미타산(彌陀山, 663m)

 

여행일 : ‘17. 4. 6()

소재지 : 경남 합천군 적중면청덕면과 의령군 부림면의 경계

산행코스 : 유학사묵방마을410m488사거리상사바위(왕복)미타산미타산성단상암불관사대나무밭유학사(산행시간 : 3시간 20)

 

함께한 사람들 : 강송산악회


특징 : 미타산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정상 근처에서 바위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바위도 없는 산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산길은 편하기 그지없다. 보드라운 흙길은 폭신폭신하기만 한데, 그 위에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아예 양탄자 위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할 지경이다. 거기다 산길은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을 만큼 편하다는 얘기이다. 흙산 치고는 조망까지도 빼어나다. 정상과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는 바위지대에서의 조망은 다른 바위산들에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장점도 있다. ’유학사라는 천년고찰과 미타산성이라는 문화유산까지 갖추고 있다. 이만하면 가족 산행지로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웰빙과 힐링을 즐기면서 조상의 빛난 얼까지 되새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산행들머리는 유학사(의령군 부림면 묵방리 49)

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마고속도로) 현풍 I.C에서 내려와 달성 제2차 일반산업단지를 통과한 후 67번 지방도를 따라 이남삼거리(창녕군 이방면 현창리)까지 온다. 이곳 삼거리에서 20번 국도로 갈아타고 적포교()를 이용 낙동강을 건넌 후 의령방면으로 달리다가 여배삼거리(의령군 부림면 여배리 166-6)‘에서 우회전하여 여배로(郡道)를 따라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유학사에 이르게 된다. 유학사의 입구에 제법 너른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산행은 첨부된 지도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부산일보의 &취재팀이 걸었던 코스와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걸은 셈이다.



오른편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다리 난간에 유학사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있으니 들머리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다만 부산일보의 산행기사를 참조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주의할 게 하나 있다. 기사대로 코스를 잡을 경우 들머리 찾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기사대로라면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계곡을 따라 50m쯤 올라가다가 왼편 산자락으로 파고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길이 또렷하게 나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치껏 들어서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다만 70m쯤 올라가면 제법 너른 임도(林道)를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일 수 있겠다. 



유학사로 오르는 돌계단 옆에 두꺼비의 머리 모양으로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돌그릇 아래에는 돌로 만든 표주박도 보인다. 생김새로 보아 우물이 분명하다. 두꺼비 입에서 떨어져 내린 물이 돌그릇을 통과해 표주박까지 흐르도록 설계된 샘 말이다. 하지만 가뭄 탓인지 물은 흐르지 않는다.



등산로는 유학사(留鶴寺)를 오른편에 끼고 나있다. 산행을 서두르는 일행들과 헤어져 유학사로 들어선다.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는데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규모이다. 남향으로 자리 잡은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만세루, 왼편에는 종각(鐘閣)을 배치했다. 그리고 요사(寮舍) 두 동은 극락전의 오른편에다 두었다. 칠성각은 요사 뒤쪽의 계단 위쪽에 살포시 숨어있다. 절의 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만세루(萬世樓)는 말만 루()이지 실제로는 누각(樓閣)이 아니다. 단층 건물인데다가 누문도 없으며 툇마루가 달린 요사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의 뒤편에 걸려있는 편액에도 유학사라고 적혀있다. 그저 절에서 부르는 이름이 만세루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절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으련만 인기척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절의 이름에서 나타나는 학()이라도 날아들기 딱 좋은 풍경이다. 하지만 찾아오지 않는지 이미 오래란다. 유학사에 날아들었다는 학은 이제 전설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유학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누가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절의 위치도 원래는 이곳이 아니었다. 창건 당시에는 미타산의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조선 초기의 왕사(王師)였던 무학(無學)이 사찰의 위치가 풍수지리상으로 맞지 않는다면서 1399(정종 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중창하였다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 부근의 형세가 날아가는 학의 형상인데 이전의 절터는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자리였으므로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학이 절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 뒤 1780(정조 4) 4월에 승통(僧統) 치유(緇裕)가 시주하여 전각(殿閣)을 중수하였으며, 190010월에는 경룡(敬龍초해(楚海정선(正善) 등이 대웅전을 중수하고 단청하였다. 1927년에는 금호(錦湖)가 칠성각을 신축하였고, 혼명(混溟)이 요사채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을 빠져나와 산행을 이어간다. 묵방마을로 이어지는 임도이다. 임도는 산허리를 자르며 나있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진 산자락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훌륭하다. 거기다 길가에는 고추나물나무가 지천이다. 잎의 생김새가 고춧잎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봄나물로 인기가 있다. 여린 잎을 뜨거운 물에 데쳐내어 양념에 무쳐놓으면 그 맛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임도는 계곡을 왼편에 끼고 나있다. 길 옆 계곡은 작지만 절경이다. 기암절벽을 옆구리에 끼고 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내린 비 때문인지는 몰라도 흐르는 물의 양 또한 제법 된다. 이쪽으로 하산을 할 경우 몸을 씻고 내려가기 딱 좋을 것 같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으면 묵방마을에 이르게 된다. 서너 가구(家口)쯤 살고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묵방마을은 이곳 본마을칠공마을로 나뉜다. 하지만 두 마을은 걸어서 산길을 넘거나 아니면 자동차로 한참을 돌아가야만 서로 만날 수 있다. 문득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노래 제목이 떠오른다. 이광조가 불렀던 노래인데 이곳 묵방마을에 딱 어울리는 글귀가 아닐까 싶다.



마을 앞에는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이런 심심산골에도 여름철 뙤약볕을 피할 곳은 필요했나 보다. 등산로는 정자의 뒤로 나있다. 경운기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지만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100m쯤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집수장까지 연결시키기 위해서 내놓은 모양이다.



집수장 근처에서 내려다본 묵방마을. 지금은 비록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지명이 통일신라 때 묵(·벼루)을 만든 장인이 자리 잡았다는데서 유래한다고 전할만큼 유서 깊은 마을이다.



능선을 향해 오르는 산길은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급하게 고도(高度)를 높여야 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산길은 가끔 골짜기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기도 한다. 골짜기라고 해봐야 물기 한 점 없는 마른 땅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웅덩이 모양의 습지(濕地)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물이 많이 나는 산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산에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꽃 무리가 길손을 맞는다. 그런데 아름답게만 보여야할 연분홍 꽃무리가 서글프게 다가오는 건 무슨 이유일까? 어쩌면 부산일보의 취재기사가 그 원인이지 싶다. 당시 기사는 미타산을 일러 '칼부림의 산'이라고 하면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글귀를 부언(附言)했었다. 고려 무인정권 시대에 세력을 떨친바 있는 천민(賤民) 출신의 장군 이의민이 이곳 미타산에 숨어들었다가 최충헌 형제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기사는 권불십년(權不十年)‘, ’칼 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우리가 명심해야할 글귀까지 첨언(添言)했었다.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면 무덤 한 기가 나온다. 이곳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옳은 방향은 오른편이다. 하지만 왼편으로도 길이 나있다. 국제신문의 근교산행 취재팀이 시루봉이라고 했던 봉우리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시루봉을 다녀올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시간을 내어가면서까지 다녀올만한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파악해본 바에 의하면 조망이나 산세 등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무덤을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 주변엔 진달래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났다. 기웃거리다보면 오르는 길이 힘들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7분쯤 헐떡거리다보면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첨부된 지도에 410m봉으로 표시된 지점일 것이다. 이곳에도 무덤 한 기가 자리 잡고 있다. 산행을 하다보면 이곳 말고도 꽤나 많은 무덤들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 미타산 인근에 명당(明堂)이 많다고 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곳 미타산의 정기(精氣)가 두 명의 대통령을 낳았다고 했다.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10Km쯤 떨어진 율곡면에 전두환대통령의 생가(生家)가 있는가 하면, 반대편으로 그만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청덕면에는 노무현대통령의 윗대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두곡리 송기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410m봉에서 내려서는 길도 역시 진달래군락지이다. 아니 그 농도(濃度)가 아까보다 훨씬 더 짙어졌다. 주변이 온통 연분홍 진달래꽃들로 둘러싸여 있다. 꽃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4분쯤 내려서면 안부에 내려선다. 미타산은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한다. 하지만 왼편으로도 길이 나있다. 첨부된 지도에 불관사로 연결되는 길이 나있는데 이곳을 이르는 모양이다.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아니 아까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그리고 거리 또한 더 길어졌다. 아까의 배 정도는 더 고생해야만 다음 봉우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이다. 오르는 길에 진달래꽃 무리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헐떡이다보면 다음 봉우리에 올라선다. 첨부된 지도에 488m봉으로 표기된 지점일 것이다. 이곳에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분지(盆地)처럼 펑퍼짐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을 따름이고 이곳이 어디라는 표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산악회의 리본들이 마치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을 따름이다.



또 다시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사가 거의 없다. 전형적인 능선 길로 봐도 되겠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진달래꽃이나 기웃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이다. 그렇게 내려서던 산길이 언제부턴가 오름길로 변해있다. 이번에도 역시 가파르지는 않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는 얘기이다.



20분 남짓 진행했을까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도 제법 굵은 바위들이다. 그렇다고 바윗길을 걷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산길이 바위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잘도 나있기 때문이다.




바위가 많은 덕택에 전망 좋은 곳 또한 많다. 올라서는 바위들마다 시야(視野)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을 경우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지겠는데 오늘은 날씨가 받쳐주지 않는다. 비온 뒤끝인지라 아직까지도 안개가 두텁게 끼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분쯤 진행하면 제대로 된 널찍한 산길을 만난다. 왼편은 미타산성으로 연결된다. 정상으로 가려면 당연히 오른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곧장 정상으로 향하지 말고 오른편을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잠시 후 또렷한 오솔길 하나가 나타날 것이다. 오봉산과 성선으로 연결되는 능선길이다. 그리고 그 길로 들어섰다싶으면 송전탑(送電塔)이 나타나면서 그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상사덤‘, 즉 상사바위이다.



상사덤은 상사병에 걸린 처녀가 뛰어내려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바위이다. 쉽게 말해 바위무덤인 셈이다. 끔찍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바위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모든 사랑이 다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픔의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인연이 찾아오는 법이다. 서투른 결단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또한 상사덤은 생각보다는 우람하지가 않다. 뛰어내린다고 해서 모두 다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이다. 자칫 몸만 상할 수도 있으니 무모한 짓은 삼가는 게 좋겠다.



아까의 갈림길로 되돌아와 정상으로 향한다.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이제 막 꽃망울을 열기 시작하는 진달래군락지로 들어서는가 하면, 굵직한 소나무들이 그득한 솔밭을 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짙게 낀 안개가 만들어내는 풍광이 더 멋지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자못 신비롭기까지 하다.



잠시 후 미타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정상표지석을 세워놓았는데,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커다란 게 인상적이다. 삼각점(창녕 24, 1991재설)은 그 앞에다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미타산이라는 이름은 서방 극락정토에 산다는 아미타불의 '미타'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지혜 광명을 상징하는 부처를 말한다. 그렇다면 미타산은 깨달음의 산이라 할 수도 있겠다. 부처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그런 산 말이다.



정상은 사방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조망이 뛰어나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몰고 온 안개가 아직까지도 걷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신문의 근교산행 취재팀의 글로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광활한 조망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정상석 옆에서 발걸음 하나 떼지 않고 제자리에서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보자. 서북쪽에 오도산과 장군봉 남산제일봉 가야산이, 동북쪽으로 넘어가면 대구 현풍 비슬산이 보인다. 동남쪽으로 돌아서면 창녕 화왕산과 영취산이 보이고 서쪽으로 돌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그 오른쪽 황매산 둥근 봉우리, 가깝게는 이웃 산인 천황산과 국사봉 대암산까지. 특히 황매산 봉우리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의 풍광은 비경 중 비경이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이정표(상홍사 2.5Km, 큰고갯길 7.2Km/ 송림재 8Km)를 만난다. 두 방향으로 길을 나누고 있는 이정표는 미타산 정상이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있으니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방향의 지명이 모두 다 낯설다는 게 문제이다. 상홍사는 합천군 적중면(누하리)에 있다는 작은 절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렇지만 송림재는 어디에 있는 곳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고객 편의주의‘, 세간(世間)의 화두(話頭)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이왕에 만들 거라면 이용하는 사람들, 즉 등산객들의 입장에서 만들었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큰고갯길 방향이다. 정상으로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가다가 상사바위로 가는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하지만 똑 같은 길을 두 번 걷고 싶지 않아서 방향을 달리 잡아봤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잘 지어진 정자(亭子)를 만난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조망(眺望) 보다는 쉼터의 기능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침목(枕木)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내려서면 널따란 초지(草地)가 나타난다. 미타산성(이정표 : 공설운동장 6.0Km/ 미타산 정상 0.3Km/ 미타산 정상 0.2Km)이다.



미타산성(彌陀山城 : 경상남도기념물 231)은 미타산의 북쪽 방향 능선에서 남서 방향으로 2정도에 이르는 토석 혼축으로 된 성곽(城郭)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성곽의 둘레가 2에 이른다. 높이 3.5m에 폭은 3m인데 그 축성(築城) 규모로 보아 군사적 요충지였음이 분명하다.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595673) 장군이 미타산성에서 백제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합천 대야성(大耶城)과 함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추정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문루(門樓)가 없는 성문을 빠져나가면 곧이어 헬기장이 나온다. 잔디가 손질이 잘되어 있는데다 헬기장을 뜻하는 ’H’자가 또렷한 것이 요즘도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성곽으로 되돌아 올라가야 한다. 유학사로 가려면 성곽을 따라 왼쪽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타산성은 미타산(표고 662m) 정상부를 성내로 삼고 그 주변 9부 능선에 성채(城寨)를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성내에서 북쪽으로 초계분지가 내려 보이고 남동쪽에는 신반, 동쪽으로는 멀리 창녕, 서쪽으로는 천황산(표고 656m)과 국사봉(표고 688m), 남쪽으로 봉산(표고 563m)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은 지세에 맞추어 축조하였으므로 평면이 곡선적이다. 성내는 북쪽과 서쪽은 급경사지이며 동쪽과 남쪽은 비교적 평탄하다. 성 바깥 역시 남쪽과 동쪽은 평탄하나 북쪽과 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성의 서북쪽 최정상부에서 동쪽으로 약 300m쯤 떨어진 평탄지에서 봉수대가 발견되었으며, 방호벽과 연조,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건물터에는 현재 초석과 샘물터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이 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초축된 이래 2~3번 이상의 수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하나의 산성에서 다양한 형태의 축성양식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조선시대의 군사방어시설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성곽의 위는 초지(草地)로 조성되어 있다. 성벽의 돌들도 역시 반듯하게 잘 쌓아 올렸다. 아마 최근에 정비를 마친 모양이다.



200m정도 내려가자 가건물 몇 동()이 나타난다. 문화재청에서 이곳 미타산성을 소개하면서 성()의 안에 민가(民家)가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한쪽 귀퉁이에는 작은 연못도 보인다. 산의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이로운 점이 있어 이곳에다 산성을 쌓았을 것이고 말이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극락전(極樂殿)’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그리고 건물의 벽면에는 미타산 단상암(彌陀山 斷想庵)’이라고 적힌 또 다른 편액도 걸려있다. 부처님을 모시는 절간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외견으로 보아서는 일반 여염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단상암에는 작은 굴들이 몇 개 뚫려있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올랐다. 그 바위의 아래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미타산왕대신지위(彌陀山王大神之位)’라고 쓰인 빗돌(碑石)을 세워놓았다. 보통의 절간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 싶다. 부처님을 모시는 절간이 아니라 무속신앙(巫俗信仰)을 믿는 곳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올 봄에 계룡산 줄기인 향적산에 오르면서 보았던 풍경들과 많이 닮았기에 거론해봤다.



단상암 앞에서 성곽을 빠져나온다. 성벽 아래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다. 부산일보 취재기사에서 성곽으로 들어서기 전에 산꾼들이 토굴집이라고 부르는 민가를 만난다고 했는데 저 집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산성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인지 말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덕분에 진달래가 곱게 핀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삭막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그렇게 30분쯤 내려가면 잘 지어진 전원주택이 나타난다. 아니 집 주변의 경작지가 제법 너른 것이 농가(農家)로 보는 게 더 옳겠다. 농가의 위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마치 수문장이라도 되는 양 오가는 이들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계속해서 임도를 탄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지루하다는 느낌이다. 여름철에 이곳을 찾았을 경우에는 무더운 뙤약볕에 고생깨나 하겠다. 그렇게 20분 가까이 걸으면 또 다른 민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진행방향 저만큼에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묵방마을을 이루고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칠공마을(묵방리)이 아닐까 싶다. 옻나무가 많이 자생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그 칠공마을 말이다. 아무튼 이곳 칠공마을에는 논을 일굴 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이곳 사람들은 외지에서 농사를 지어 지게로 져왔단다. 나락을 다섯 번 지고 오는 동안 밥은 여섯 번을 먹었을 정도라니 혹독한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표한할 수 있겠는가.



마을에는 절간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불관사이다. 심심산골에 들어앉은 사찰치고는 제법 큰 규모이지만 누가 언제 어떤 사연을 갖고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절 앞에 표석을 세워놓았지만 어느 종단에 속해있는지도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쉽게 말해 정체불명의 사찰이라는 얘기이다. 참 이곳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다. 불관사에 이르기 전에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무조건 절이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라는 것이다.



유리 너머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멘트 벽면에 뚫려있는 세 개의 구멍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다. 그 아래에는 다섯 개의 수도꼭지가 매달려 있다. ’용천약수(龍泉藥水)‘란다. 냉큼 한 모금 마시고 본다. 미적지근한 것이 물맛은 별로이다. 물통의 물을 보충하려다 뚜껑을 도로 닫아버린 이유이다.



불관사를 빠져나오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왼쪽이 옳은 방향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골목길로 보여 의아해 할 수도 있으나 옳은 방향이니 의심하지 말도록 하자. 방향을 틀자마자 오른편으로 비좁은 길이 하나 나뉜다. 등산로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 길로 들어서는 게 옳다. 잠시 후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타나면 옳게 진행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말은 쉽게 했지만 길 찾기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우리 부부 역시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타난 구세주는 동네 주민들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유학사로 내려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는 게 아닌가. 길을 못 찾고 헤매는 등산객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물론 주민들의 친절한 마음씨가 없었더라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산길은 울창한 대나무밭 한가운데로 나있다. 햇빛이 스며들지 못해 어두컴컴한 것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거기다 시체처럼 드러누운 대나무들이 자꾸만 길을 막는다.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나무 밭이 끝났다 싶으면 다 쓰러져가는 움막이 하나 나탄다. 어두컴컴한 주변 풍경 탓인지 귀신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흉흉한 모습이다.



대나무밭 근처에서 멋진 풍광을 만난다. 각진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다. 하도 바위가 귀한 산이다 보니 웬만한 바위들은 모두가 다 눈에 쏙쏙 들어온다.



산길은 가파르게 아래로 향한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임도처럼 널따란 길로 이어진다. 유학사에서 칠공마을로 이어진다는 옛길인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낙엽만이 수북하다. 하긴 칠공마을까지 자동차 길이 나있는데도 일부러 이 길을 걸을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산행날머리는 유학사(원점회귀)

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었다싶은데 갑자기 임도가 끝나버린다. 이어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잠시 내려서면 유학사 앞 계곡에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계곡은 봇물 터진 듯 요란스럽게 물을 뿜어내고 있다. 간밤에 내린 비의 양이 제법 되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산행 내내 길이 미끄러웠었다. 아무튼 오늘 산행은 4시간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실제로 걸은 시간은 그보다 훨씬 적다. 나물을 캐느라 중간에 멈추었던 시간을 감안할 경우 3시간 20분 정도가 걸렸다고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