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둘째 날 : 바람의 궁전, 물의 궁전 등 자이푸르(Jaipur)의 유적들

 

특징 : 1727마하라자 자이싱 2(Jai Singh II, 1686~1743)’에 의해 세워진 자이푸르(Jaipur)는 인도어로 승리의 도시' 또는 '핑크 시티'라고 불리운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876년 이 지역을 다스리던 마하라자가 영국 에드워드 7세 왕자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모든 건물을 분홍색 석재로 짓도록 법제화했다고 해서 유래된 별명이다. 이후 여전히 그 색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도 건물에 다른 색을 칠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다고 한다. 풍부한 연분홍 색깔의 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유독 많은 자이푸르는 거대한 성과 웅장한 궁전, 아름다운 사원과 경탄을 자아내는 정원들이 가득 찬 도시이다. 그중 1799년에 건축된 5층 규모의 궁전인 하와 마할(Hawa Mahal)’과 호수 속에 잠겨버린 버려진 궁전 잘 마할(Jal Mahal)‘, 그리고 산등성이의 요새인 나하가르 성(Nahargarh Fort)’을 둘러보기로 한다.

 

 

 

자이푸르(Jaipur) 구시가지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이 온통 붉은 색으로 변해버린다. 1876년 영국 왕가의 방문 시기에 맞춰 시내 건축물의 벽을 전통적으로 환영을 상징하는 담홍색을 띄도록 칠한 이래 현재까지 건물 외벽을 담홍색으로 단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도시 경관에서 핑크시티라는 도시의 별칭이 유래되었단다. 자이푸르의 화려했던 과거를 가늠케 해주는 핑크빛 구시가지에서 낭만을 꿈꾸는 여행이 시작된다.

 

 

 

 

 

구시가(舊市街)6m 높이의 거벽(銀璧)을 갖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는 정연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되어 있다. 신시가는 19~20세기에 성벽 남쪽으로 건설되었다. 참고로 인도에서는 왕을 의미하는 명칭을 보통 지역을 다스리는 규모에 따라 마하라나(Maharana), 마하라자(Maharaja), 마하라왈(Maha Rawal)로 보통 나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이푸르(Jaipur)는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나라의 도성(都城)이었던 셈이다. 1692년 이 성을 새로 지은 왕이 마하라자 만 싱(Raja Man Singh)’이었으니 말이다.

 

 

 

 

길은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분주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 무언가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사람, 느긋하게 걸어가는 사람, 인파에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자적한 동물, 빵빵거리는 소리 등, 말 그대로 정말 인도적이다. 그 복잡함 속에서 사람들은 바느질도 하고, 몸도 닦고, 구걸도 하고, 관광도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느긋하고 팔자가 늘어진 동물이 소다. 그들은 누구의 제지도 받음이 없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다. 낯선 나라에서 만나는 낯선 풍경들이 신기롭기만 하다. 이런 풍경들을 쫓아 인도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잘 달리던 버스가 멈춰 선다. 바람의 궁전 하와마할(Hawa Mahal)’을 둘러보란다. 기껏해야 건물의 외관(外觀)만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 말이다. 아무튼 자이푸르 시내 중심가에 있는 5층짜리 성()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 성은 자이푸르 시내를 관망할 수 있는, 바람이 잘 통하는 격자형 창문이 벌집처럼 많아 바람의 궁전이라고 불린다. 성은 분홍빛과 붉은 사암으로, 성의 외벽(外壁)이 도로와 맞닿도록 건축되었다. 성의 1,2층은 정원으로 연결돼 있으며 성에는 약 953개의 작고 둥근 포대와 같은 공간이 층을 이루고 각 공간에는 작은 발코니, 아치형 지붕, 격자형 창문이 나있다. 시내에서 행사가 열리면 여인들은 이 격자형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관람했다고 한다.

 

 

하와마할(Hawa Mahal)1799스와이 프라탑 싱(Sawai Pratap Singh)’이 건축하고 라찬드 우스타(Lachand Usta)’가 설계를 맡았다. 자이푸르의 '분홍색 도시'의 시각적 언어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하와 마할도 붉은 사암을 사용하여 햇빛이 핑크빛으로 반짝이게 했다. 라지푸트(Rajput) 양식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파사드(Facadem,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의 대칭에서는 무굴 양식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높이가 15미터에 이르는 파사드에는 950개가 넘는 창문이 있으며, 각각 하얀 석회로 모티프를 그려 넣었다. 주 출입문은 건물 뒤쪽에 있으며, 일련의 경사로를 통해 위층으로 갈 수 있는데, 이는 팰런킨(palanquin, 어깨에 메는 가마)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와 마할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 혹독한 날씨에 대응하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사막의 열기로부터 실내를 서늘하게 유지할 수 있었단다. 영국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에드윈 아놀드 경(Sir Edwin Arnold)’도 이런 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알라딘의 마법사도 이보다 환상적인 건물은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라자스탄 주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하와 마할은 자이푸르의 번잡한 시가지 한복판에 홀로 고요히 서 있다. 자이푸르 궁전의 규방 확장의 일환이었던 이 건물은 원래는 전망용 스크린(screen)으로 지은 것이었다. 왕실의 여성들이 푸르다(purdah, 베일 등으로 얼굴과 몸을 가리고, 주택에도 장막이나 담을 설치해 여성이 외부인의 눈에 띄지 않게 하던 관습)를 매우 엄격하게 준수하던 시절(1799)에 이 스크린(일종의 건축적 베일)을 통해 왕실과 하렘의 여인들은 모습이 겉으로 드러날 염려 없이 시장과 그 활기 넘치는 광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마할(mahal)'이라는 이름이 이 경우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건물은 처음부터 거주용으로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층짜리 건물이긴 하지만 꽤 낮고, 그 깊이가 방 하나로 쓸 만큼도 되지 않는 위쪽 3개 층에는, 여성들이 앉아서 밖을 내다보았던 기묘한 모양의 방들만이 있다. 서쪽에 아치형 현관이 있으며 이 현관은 삼 면이 2층짜리 건물로 둘러싸인 안뜰을 향해 열려 있다. 동쪽인 네 번째 면에 바로 이 건물이 독보적인 높이로 솟아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건물 안에는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없으며, 경사로만 있다. 내부의 방들과 공공 구역에 장식이 없다는 점은 외관과 강력한 대조를 이루며, 이 궁전이 거주의 목적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암베르 성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널따란 호수 하나가 나타난다. ‘만 사가르 호수(Man Sagar Lake)’, 한가운데에는 아름다운 건축물 하나가 물 위에 떠있다. ‘물의 궁전이라는 잘 마할(Jal Mahal)‘이다. 마음씨 좋은 가이드는 예정에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차를 멈춰 세운다. 사진발 잘 받는 포토죤(photo zone)‘이니 예쁜 사진 많이 찍으라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만 사가르 호수(Man Sagar Lake)’ 주변의 풍경도 볼만하지만 노점상들이 늘어놓은 기념품 하나쯤 흥정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낙타가 보인다. 오전에 암베르성에 갔을 때는 코끼리가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더니, 이곳에서는 낙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나 보다.

 

 

호수 주변에 호텔도 지어져 있다. 그만큼 이 호수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건물의 전면을 궁전(宮殿)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잘 마할(Jal Mahal)‘은 왕족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18세기 마하라자(Maharaja, 힌두 제왕) ‘자이싱 2(Jai Singh II)‘가 지었다. 원래는 5층 건물로 지어졌는데 4층 아래로는 물에 잠겨 있다고 한다. 물론 원래부터 물 위에 지은 것은 아니란다. 도시에 물이 부족해 댐을 쌓고 나니 자연스럽게 호수가 형성돼 궁전이 물에 갇히게 됐다는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으니 버려진 궁전인 셈이다. 그것도 동화나라에서나 볼 법한 궁전이다.

 

 

 

 

 

 

 

잘 마할은 대한항공의 인도 CF에 까지 나왔던 곳이란다. 무굴양식과 라자스탄(Rajasthan) 스타일이 혼재된 건축물로서 네 귀퉁이에는 팔각형의 차트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하는데, 우산을 닮은 작은 탑으로 이해하면 되겠다)가 올려져있다. 옛날에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있었으나 현재는 물에 잠겨있어 입장이 불가능하다.

 

 

 

 

 

 

 

 

해질 무렵 나하가르 성(Nahargarh Fort)’에 올랐다. 아까 암베르 성으로 올라갈 때 탔던 짚(jeep)을 또 다시 이용하는데,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탓에 지그재그로 난 길에서 곡예운전을 해야만 한다. 아무튼 1734사와이 자이 싱(Sawai Jai Singh) 2에 의해 지어진 이 성의 원래 이름은 수다르샹가르(Sudarshangarh)’이었다. 하지만 죽은 왕자 나하르싱(Nahar Singh)’의 유령이 이곳에 자주 나타나자 그의 이름을 따라 나하르가르(Nahargarh, 호랑이의 집)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단다. 1944년까지 잔타르 만타르의 해시계에 따라 시간을 알리는 대포를 쏘던 곳이기도 하다.

 

 

성 안에는 마드하벤드라 궁전(Madhavendra Bhavan)’이 있다. ()에는 아홉 개의 별채가 있는데 아홉 명의 왕비가 각자의 구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바람둥이 왕이 이곳에 들러 각각의 왕비와 따로 연회를 즐겼단다. 각 구역의 출입문(出入門)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잠자고, 먹고 마시며 신나게 놀던 곳이 훗날 역사의 유적으로 남아 외지인들을 끌어들이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린 궁전의 내부관람은 생략한 채로 곧장 요새(要塞)로 향했다. 휴게소를 겸한 전망대에서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시켜놓고 일몰(日沒)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자이푸르의 해질녘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나있기 때문이다. 자이푸르 시가지를 감싸 안듯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일몰 광경은 트래블러(traveler)들이 두고두고 얘기할 정도로 멋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망대는 망루(望樓)에 만들어져 있다.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파는 카페를 포함한 휴게소를 겸하고 있는데, 딱히 볼거리는 없다. 화려한 궁전도 없고, 잘 가꿔진 정원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투박하게 쌓아올린 무뚝뚝한 성곽만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하지만 도시전체가 보이는 탁 트인 경관은 일품이다. 특히 이곳에서의 일몰(日沒)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 일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테이블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즐긴다.

 

 

 

 

 

 

탁자에 앉아 맥주(인도에서 먹은 맥주는 대부분 King Fisher)를 주문하자 땅콩을 가져다준다. 기본 안주인지는 모르겠다. 거기다 맘씨 좋은 가이드는 럼주(rum)’까지 병째로 꺼내놓는다. 우리 일행의 술 실력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챙겨 왔단다.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그 덕분에 일몰을 바라보며 건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이푸르의 하이라이트라는 나하가르의 일몰(日沒)은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잠깐의 실수로 카메라의 노출이 어긋나버렸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새로 산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탓이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이제는 좀 손에 익숙해지련만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

 

 

 

 

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둘째 날 : 자이푸르(Jaipur)의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

 

특징 :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18세기 초 지혜로운 왕 마하라자(Maharaja) ‘자이싱 2(Jai Singh II)’가 세운 천문대(天文臺) 유적이다. 20여 개로 구성된 주요 관측기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18세기 초반 인도 땅에 세워진 기념비적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보존이 잘되어 있다. 이 천문대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c)의 우주천동설을 천문학 전통으로 따른다. 이 관찰 천문학에 따라 지이(Zij) 천문도 완성에 공헌하였다. 이는 천문학 전통을 놓고 보면 늦었지만 기념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잔타르 만타르 천문대는 다양한 과학 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시 널리 퍼진 사회의 관행을 우주론과 연결할 수 있었다. 도시 규모, 시간 통제, 천문학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예측 능력을 상징하였다. 또한 정치, 과학, 종교의 필요성을 조화롭게 구현한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이 천문대는 19세기에 잠시 방치되기도 했다. 이후 꾸준히 관리하고 1세기 넘게 다양한 방법으로 복구하였다. 그 결과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자이푸르를 찾는 여행자들이 한번쯤 찾아가는 명소로 자리매김 했다. 참고로 잔타르 만타르는 산스크리트어(梵語, Sanskrit)마법의 장치라는 뜻이다. 해의 그림자를 가지고 시간을 맞추고 별자리의 위도를 아는 것이 당시에는 마법으로 보였을 것이다.

 

 

 

온통 붉게 빛나는 도심(都心)을 달리던 버스가 멈춰 선다. 노란색 건물로 둘러싸인 너른 주차장이다. 주차장에는 관광객들을 태우고 온 수많은 버스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주인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다가와도 꿈쩍 조차 않고 있는 비둘기들이다.

 

 

 

 

 

 

인도는 동물의 천국인가 보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리를 배회하는 동물이 소나 코기리만 있는 줄 알았더니 돼지도 그에 못지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헤나(Henna)’를 하고 있는 꼬마아가씨가 보인다. 자기가 앉고 있는 의자 하나에 손님용 의자 하나가 전부인 단출한 가게이다. 아니 옆에는 물감 등의 도구를 놓아두는 탁자도 있다. 의자에 앉으면 새기고 싶은 문양(文樣)과 그 문양을 그려 넣을 위치를 정하는 질문이 오간다. 다음 행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헤나콘의 끝을 이빨로 살짝 뜯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그림 그리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멋진 그림이 완성된다. 이 그림은 피부에 어두운 갈색으로 물들며, 일주일 정도 지나면 자동적으로 흔적이 사라진다.

 

 

 

헤나(Henna)는 로소니아 이너미스( Lawsonia inermis)라는 열대성관목의 잎을 따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든 염색제를 말한다. 인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헤나나무 잎으로 오래 전부터 모발염색이나 문신으로 사용했으며, 최근에는 해외나 국내의 유명연예인들이 헤나를 하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꽃은 향수의 원료로도 사용되며, 살균의 효과가 있어서 피부병과 약재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헤나를 하고 있으며, 머리카락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현지인들을 만난다면 헤나로 염색을 한 사람들일 것이다. 인도에서는 헤나로 하는 문신을 멘디(mehndi)라고 부르는데, 여성들의 손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풍습의 하나로 내려오고 있다.

 

 

풍부한 연분홍 색깔의 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유독 많아 핑크시티로 불리는 자이푸르는 거대한 성과 웅장한 궁전, 아름다운 사원과 경탄을 자아내는 정원들이 가득 찬 도시이다. ‘잔타르 만타르로 가는 길에 그중 하나가 얼핏 보인다. 무굴식 건축양식과 라자스타니 건축양식의 혼합체인 시티 팔레스(City Palace)’이다. 궁전의 일부는 현재 자이푸르 왕가의 물건들을 전시, 보관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접견실로 쓰이던 곳엔 미술품 및 고서들이 진열돼 있다. 루비와 유리, 금 등을 갈아 만든 물감으로 그린 정밀한 세밀화들이 박물관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매표소 앞 광장은 어린 인도 학생들로 가득하다. 체험학습이라도 나왔나 보다. 하긴 이보다 더 나은 과학 공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아무튼 이곳 잔타르 만타르는 건축과 천문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자이싱 2(Jai Singh II)’가 세운 천문대로 인도 달력의 개량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잔타르 만타르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에 만들어져 있다. 1724년에 델리를 시작으로 웃자인(Ujjain), 자이푸르, 바라나시, 마투라(Mathura)에 세워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자이푸르에 있는 잔타르 만타르로 총 18개의 천문대와 적도 시계, 해시계 등을 갖추고 있는데, 천문대의 경우 20세기 초까지도 실제 천체 관측이 실시됐을 정도로 정확도가 높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천체를 감상할 수 있는 밤에는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기 때문에 그 진가는 확인해볼 수가 없다. 다만 낮에 방문해 외관을 확인하는 것 정도가 최선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광장의 곳곳에 수많은 천문기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인류의 문명과 함께 발달해 온 천문학은 천체 현상을 신의 계시로 해석하려 했던 고대인들의 의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종교적 의식을 치르기 위한 시기를 결정했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언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에서도 천문학은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를 연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신들의 나라´라 불릴 만큼 많은 신들을 믿는 인도에서는 정확한 시기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양··별 등의 움직임을 관찰했고 춘분·추분·동지·하지·일식·월식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달력을 만들고 별자리를 그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천체를 실제로 관측하기 위한 천문기구를 개발하고 만드는 일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좀 더 실질적인 연구가 가능한 전문적인 천체관측소가 설립된 것은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18세기 무렵이었다.

 

 

자이푸르(Jaipur)를 세운 마하라자 자이 싱 2(Jai Singh II)’는 천문학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천체 관측에 남다른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인도의 달력을 개량하기 위해 자국의 학자들을 외국으로 보내 그 나라의 천문대를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천체 관측을 목적으로 지어진 천문대인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마법의 장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는 이곳 자이푸르를 비롯하여 델리, 마투라, 바라나시, 우자인 등 5개의 도시에 건설됐다, 이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자이푸르와 델리의 천문대인데, 델리에 있는 것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다행히 규모가 가장 컸던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는 제대로 복원돼 있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돌과 대리석을 이용하여 만든 기묘한 모양의 건축물들은 언뜻 보기에 커다란 예술작품 같지만, 모두 천체 관측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해시계와 적도시계를 비롯하여 일식과 월식, 별자리와 계절풍을 관측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들은 천체관측소라기 보다는 특이하게 설계된 조각공원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중 6가지는 태양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것이고, 11가지는 달과 별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것이다. 이들 시설은 시간을 측정하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고, 별자리 위치를 추적하고, 태양계 행성의 궤도를 확정하고, 천체의 고도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해시계인 브리하트 삼라트 얀트라(Vrihat Samrat Yantra)‘이다. 여기서 브리하트(Vrihat)‘는 거대한 또는 큰이라는 뜻이다. 이 해시계는 삼각형 구조물의 높이가 24m나 되고 밑변의 길이가 44m나 된다. 그 안에 반경이 15m인 반구가 직각으로 설치되어 있다. 해시계를 이처럼 크게 만든 것은 측정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2초 이상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시계는 태양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해시계가 가능한 커야 정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구상에 의해 만들어 졌다. 그래서 다른 해시계들이 20~25초 단위로 시간을 알려주는데 반해, 이 해시계는 2초 단위로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다고 한다. 크기가 거대하다 보니 벽돌과 석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형태는 두 개의 대리석 사이에 큰 경사로를 설치한 모양새다. 태양에 비친 경사로의 그림자가 대리석 판에 떨어져 시간이 표시되는 것이다.

 

 

 

 

나리발라야 얀트라(Narivalaya Yantra)‘는 원판 형식의 측정도구를 양쪽으로 설치한 원통형 시설로 각각 남쪽과 북쪽을 향해 있다. 하나는 겨울에 다른 하나는 여름에 사용했다고 한다. 여기서 겨울은 해가 남반구에 있는 923일부터 321일까지를 말하고, 여름은 해가 북반구에 있는 321일부터 923일까지를 말한다. 원판 안에 대리석으로 원형을 만든 다음 가운데 철주를 세워 그 그림자의 위치로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원형의 얀트라(Yantra)에는 60개의 눈금(Ghatis)이 그려져 있다. 춘분과 추분, 그리고 동지와 하지의 정확한 날짜를 계측하는 이 도구는 해시계를 겸하고 있는데, 아직도 인도의 표준시계를 가리킬 만큼 정확도가 높단다. 참고로 두 개의 분리된 원형판은 지구의 적도에 평행방향으로 놓여 있다고 한다.

 

 

 

 

 

 

얀트라 라즈(YanTra Raj)’는 이름 그대로 관측기의 왕이다. 200킬로그램의 거대한 금속 원반으로 태양과 행성의 위치, 자전, 공전을 측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천문기계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의 변형으로 밤에는 별의 위치를, 그리고 낮에는 해의 위치로 시간을 측정했다. 가티스(Ghatis) 따라 나눠진 360도 금속판 중앙에 튜브를 끼워서 본다고 한다. 1901년에 보수된 시설이다.

 

 

크란티브타(krantivrtta)‘는 특정 대상물의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는 기구이다. 한낮에 태양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측정하는데도 사용되었다. 두 개의 동일한 지름을 가진 금속 원형이 한 곳에 중심축을 두고 있는데, 두 금속 사이의 각도는 23°라고 한다. 지구의 적도에 항상 수평으로 맞추어져 있고, 바깥쪽 금속 원형은 손잡이를 통해 올릴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고정시켜 놓았다.

 

 

 

라구 삼라트 얀트라(Laghu Samrat Yantra)’브리하트 삼라트 얀트라(Vrihat Samrat Yantra)‘의 축소판으로, 삼각형의 구조물과 반구형의 구조물이 엇갈려 있고, 삼각형 구조물의 긴 변이 반구형의 눈금에 비친 그림자를 읽어 정확한 시간을 측정한다. 삼각형의 긴 변이 땅과 이루는 각도가 27°인데, 그것은 자이푸르의 위도가 북위 27°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해시계의 정확도는 대단해, 현재 기준으로도 20초 이상 틀리지 않는단다. 건설 당시에는 자이푸르의 현재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수행했으나 현재는 삼라트 얀트라가 자이푸르의 현재시간을, ‘라구 삼라트 얀트라는 세계 표준시를 가리키고 있단다. 

 

 

 

 

 

 

차크라 얀트라(Chakra Yantra)‘는 청동관으로 만든 두 개의 바퀴 형태 구조물을 기둥에 고정시켜 만들었다. 바퀴 안에 지름 형태의 관을 가로지르게 하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중심을 표시했다. 그런데 이것이 정북으로부터 27° 기울어 있다. 이것은 자이푸르의 위도를 반영한 것이다. 차크라 얀트라는 적도로부터 행성과 별의 각도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카팔라 얀트라(Kapala Yantra)’는 별자리를 측정하는 장치이다. 같은 모양의 반구(半球)가 두개가 있는데, 사이사이 공간이 서로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 사이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일 종의 통로로써, 이 때문에 하나의 완벽한 구형체를 만들지 않고 두개로 나누어 만든 것이다. 이 두개를 끼워 맞춘다면 아마도 요철이 정확히 맞아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태양의 위치에 따라 그림자가 한 곳엔 있고 한 곳엔 없게 만들어져 있다.

 

 

 

 

람 얀트라(Ram Yantra)는 태양과 달을 계측하는 용도라고 하는데 꼭 신전처럼 생겼다. 12개 기둥으로 실린더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고, 그 안에 수평으로 이등변 삼각형의 구조물을 연결한 다음, 가운데 철심을 세운 형태다. 이 기구에는 360개의 수직선과 90개의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그러므로 행성과 별의 고도와 방위각을 바로 측정할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수치를 활용, 날씨를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디감사 얀트라(Digamsa Yantra)는 천체의 모든 대상물과 대상물간의 방위의 각도를 측정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라지 발라야 얀트라(Rasivalaya Yantra)‘12개의 자그만 관측대(觀測臺)‘들이다. 이 기구는 황도대(zodiac, 태양을 도는 주요 행성들의 행로, 별자리에 따라 12궁으로 나뉨) 12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만든 일종의 해시계다. 그러므로 모양은 삼라트 얀트라(Samrat Yantra)‘를 축소해 놓은 형태고, 모두 12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관측대는 점성학에서 말하는 12개의 별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이들 12궁은 춘분점을 시작으로 양, 황소, 쌍둥이, , 사자, 처녀, 천칭, 전갈, 궁수, 염소, 물병, 물고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얀트라는 점성용 천궁도를 정확히 하기 위해 활용되었다고 한다.

 

 

 

 

 

 

자이 프라카쉬 얀트라(Jai Prakash Yantra)‘는 반구 두 개가 서로 어우러진 거대한 해시계이다. 세세하게 그려진 잔금들이 눈길을 끈다. ’자이 프라카쉬(Jai Prakash)‘'자이의 빛'이라는 뜻으로 자이 싱 2세가 직접 만들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종의 천구의(天球儀)로 시간, 고도와 방위각, 적위와 적경, 황위와 황경 등을 파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얀트라는 천문대에 있는 다른 기구들의 정확도를 높이고 오류를 수정하는데 활용되었다고 한다.

 

 

 

 

 

 

 

 

 

담 너머에 시티 팰리스(City Palace)’가 보인다. 암베르 성(Amber Fort)에 거주하던 마하라자 자이 싱(Jai Singh) 2세가 1729년 왕궁으로 만들었으며 지금도 왕족이 살고 있다. 현재 이 궁전은 관광객이 관람할 수 있는 공개 구역과 후손이 거처하는 비공개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일반에게 공개되는 마하라자 사와이 만 싱(Maharaja Sawai Man Singh II)박물관1층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박물관은 희귀한 필사본과 무굴과 라자스탄의 미니어처, 무굴의 카펫, 의류, 직물, 무기, 왕족의 소지품 등 광범위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둘째 날 : 자이푸르(Jaipur)의 암베르 성(Amber)

 

특징 : 자이푸르(Jaipur) : 인도 라자스탄(Rajasthan) 주의 주도(州都)로서 도로와 철도 등 교통망이 정비된 상공업 중심지이다. 12세기 라지푸트족(Rajput, Rajputana를 다스렸던 전사계급)이 세운 자이푸르 왕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왕국의 수도는 본래 자이푸르에서 북쪽으로 약 8km 거리의 암베르(현 아메르)였는데 1727마하라자 자이싱 2(Jai Singh II, 1686~1743)’가 자이푸르를 새로운 수도로 건설하여 천도하였다. 지명은 '자이 왕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자이푸르 왕국은 1818년 영국령 인도제국에 포함되어 자이푸르 번왕국이 되었으며, 자이푸르는 인도 독립 이전 1947년까지 자이푸르 번왕국의 수도였다. 담홍색을 띤 건물이 많다고 해서 '핑크 시티'라고도 불리는데. 구시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는 바둑판 모양의 넓은 거리로 구획되어 있다. 계획도시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주요 유적으로는 도시의 상징이자 왕족 일가의 거주지인 찬다르 마할(Chandra Mahal)’, 1799년에 건축된 5층 규모의 궁전인 하와 마할(Hawa Mahal)’, 현재는 호텔로 쓰이는 타지 람바그 궁전(Taj Rambagh Palace)’, ‘나하르가르(Nahargarh) 요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8세기의 천문 관측소인 자이푸르 잔다르만타르’, 그리고 11Km쯤 떨어진 곳에 암베르성(Amber Fort)이 있다.

 

암베르 성(Amber Port) : 자이푸르에서 약 11km 떨어진 자그마한 도시 아메르(Amer)에 있는 성으로 바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지어졌는데 지형을 활용한 방어적 목적이 강하다. 11세기 초 미나스(Susawat Minas) 왕조의 수도로 처음 건설되었다. 이웃하고 있던 카츠와하(Kachhwaha) 왕국의 라자 카킬(Raja Kakil)’12세기 초 암베르성을 정복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그 후 28명의 왕이 600년 동안 이곳에 거주했다. 암베르성을 현재의 모습으로 짓기 시작한 것은 1592만 싱 1(Man Singh I)’에 의해서다. 그리고 자이 싱 1(Jai Singh I: 1611~1667)’ 때인 1600년대 전반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1727사와이 자이 싱 2(Sawai Jai Singh II)’가 자이푸르에 새 수도를 건설하면서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인도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성으로 꼽히며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도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그러나 암베르 성만 따로 떼어서한 것은 아니고 라자스탄주에 산재한 6곳의 요새들을 라자스탄 구릉요새(Hill forts of Rajasthan)’로 한데 묶었다. 8~18세기에 걸쳐 이 지역에서 번성하였던 라지푸트 번왕국(藩王國)을 증언하는 유적들이다. 참고로 암베르라는 이름은 아요디아(Ayodhya, 우리에게는 아유타阿踰陀로 알려져 있다)’의 왕 암바리샤(Ambarisha, 익시바쿠족 제28번째의 왕)’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암바리카네로 불렀으나 후에 암비네르또는 암베르로 줄여 불렀다는 것이다. 현재는 '아메르(Amer)'를 공식 이름으로 쓰고 있다.

 

 

 

물의 궁전에서 8인승 지프(Jeep)를 타면서 암베르성(Amber fort)’ 투어는 시작된다. 성 아래에 있는 주차장까지 버스로 이동한 다음, 성문까지는 코끼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잔뜩 기대했었는데 시작부터가 실망이다. 코끼리는 오전에만 탈 수 있는데, 우린 오후에야 자이푸르에 도착한 탓에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이동 중에 암베르성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처음 본 느낌은 ! 아름답다이다. 성을 건설하고 성곽을 쌓는 것은 외적을 막기 위함이겠지만 자이푸르 지역의 붉은 사암과 대리석으로 건축된 암베르 성은 짙은 베이지색을 바탕으로 힌두와 이슬람 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품위 있는 예술작품과 같다는 느낌이다.

 

 

 

 

지프(jeep)에서 내리면 암베르성의 성문은 바로 코앞이다. '암베르(Amber)‘라는 지역은 한 때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암베르 지역의 높은 구릉지에 있는 암베르 성(Amber fort)‘은 라자스탄 지역 최고의 부국이던 카츠와하(Kachwaha) 왕조가 지은 성이다. ’암베르성카츠와하 왕국이 인도 역사 속에 부각된 것은 라자 바르말(Raja Bharmal)‘ 때이다. 그는 1562년 자신의 딸인 조다 바이(Jodha bai)‘를 무굴제국 황제인 악바르(Akbar the Great)‘에게 시집보냈다. 1569년 그녀와 악바르 사이에서 왕자인 무함마드 살림(Muhammad Salim)이 태어났고, 1605년 살림이 무굴제국의 제4대 황제 자한기르(Jahangir)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라자스탄 왕국은 무굴제국의 외척으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참고로 힌두와 이슬람 건축양식이 잘 조화되어 있는 이 성은 델리의 레드포트(Red Fort), 아그라의 아그라포트(Agra Fort)와 함께 인도의 3대 성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달의 문(Chand Pol, Moon gate)’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찬드(Chand)’는 달의 신 찬드라를 가리키는데, 옛날에는 서민들이 사용하던 문이라고 한다. 암베르성에는 공식적인 문이 두 개 있다. 나머지 하나는 태양신 수리야를 이름으로 삼은 수라지 폴(Suraj Pol)’ 태양의 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널따란 광장이 나타난다. ‘잘렙 촉(Jaleb chowk)’인데, 옛날 전쟁에서 승리한 후 왕의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던 장소라고 한다.

 

 

광장은 온통 노란빛의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정면에는 디완--(Diwan-e-Am)’이 그 오른쪽에는 실라데비 사원(Shila Devi)’이 위치하고 있다. ‘달의 문맞은편에 보이는 문은 왕과 왕의 가족(Royal Family)들이 드나들었다는 태양의 문(Suraj Pole, Sun Gate)’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태양신 수리야를 문의 이름에 붙였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정원에서 계단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간다. 계단의 위에는 아치형의 문이 나있다. 누군가는 궁으로 들어가는 이 출입문을 일러 사자의 문(Singh Pol)‘이라고 하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문을 오르다 오른쪽으로 가면 실라데비 사원(Shila Devi)이 나온다고 하나 가이드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우리 역시 그의 뒤꽁무니를 쫓기에 바쁠 뿐이다.

 

 

 

문의 주위 벽면은 아름다운 문양들이 빼꼭히 들어 차있다.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로 보이는데, 바탕 돌에 꽃 등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는 기법이다. 대부분의 문양들이 식물과 꽃인 것을 보면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들은 우상으로 취급되어 다루는 것 자체가 금지되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면 두 번째 광장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잘렙 촉이라고 하는데 어떤 게 옳은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궁전의 앞마당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궁전은 외궁과 내궁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궁은 코끼리 문으로 일려진 가네쉬 폴(Ganesh Pol)’의 바깥 쪽, 즉 공식 접견실(Diwan-i-Aam)이 있는 공간이다. 내궁은 가네쉬 폴의 안쪽, 즉 사적 접견실(Diwan-i-Khas)쾌락의 정원(Aram Bagh)’이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내궁 안쪽으로 또 다른 성벽을 사이에 두고 정자 형태의 바다나리(Badanari) 광장과 여성들의 공간인 제나나(Zenana)가 있다.

 

 

 

 

왕의 공식 접견장인 디와니암(Diwan-e-Am)’은 광장의 왼편에 자리 잡고 있다. 2층의 원기둥과 격자형 복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날 왕이 신하들의 간언을 듣던 장소라고 한다. ·외부 모두 흰 대리석(大理石, marble)과 붉은 사암(砂岩, sandstone)으로 지어졌는데 화려하진 않지만 웅장한 느낌을 받는다.

 

 

 

 

디와니암(Diwan-e-Am)’의 안은 대리석 기둥이 다섯줄로 늘어서 있다. 그 안에서 왕이 대중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리고 2층의 갤러리(gallery)에서는 공식 행사를 열기도 했었을 것이다.

 

 

 

 

디와 니 암에서의 조망은 시원스럽다. 난간에라도 서면 암베르 시가지는 물론이고, 성 앞의 큰 호수인 마오타 호수(Lake Maota)’ 속에 떠 있는 것같이 만들어진 3단으로 구성된 사분정원(四分庭園, Chahar Bagh)’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케사르 카아리(Kesar Kyari)’ 정원이란다. 3단으로 구성된 정원에는 각 단마다 사분정원이 아름다운 수법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옆에 보이는 건물은 딜라람(Dilaram) 궁전이라고 한다.

 

 

산릉(山稜)을 따라 길게 지어진 산성의 성벽이 참 멋지다. 누군가 중국에 만리장성이 있다면, 인도에는 암베르성이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산을 따라 끝도 없이 늘어선 산성이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하다.

 

 

이젠 왕의 사적 공간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광장 맞은편에 화려하고 웅장한 코끼리 문(Ganesh Pol)이 보인다. ‘가네쉬 폴1640년에 건설된 2층짜리 이중(二重) ()이다. 외문(外門)2층 높이고, 그 안에 1층을 통과하는 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왕족의 사적인 공간이 된다. 코끼리 문 위층에는 수하그 만디르(Suhag Mandir)’가 있다. 3개의 방 창문이 보이는데 격자상의 창문(Jali)을 통해 왕족의 여인들이 공식적인 행사가 벌어지는 장면을 구경하던 곳이다. 2층과 3층 벽에 만들어진 벌집 문양의 창 또한 안쪽에서 바깥쪽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그렇지만 바깥에서는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문의 가운데에 라자스탄의 상징 동물인 코끼리 조각이 있다. ‘코끼리 문(Ganesh Pol)’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근원인데, 의외로 귀여운 형상을 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코끼리를 신성한 존재로 여긴다고 하던데, 예외로 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임에는 틀림없다. 문 주위 벽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각종 문양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코끼리 문을 통과하면 3번째 광장이 나온다. 광장 왼쪽으로는 디완--카스(Diwan-i-Khas : Jai Mandir 승리의 방, Sheesh Mahal 거울의 방)’가 있고 그 위층은 자스 만디르(Jas Mandir)가 있다. ‘디완--카스(Diwan-i-Khas)의 맞은편에는 수크 니와스(Sukh Niwas : Hall of Pleasure)’가 있다. 두 건물의 사이에는 이슬람 양식의 사분정원(四分庭園)쾌락의 정원(Aram Bagh)’이 만들어져 있다. 정원은 기하학적 형태의 석조로 만든 보도가 형성되어 있으며 중앙의 연못 중심부분에는 옥좌(玉座)가 배치되어 있다. 라지푸트의 나라들이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하학적 평면 형태의 정원들을 여러 곳에 만들었다고 하더니 이곳 또한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궁전건축과 정원을 연관시킨 구도가 눈길을 끈다.

 

 

 

 

환락의 궁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수크 니와스(Sukh Niwas)’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정원을 사이에 두고 쉬시 마할(Sheesh Mahal)’과 마주보고 있다. 하지만 내부는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다른 사람의 글로 대신해 본다. <물을 이용해 여름에 내부를 시원하게 하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물이 정원으로 흘러들어 식물들에게 생명수 역할을 한다. 이처럼 물을 인위적으로 궁전에 끌어들여 낙원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이슬람 건축의 기본 콘셉트이다.> 또 다른 글도 있다. <뒤쪽 벽의 가운데, 돌로 만든 촘촘한 작은 구멍이 있는 직사각형의 벽이 보인다. 그곳을 통해 물이 흘러내리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물은 대리석 바닥에 내놓은 홈을 통해 홀의 중간에 있는 작은 수조로 흘러든다. 그리고 다시 홈을 통해 정원으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덥고 건조한 인도에서 물을 이용해서 냉방은 물론이고 습도조절까지 한방에 해결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뛰어난 건축기술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처럼 물을 인위적으로 궁전에 끌어들여 낙원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이슬람 건축의 기본 콘셉트이다.

 

 

수크 니와스(Sukh Niwas)’의 회랑(回廊)을 따른다. 대리석의 벽면에는 아름다운 문양들을 빼꼭히 조각했고, 천정의 그림에는 아예 보석까지 심어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꾸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벽면의 유리 가림창 너머에는 아라베스크(arabesque)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장식장과 왕비가 타고 다녔다는 가마가 전시되어 있다. ‘수크 니와스(Sukh Niwas)’의 내부를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보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쉬크 니 와스에서 맞은편 쉬시 마할로 가기 위해서는 쉬크니와스의 회랑)回廊)을 지난 다음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런데 통로의 왼편에 만들어진 창틀이 눈길을 끈다. 창살에 약간의 경사(傾斜)를 줌으로써 밖에서는 안쪽이 안 보이는 대신에 안쪽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게끔 설계된 것이다. 이곳이 왕가의 여인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라고 하더니 그녀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디완 이 카스(Diwan-i-Khas)‘에는 왕의 개인 접견실인 승리의 홀(Jal Mandir)’이 만들어져 있고, 그 안에 들어있는 방은 거울의 방으로 입소문을 탄 쉬시 마할(Sheesh Mahal)’이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홀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격자창, 식물 문양이 새겨진 천정, 대리석 부조, 유리를 붙인 벽 등이 어우러져 마치 천국을 연상케 한다. 이곳에서 왕은 관리를 만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내정과 외교 문제를 처리했다. 이 홀은 쉬시 마할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거울로 치장된 궁전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곳은 자이 싱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해서 자이 만디르(Jai Mandir)‘라 불리기도 한다.

 

 

'승리의 홀' 안에는 암베르 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거울 궁전(세시마할)'이 있다. 왕과 왕비가 침실로 이용하던 곳인데,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막고 있다. 그렇다고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밖에서 내다봐도 대부분 다 보이기 때문이다. 벽은 물론 천장까지 온통 거울 조각들이 촘촘히 박혀 모자이크처럼 장식되어있다. 한마디로 대단하다.

 

 

쉬시 마할은 암베르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궁전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궁전의 4면은 모두 보석과 채색유리 거울들로 장식 되어 있다. ’거울 궁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이다. 지금의 보석들은 비록 가짜지만 어둠속에서 촛불을 하나 켜면 여전히 거울을 통해 광선이 반사되어 빛 속의 황홀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가 돋을 기법으로 새겨진 정물화(靜物畵, still-life painting)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고 숨은 그림 찾기를 시작한다. 세 송이의 꽃과 두 마리의 나비를 그려 넣은 단순한 구도의 그림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가 형상들을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그림의 일부분을 가려가면서 찾아내가는 그의 손길이 가볍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겨울궁전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역시 화려하기 짝이 없다.

 

 

쉬시마할에서 나와 코끼리 문이 있는 건물의 이층으로 오른다. 왕의 침실인 자스 만디르(jas Mandir)’ 등이 있는 은밀한 공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층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가면 왕의 침실인 자스 만디르(jas Mandir)’가 나온다. 왕이 거주하는 공간답게 화려하기 짝이 없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창이 특히 아름답다. 한쪽의 벌집모양 대리석 창을 통해 '마호타'호수의 경치를 내려다보면 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고 정교한 홀에는 벌집처럼 생긴 대리석 창문이 나있고 꽃이 조각된 천정과 채색유리로 치장되어 있다. 벽면의 문양들은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을 이용했다. 고급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는 기법이다. 우리나라 고려청자의 상감(象嵌) 기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색이 바래지 않음은 물론이고, 지워짐이 없이 예전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격자창(格子窓) 가운데는 작은 문()이 하나 나있는 게 보인다. 그런데 저 격자창은 나무가 아니라 돌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무척이나 정교하면서도 아름답다. 한 장의 돌을 조각한 것이라는데, 만든 사람들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창살을 통해 마하라자()의 후궁들은 밖의 동정을 살폈다고 한다. 왕궁의 여자들은 오직 창문을 통해서만 외부를 볼 수 있었단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구조였음은 물론이다. 혹시 저 창살은 왕실 여인들의 세상을 향한 몸부림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에 보았던 마하라자의 개인정원이 한눈에 잘 내려다보인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원이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사분정원이라고 하는데, 아그라에서 보았던 정원들과는 조금 다른 외형을 갖고 있다. 수로를 이용해 정확히 사등분했던 아그라와는 달리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의 정원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정원의 오른편 건물은 수크 니와스(Sukh Niwas)’이다. 그 아래 사진은 옥상에서 바라본 승리의 홀(Jal Mandir)’이다.

 

 

 

 

옥상에서는 산 정상에 있는 자아가르 포트(Jaijarh Fort)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자아가르(Jaijarh)승리의 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성 안에는 궁전과 박물관 곡물창고, 사원, 세상에서 제일 큰 대포 등이 있으며, 그곳에서 바라보는 자이푸르의 전망은 끝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36년에 건설되어 한때는 마하라자의 왕궁으로도 사용되었던 곳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단다. 또한 사진은 첨부시키지 않았지만 마오다(Maotha)와 무굴양식의 정원, 그리고 암베르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주변 경치에 한참 동안 넋을 놓다가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여성들만의 공간이라는 제나나(Zenana)’로 향한다. 아랍어로는 하렘(Harem, 왕비와 후궁, 궁녀들이 모여 사는 금남의 집)과 같은 개념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후궁들의 처소인 제나나(Zenana)’는 수십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방들은 미로(迷路)처럼 복잡한 복도로 연결시킨다. 왕이 자기의 처소에서 후궁들의 방으로 은밀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유사시에는 왕의 대피 통로 역할도 감안했다고 한다. 아래로 내려 갈수록 넓어져서 나중에는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을 정도까지 된단다.

 

 

안마당에는 목욕탕도 만들어져 있다. 제법 깊은 탓에 모서리에 발을 딛고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건물은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까지 세심하게 장식과 그림을 채워 넣었다. 그런데 이곳의 그림들은 대부분 동물이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는 남녀가 성행위를 하고 있는 장면도 있다. 이는 이 궁전이 이슬람이 아니라 힌두교 왕족의 궁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분홍빛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의 가운데에는 정자(亭子) 형태의 바다나리(Badanari)가 지어져 있다. 낮 시간에 왕의 여인들은 이 정자에 모여 서로에 대한 감시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왕은 위에서 그녀들의 이러한 행동을 지켜볼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마음에 내킨 여자를 골라 하룻밤을 보냈을 것이다.

 

 

 

이곳은 암베르성의 궁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어진 공간으로 왕족과 비빈들이 살던 곳이다. ‘카츠와하(Kachhwaha)’ 왕조의 후예인 마하라자()가 지금도 이곳 궁전 한쪽에 살고 있으며, 궁전을 개방하여 벌어들이는 관광수입 등으로 성의 유지·관리를 하고 있단다. 마하라자()가 사는 곳은 건물 꼭대기에 깃발이 꽂혀 있다. 아래 두 번째 사진에 첨탑 전망대(키오스크)가 보인다. 때로는 감시탑 역할도 수행하던 시설이다.

 

 

 

 

안마당에 사각의 격자(格子)무늬 틀이 만들어져 있다. 그 안에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안내판에 보니 툴시(tulsi)’라고 적혀있다. ‘홀리 바질(Holy Basil)’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툴시는 신성한 의미의 접두어인 '크라슈나(Krishna)'가 붙을 정도로 힌두교에서는 숭배하다시피 하는 다년초 식물이다. 강한 아니스(anise)씨앗향을 내며, 즙에서는 후추와 비슷한 멘톨에 가까운 정향이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힌두교도들은 바질을 힌두 신인 비쉬누의 지상 현신으로 여기며, 전통적으로 예배 때 비쉬누에게 봉헌한다. 나무뿌리와 흡사한 바질의 뿌리로는 염주알을 만들기도 한다. 어찌됐든 이러한 문화적 중요성 때문에, 인도에서 툴시는 요리보다는 약재나 영성적인 용도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성을 빠져나오는 길에 ‘Gallery Artchill’이라고 적힌 푯말이 보인다.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로 현대미술 기법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푯말 아래에 커다란 돌 항아리가 전시되어 있다. 쌀을 담았던 항아리란다. 항아리 앞에 보이는 커다란 가마솥은 관광객들을 위해 옮겨놓은 것이란다.

 

 

 

 

 

이 문을 빠져나가면 대광장이 나온다. 이어서 성을 빠져나와 아까 짚에서 내렸던 주차장으로 향한다. 혹시라도 코끼리를 볼 수 있나 해서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성으로 들어오면서 타지 못했던 코끼리를 가까이서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는 모양이다. 보고 싶은 코끼리 대신에 귀찮은 장사꾼들에게 죽도록 시달리기만 했다. 조잡하기 짝이 없는 금속세공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주차장에 이를 때가지 졸졸 따라다니며 여간 귀찮게 하는 게 아니었다. 이번 인도여행에서 가장 기분 나쁜 추억이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쇼핑에 대해서도 거론해보자. 이곳 자이푸르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드는 미술공예품이 유명하다. 특히 대리석이나 상아에 상감기법(象嵌技法)으로 무늬를 넣어 만드는 각종 공예품과 금속세공품(金屬細工品)들은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기 짝이 없다. 시내에 전문 매장이 몇 곳이 운영되고 있으니 하나쯤 구입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첫째 날 : 아그라 성(Āgra Fort)

 

특징 :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과는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붉은 사암(砂岩, sandstone)의 성채와 내부의 하얀 대리석 건물이 어우러져 웅장함과 정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아그라가 무굴제국의 수도가 된 것은 1558년 제3대 황제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에 의해서다. 이때 만든 방어성(Fortress)이자 궁전(Palace)이 바로 아그라성이다. 악바르는 1556년 파니파트(Panipat) 전투에서 힌두교 왕 헤무(Hemu)를 물리치고 나서, 아그라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파괴된 성을 재건하기 위해 라자스탄 지역에서 나는 붉은 사암으로 성과 궁전을 짓기 시작했고, 1573년에 완성시켰다. 이후 그의 손자인 샤 자한(Shah Jahan)’이 타지마할(Taj Mahal)을 건축함과 동시에 이곳 또한 더욱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보다는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 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 더 유명하다. ‘샤 자한이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지내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아그라성은 바로 코앞이다. 거대한 성은 입구부터 찾아오는 이들을 압도해 버린다. 시선을 압도하는 붉은색 또한 무척 인상적이다. 높이가 20m에 이르는 저런 성벽이 2.5Km에 걸쳐 이중으로 쌓여있다고 한다. 아그라성은 첫눈에 봐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여겨진다. 악바르가 건설하던 당시 저 성은 대형의 요새였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샤 자한이 황제가 된 후 평화정책을 견지해 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궁전으로 기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근래 외벽 문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 마할샤 자한이 부활할 것이다.> 그들의 열렬했던 사랑의 흔적들은 타지마할뿐만 아니라 이곳에까지도 짙게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성의 둘레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10m 넓이의 해자(垓字, moat)로 둘러져 있다. 당시 저 해자에는 악어를 풀어 놓았었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해자를 건너기 위해서는 나무판으로 만든 다리를 지나야 하는데, 이 다리를 위로 들어 문을 막으면 외적이 접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설사 나무다리를 통과했다고 해도 다는 아니다. 성문에도 좌우로 여닫는 철문(鐵門)이 만들어져 있다.

 

 

남문(南門)아마르 싱 게이트(Amar Singh Gate)‘로 들어서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아그라성에는 동서남북에 네 개의 문이 있는데, 현재는 이곳 남문과 서쪽의 델리 게이트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델리 게이트는 인도군 낙하산부대가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은 제한된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 아마르 싱 게이트악바르 문(Akbar Darwaza)‘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1568년 악바르가 이 문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란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남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또 다른 문 하나가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성채 본곽(本墎)에 내놓은 문이다.

 

 

두 번째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자그만 정원이 나오면서 관광객들은 자신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완전히 성안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성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을 더 통과해야만 한다. 아그라성은 이렇게 3중의 문을 통과해야만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요새이다.

 

 

세 번째 문은 하티 폴(Hathi Pol)‘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하티 폴코끼리 게이트라고도 불리는데 두 개의 높은 기둥이 문 양쪽을 받치고 있어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문루에는 몇 개의 방이 있는데 현재 작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이드의 뒷 꽁무니를 따라가기에 바빴기에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다. 안으로 들어오는 길이 곧지를 않고 급하게 휘어져 있다는 것이다. 옛날 코끼리를 탄 적군이 성안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휘어놓았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세 번째 문을 지나면 아그라성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이 길 역시 양쪽으로 벽을 쌓아 들어오는 외적(外敵)을 위에서 공격할 수 있게끔 했다. 실제 외적이 두 개의 문을 돌파하고 들어올 경우에는 이 경사로에 기름을 부어 올라오는 것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고 한다. 원초적이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곳에서는 창이나 칼, 화살, 대포 같은 무기 보다는 펄펄 끓는 기름이 더 효과적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길의 끝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샤자한 게이트로 옛날 황제가 대중들을 알현하는 궁전인 디완 이 암(Diwan-i-Aam)‘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오른편에 있는 자한기르 마할‘ ’카스 마할(Khas Mahal)‘ 등 궁전 내부를 먼저 둘러보고 나올 때 저 문을 이용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널따란 잔디밭 너머로 자한기르 마할(Jahangir Mahal)‘이 나타난다.

 

 

자한기르 마할‘, 자한기르 궁전(Jahangir Palace)‘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 1542-1605 재위)‘가 힘겹게 얻은 아들인 자항기르(Jahangir, 1605-1627 재위)‘를 위해 벵갈 양식으로 지은 궁전이다. 자한기르가 주로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궁전은 아그라 성벽과 같은 붉은 사암으로 건설되었으며,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일품이다. 건물 벽면은 붉은 사암으로 지어 흰 대리암 상감을 입혔다. ’파사드(façade,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는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 양끝에는 차토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하는데, 우산을 닮은 작은 탑으로 이해하면 되겠다)가 올려져있다.

 

 

 

정원 한가운데에 돌로 만든 반구형 석조(石槽)가 놓여있다. 황태자였던 자한기르가 장미수(Rose water) 목욕을 했다는 욕조(浴槽)이다. 지름이 2.4m나 되는 커다란 목욕통인데 높이도 1.5m나 되어 욕조의 안과 바깥에 계단까지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다. 욕조 가장자리에 페르시아어로 자한기르 욕조(Hauz-i-Jahangiri)’라고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철책을 둘러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외관을 살펴봤다면 이젠 궁전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자한기르 궁전은 이름처럼 자한기르와 그의 부인 누르 자한(Nur Jahan)’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자한기르가 황제에 오른 것은 1605년이며, 그 후 1627년까지 이곳 아그라성에서 무굴제국을 통치했다. 이 궁전은 인도 양식과 중앙아시아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대칭과 개방성, 기하학적 문양, 그리고 건물 위 정자모양의 차트리 등을 주요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일부 건축가들은 이를 두고 단순성(Simplicity)과 명료성(Clarity), 완전성(Integrity)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내부에 들어서면 마주치게 되는 실내 풍경, 벽면이나 돔(dome)의 하부로 보이는 천장 등은 붉은색 사암(砂岩)으로 지어졌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흥취를 주지 못한다. 모양새이나 무늬에 얽힌 사연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내 앎이 거기까지이니 어쩌겠는가. 그냥 통과하기로 한다.

 

 

 

 

하지만 궁전의 중앙에 만들어 놓은 안뜰에 들어서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과학적인 논리까지 품고 있는 구조물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사암으로 만든 기둥이나 벽면은 물론이고, 차양을 받치고 있는 까치발에까지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남북의 홀은 기둥들보 구조로 되어 있다. 조금 전 들어올 때 보았던 외관(外觀)은 전형적인 아프칸 형식을 따랐으나, 궁전의 내부는 구자라트나 라자스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하라자(maharaja, 산스크리트어인 위대한이란 뜻의 mahatrājan이 합쳐진 것인데, 보통 왕의 위에 군림하는 힌두의 제왕을 의미한다)’들의 궁전과 비슷하다. 이는 자이푸르의 공주를 정실로 맞아들였을 정도로 힌두와의 융합을 중시했던 악바르의 영향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궁전은 악바르시대에 지어진 궁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꼽힌다고 한다.

 

 

반대편 건물로 들어서면 그 아름다움은 한층 더 짙어진다. 여성들이 머물던 공간이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공간에는 과학적인 원리까지 적용을 시키고 있다. 벽 속에 물이 흐르는 수도관을 넣어 여름철에도 찬바람이 실내로 전달되게끔 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에어컨(Air conditioner) 시설쯤으로 여겨도 될 듯 싶다. 아주 오래 전, 저런 원리를 소개하던 신문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세간의 화두(話頭)에너지절약이었을 때인데, 당시 기사에는 상수도관을 벽속에 넣음으로써 에너지를 쓰지 않고도 냉방을 하고 있다며 식당주인의 아이디어를 극찬하고 있었다.

 

 

 

 

사암으로 된 기둥에 조각된 무늬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마치 찰흙을 빚어 정교한 부조를 만들어 놓은 듯, 정교한 문양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새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을 정도로 아라베스크(arabesque : 원래 고대 그리스 공예가들에게서 유래했으나 1000년경 이슬람 공예가들이 종교적 이유로 새·동물·사람 등을 제외시킨 채로 정형화시킨 이슬람 장식 문화)’ 문양들이 향연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경이(驚異) 그 자체가 된다.

 

 

 

갑자기 대리석 방들이 나타난다. 아니 사암 위에 회칠을 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붉은 빛에서 하얀 빛으로 바뀐 것만 해도 새로운 아름다움인데, 거기다 온 벽면을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들로 채워놓아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켜 놓았다. 혹시 여성들이 침실로 사용하던 공간이지 않나 싶다.

 

 

 

 

궁전을 빠져나가면 또 다른 마당이 나타난다. 한쪽 면이 트여 있는 것이 테라스(terrace)를 염두에 두고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툭 터놓은 것은 아니다. 어른의 키보다 훨씬 더 높게 담장을 두르고 중간 중간에 사각의 구멍을 내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마당의 가운데에는 빗물을 모아두던 수조(水槽)가 있다. 그런데 임시로 빗물을 모아두는 시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을 갖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짓지 않는 당시의 건축술이 놀랍다. 아무튼 이 물은 그냥 버리지를 않고 생활용수로 다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구멍마다 관광객들이 몰려있기에 다가가 본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묘라는 타지마할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한기르 궁전이 끝나면 주위 풍경 또한 확 바뀌어 버린다. 사암(砂岩, sandstone)이 대리석(大理石, marble)으로 바뀌면서 색깔 또한 붉은색에서 하얀색으로 변한 것이다. 샤자한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지금 향하고 있는 공간을 그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1627년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등극한 샤자한도 1648년까지는 이곳 아그라성에 살았다. 당시 그는 북쪽 공간에 하얀 대리석 궁전을 지었는데, 대표적인 건물로는 카스 마할(Khas Mahal)’디완 이 카스(Diwan-i-khas)’, ‘디완 이 암(Diwan-i-Aam)’ 등이 있다. 참고로 샤 자한1648년 수도를 샤자하나바드(Shahjahanabad)로 옮긴다. 현재의 올드 델리(Old Delhi)’이다. 그리고 무굴제국이 몰락하는 1857년까지 200년 이상을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백색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건, 황금색 지붕으로 이루어진 골든 파빌리언(golden pavilion, 부속건물)’이다. ‘샤 자한의 두 딸 중의 하나인 로샤나라(roshanara)가 머무르던 공간이라고 한다. ‘카스마할을 가운데에 두고 왕자와 공주들의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그 곁에는 샤 자한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인 카스마할(Khas Mahal)’이 자리 잡았다. 1631년부터 1640년 사이 샤자한에 의해 건설된 카스 마할은 황제와 황후의 거처이다. ‘카스 마할이란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성스러운 궁전이란 뜻으로, 아그라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한다. ‘앙구리 박(Anguri Bagh)’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카스 마할 정면에 마당이 나타나는데, 마당 한가운데 수조(水槽)와 분수대가 있고, 그 앞으로 정면 5칸의 개방된 궁전인 카스마할이 버티고 있다. 당시 건축방식을 따라서 천장이 무척 높게 만들어져 있으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침실에서는 성 주변에 있는 야무나 강이 잘 조망된다.

 

 

 

궁전 내부는 인도의 궁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각(陽角)으로 조각한 벽장식, 화려하게 상감(象嵌)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그리고 격자창 등이 눈길을 끈다. 타지마할에서 보았던 양식들과 거의 비슷한 느낌들인데 다만 피에트라 두라의 상감기법은 그 색깔이 타지마할 보다 조금 약한 것 같다. 타지마할에서 사용했던 보석들을 이곳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스마할 앞마당은 파라다이스를 상징하는 사분정원으로 되어 있다. 화단과 수로, 그리고 연못과 분수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포도나무 정원으로 불리는 앙구리 박(Anguri Bagh)’인데, 현재는 포도나무 대신 화초들이 심어져 있을 따름이다. 정원은 가로 68m, 세로 52m의 직사각형이고, 가운데로 폭 5.5m 십자형 길이 나 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수조 형태의 단이 만들어져 있다. ‘앙구리 박의 남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에는 궁녀들의 거처인 쉬시 마할(Sheesh Mahal)’이 있다.

 

 

 

 

카스 마할옆에는 샤 자한의 또 다른 딸인 자하나라(Jahanara)’가 머물렀던 공간이 있다. 아들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 샤 자한은 야무나 강 건너에 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우랑제브가 아그라 성으로 공급되는 야무나 강줄기를 막아 버리자 소금기 많은 성안의 물로 한여름의 갈증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66674살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힘든 여생을 보내야했던 샤 자한을 곁에서 보살폈던 사람이 자하나라(Jahanara)’이다.

 

 

공주의 거주 공간 안에는 전망 좋은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건너편에 있는 타지마할을 조망(眺望)하기가 더 없이 좋지만 일부러 격자창 사이에다 카메라 렌즈를 대고 촬영해봤다.

 

 

카스 마할옆에는 8각형 탑의 형태로 지어진 무삼만 부르즈(Muthamman Burj)’가 있다. ‘포로의 탑이라는 뜻으로 건물 한가운데 가로 12.3m 세로 6.7m의 향수 분수가 있고, 그 둘레에 피에트라 두라로 장식한 기둥과 벽 그리고 방이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샤 자한이다. 하지만 말년에 그가 갇혀있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1658년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황제자리를 찬탈 당한 뒤, 1666년 숨을 다할 때까지 마지막 7년을 이곳에서 유폐생활을 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갇혀 지낼 감옥(監獄)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던 셈이다.

 

 

무삼만 부르즈(Muthamman Burj)’ 앞에는 이름이 적힌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그만큼 의미가 있는 건물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제 몸에서 나온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폐위된 샤 자한(Shah Jahan)’은 아그라성에 유폐되었다. 아그라성의 작은 방에서 저 멀리 보이는 타지마할(Taj Mahal), 구불구불 흐르는 야무나 강변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타지마할에 누워 있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다 최후를 맞게 된다. 여름 내내 짠맛이 나는 우물물만 마시게 했다는 아우랑제브의 학대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바라보며 죽어간 그는, 사랑의 추억에 행복했을까, 아니면 덧없는 인생의 영욕에 쓸쓸했을까.

 

 

내부 장식은 잠시 전에 보았던 카스 마할못지않게 화려하다. 그것은 카스 마할보다 보존이 잘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지금도 내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참고로 무삼만 부르즈의 한쪽에는 장식이 없는 작은 모스크가 있다. ‘메나 마스지드(Meena Masjid)’로 왕가의 사적인 예배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곳 역시 들어갈 수가 없다.

 

 

다음은 황제의 사적 업무 공간인 디완 이 카스(Diwan-i-Khas)’이다. 대신 및 외국 사신들과 만나는 외부의 개방된 홀과 황제의 집무실인 내부의 폐쇄된 홀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 역시 1635년 샤자한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페르시아의 한 시인이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는 시구(詩句)를 지어 바쳤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었다고 전해진다. 건설 당시만 해도 온 벽을 보석으로 치장했었다니 그랬을 만도 하겠다.

 

 

 

 

 

하지만 디와니카스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건물 안에 있던 옥좌, 일명 공작왕좌(孔雀座, Takht-I-Taus) 때문이다. ‘샤 자한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옥좌는 인류가 만든 어떤 옥좌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우선 단상까지 이르는 계단을 은으로 만든 데다 의자의 다리는 황금으로, 등받이는 다이아몬드와 루비 등으로 꾸며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다. 공작왕좌는 의자의 등받이가 공작의 깃털 모양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공작좌는 1648년 수도를 델리로 옮기면서 델리의 레드 포트로 옮겨졌다.(디와니카스의 왼편에 보이는 탑은 샤자한이 갇혀 살았던 무삼 부르즈의 상징인 팔각 탑이다.)

 

 

디완 이 카스밖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중 검은색 판은 자한기르의 왕좌((Takht-I-Jahangiri)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맞은편에 있는 흰색 판은 대신이나 사신들이 앉았던 자리가 아닐까 싶다. 혹자는 왕비의 자리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디완이카스가 왕의 집무공간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더 이상 우겨서는 안 될 일이다.

 

 

 

 

디완 이 카스앞에는 2층짜리 마치 바완(Macchi Bhawan)’이 있다. 이 건물 가운데 잔디 광장이 있고, 그 주변을 아케이드 형태로 만들었다. 1층의 널따란 잔디광장은 여성 상인들이 무굴 왕실의 귀부인들에게 물건을 팔던 공간인 레이디 바자르이다. 궁녀들이 2층에서 내려와 물건을 사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 금남(禁男)의 구역이었을 게 분명하다. 참고로 마치 바완의 북서쪽 코너에는 궁녀들을 위한 사원인 나기나 마스지드(Nagina Masjid)’가 있다.

 

 

 

 

내부 궁전을 다 둘러봤다면 이젠 외부 궁전인 디완 이 암(Diwan I Am)’으로 나가볼 차례이다. ‘디완 이 암역시 건물이 서향(西向)으로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운동장을 설치한 형태다. 샤자한에 의해 1630년대 지어졌는데, 대중이 참가하는 공식적인 의전과 행사 장소로 사용되었고 한다. 궁전은 기둥이 정면 10, 측면 4줄이나 되는 개방형 건물이다. 그러므로 내부는 27개 공간으로 나눠진다. 여러 겹의 기둥들이 겹쳐진 듯 건물을 떠받치고 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어 내· 외부를 비롯하여 어느 각도에서 봐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외형을 보여준다.

 

 

내부 장식은 디완 이 카스카스 마할처럼 화려하지 않고 단순한 편이다. 전면에 어른 키 높이의 단상(壇上)이 만들어져 있는데 황제가 앉았던 자리란다. 그 앞에는 나지막한 좌대(座臺)가 놓여있다. 가이드가 신하의 자리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디완 이 암(Diwan I Am)’의 앞에는 정원을 꾸며놓았다. 바닥에 잔디를 깔고 관목(灌木)들로 조경을 했다. 그런데 운동장의 한가운데에 의외의 무덤 하나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인도 북서부 지방을 다스리던 부총독 존 러셀 콜빈(John Russel Colvin)’의 무덤이란다. 1857년 인도 1차 독립전쟁(세포이 항쟁) 당시 이곳 아그라성에서 죽었는데, 아그라성의 아름다움에 반한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일 것 같다. 만일 테라우찌(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하세가와(長谷川好道, 2대 총독)‘의 묘를 경복궁 뜰에 세운다면 가만히 있을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인도에 도움을 많이 준 인물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풍경이었다.

 

 

출구, 그러니까 샤 자한 게이트의 반대편 방향에 많은 숫자의 정자 형태 차트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한다)들이 보인다. ’샤 자한이 지은 아그라성의 공식 사원, 즉 진주사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모티 마스지드(Moti Masjid)‘일 것이다. 그런데 가이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밖으로 향해버린다. 시간이 없어선지, 아니면 원래부터 입장이 불가능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사원으로 알려져 있기에 구경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가이드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다. 패키지여행의 가장 좋지 않은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니 어쩌겠는가.

 

 

 

에필로그(epilogue),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마라.‘는 속담(俗談)이 있다.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배우는 법이니 항시 언행(言行)을 조심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오늘 아그라성을 둘러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위의 속담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건축물인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 자한(Shah Jahan)’은 제 몸에서 나온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폐위된 채 아그라성에 유폐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우랑제브를 패륜아(悖倫兒)로 손가락질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그가 왜 폐륜아가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봤다. ‘샤 자한이 과연 옳은 아버지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망나니가 태어났을까 하는 의구심을 말이다.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샤 자한또한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료에 의하면 샤 자한은 그의 아버지 자항기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왕좌를 빼앗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었다. 거사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아들인 다르 슈코흐아우랑제브를 아버지인 자항기르에게 인질로 보내고, ‘샤 자한자신은 은퇴하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부지한다. 나중 일이지만 왕좌 또한 그냥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다. 형제들과 살육전을 벌이고 난 뒤에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그의 아들은 과연 뭘 배웠을까. 아우랑제브 역시 형제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인 끝에 1658년 무굴제국 6대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경쟁자였던 큰아들 다라 슈코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아그라성에 유폐시켜버린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속성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부모에게 배운대도 실행에 옮겼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샤 자한은 그가 저질렀던 업보(業報)를 그대로 되돌려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패륜아인 아그랑제브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권좌를 차지한 아우랑제브는 90살까지 50년을 통치했다. 그러나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졌던 그는 제국 멸망의 원인이기도 했다. 선대왕들의 관용정책을 무시하고 비()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지즈야인두세를 부활시키는가 하면, 시크교 지도자를 잡아 잔인하게 처형하고 힌두교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30년 넘는 세월을 소진했다. 내란과 저항을 거듭하던 제국은 결국 때마침 쳐들어온 페르시아와 아프간 세력에 의해 18세 중엽 몰락당하고 무굴제국은 델리 주변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친구는 아예 나라를 거덜내버린 것이다.

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첫째 날 : 아그라(Āgra)의 타지마할(Taj Mahal)

 

특징 : 무굴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Shah Jahan,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왕이라는 뜻, 1628-1658 재위)’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영묘(靈廟)이다. 시장에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팔고 있던 열아홉 살의 처녀 바누 베감을 보고 한눈에 반한 샤 자한은 그녀를 두 번째 황비(皇妃)로 맞아들이면서 궁전의 꽃이라는 의미의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타지마할(Taj Mahal)’마할의 왕관이란 뜻이다. 1612년에 결혼한 그들은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다. 전쟁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의 질투였을까, 이 세상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던 뭄타즈 마할은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함께 출정한 데칸고원의 전쟁터 근처 천막에서 아이를 낳다가 서른아홉이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17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 사이엔 14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 급작스러운 죽음에 샤 자한은 머리카락이 하룻밤 새에 하얗게 변해버렸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아내를 그리워한 황제는 2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고 사후세계에서의 재회를 기약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를 지어주겠다고 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2년간에 걸쳐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공사는 인도·페르시아·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타지마할의 중앙에는 정4각형 정원이, 남쪽에는 사암 출입구와 부속 건물이, 북쪽에는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모스크(mosque, 예배당)‘와 이와 완전 대칭을 이루는 '자와브(jawab, 영빈관)'가 있다.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고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1983년 타지마할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2007년에는 세계의 경이적인 문화유산 7개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더욱 더 유명세를 띠게 되었다.

 

 

 

버스는 우릴 타지마할(Taj Mahal)에서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다 내려놓는다. 타지마할은 대형버스의 진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록(1983)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아닐까 싶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전동차(電動車)를 타고 타지마할 동문으로 향한다. 주변에는 릭샤, 마차, 낙타 등이 줄을 서 있다. 모두가 타지마할로 가려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휘발유나 경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자동차는 보이지 않는다. 대형차량의 진입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재에 해가 되는 매연(煤煙)을 내뿜는 차랑 자체의 통행을 금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전동차라고 해서 남문 앞까지 곧장 가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200m정도는 카라반 사라이(karavan sarai), 즉 상가지역을 통과해야만 남문에 이를 수가 있다.

 

 

길가에 코브라를 닮은 조형물이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 봤다. 뒤편 벽면에는 액자도 하나 걸려 있다. 뭔가를 부조(浮彫)로 새겨놓았는데 무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힌두교가 본디 다신교(多神敎)인 점을 감안하면 뭔가를 바라며 만들어놓은 신단(神壇)일지도 모르겠다.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요란스런 음악소리가 들리기에 봤더니 인도의 전통복장을 한 여성들이 뭔가를 머리에 인 채로 줄지어 가고 있다. 인도의 전통 축제인 디왈리(Diwali)’를 준비하기 위한 행사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힌두 달력으로 여덟 번째 달(Kārtika, 카르티카) 초승달이 뜨는 날을 중심으로 닷새 동안 열리니, 그레고리력으로는 10월쯤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디왈리는 집집마다 수많은 작은 등불을 밝히고 힌두교의 신들을 맞이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힌두교 전통 축제로, 힌두교의 부와 행운의 여신 락슈미, 죽음과 파괴의 여신 칼리(Kali), 최고신 비슈누(Vishnu)의 여덟 번째 화신인 크리슈나(Krishna) 등을 숭배한다. 디왈리는 홀리(Holi), 두세라(Dussehra)와 더불어 힌두교 3대 축제로 손꼽힌다.

 

 

가이드가 나눠준 입장권과 덧버선을 챙겨들고 동문으로 들어선다. 특이하게도 남자와 여자가 따로 줄을 서고 있다. 검문·검색의 편의를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타지마할은 경비가 아주 엄격한 편이다. 소지품은 물론이고 신체까지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예 주무르다시피 해가면서 검색을 한다. 나이프나 송곳, 연필 등 건물에 해가되는 도구는 일체 금지되며, 음식물 또한 반입을 막고 있다. 아무튼 검색을 마치고 나면 우린 타지마할의 영역으로 들어선 셈이 된다.

 

 

타지마할 남쪽의 정문까지는 화단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간다. 그러나 길 양쪽으로 회랑(回廊)이 지어져 있으니 이를 따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 아니면 투어를 마치고 되돌아 나오면서 이용해도 될 일이고 말이다.

 

 

 

 

붉은 사암(砂岩, sandstone)으로 지어진 회랑(回廊) 건물이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탓인지 무척 이색적이다.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의 눈에는 더욱 낯설었던 모양이다. 자꾸만 시멘트로 지은 건물이라고 우겨댄다. 자원공학(資源工學)을 전공했다는 것까지 들먹거려 보지만 가이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하긴 분명히 사암인 것을 어쩌겠는가. 아무튼 변화를 주어가며 만들어 놓은 회랑의 생김새를 눈여겨 봐가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잠시 후, 붉은 사암(砂岩)으로 지어진 정문(正門)에 이른다. ‘무케두아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사암 바탕에 흰 대리석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건물로, 타지마할의 여러 문들 가운데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이다.

 

 

정문의 앞은 널따란 광장(廣場)이 조성되어 있다. 이 광장은 앞과 옆으로 나있는 또 다른 출입문인 남문 및 서문과 연결된다.

 

 

 

 

정문인 아케두아르는 아치형의 문을 3개 만들고, 가운데 문에 또 다시 3개의 아치(arch)를 만든 다음, 가운데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또 문을 2층으로 만들고, 그 위 사방에 정자 형태의 차트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한다)를 설치했다. 가운데 지붕 위에는 작은 돔(dome) 11개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뒷면에도 11개가 있어 둘을 합할 경우 22개가 되는데, 이는 타지마할을 건설하는데 22년이란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광장의 한켠에 자리 잡은 거대한 노거수(老巨樹) 한 그루가 쉼터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주고 있다. 동남아 여행 중에 자주 만났던 나무인데 이 나무는 유난히도 더 굵다.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는 수많은 나무줄기들이 흡사 인간의 수염을 닮았다. 그래서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신성하게 보이는 이유일 테고 말이다.

 

 

 

정문 앞에 타지마할의 평면도(平面圖)가 그려진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가이드의 눈초리가 빛나는가 싶더니만 전체적인 윤곽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흡사 물을 만난 고기마냥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자잘한 것까지 빠짐없이 늘어놓는다. 타지마할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고 한다. 그 중앙에는 한 변이 305m인 정4각형의 정원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그보다 약간 작은 2개의 직4각형 구역이 있다. 남쪽 구역은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mosque, 예배당)이며 동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jawab, 영빈관)'이다. 모퉁이에 8각형 탑이 솟아 있는 높은 벽이 북쪽 구역과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울타리 밖에는 마구간과 경비병 숙소가 있다.

 

 

 

 

출입문을 통과하자 갑자기 눈이 훤해진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하얀 대리석 건축물이 눈앞에 펼쳐진다. 스위스의 영화제작자 베른하트르 베버(Bernard Weber)’가 이끄는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New7Wonders) 재단에서 새천년(AD 2000)을 기념하기 위해 인터넷 투표를 통해 뽑은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世界 七大 不可思議)‘에 여섯 번째로 이름을 올린바 있는 타지마할이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에는 좌우가 흐트러짐이 없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긴 수백 미터의 연못에 반영되는 데칼코마니(decalcomanie, 일정한 무늬를 종이에 찍어 다른 표면에 옮겨 붙이는 기법)’조차 한 치의 어김없이 대칭이라는 칭송을 들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저 균형 잡힌 대칭의 안에는 수많은 비대칭들이 스며있을 것이다. 종교와 언어, 인종 등 무구한 역사의 끝없이 이어지는 비대칭들 말이다. 아무튼 타지마할은 순백색 대리석의 조화가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어느 시인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오로지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한 남자의 숭고한 사랑으로 가득한 건축물이 아닐까 싶다. 남녀 간의 깊은 애정은 때로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는 인도의 타지마할도 세기적인 사랑이 탄생시킨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색의 진주’, ‘꿈의 궁전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낮에는 흰색으로 보이지만 아침에는 자줏빛, 황혼녘에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시시각각 보랏빛과 푸른빛 등 그 색채가 수없이 변한다고 한다.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단다. 문득 영국 출신의 작가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이 이곳을 방문한 뒤에 적었다는 후기가 생각난다. ‘순수한 모든 것, 성스러운 모든 것, 그리고 불행한 모든 것의 결정이다. 이 건물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로 타지마할을 짓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단을 쌓을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타지마할의 건설 부지가 강둑의 부드러운 모래 지반이라서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토대를 다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건축기술자들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와 쇠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건축법은 20세기에 이루어진 조사에서야 겨우 밝혀졌을 정도로 신묘(神妙)한 기법이었다. 그만큼 토목공학적으로도 수작이라는 얘기이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구조물을 벽돌과 나무 받침대에 박은 쇠테로 보강한 아치가 지탱하고, 우물을 이용하여 타지마할을 야무나(Yamuna)강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단다.

 

 

영묘(靈廟, Mausoleum)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룬다.

 

 

정문에서 영묘(靈廟, Mausoleum)로 가는 길은 정원의 한가운데로 난 수로(水路)의 양쪽으로 난 길을 따르면 된다. 하지만 정원의 양쪽 끝자락을 따라 에둘러서 가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이때는 좌우로 나있는 회랑(回廊)을 따르면 된다. 그리고 회랑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원으로 내려선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능묘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이 코스를 이용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타지마할의 정원은 무굴양식의 차르바그(char bagh)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차르바그4(char)의 정원(bagh)이란 뜻으로 천국의 정원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정원은 긴 변이 320m, 그리고 짧은 변이 300m인 직사각형인데, 4개의 정원 사이로 수로가 나있다. 가운데로 길게 판 수로는 코란에서 풍요로운 천국의 연못이라고 묘사한 카우사르(Kawthar)를 상징한단다. 원래 이 정원에는 장미와 수선화, 그리고 수많은 유실수들이 심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모습은 영국의 식민통치 이후 영국식 정원양식이 더해진 것이란다.(아래 사진은 수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만들어진 중앙 연못에서 바라본 정문이다)

 

 

후마윤의 무덤에서 시도된 사분정원(四分庭園)’이 타지마할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네모반듯한 정원을 십자형으로 교차되는 수로가 정확히 사등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맞다. 타지마할의 정원은 이슬람교의 낙원사상을 나타내는 사분정원(四分庭園)‘, 차르 바그(Char Bagh) 형식을 정확히 따른다. 네모반듯한 정원을 수많은 정사각형으로 쪼갠 후 그 사이사이에 수로(水路)를 내는 양식이다. 전체로 보건, 작게 쪼개 보건, 정사각형의 형태를 드러나게 만든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기하학적인 구도라 하겠다. 아무튼 네 개의 수로가 만나는 정중앙에는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네 개의 수로가 생명의 원천을 나타낸다니. 수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만들어진 중앙의 우물은 인간과 신이 만나는 영역쯤으로 여겨도 될 듯 싶다.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정사각형으로 단()을 쌓고 그 안에다 연꽃 수조(水槽)’와 분수(噴水)를 들어 앉혔다. 학창시절 책에서 보았던 그 연못이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책에서 봤던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연못의 물결 위에 타지마할의 건물 그림자가 비춰져야 하는데도 그러지를 않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찍었기에 그런 그림이 만들어졌을까? 어쩌면 드론(Drone)을 이용해서 촬영했는지도 모르겠다.

 

 

 

연못의 네 곳 가장자리에는 각기 하나씩의 의자가 놓여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다이애나 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의 왕세자빈이었던 다이애나가 1992년 타지마할을 방문했을 때 앉았던 의자라고 한다. 그녀의 유명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포토죤으로 소문나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중앙 연못이 있는 좌대에 오르면 사진에서만 보아오던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 펼쳐진다. 거대한 중앙 돔을 사이에 두고 4개의 작은 돔이 있고 기단(基壇)의 네 곳 끝에는 각각 미나레트(minaret)라고 부르는 첨탑이 자리하고 있다. 타지마할의 핵심은 완벽한 대칭과 돔과 아치가 보여주는 곡선미, 그리고 대리석 장식인 피에트라 두라를 꼽을 수 있다. 그중 완벽한 대칭을 확인해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참고로 영국 출신의 우리 세계의 70가지 경이로운 건축물(The seventy architectural wonders of our world)’의 저자 닐 파킨(Neil Parkyn)’은 영묘(靈廟, mausoleum)인 타지마할이 인도·이슬람 건축의 가장 완벽한 전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첫째, 타지마할은 샤 자한 가즈(80~82센티미터)’를 기준 단위로 삼아 측량함으로써 엄밀한 기하학을 구현할 수 있었고. 둘째, 대칭구도를 일관적으로 관철시켜 중앙 축을 중심으로 한 좌우동형 속에서 각 부분들을 통합했다. 셋째, 자재·형태·색채에서 아주 세밀한 장식에 이르기까지 질서를 부여했다. , 누구나 감탄을 금치 않는, 좌우대칭의 균형미와 세련미가 넘치는 빼어난 예술적 건축물을 구현한 것이다.

 

 

중앙 연못에서 좌우로 뻗어나간 수로(水路)의 양쪽 끄트머리에는 똑 같은 모양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 지도에는 나우밧 카나(naubat khana)’라고 적혀있는데 무슨 용도로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혹시 델리 소재의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인 붉은 요새(Lal Qalah)’에 있는 나우밧 카나와 같은 용도로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황제나 왕자들이 지나갈 때 음악을 연주하던 장소로 말이다. 그나저나 지금은 동쪽은 휴게실(바로 아래 사진), 그리고 서쪽은 박물관(그 아래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앞서 걷고 있던 가이드가 뭔가를 가리킨다. 네 개의 50미터짜리 미나레트(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를 자세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들은 후에 바라본 미나레트는 바깥쪽으로 약간씩 휘어져 있다. 원근법적(遠近法的) 효과를 고려해서 건축한 탓이란다.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지진(地震)을 대비한 조치인데, 그 결과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가운데의 영묘(靈廟) 쪽으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단다.

 

 

영묘(Mausoleum)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왼편에 있는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에 들러보기로 한다. 영묘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똑 같은 건물이 하나씩 들어섰는데 이 가운데 왼편이 모스크이다. 영묘와 모스크가 있는 기단(基壇)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만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실내도 아닌 실외에서까지 맨발로 걷든지 아니면 덧신을 신고 구경하도록 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우린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까 가이드가 입장권과 함께 나눠주었던 덧버선을 꺼내 신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모스크는 우선 색깔과 감촉에서부터 옆에 있는 영묘와 확실히 구분이 된다. 순수한 하얀색 마크라나 대리석으로 지은 영묘와는 달리 붉은 시크리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에는 대리석을 두른 돔(dome)과 아키트레이브(architrave, 문틀과 벽면 사이, 창문틀의 테두리에 치장을 목적으로 대는 틀)가 있으며 일부 표면이 단단한 돌(pietra dura)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부는 둘러볼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이슬람 복장을 한 사람이 나가라며 큰소리로 외쳐댔기 때문이다. 예배시간만 아니면 입장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바닥에 반쯤 누운 자세로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광경은 불쾌하기까지 했다.

 

 

붉은 사암으로 된 천정에는 아라베스크(arabesque, 아라비아 사람들의 창의로 이루어진 장식무늬의 일종)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곡면(曲面)인데도 불구하고 빈틈없이 기하학적으로 채워져 있는 게 신기하다. 다른 공간들은 캘리그래피(calligraphy) 등의 기법으로 채워져 있다.

 

 

 

타지마할을 측면에서 본 모습, 높이가 75미터, 돔 부분의 무게만 13000톤 이상 나가는 타지마할은 건축 공학의 기적을 이룬 것은 물론 이슬람과 힌두교 문화,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해 당대 최고의 예술적인 완성도를 이룩한 건축물이다. 저 무덤의 주인공인 뭄타즈 마할은 한 남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의 증표를 받았다고 봐야 하겠다. 아무튼 가까이 접근한 탓인지 돔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 초승달까지 눈에 들어온다.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이슬람의 상징이며 진리의 시작을 의미한다. 즉 무하마드가 최초로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함께 떠있었고. 그때부터 하느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란다.

 

 

이젠 영묘의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이다. 영묘와 모스크 사이에 있는 사각형의 얕은 수조(水槽)인 반사지(反射池)를 스쳐 지나면 영묘의 전면부로 연결된다. 영묘에 가까워지자 가슴에 와 닿는 뭔가가 느껴진다. 평소의 내 생각과 같은 의미를 지닌 공간에 들어섰다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집사람을 향한 내 사랑을 싯귀(詩句)로 표현해 본 일이 있었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지라도 영원히 사랑하고 싶고’, 한걸음 더 나가 천만 번 윤회(輪廻)를 거듭하더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부부간의 사랑을 아름다운 건축물로 표현한 곳이 바로 이곳 타지마할인 것이다.

 

 

영묘 정면은 기하학적 형태들이 차분하게 통일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대로 피에트라 두라기법으로 대리석 안에 반질반질한 장식용 돌들을 연결부 없이 집어넣은 플로렌스 모자이크와 반석에 새겨진 보주들은 페르시아의 모티프임에도 불구하고 인도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능묘의 출입문 주위는 아름다운 문양들로 가득하다. 흰색 대리석에 양각기법으로 꽃문양을 새겨 넣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상감기법으로 색상이 있는 꽃문양으로 벽면을 채워 놓았다. 출입문의 바로 옆 기둥에 그려진 문양들은 아마 코란 구절을 적어 놓았을 게다.

 

 

3면이 개방되어 있는 이완(Iwan) 양식출입구의 천장은 의외로 소박하다. 하얀색 마크라나(makrana, 인도 북서부 라자스탄 지방에 소재한 대리석 광산) 대리석으로 단순하게 마감처리 되어 있을 따름이다.

 

 

네 개의 작은 정자와 연결된 중앙홀로 들어가면 유골(遺骨)이 없는 가묘(假墓)가 있다. 중앙에 뭄타즈 마할의 석관(石棺), 그 왼쪽에 샤 자한의 석관이 놓여 있는 이 가묘는 지하에 있는 진짜 무덤의 도굴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진짜 유해는 한 층 아래의 지하묘에 안장되어 있다. 원래 샤 자한은 야무나강 건너편에다 타지마할 같은 자신의 묘를 검정 대리석으로 건설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견고한 황금다리로 타지마할과 연결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거창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말년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 뒤 숨을 거둘 때까지 유폐(幽閉)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시신을 영묘 중앙에 있는 어머니 석관 왼쪽에 안치했다. 이들의 석관을 장식하고 있다는 천국을 찬미하는 코란의 경구는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조명시설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지마할은 정원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그런데 그 대칭을 깨뜨리는 유일한 공간이 이곳 가묘이다. 원래는 중앙에 뭄타즈 마할의 석관을 놓아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었는데, 계획이 없던 샤 자한의 관이 추가됨으로써 그 대칭을 깨뜨려버린 것이다.

 

 

석관(石棺)은 보석을 넣어 정교하게 가공한 덩굴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명(照明)이 없으므로 빛이 투과되도록 정교하게 새겨진 병풍석이 공간을 신비스럽게 만드는데 빛의 흐름을 따라가면 가묘 주위에 박혀 있는 수많은 준보석들이 영롱하게 반짝거려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타지마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이는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는 기법이다. 타지마할 내외벽을 싸고 있는 대부분의 문양들은 식물과 꽃이다. 이슬람교 특성상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들은 모두 우상으로 취급되어 금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건 그렇고, 무덤을 지키는 관원(官員)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더니 안으로 들어와서 직접 보겠냐고 물어온다. 불도 켜주겠단다. 남들이 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게 부담스러워 거절을 했지만 응하지 못한 아쉬움은 꽤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그런 좋은 기회가 두 번 다시는 찾아올 것 같지 않아서이다.

 

 

능묘를 둘러보고 북쪽 피쉬타크를 통해 밖으로 나가면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은 타지마할의 기단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그 앞에 난간이 처져 있다. 난간 너머로는 야무나강이 동서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사실 타지마할은 현재처럼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정원을 지나 들어갈 수도 있지만, 북쪽 야무나강을 건너 바로 들어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왕족들은 강 건너 메탑 박(Mehtab Bagh: 달빛 정원)에서 놀면서 타지마할의 야경을 즐기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간에 서면 타지마할의 완성을 위해 물길까지 돌려놓았다는 야무나(Jamuna) 이 흐른다. 펼쳐지는 그림의 한쪽 귀퉁이에는 붉은 사암의 웅장한 아그라성이 웅크리고 있다. 저곳에 유폐되었던 샤 자한이 애달프게 바라보면서 느꼈을 그리움의 거리만큼이나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진다.

 

 

 

 

 

 

모든 출입문들은 이슬람 건축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완(Iwan)’, 3면이 벽이고 마당으로 향한 쪽만 끝이 뾰쪽한 아치형으로 개방되어 있는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치(arch) 구조물은 기둥이나 벽 위에 반원 형태로 만드는데, 이완은 지지하는 기둥이나 벽을 따로 세우지 않고 양 옆이 평평한 타원 형태로 상층부에서 바닥까지 연결된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역별로 전통적인 장식 요소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라베스크(arabesque)의 추상무늬가 새겨진 백색 타일을 이용하여 장식하고, ‘캘리그래피(calligraphy)’와 일종의 상감기법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을 사용해 각종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로보아 페르시아지역의 유형을 따르고 있지 않나 싶다. 그물망 모양으로 만들어진 창문 또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기단부를 따라 능묘를 한 바퀴 돌아본다. 이곳도 역시 부조(浮彫)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피슈타크(Pishtaq, 이완을 둘러싸고 있는 직육면체 형태의 구조물)’, ‘캘리그라피(calligraphy)’ 등이 예술성을 더해준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아름답고 훌륭한 건축물이다. 그리고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참고로 타지마할은 모자이크의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피에트라 두라 기법은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후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은 것을 말한다.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색색의 이 돌들은 순백의 대리석과 어우러져 오묘한 빛을 발하며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고 한다. 문양(紋樣)은 주로 꽃을 표현했는데 이는 이슬람에서 동물이나 신상의 조각을 금지하기 때문이란다.

 

 

이완의 주위나 문틀의 주위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에 따라 인물과 동물을 형상화하지 못하자 대안 예술로 코란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캘리그래피(calligraphy)’ 기법을 활용했다. 이슬람 캘리그래피는 이슬람 예술 중에서도 가장 숭고한 장르로서 아라베스크(arabesque, 아라비아 사람들의 창의로 이루어진 장식무늬의 일종)의 기하학 문양과 함께 어우러져 이슬람 예술만의 고유한 특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 서체인 쿠파체(Kufic script)를 비롯해 다양한 서체가 있다. ! 하마터면 빼먹을 뻔 했다. 대리석에 양각으로 표현한 꽃과 식물들 말이다. 이들은 벽에 상당히 크게 양각되어 있고, 그것이 벽을 따라 나란히 서 있기 때문에, 건물의 아랫부분이 마치 꽃밭처럼 느껴진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아까 영묘에 들어가기 전에 들렀던 모스크와 똑 같이 생긴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동서(東西)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아니 타지마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 건물도 붉은 사암으로 만든 전형적인 무굴양식 건축이다. 이곳에도 역시 피에트라 두라 기법과 양각의 조각 등이 눈에 띈다. 그리고 기둥과 피슈타크(Pishtaq)’에도 장식이 있다. 타지마할의 유명세에 밀려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지만 이곳 역시 대단한 건물임에는 분명이다.

 

 

회랑을 따라 되돌아 나오는 길에 나뭇가지 사이로 능묘가 나타난다. 백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건물은 지면에서 6~7미터 높은 기단(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기단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96미터인 정사각형이라고 한다. 영묘 건물 자체의 크기는 56.7미터의 정사각형이고 바닥 면에서 돔의 정점까지는 57미터에 달한다. 이중의 돔(양파껍질처럼 안쪽 덮개 위에 바깥 덮개가 있는 돔)은 페르시아 양식 그대로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벽돌에 흰 대리석을 씌운 것이란다. 벽돌은 당시 널리 사용하던 표준 크기인 19×12.5×3센티미터의 것을 사용했다. 벽돌을 주로 긴 쪽으로 쌓았지만 석회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른 다음 짧은 쪽으로 쌓기도 했다. 둥근 천장은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르고 동심원의 고리들을 만들어 쌓았다. 이 건축기법을 통해 내부에 강화벽을 세우지 않고도 반구형의 내부 돔과 공 모양의 외부 돔을 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외부 돔 위에는 9미터 높이의 작은 청동 뾰족탑을 얹었고 돔 전체에는 금박을 입혔다. 돔은 이스탄불 출신의 이스마일 에펜디(Ismail Effendi)’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문을 빠져나오니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 어차피 아까 버스에서 내렸던 장소까지 되돌아 나가야하니 한번쯤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옛날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차에 앉아 옛날 타지마할에서 일어났을 수많을 일들을 상상해보며 말이다.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공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설계자는 눈을 뽑아버렸단다.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을 만들려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란다.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겠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으면 그런 괴담까지 생겨났겠는가. 하지만 그보다는 천하의 황제라도 사랑이 없을 경우 행복 또한 존재할 수 없음을 가슴에 새겨보자.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자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배우자의 존귀함을 결코 잊지 말자.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서도 나오겠지만, 그것을 보고 즐기는 사람에게서도 나오는 법이다. 비록 이곳 타지마할은 서글픈 사랑이야기로 끝을 맺지만 우린 행복한 사랑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자.

 

 

 

에필로그(epilogue),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명칭이 붙을 만큼 무덤이라기보다는 성스러운 신전 같은 느낌을 준다. 이슬람 왕조의 황제들이 신전을 짓는 데 붉은색 사암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타지마할은 백색 대리석을 이용했는데, 이는 힌두교의 전통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부와 외부의 벽면은 보석과 준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이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런 화려함 때문에 끊임없는 약탈의 대상이 되어버렸으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값비싼 보석들은 도굴꾼과 침략자들에 의하여 사라졌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의 약탈은 특히 심했다고 한다. 거대한 돔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떼어내고 구리로 덮었으며, 은으로 된 출입문 대신 청동문을 달아놓았을 정도란다. 독립한 뒤 타지마할은 옛 모습을 되찾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보석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의 박물관과 개인저택의 문화공간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가슴이 싸해진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36년 동안이나 침탈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우리네의 현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우리네 후손에게만은 그런 아픈 역사를 물려주지 않도록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해보면 어떨까 싶다.

 

여행지 : 인도 북부

 

여행일 : ‘17. 9. 20() - 24()

여행지 :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

 

일 정 :

9.21() : 아그라(타지마할, 아그라성, 시칸드라 악바르대왕의 묘)

9.22() : 자이푸르(암베르성, 잔타르 만타르, 하와마할, 나하가르 요새)

9.23() : 델리(꾸툽탑, 인도문, 바하이사원, 간디의 화장터 라지가트)

 

여행 첫째 날 : 아그라(Āgra)의 시칸드라 묘역

 

특징 : 인도(Republic of India) : 힌두어로는 Bhārat 또는 Bhāratavarsha(전설적 현인군주인 '바라트의 땅'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은 면적을 갖고 있으며, 인구는 13억 이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북쪽과 북동쪽으로는 중국, 북쪽으로는 네팔과 부탄, 서쪽에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동쪽에는 벵골 만, 남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와 맞닿아 있다. 인도는 매우 다양한 인종적 혈통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도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인도 대륙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 혹은 그 이후의 침입자들의 혈통이 뒤섞인 데서 기인한다. 공식 언어는 힌두어와 영어이고, 벵골어·카슈미르어·마라타어·우르두어 등이 포함된 다른 인도-유럽 언어들, 드라비다어, 그리고 수백 개의 다른 어군을 사용한다. 종교는 인도가 발상지(發祥地)인 힌두교(80이상)와 시크교(1%), 불교, 자이나교 외에도 이슬람교(11.4)와 그리스도교(1%) 등 다양하다. 화폐단위는 루피(rupee/Re)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는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일찍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로, 기원전 2500년 무렵에 이미 인더스(Indus)강 유역에 청동기 도시문명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 무렵에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흥기하는 등 인도의 특색 있는 문화와 사회형태가 만들어졌다. 기원전 317년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해 강대한 상비군과 관료체제를 갖춘 마우리아(Maurya)제국이 인도의 통일제국을 이룩하였다. 이어 4세기 전반에 출현한 굽타(Gupta)제국이 북인도 일대를 지배하였고, 812세기에는 무슬림(Muslim) 세력들에 의한 무슬림왕조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인도의 정치적 통일과정은 1526년 무굴(Mughal)제국 성립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무굴제국의 건설은 제3대 악바르(Akbar, 재위 15421605)에 의해서 행해졌다. 그는 주위의 세력들을 무찌르고 무굴 세력을 확립하는 동시에 황제의 지위와 권력을 구축하였다. 무굴제국은 그 뒤 약 150년 동안 번영을 누렸으나, 18세기가 되면서 모든 지방의 세력들이 독립해서 분립하거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침략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1498년 인도를 향한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수 세기에 걸쳐 계속된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 간의 무역 경쟁을 가져왔다. 18~19세기에 걸친 영국의 지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로 이어졌고, 1858년 대영제국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모한다스 간디(Gandhi,M.)’1947년에 영국의 지배를 종식(파키스탄과 분리해서 독립)시키는 데 기여한 이후, ‘자와할랄 네루가 인도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와 손자인 라지브 간디까지 삼대에 걸쳐 국가의 운명을 이끌게 된다. 물론 선거에 의한 집권이다. 우리나리와는 1962년의 영사관계를 거쳐 1973년 대사급으로 격상되었다.

 

아그라(Āgra) :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슈(Uttar Pradesh) ()’에 있는 도시로 델리의 남쪽 200km, ‘야무나 강(Yamuna River)’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16세기 초 로디왕조(Lodi Dynasty, 1451-1526)2번째 왕 시칸다르 로디(Sikander Lodi, 1489-1517 재위)’가 세웠으며 무굴왕조(Mughal dynasty, 1526~1857)3번째 왕 아크바르 대제(Akbar the Great, 1556-1605 재위)’가 강 왼편에 있던 도시를 오른편으로 옮기면서 무굴제국의 수도(1556-1658)가 되었다. 그의 아들 자항기르(Jahāngir, 1605-1627 재위)와 손자 샤 자한(Shāh Jahān, 1628~1658 재위)‘은 항상 여기서 살지는 않았으나 다수의 이슬람 건축물들을 건설함으로써, 아우랑제브(Aurangzeb, 1658~1707 재위)가 델리로 천도(遷都)할 때까지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8세기 말 자트족·마라타족·무굴인과 괄리오르의 통치자들에게 잇달아 점령당했으며 1803년에는 영국에게 넘어가게 된다. 한편 아그라는 타지마할(Taj Mahal)‘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 자항기르 마할(Jahangir Mahal)‘과 아크바르 황제가 건설한 흰 대리석의 진주사원(Moti Masjid)을 포함하고 있는 16세기 성채가 있다. 또한 대사원(Jami' Masjid)과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잘 알려진 훌륭한 능묘도 있다. 북서쪽 시칸드라(Sikandra)에는 아크바르의 무덤(Tomb of Akbar the Great)‘이 있다.

 

 

 

주차장에 내리면서 시칸드라 (Sikandra)’의 투어가 시작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유적지답게 널찍한 주차장을 조성해 놓았다. 시칸드라는 무굴제국의 세 번째 왕인 악바르(‘아크바르라 읽기도 하나 이하 악바르라 한다) 대왕의 무덤(Tomb of Akbar the Great)’이다. 무굴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영묘(靈廟, Mausoleum). 정식 명칭은 악바르 마우솔레움(Akbar’s Mausoleum)‘이다. 하지만 아그라의 타지마할에서 북서쪽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칸드라 공원의 안에 들어있다고 해서 현지에서는 시칸드라(Sikandra)‘라고 불린다.

 

 

 

 

 

 

매표소 앞에서 가이드의 안내가 시작된다. 인도에서 대학원까지 나왔다는 그는 한국에서 시집 온 형수의 권유로 한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체험을 겸한 생활언어를 읽힌 셈이다. 거기다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 연수까지 마쳤다고 한다. 문화재에 얽힌 비사(祕史)들까지 능수능란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매표소 앞에 오래 묵은 건축물 하나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고 본다. 하지만 누가 어떤 용도로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가이드의 답변을 듣고도 정리를 하지 못했으니 큰 의미를 둘만한 가치는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묘역(墓域)으로 들어가는 길은 제법 길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풍스런 옛 건축물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기 때문이다. 하긴 사치를 좋아하지 않던 왕의 성정에 따라 검소하게 만들어진 무덤보다도 오히려 무덤 앞의 정원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알려졌을 정도이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얼마쯤 걸었을까 진행방향에서 왼편으로 조금 비켜난 곳에 화려한 건축물 하나가 나타난다. 건물의 옆으로는 높은 담장을 쌓아 안에 있는 묘를 보호하고 있는 형세이다. 아무튼 이 건축물은 외관(外觀)만 놓고 볼 때에는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를 쏙 빼다 닮았으나 실제로는 문(, gate)이란다.

 

 

 

 

시칸드라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네 개로 동···북 방향으로 나있다. 그러나 관광객들은 오직 남문(南門)만을 이용할 수 있으니 참조한다. 나머지 세 개의 문은 원래부터가 실제 출입구가 아닌 숙소용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란다. 쉽게 말해 가짜 대문인 셈이다. 이 네 개의 문들은 각각 다른 종교를 상징하는 형태로 독특하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와 화합을 추진하는 등 타 문화에 관용적이었던 악바르 대제의 마지막 안식처답게 그의 종교관이 건축 양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남문(south gate)은 거대한 이완(Iwan, 이슬람 건축에 표현되는 거대한 아치 형태의 출입구로 페르시아 지역의 모스크와 광장, 궁정 건축에서 볼 수 있다)의 형태를 보이며 옥상의 각 모서리에는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전형적인 이슬람양식의 첨탑(尖塔), 즉 미나레트(minaret, 이슬람 건축에서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탑)가 높게 세워져 있다. 그 숫자가 넷인 걸로 보아 왕()이 지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5년 전쯤엔가 이스탄불에 출장 갔을 때 모스크들을 안내해주던 터키 상공회의소직원이 알려준 정보인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이완(Iwan)은 앞뒷면 모두 화려한 문양(紋樣)으로 장식되어 있다. 출입구 바로 근처는 꽃무늬 장식, 그리고 그 주위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둘러싸고 있다.

 

 

 

 

무덤의 정문에 남아있다는 황제의 마지막 안식처를 암시하는 문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에덴의 가든이다. 영원히 머물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다.’라는 뜻이라는데 도대체 어디에다 적어 놓았는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글씨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힌두어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중앙 아치의 내부는 미랍(mihrab, 이슬람교에서 설교자가 회중 앞에 서는, 벽 중앙에 움푹 들어가 비어있는 공간) 형태로 되어 있다. 화려한 외관에 비해 소박하기 짝이 없는 내부가 특히 눈길을 끈다.

 

 

대문을 들어서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정원 중앙부분에 묘() 건물이 있다. 대문에서 묘까지는 널따란 길로 연결된다. 양편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길의 한가운데에는 수로(水路)가 나있다. 양쪽 가장자리에도 보인다. 악바르의 묘가 큰 규모로 만든 사분정원(四分庭園)’의 중앙에 건설되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이슬람교의 낙원사상을 보여주는 사분정원의 특징이 네모반듯한 정원을 십자형으로 교차되는 수로가 사등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사분정원은 후마윤 묘건물의 사분정원과 함께 무굴 정원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중간쯤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종횡으로 배치된 좁은 수로(水路)가 교차되는 곳이다. 이 또한 사분정원(四分庭園)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사분정원(四分庭園)의 네 개로 갈라지는 수로를 생명의 원천이라고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그 수로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이 연못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영역쯤으로 봐도 되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묘() 건물은 의외로 소박한 분위기다. 악바르가 후대 인도인들로부터 대왕이라는 칭호(Akbar the Great)를 부여받았을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임을 감안할 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던 왕의 성정에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왕의 무덤이 입구에 해당하는 대문보다도 더 검소한 외형을 보이기에 거론해봤다. 아무튼 능묘(陵墓)의 공사는 악바르 자신이 시작했으나, 완공은 1613년 그의 아들 자한기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와 인도 양식을 융합시킨 무굴 건축양식의 건축물로, 이는 악바르가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했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관용은 각각 다른 종교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설계된 네 개의 문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아무튼 이 지방의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을 병치시킨 시도는 새로운 건축 방식이다.

 

 

()3층으로 지어졌다. 1층은 1변이 약 97m의 사각형이며 4면 중앙에는 높은 아치형 대문이 있고 그 좌우에는 5개의 아치가 줄지어 서 있다. 모서리 상부에는 8각형 정자가 설치되었다. 중앙에 있는 아치형 대문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2층은 1변이 56m의 사각형이며 1층 중앙에 있는 아치형 대문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에는 적색사암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3층은 갑자기 변하여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악바르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인 자항기르 황제가 이 부분을 만든 까닭이라 생각된다. 최상층은 회랑식으로 만들고 중앙에 특이한 묘석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의 건설공사는 기공한 후에 20년이 걸렸으며 완성된 것은 1613년이다. 이 묘 건물은 유례가 없이 웅대하며 특이한 건축물이나 남성적인 웅장함과 화려하고 섬약한 표현을 함께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이다. 악바르 황제 시대의 건축양식은 서방의 이슬람교적인 요소보다 오히려 힌두교적인 인도의 전통적 건축양식 요소가 많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악바르 황제의 정치적인 이념이 종교적 및 문화적 면에서 동서의 융합과 조화를 중요시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 시대의 건축에는 적색사암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흰 대리석은 특히 강조할 부분에만 사용되었다. 색돌을 상감하여 장식하는 수법은 아직 많이 발전되지 않았다. 중앙에 높은 돔은 발보스(balbous, 마늘꽃봉오리) 형태로 만들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건설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던 악바르 대제는 자신의 무덤도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그가 건설한 다른 건축물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사암에 대리석 상감 기법으로 장식되었고, 내부는 벽화로 꾸며져 있다. 악바르 대제의 유해는 지하 1층에 안치되어 있다. 무덤의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만 한다. 왕을 알현하려는 것이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게다.

 

 

 

 

아치(arch)형의 천장은 그물형태의 무늬를 띈다. 이는 리브(rib, 서양 건축용어로 늑골이라는 뜻)의 구조적 이용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악바르 대왕이 영면(永眠)하고 있는 장소로 가려면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야만 한다. 경사로가 지하층의 묘실로 연결되는데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둡다. 하지만 걷는 데는 조금도 부담이 없다. 계단 등 어둠의 천적들이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드디어 무덤의 안이다. 한 가운데에 석관(石棺) 하나만 놓여있을 뿐 단조로운 풍경이다. 석관의 앞에다 1불짜리 지폐를 놓고 두 손을 합장했더니 관을 지키고 있던 이슬람 복장의 사람이 코란을 읊조려 준다. 꽤나 큰 소리인데 읽는 게 아니라 흡사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참고로 석관의 주인인 악바르(Akbar the Great, 1556-1605 재위)‘는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는다.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였던 악바르 대제는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아소카(Ashoka) 과 함께 후대 인도인들에게 대왕이라는 칭호(Akbar the Great)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정복 전쟁으로 인도의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자인교 등 종교 대통합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성군(聖君)으로 존경을 받는다.

 

 

밖으로 빠져나오면 또 다른 석관(石棺)들을 만나게 된다. 묘로 들어가는 출입문 옆의 방들에 보셔놓았는데 악바르 대왕의 왕비와 두 딸의 유해가 아닐까 싶다.

 

 

 

 

건너편에 정문인 남문(南門)이 우뚝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묘역의 본전(本殿)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전의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악바르가 그의 결함을 채우기 위해서 예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는데 이를 말이겠는가. 그렇다면 그의 결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악바르는 글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후세 인도인들로부터 성군으로까지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임을 감안하면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밝혔듯이 묘역은 널따란 공원(公園)의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잘 다듬고 가꾼 탓인지 무척 아름다운 공원이다. 야자수가 펼쳐진 넓은 부지에서 사슴과 새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풍경은 야외 동물원을 연상시킨다. 특히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다가가는 관광객들까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들이 흡사 사파리(safari) 투어에라도 따라나선 느낌이다.

 

 

 

 

하룻밤을 머물렀던 아마르호텔(Amar Hotel)

4층 건물에 60개 정도의 객실을 갖추었으니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규모이다. 깨끗하면서도 널찍한 객실에다 칫솔과 치약을 제외한 다른 일회용품은 다 비치되어 있다. 그리고 아침과 저녁식사도 괜찮은 편이었다. 몇 가지만 추려서 먹기는 했지만, 향신료가 조금만 들어가도 먹지를 못하는 내 입에까지 맞을 정도였으니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길들여진 음식들을 내놓지 않았나 싶다.

 

 

에필로그(epilogue), 악바르는 불과 13세에 무굴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당시의 무굴 제국은 여러 가지 위험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악바르가 치적을 이루는데 첫 번째 공로자는 바이람 칸(Biram Khah)’이었다. 그는 무굴 인은 아니었지만, 무굴의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노련한 정치인이자 유능한 장군이었다. 4년에 걸친 그의 보살핌으로 어린 악바르는 초기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무굴 제국의 위치를 북인도에서 확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악바르에 의해 살해된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후 40년 동안 제국은 악바르의 손에 좌우된다. 무굴 제국이 인도 대륙의 절반을 지배하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인도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였다.

 

무굴은 단순한 제국이라기보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이는 어느 누구보다도 악바르의 업적에 기인한다. 1605년에 죽을 때까지 악바르는 북인도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였고, 데칸과 벵골 만, 아라비아 해에 이른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악바르는 서북쪽에서 용맹스러운 병사들을 언제나 끌어들일 수 있었으며, 벵골의 풍부한 자원과 중동과의 무역에서 얻은 수익 등으로 안정된 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악바르의 업적은 소수의 외국인 집단(무슬림)의 지도자로서만 있지 않고, 모든 힌두 인들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일이다. 악바르는 힌두 인들을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대했다. 더욱이, 악바르는 자이푸트의 힌두 공주와 결혼하여 그의 자손들에게는 라지푸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그 밖에 각 지역의 라지푸트 족장은 자치권을 행사하였으며, 그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무슬림 귀족들과 동등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악바르는 무슬림 국가에서 비무슬림 교도가 납부하는 세금인 지즈야(Jizya) 제도도 폐지하였다. 이렇게 악바르는 결혼 정책, 회유와 교섭, 제휴 등의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힌두의 여러 세력을 무굴 제국으로 흡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악바르의 또 다른 업적은 관료제적(官僚制的) 집권 지배(集權支配)의 조직화였다. 그것은 바로 만사브다르(Mansabdar) 제도에 의해 수행되었다. 위계(位階)에 따라 지방 행정을 관할하는 관료들을 총칭하여 만사브다르라 불렀는데, 전국 각지에 퍼져서 황제의 눈과 귀의 역할을 했으며, 제국 행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행정 관료임과 동시에 군사령관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악바르의 관료 체제는 군정일치(軍政一致)’적 성격이 강했다. 만사브다르들의 지위는 휘하의 병사들의 수에 따라 결정되었다. 10명에서 5,000명까지 거느리는 지위는 모두 33등급으로 나누어졌는데, 그중 5,000명을 거느리는 장군은 판츠-하자리(panch-hazari)라 불리며, 국가의 높은 관료로서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지위는 세습적이지 않고 각자의 공로에 따라 지명되고 승진되었다. 야망에 찬 젊은 귀족들과 사회 제반 분야의 젊은이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었던 셈이다. 그로인해 젊은이들은 폭동과 반란, 약탈 등으로 부귀영화를 구하는 대신에, 국가의 건설적인 사업에 젊음을 불태움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마지막 업적은 인도에 제국의 관념을 재창조한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악바르는 제국의 신성한 관념을 부활시켰다. 그래서 악바르 통치 이후 회화에 나타난 무굴 제국 황제의 머리에는 신령스러운 광배가 그려지게 된다. 그는 종교적 절충주의를 정책에 반영하였다. 악바르는 힌두교와 무슬림을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묶는 것이 불가능하며, 어느 한 종교인을 다른 종교인으로 영원히 개종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전제 군주의 의식(儀式)을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그에게의 복종은 신성한 일이며, 불복종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하여 그 자신을 반() 신성시하였다.

 

악바르가 뛰어난 인격의 소유자임은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그는 문맹(文盲)이었지만, 왕성한 기억력과 날카로운 지혜의 소유자였다. 그는 서기를 통해서 사건들을 기록하게 했으며, 언제나 그 내용들은 대리인을 통해서 그의 귀로 들어갔다. 그는 힘과 용기를 지닌 훌륭한 장군이었다. 동시에 신하들로 하여금 충성심을 불러일으키고, 적으로부터도 그에게로의 존경심을 끄집어내는 인간적이고 도량이 깊은 매혹적인 인물이었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셋째 날 오후 : 라오스 불교의 성지, 탓 루앙(Pha That Luang)

 

특징 : 위대한 불탑이라는 의미를 가진 탓루앙은 16세기 셋타티랏(Setthathirat)왕 시대에 건축된 황금색 부처의 사리탑으로 도심으로부터 4km거리의 타논 탓 루앙(Thanon That Luang)’의 끝, 13세기 초에 세워진 크메르사원 안에 위치한다.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가 파견한 불교 선교사들이 처음 세웠으며 13세기에 크메르 형식의 불교 사원이 세워졌다. 16세기에 현재와 같은 건물이 세워졌는데 이는 13세기에 지어진 건물을 바탕으로 세운 것이다. 19세기 시암(Siam, 현재의 태국)의 침공으로 무너지기도 했지만 1935년 복원되었다. 탑의 바닥은 신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각 층을 돌아가면서 통로가 있다. 각 층은 계단으로 연결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을 기호화한 것들이 층마다 다른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라오스 전통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불교도와 라오스 독립에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라오스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물로 여겨진다.

 

 

 

버스는 우릴 널따란 광장(廣場)에다 내려놓는다. 반대편 끄트머리가 아스라하게 보일 정도로 너른 광장이다. 라오스 사람이라면 평생에 한 번은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고 알려질 정도로 성대한 탓루앙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하더니, 그 축제를 위해 조성된 모양이다. 한 해 축제의 마지막임을 알리는 탓루앙축제는 일주일간 준비하고 왓시무앙(Wat Si Muang)’에서 출발한 행렬이 탓루앙에 도착할 즈음이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순례자들은 촛불을 들고 탑돌이를 하며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 광장은 물의 축제인 송칸(Songkan)축제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구정(라오스의 구정은 양력 413일이다.)에 열린다고 해서 삐마이(Pi Mai) 축제라고도 불리는데, 이곳 라오스는 우리의 구정을 삐마이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Pi)는 년()’이고, ‘마이(Mai)는 새롭다라는 뜻이니 우리의 구정과 그 뜻을 같이 한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이 삐마이가 되면 5일간 휴가를 즐기는데 3일 간의 물축제(Songkan)를 지내며 1년간의 액운을 떨어내게 된단다. 연휴 첫째 날은 낡은 송칸(설날)이 떠나는 날로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둘째 날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휴식의 날’, 셋째 날은 새로운 송칸이 오는 날로 아홉 개의 절을 방문해 불상에 물을 뿌리는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불상을 흐른 물을 다시 받아 가족들에게 물을 뿌리면서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데, 이후에는 불특정 다수에게 물을 부어주며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 라오스의 물 축제이다. 참고로 이 축제는 동남아의 여러 나라에서 열리는데 태국에서는 송끄란’, 그리고 미얀마는 틴잔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라오스인들의 자부심이라는 탓루앙(That Luang)’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성당시 450kg의 황금이 들어갔다는 탓루앙(That Luang)’은 탑이라는 뜻의 (That)’과 위대하다는 루앙Luang)’의 합성어로서 위대한 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라오스 불교라오스 주권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 여기는 불교사원으로 황금사원이라 불리기도 하며 매년 삐마이축제, 탓루앙 축제 등 다채로운 축제가 열린다.

 

 

사원의 입구에는 탑을 건축한 셋타티랏왕(Sethathirat, 1547-1571)’의 동상이 있다. 포티사랏(Phothisarat, 1520-1547)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란쌍(Lan Xang)왕국의 왕 세타티랏(Sethathirat, 1547-1571)은 버마의 침략을 피해 1563년에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옮겼다. 라오스 불교의 상징인 황금색의 화려한 탓 루앙(That Luang) 사원이 건설된 것이 이 때였으며, 애머랄드 불상도 비엔티안에 안치되었다. 그는 버마에 의해 아유타야가 점령되는 등 따이 세계가 모두 패배하고 있을 때에도 그의 왕국만은 버마의 공격을 이겨 내며 독립을 유지해 낸 역량이 돋보인다. 위기에 처한 아유타야에 지원군을 이끌고 출동해 버마와 싸우고, 버마의 역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릴 때는 게릴라전까지 구사해 가며 끝까지 저항했다는 그는 라오스인들에게 영웅적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사려 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비록 수도는 비엔티안으로 옮겼지만, 이전 수도에 남아 있을 주민들의 감정도 고려하여, 프라방 불상은 그곳에 남겨두었다. ‘썅 동 썅 통(Xiang Dong Xiang Thong)’으로 불리던 이 도시의 이름이 프라방 불상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루앙푸라방'으로 바뀌게 된 연유이다. 왓 썅통(Wat Xiang Thong) 사원을 건설할 것도 이 도시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탑의 왼편에 아름다운 사원(寺院) 하나가 보인다. ‘왓탓루앙누아(Wat That Luang Neua)’로 라오스 불교의 종정(宗正)이 주석(主席)하고 있는 사원이란다. ‘탓 루앙이 세워진 후 탑의 주변에 총 네 개의 사원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 중의 하나란다. 남아있는 다른 하나는 조금 후에 들르게 될 남쪽의 왓탓루앙타이(Wat That Luang Tai)이다.

 

 

거대한 외형의 탓 루앙(That Luang)’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담과 작은 창문을 가진 사원이 45m 높이의 황금탑을 둘러싸고 있다. 저 탑의 안에는 부처님의 유발과 가슴뼈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아름답기 그지없는 건축물이다. 하긴 라오스의 상징으로 여겨짐은 물론 라오스의 국장과 지폐에까지 사용되고 있다니 오죽하겠는가.

 

 

그 고귀한 사원을 우린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보수공사 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찾아온 시기가 관광 비수기였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관광지들은 비수기를 이용해 시설들을 보수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탓루앙(That Luang)’에 들어가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왓 탓 루앙타이(Wat That Luang Tai)사원으로 향한다. 세타티랏왕(King Setthathirat)에 의해 세워진 네 개의 사원(寺院)중에 왓 루앙누아(Wat Luang Nua)’사원과 함께 현재까지 남아있는 다른 하나의 사원이다.

 

 

사원에는 화려한 외양의 전각(殿閣)과 불상(佛像) 외에도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둘러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고 보면 되겠다.

 

 

 

 

절 마당 한켠에는 벽면(壁面)이 없는 회랑 형태의 전각을 짓고 수많은 부처님들을 모셨다. 누워있는 부처님이 계신가 하면, 정좌를 하고 있거나 서있는 등 그 모양새가 제각기 다르다. 같은 점이라면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부처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코끼리와 원숭이의 조형물도 보인다. 불교와 친숙한 동물들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원의 안에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탑()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다. 하나같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라오스 여행의 첫날 들렀던 왓 씨사켓(Wat Sisaket)‘ 사원에서 만났던 부도탑(浮屠塔)‘들과 같은 탑들일 것이다. 이 지방 유력인사들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을 게고 말이다. 하긴 우리나라 같이 승려들의 유골을 모셨다면 재력이 딸려서라도 저렇게 화려한 부도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왓 탓 루앙타이(Wat That Luang Tai)사원의 자랑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와불(臥佛)이 아닐까 싶다. 엄청나게 커다란 부처님이 비스듬히 누워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치고 계신다. 열반(涅槃) 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열반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표식은 누운 와불의 발바닥에 그려진 국화 문양이라고 한다.

 

 

 

 

 

 

와불 뒤편으로 빠져나오니 또 다시 광장이 나타난다. 기념품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광장이다. 이곳에서 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현지인들의 순박한 인심을 말이다. 기념품을 구입하려고 가격을 흥정하는데 그렇게는 할 수가 없다면서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너무 깎으려고만 했던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버리는 그녀의 표정이 이번 라오스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오래오래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하긴 이런 풍경들이 있었기에 라오스라는 나라가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고 있는 올해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매년 빠짐없이 꼽히고 있을 것이다. 자연이 잘 보존돼있음은 물론 생활 속에서 불교를 실천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라오스는 국민의 85%가 불교도이다. 라오스인에게 있어 불교는 일상생활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회 문화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현세에서의 덕과 선행이 이생에서의 행운과 후생에서의 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금기시 된다고 한다. 라오스의 치안이 꽤 좋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셋째 날 오전 : 라오스의 개선문, 빠뚜싸이(Patuxai)

 

특징 라오스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프랑스에서 독립한 기념과 제 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독립전쟁으로 사망한 라오스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로열 라오 정부(1949~1975, 라오스 왕국시대) 시절인 1957년에 프랑스의 개선문을 벤치마킹하여 만들었다. 197512월 빠텟라오 정권이 들어선 후 라오스 왕국시대의 명칭인 아누싸와리(Anousawary, 기념물)’ 대신 빠뚜싸이(Patuxai)’로 명칭을 바꾸었다. 빠뚜(Patu, )와 싸이(xai, 승리)라는 이름대로 라오스의 개선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어로는 ‘Victory Gate’라고 불린다. 1950년대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대외 원조법에 따라 미국 정부가 당시 로열 라오 정부의 공항 건설을 위해 시멘트를 지원하였지만 공항대신 이 빠뚜싸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서있는 활주로라고 비아냥 거렸다고 하며, 독립 기념 건축물을 미국의 원조로 지은 것도 그렇지만 지배자였던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따 만든 것은 아이러니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7층의 높이로 지어진 빠뚜싸이는 한마디로 거대한 건축물이다. 가이드의 말로는 비엔티안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란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성 때문에 이보다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은 정부에서 허가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그 규제가 풀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빠뚜싸이의 앞에는 널따란 광장(廣場)을 조성해 놓았다. 광장의 주위는 공원으로 가꾸었는데 대체로 꽃밭 위주로 만들었다. 시야를 가릴 만큼 커다란 나무는 일부러 피했다는 느낌이 든다. 빠뚜싸이를 조망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만든 것 같다는 얘기이다.

 

 

 

 

빠뚜싸이의 앞에는 커다란 음악 분수(噴水)가 만들어져 있다. 분수의 앞에는 중국의 국기가 그려진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중국 정부가 만들어 줬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중국에서 메콩강 상류에 여러 개의 댐을 건설하면서 강물이 말라져가자 이에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들이 반발을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분수를 건설해 주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겨우 이 정도를 갖고 중국에 대한 반감이 가셔버렸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가이드의 얼굴표정에는 진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누군가 행복은 만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라오스가 본디 '행복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국민 행복지수가 높다고 하니, 그들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 또한 이해가 되지 않겠는가.

 

 

 

 

 

 

문의 외형은 4층 구조로 지어졌으며, 내부의 문양은 라오스 전통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1층은 천정과 벽면에 부조(浮彫)로 새겨진 신상(神像)들이 볼만하고, 2층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자리 잡았다. 옥상형태로 된 3층과 전망대로 조성된 4층에서는 비엔티안 시내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빠뚜싸이는 라오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그래서 비엔티안으로 가는 모든 도로의 거리표지판은 빠뚜싸이를 기준으로 측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 만큼 라오스인들에게 빠뚜싸이는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빠뚜싸이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그들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기념해 세웠다는 기념물이 기껏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했다면서 비웃는다. 하지만 승리를 내세우며 세운 세계 곳곳의 문들은 그 외형이 대부분 비슷비슷한 편이다. 프랑스의 개선문보다 훨씬 전 로마시대에 세워진 티투스 개선문(Arch of Titus,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 이를 증명한다 할 것이다. 그러니 닮았다고 해서 너무 나무랄 일도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렇지 않다고 정 우긴다면 외형은 닮았다고 치자. 하지만 빠뚜싸이를 장식하고 있는 문양(紋樣)들을 살펴보면 프랑스의 개선문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빠뚜싸이는 라오스의 전통 문화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물 천장과 벽면에 그들의 삶에 녹아 있는 불교와 힌두교의 ()’인 비슈누, 브라마, 인드라 등과 라마야나(Rāmāyana,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조각해 넣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라오스를 상징하는 건물로 인정해주기도 한다.

 

 

 

 

 

빠뚜싸이의 문() 네 곳에는 하반신은 새()이고 상반신은 여자인 조형물이 달려있다. ‘킨나리(Kinnari)’라고 하는데,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마물의 일종으로 남성형은 킨나라(Kimnara)이다. 킨나리는 아름다운 천녀(天女)의 모습으로 가끔씩 지상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며 노는데, 만일 그녀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날개를 손에 넣으면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뭇꾼설화(說話)가 이곳에도 있다고 보면 되겠다.

 

 

 

모두들 아래 사진의 천장 문양(紋樣)을 배경으로 넣고 인증사진을 찍겠다고 난리다. 하지만 난 포기하기로 한다. 찍어봤자 별로 쓸 일도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문양에 얽힌 사연을 하나라도 더 알아보는 게 내 취향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주변을 다 둘러봤다면 이젠 빠뚜싸이의 위로 올라볼 차례이다. 오르는 방법은 단 하나, 내부에 있는 계단을 통해서만 위로 오를 수 있다. 승강기(elevator)는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지은 지 오래되어선지 계단이 무척 어둡다. 자칫 잘못하다간 발을 헛딛을 수도 있겠다. 조심해서 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내려올 때에는 이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3개 층에서 기념품과 특산품을 파는 가게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손님들을 위해 전등을 켜놓았지만 어둡기는 매한가지이다. 장사가 안 되어선지 매대(賣臺)에 보자기를 씌워놓은 점포도 보인다. 그러니 냉방시설이 되어 있을 리가 없다. 이런 걸 보고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 서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무더운데 어느 누가 한가하게 물건을 고르고 있겠는가.

 

 

 

 

3층은 옥상 형태로 야외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상부를 장식하고 있는 다섯 개의 탑() 중 네 개의 첨탑(尖塔)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3층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비엔티엔 시내가 한눈에 다 보인다. 빠뚜싸이를 중심으로 광장 공원이 형성되어 있고 시내의 주도로가 세 갈레로 뻗어 있다. 광장의 큰 길 주변에는 정부의 각 행정부처가 한 건물씩 크게 자리 잡고 있다.

 

 

 

 

 

 

4층으로 오르려면 비좁은 회전식 계단을 빙빙 돌면서 올라가야 한다.

 

 

4층에 올라가면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으며 비엔티안 시내의 풍광을 동서남북 방향으로 모두 볼 수 있다. 아까 3층에서 보았던 풍광이 다시 한 번 펼쳐지는데 그 범위가 아까보다는 사뭇 넓어졌다. 그만큼 고도(高度)가 높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비엔티안 시내가 탁 트여 어느 방향이든 한 눈에 쏙 들어온다. 빠뚜싸이의 동쪽으로 보이는 빨간 건물은 '비엔티안 시청이고, 서쪽으로는 라오스의 유일당인 '라오인민혁명당'의 건물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사당이다. 남쪽으로 시원하게 쭉 뻗은 도로는 '란쌍로(Lan Xang Rd)'인데 이 도로는 대통령 궁까지 뻗어 있다. 대통령 궁 왼쪽으로 왓 허파깨우(Wat Ho Phakeo)와 맞은편 왓 시사켓(Wat Sisaket), 북쪽으로는 파 탓 루왕(Pha That Luang)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빠뚜싸이의 상부는 중앙의 탑()과 함께 네 개의 첨탑 등 총 다섯 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탑들은 불교의 5가지 교리인 우정과 용납, 정직, 위엄 그리고 번영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둘째 날 오후 : 탐남동굴 튜빙(Tubing)과 쏭강 카야킹(Kayaking)

 

특징 : 비엔티안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연도시 방비엥의 특징에 대해서는 선셋 모터보트편에서 얘기한바 있다. 그리고 방비엥에서의 모든 일정은 즐기는 코스로 짜여있다는 것도 거론했었다. 롱테일보트(Long Tail Boat)나 짚라인(Zipline), 버기카(Buggy Car), 튜빙, 열기구 등이 그것인데 이번에 타게 되는 카약킹(Kayaking)과 튜빙도 그중의 하나이다. 먼저 탐남동굴(ThamNam)‘에서 이루어지는 튜빙(Tubing)은 고무 튜브를 타고 동굴을 탐사하는 일정이고, 카야킹(Kayaking)21조로 팀을 나누어 카약을 타고 쏭강을 내려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늘 오후는 물속에서 노는 일정으로 짜여진 셈이다.

 

 

 

블루라군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트럭의 뒷칸에 몸을 싣는다. 탐낭동굴로 이동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오후는 튜브를 타고 탐낭동굴을 탐사한 후, 카약을 저어 쏭강을 내려오는 일정으로 짜여 있다. 잘 달리던 차량이 작은 강가에서 멈추어버린다. 더 이상은 들어갈 수가 없단다. 이곳에서 탐낭동굴까지는 꽤나 먼 거리이지만 걸어가야만 한단다.

 

 

다리를 건너면서 오후 일정이 시작된다. 길이가 70m쯤 되는 현수교(懸垂橋)인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출렁거린다. 껑충껑충 뛰어보는 사람들도 보인다. 앞뒤의 여성들을 놀래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그래봤자 놀라는 사람도 없었지만 말이다. 하긴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이정도 높이에서 겁먹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리를 건너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뒤에는 거대한 바위절벽이 버티고 있다. 그 절벽의 아래에 땀쌍동굴(Tham Xang Cave)‘이 자리하고 있다. 탐쌍(Tham Xang)이란 동굴을 뜻하는 라오스어인 '(Tham)‘코끼리를 뜻하는 '(Xang)‘의 합성어(合成語)이다. 말 그대로 코끼리 동굴이라는 뜻이다. 이는 동굴내부에 코끼리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쏙 빼다 닮은 종유석이 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동굴의 오른편에 사원(寺院)으로 보이는 건물이 지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불상(佛像)을 모셔놓은 전각(殿閣)일 것이다.

 

 

절벽 아래에 이르니 그다지 깊지 않은 동굴이 나타난다. 입구의 높이가 3m가량 되고, 그 안은 30평 정도의 너른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왼편 벽 가까이에 뭔가가 매달려있다. 생김새로 보아 종()이려니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월남전 때 미군이 사용했던 포탄인데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걸어놓은 것이란다.

 

 

동굴의 안은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중앙에는 좌불(坐佛)을 안치했다. 생김새나 얼굴 표정 등 소승불교의 대표적인 외형을 보여주는 불상이란다. 입술의 모양새 때문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흡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오른편에는 누워있는 형상의 와불(臥佛)을 모셨다. 황금빛 나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불상이다. 부처님 주위에는 합장을 하고 있는 좌상 몇 개를 배치했다. 부처님의 제자쯤 되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런 불상들을 모셨기에 이곳 탐쌍동굴을 사원(Thamxang Xayyalam temple)으로 부르기도 하나보다.

 

 

머리를 들어보면 이 동굴의 이름을 낳게 한 종유석 하나가 동굴 벽면에 돌출되어 있다. 상아와 코, , 다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발톱까지도 코끼리를 쏙 빼다 닮았다.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코끼리다. 어느 명장(名匠)이 과연 이렇게 생동감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다. ()이 아니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코끼리()는 라오스에서 성스럽게 여기는 동물이다. 그래서 코끼리 모양의 종유석이 있는 동굴내부에다 불전을 꾸미고 성스런 장소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머리맡에 뱀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가이드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어느 날 뱀이 부처를 찾아와 구원을 요청했단다. 부처님이 이를 거절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뱀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폭우가 쏟아지자 부처님을 덮어 비를 맞지 않게 해주었단다. 그 뒤로 뱀은 부처님을 보호하는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원에 가면 이렇게 뱀을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많다는 것이다.

 

 

천정에 매달린 종유석 중에는 용()의 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불교에서는 용도 신성시하고 있으니 저것 또한 신이 빚어놓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작은 불상들을 곳곳에 모셔놓았다. 이런 게 불교국가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조금이라도 신성한 느낌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부처님이 들어앉아 있다.

 

 

 

 

 

 

 

동굴을 빠져나와 탐남동굴로 향한다. 농로(農路)를 따라 걷게 되는데 10분을 훌쩍 넘기는 거리이니 꽤나 멀다고 봐야겠다. 거기다 따가운 뙤약볕에 노출까지 되기 때문에 걷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불평만 하면 어쩌겠는가. ‘피하지 못할 바에는 즐기라고 했다.’ 길가에 펼쳐지는 풍경에라도 푹 빠져볼 일이다. 저 멀리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바위봉우리들이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고, 길가 들녘에서는 소떼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걷다보면 길바닥에서 먼지가 풀썩풀썩 피어오른다. 최근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라오스는 열대 몬순기후대(monsoon climate)‘이다. 건기(乾期)와 우기(雨期)로 구분되는데, 지금이 2월 말이니 건기의 끝자락쯤으로 보면 되겠다.

 

 

 

왜 사람들이 방비엥, 방비엥 하는지 알 것도 같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병풍처럼 반긴다. 여행 책자를 보니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의 특성으로 인해 특이한 모양의 산과 수많은 동굴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 생김새가 중국의 계림을 닮았다고 해서 작은 계림또는 라오스의 계림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탐남동굴 앞은 식당가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가이드는 이 속담을 충실히 따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동굴 탐험을 시작하기 전에 점심부터 먹여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고장의 별미라는 찰밥꼬지구이그리고 바게트 빵등이 나온다. 이것들을 이용해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내 머리 속에서는 케밥(Kebab)’이라고 자꾸 우겨댄다. 아무래도 몇 년 전 이스탄불로 출장 갔을 때 먹어본 고등어 케밥이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식당은 관광객들로 우글거린다. 그런데 서빙을 하고 있는 종업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국인들 일색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관광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 어느 글에선가 지난 2011년에 국내항공사인 진에어(JIN AIR)가 인천-비엔티안 직항 노선을 개설한 이래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고 했다. 현재는 티웨이항공(T'way Air)’과 대한항공에다 라오스 국적기인 라오항공(Lao Airlines)’까지도 정기노선을 운행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식사가 끝났다면 이젠 동굴탐사에 나설 차례이다. 동굴은 식당가의 바로 옆에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안전장비를 착용해야만 한다. 튜브(tube)와 구명조끼, 그리고 헤드램프(headlamp)1인당 한 개씩 지급이 된다. 동굴의 천정이 낮아 머리가 부딪칠 염려가 많은데, 이왕이면 헬멧(helmet)까지 지급했더라면 좋았지 않았나 싶다. 아니 지급을 받은 팀들도 보이기는 했다.

 

 

 

 

탐남(Tham Nam)동굴(Tham)’(Nam)’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인데 전자는 동굴을 그리고 후자는 물을 뜻한다. 말 그대로 물에 잠겨있는 굴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까 동굴에 들어갈 때에는 응당 뭔가 물에 뜨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튜브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물은 석회성분이 많아 약간 뽀얗게 보이지만 대체로 맑고 깨끗하다. 물장난을 치다가 조금 들이마셔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이곳의 물은 석회성분이 많다니 어떻게 해서든지 안 마시는 게 좋을 것이다.

 

 

탐남동굴의 탐사는 튜브를 타고 이루어진다. 동굴이 절반쯤 물에 잠겨있기 때문이다. 워터게이브(Water Cave)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일단은 튜브에 드러눕고 본다. 앉는 게 편하겠지만 최대한으로 자세를 낮추어야 하니 별 수 없이 드러눕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이때 머리에는 헤드램프를 쓰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는 줄을 잡고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안전사고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손을 아래로 내려 보면 바닥이 닿을 정도로 물이 얕기 때문이다. 그저 천정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만 하면 된다.

 

 

 

 

동굴 안은 한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는다. 암흑세상이라는 얘기이다. 그동안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굴들을 들어가 봤다. 그러나 이곳처럼 조명시설을 해놓지 않은 동굴은 처음이다. 아무리 관광산업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다. 아무튼 동굴에는 밧줄이 매어져 있다. 튜브에 드러누운 채로 손으로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전진한다. 그러다보니 헤드램프의 불빛은 전방(前方) 보다는 천정을 바라보는데 활용 된다. 그래봤자 볼 것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중간쯤에서 잠깐 걸을 때 불빛을 사용하였으니 소용이 아주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특히 좁은 공간을 기어들어갈 때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동굴탐사가 끝나면 이젠 카약킹(Kayaking)을 즐겨볼 차례이다. 아까 트럭에서 내렸던 강가로 되돌아와 또 다시 트럭을 타고 쏭강의 상류로 이동한다. 주변 풍경을 보니 어제 롱 테일 보트(Long Tail Boat)’를 즐겼던 곳이 아닐까 싶다.

 

 

 

카약킹은 카약 한 대에 두 명씩 승선하게 된다. 이때 구명조끼와 노()가 하나씩 개인장비로 주어진다. 그리고 둘이서 힘을 합쳐 노를 저어 강을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 뒤에 안전요원 한 명이 함께 동승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물길은 편한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깊은 곳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물살이 센 곳도 지나간다. 하지만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카약의 뒷자리에 동승하고 있는 안전요원이 보살펴주기 때문이다. 거기다 노를 젓는 게 힘들어 보이기라도 할라치면 노까지 저어준다. 그런 상황에 마음이 놓여서인지 다를 물장난을 치느라 정신들이 없다. 상대편 카약에 가까이 다가간 다음 노를 이용해 물세례를 퍼붓는 것이다.

 

 

노를 저어 상류에서 하류로 남쏭강(Nam Song River)’을 지난다. 어제 롱테일 보트를 할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물놀이를 하는 유럽인들이 가끔 눈에 띈다. 반갑다고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참으로 여유로운 모습들이다. '행복의 나라'라 불리는 이곳 라오스는 국민 행복지수가 높기로 유명하다. 저 유럽인들은 그 행복지수에 감염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의 손짓에 반응하고 있는 나 또한 감염된 지 이미 오래일 것이고 말이다.

 

 

쏭강의 풍경은 어제와 비슷하다. 아니 자신은 못하겠지만 어제와 같은 풍경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의 섶다리가 생각나는 다리들이 심심찮게 보이는가 하면 블루라군으로 들어갈 때 가슴 졸였던 그 현수교도 보인다.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봉우리들도 계속해서 나타난다. 고깔모자를 쓴 것 같은 독특한 모양새가 흡사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중국의 계림(桂林),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라오스의 소계림'이라는 애칭(愛稱)으로 부른다.

 

 

강변에는 위락시설들도 보인다. 하긴 여행객들로 넘치는 방비엥이니 어떻게 저런 곳을 그냥 놔둘 수가 있겠는가. 마치 우리나라의 가평을 연상시키듯 쏭강을 배경으로 많은 위락시설들이 늘어서있다.

 

 

물살이 센 곳과 약한 곳, 그리고 물이 깊은 곳과 얕은 곳을 교대로 지나간다. 눈앞에는 방비엥의 수많은 산군(山群)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카르스트 지형이 빚어낸 봉우리들의 자태가 자못 빼어나다. 그리고 그 봉우리들은 쏭강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풍경화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물놀이를 즐기다보면 어느덧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의 옆에 도착하게 된다. 튜빙과 카약킹을 하면서 젖은 옷은 아직도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다. 방으로 들어가 씻는 게 우선이겠지만 마음 급한 일부 사람들은 호텔의 야외 수영장으로 뛰어들고 본다. 물속에서 놀다 젖은 옷이니 더러울 게 없다면서 말이다.

 

 

여행지 : 라오스(Laos)

 

여행일 : ‘17. 2. 28() - 3.4()

일 정 :

3.1() : 비엔티엔 사원관광(왓 씨사켓, 왓 팟 깨우), 불상공원(왓 씨엥쿠안). 탕원유원지 선상식. 소금마을 방문, 방비엥(썬셋 모터보트, 유러피안 거리)

3.2() : 방비엥(블루라군, 짚라인, 탐남동굴 튜빙, 쏭강 카약킹)

3.3() : 젓갈마을 방문, 비엔티엔(빠뚜싸이 독립기념탑, 왓 탓 루앙)

 

여행 둘째 날 오전 : 짚라인(Zipline)

 

특징 : 비엔티안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연도시 방비엥의 특징에 대해서는 선셋 모터보트편에서 얘기한바 있다. 그리고 방비엥에서의 모든 일정은 즐기는 코스로 짜여있다는 것도 거론했었다. 롱테일보트(Long Tail Boat)나 카약킹(Kayaking), 버기카(Buggy Car), 튜빙, 열기구 등이 그것인데 오늘 타게 되는 짚라인(Zipline)도 그중의 하나이다. 짚라인(Zipline)은 양 편의 나무 또는 지주대 사이로 튼튼한 와이어를 설치하고 탑승자와 연결된 트롤리(trolley, 일종의 도르래)를 와이어에 걸어 빠른 속도로 반대편으로 이동하면서 스릴(thrill)과 함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야외 레포츠이다. 지역에 따라 플라잉폭스(Flying Fox), 짚와이어(zip-wire), 에어리얼런웨이(Aerial Runway), 티롤리언크로싱(Tyrolean Crossing) 스카이플라이(SkyFly)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짚라인은 짚라인코리아()의 브랜드이자 등록상표명이다. 짚라인코리아가 문경, 용인, 충주, 설악, 청도 등에 설치하여 운영 중인데, 와이어를 타고 이동할 때 트롤리와 와이어의 마찰음이 '~'(zip~)과 비슷하게 들리는 점에 착안하여 '짚라인'으로 브랜드명을 정했다고 한다.

 

 

 

짚라인(Zipline) 체험을 하겠다고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블루라군의 바로 옆에서 기초교육을 시키기 때문이다. 2~3m정도 높이에 와이어(wire)를 매달고 트롤리(trolley, 일종의 도르래)를 이용해 건너편까지 이동하는 방법을 배운다. 줄에 매달린 채로 몸의 균형을 잡는 방법과 트롤리의 작동방법 등인데 어려울 것은 없다. ! 교육 전에 하네스(harness)를 착용하고 헬멧을 쓰는 것은 기본이다.

 

 

 

 

 

짚라인은 다른 레저스포츠에 비해 매우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교육을 이수한 가이드 요원과 동반하여 코스를 이용하므로 사전 지식이나 훈련 없이도 누구나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거기다 안정장비 또한 잘 갖추어져 있다. 하강레포츠 전용 하네스와 2중 카라비너(karabiner) 체결시스템, 브레이크(brake) 시스템 등 다양한 안전장치들을 마련해두고 있다. 특히 ACCT(미국 챌린지코스 기술협회, Association for Challenge Course Technology)에서 하강레포츠의 설계 및 시공, 탑승장비에 대한 세부 지침을 마련하여 회원사들로 하여금 이를 준용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그 지침을 따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교육이 끝나면 곧장 체험장으로 이동한다. 블루라곤의 뒤편 산자락을 잠시 오르면 만나게 되는 거대한 나무의 위이다. 이곳 블루라군 지역에는 총 4곳의 체험장이 있다고 한다. 그중 우리는 블루라군의 위를 오가는 체험장으로 결정되었다. 이곳은 두 개의 코스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조금 수월한 편이고, 두 번째는 상당히 고난도(高難度)의 코스란다. 매 코스마다 여덟 번 정도 짚라인을 타게 되므로 총 열여섯 번을 와이어에 매달린다고 보면 되겠다.

 

 

블루라군의 울창한 숲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수없이 많다 그 나무들 사이사이를 와이어(wire)로 연결하고 줄에 매달려 반대편 나무로 이동하는 게 짚라인이다. 출발하기 전에 안전요원이 먼저 시범을 보여준다. 거꾸로 매달려 쓩쓩 날아가는 것이 숫제 원숭이나 다름없다. 저기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흉내라도 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선두로 나서본다.

 

 

와이어는 두 줄로 매어져 있어 떨어질 일은 절대로 없단다. 체중을 지탱해 주는 기본 줄 이외에 안전을 위한 보조 줄이 하나 더 매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두려움이 가실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발아래가 거칠 것 없이 텅 비어있는데 말이다. 참가자들의 얼굴 근육이 풀어질 줄 모르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짚라인을 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줄에 올라타면 끝까지 운행하는 것으로 상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지주대(支柱臺)를 여러 곳에 나누어 설치하고 여러 번 바꾸어가며 탄다. 여덟 개 구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탑승장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다음 구간으로 이동하지만 흔들리는 구름다리를 이용해야 하는 구간도 있다. 숫제 유격훈련장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성분들은 잔뜩 긴장을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끝나고 난 후에는 이구동성으로 조금 더 하자며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다들 동심(童心)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오늘의 체험코스 중 하이라이트(highlight)는 뭐니 뭐니 해도 사다리타기가 아닐까 싶다. 양쪽 나무의 사이를 와이어(wire) 두 개로 연결하고 그 위에 지그재그로 각목(角木)을 깔았다. 그런데 그 각목의 두께가 어른 팔뚝만큼도 못할 정도로 가는 게 문제다. 거기다 벌어진 틈이 고정되어 있지를 않고 제 맘대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위에 걸쳐져 있는 별도의 와이어에 생명줄을 연결시켜 놓았다고는 하지만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건너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모두들 사색(死色)이다.

 

 

 

 

 

 

어떻게 즐기는가는 타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여유로워져 나중에는 각종 포즈(pose)를 취해보이기까지 한다. 반면에 끝까지 낯을 붉히게 만드는 풍경을 연출하는 사람들도 있다. 겁에 질려 자꾸만 브레이크를 잡는 바람에 목적지까지 도착하지도 못하고 도우미에게 질질 끌려가는 굴욕을 당하는 풍경이다.

 

 

 

 

 

 

 

 

 

 

마지막으로 내려서는 곳은 어른의 키로 한 길도 채 안 되는 높이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머리 위에 또 하나의 탑승장이 보인다. 나무가 하도 굵고 높다보니 탑승장을 하나 더 만들었나 보다. 아니 세 개까지 탑승장이 만들어진 나무도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코스가 끝나면 블루라군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그래봤자 블루라군 내에 있는 유원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에메랄드빛의 새끼여울을 가로지르는 대나무다리를 지나는가 하면 풍취(風趣)있는 대나무 숲을 지나기도 한다.

 

 

 

 

 

 

 

 

 

두 번째 코스의 출발점으로 이동한다. 이번에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올라야만 한다. 하긴 난이도(難易度)가 높아졌으니 그만큼 높은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두 번째 코스는 난이도가 높은 게 확실하다. 높이가 아까보다는 훨씬 더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길이 또한 훨씬 길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곳 블루라군의 짚라인은 얼마 전(’17.5.16) JTBC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패키지로 세계일주-뭉쳐야 뜬다'에 소개되면서 입소문을 탄바 있다. 김용만과 김성주, 안정환, 정형돈 등 기존 멤버와 게스트인 차태현이 체험에 참여했는데 긴장감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유쾌해하는 멤버들의 면면이 방영되었다. 그렇다고 그 전까지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2017) 2월에 우리가 찾았을 때도 짚라인을 타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우리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이었다.

 

 

 

 

 

 

 

 

 

 

주변의 풍광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이젠 줄타기가 많이 익숙해졌나 보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블루라군은 물론이고 고개를 조금만 더 들면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 낸 수많은 바위봉우리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그래 언젠가 미술관에서 들렀을 때 감명 깊게 다가왔던 풍경화가 바로 저랬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자유낙하이다. 아니 강제 낙하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아래로 뚝 떨어져 내리기 때문이다. 내막은 이렇다. 짚라인을 타고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 20m정도 되는 나무의 위인데, 이곳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이다. 밧줄에 매달린 체험참가자를 아래에 있는 진행요원이 줄을 조금씩 늘어뜨려 주어야만 땅에 내려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참가자들은 오로지 진행요원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 음모가 숨어있다. 진행요원이 갑자기 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물론 땅에 닿기 전 적당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이 자동적으로 멈추도록 밧줄이 고정되어 있지만 떨어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모든 참가자들은 하나 같이 까무러치게 놀라 괴성(怪聲)을 질러댄다. 극도로 놀라다보면 오줌을 지리는 사람들도 생길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