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1구간(하동호-삼화실)

 

여행일 : ‘22. 2. 19(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청암면과 적량면 일원

여행코스 : 하동호(2km)→평촌마을(1.2km)→화월마을(1.1km)→관점마을(3.2km)→상존티마을(0.7km)→존티재(1.2km)→삼화실(거리 및 시간 : 9.4km/ 실제는 9.26km를 2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1구간(하동호-삼화실)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하동 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거리가 9.4km 밖에 되지 않는데다 고개도 하나만 넘어 난이도는 ‘하’로 분류된다. 그래선지 가슴에 담아둘만한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꼬맹이 마을의 고즈넉함이 볼거리라면 모를까. 참! 징검다리에서 장난삼아 총총거리는가 하면, 산골마을 학생들의 추억이 서린 존티재를 넘어보는 재미도 있기는 했다.

 

▼ 들머리는 하동호(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읍까지 내려온다. 섬진주유소(GS칼텍스) 앞 회전교차로에서 12시 방향 경서대로를 따라 횡천(면소재지)까지 간 다음, 횡천삼거리에서 1003번 지방도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동호에 이르게 된다. 남해고속도로 옥곡 IC에서 내려와 2번 국도와 1003번 지방도를 이용하는 방법(나비는 이 코스를 권하고 있었다)도 있으나 산악회버스는 전자를 따랐다.

▼ 하동호관리소(하동군 청암면)에서 삼화실 마을(하동군 적량면)까지. 거리(9.4km)가 짧은데다 비탈진 고개도 없으니 산책삼아 느긋하게 걸으면 된다.

▼ 공중화장실 오른편(동·남쪽 코너)에서 돌계단을 내려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초입에 지리산둘레길안내도와 벅수(하동호 0.0㎞/ 삼화실 9.4㎞)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둑에서 내려와 평촌마을로 향한다. 이 구간은 횡천강(橫川江, 또는 청암천)이 함께 한다. 지리산 삼신봉에서 발원해 남동쪽으로 흐르다가 하동호에서 ‘중이천’을 보탠 물길이다.

▼ 이때 하동호의 거대한 둑이 눈에 들어온다. 길이 496m에 높이만도 58.6m나 된단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동군에 사천시까지 보탠 너른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할 수 있지 않겠는가.

▼ 댐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는 소수력발전소가 들어섰다. 발전용량이 825㎾라니 발전소랄 것도 없다. 하지만 영농기(4월-9월)에 용수로를 통해 흘러가는 물을 재활용해 전력을 생산한다는데 큰 의미가 있단다. 저수지 아래의 유휴부지에는 194㎾ 규모의 태양광발전소도 들어서있었다. 정부의 친환경 에너지정책에 발맞춰 만든 시설들이다.

▼ 하천을 정리하면서 생긴 듯한 널따란 부지에는 각종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스포츠 콤플렉스’라도 만들려는 듯 축구장과 풋살경기장으로도 모자라 테니스장까지 보탰다. 거기다 라이트 시설을 넣어 주경야동(晝耕夜動)이 가능하도록 했다. 최근의 화두가 된 ‘정주여건 개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나 할까?

▼ 둘레길 옆은 매실나무 밭.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망울이 2주 전 10구간 때보다 훨씬 굵어졌다.

▼ 명색이 강인데도 물길은 보잘 것이 없다. 하동호에 물이 갇혀버린 탓일 게다. 때문에 물길은 실개천으로 변해 가운데로 좁게 흘러간다. 그렇다고 보잘 것까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수중보에 갇힌 물이 옛 풍모를 드러내주는가 하면, 물길 곳곳에 들어앉은 기암들은 그 풍모를 한층 업그레이드시켜준다.

▼ 길을 나선지 25분. 평촌교(벅수 : 삼화실 7.8㎞/ 하동호 1.6㎞)로 횡천강을 건너면, 둘레길은 평촌(坪村) 마을로 들어선다. 너른 들녘을 뜨락으로 둔 풍요로운 마을인데, 창산(倉山) 또는 창촌(倉村)으로도 불린다. 옛날 이곳에 조세를 거둔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 ‘아트센터’ 현수막에 홀려 일단 카메라부터 들이대 본다. 아니 ‘추구집(推句集)’의 책 표지가 인쇄된 또 다른 현수막에 이끌렸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할아버지께 잠시 배웠던 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추구집’이란 옛 사람들이 남긴 속담·풍자·해학·명언·오언절구 등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조선시대 천자문과 함께 서당에서 배우던 교양 학습서이다.

▼ 마을회관은 청암면의 ‘자원봉사캠프’를 겸하고 있었다. ‘사랑나누미 빨래방’을 이곳에 두고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노인, 가정위탁아동이 전화로 신청하면 봉사자들이 빨래를 해주는 시스템이다.

▼ 농가의 마당은 오리와 닭들로 한 가득이다. 농약 대신 우렁이나 오리로 농사를 짓는 친환경 농가들이 많다더니 저게 그 오리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올 여름 몸보신용일 게고 말이다.

▼ 평촌마을은 ‘청암면’의 소재지다. 그래선지 웬만한 읍내 분위기다. 면사무소와 파출소 같은 관공서는 물론이고, 복지회관과 농협 등 면단위 편의시설들도 모두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민박과 간단한 요기도 가능하다. 하나 더, 파출소 뒤로 들어가면 ‘경천묘(敬天廟)’와 금남사(錦南祠)가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초상화)과 경천묘를 세운 이색·권근·김충한의 위패를 각각 모신다.

▼ 잠시 1003번 지방도를 따르던 둘레길이 ‘화월마을’ 버스정류장(벅수 : 삼화실 7.1㎞/ 하동호 2.3㎞)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 초입에는 ‘우회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이 구간에 징검다리가 놓여있으니, 비가 올 때는 계속해서 1003번 지방도를 따르란다.

▼ 천변에 이르자 갑자기 둘레길이 사라져버렸다. 아니 논둑을 따라 길이 나있다보니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천변에 가로막힌 둘레길은 횡천강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 그렇게 70~80m쯤 올라가자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냇물의 흐름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징검다리를 만나자 엎어져 하얗게 부서지다 일어서서 모이기를 반복하고 있다.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라 하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픈 추억이다. 초등학교 시절(3학년까지는 시골에서 다녔다) 소나기라도 올라치면 나는 징검다리 앞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동급생들보다 두어 살이나 어린데다, 유난히도 키가 작았던 탓에 물이 불어나면 다리를 건널 엄두조차 못 냈기 때문이다. 동네 형들의 도움으로 건널 수는 있었지만 다시 꺼내보고 싶은 추억은 결코 아니다.

▼ 건너편 강둑으로 올라선 둘레길은 이번에는 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강둑에는 ‘지리산 둘레보고’의 로고가 들어간 벤치가 놓여있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7개 시·군(남원시·장수군·곡성군·구례군·하동군·산청군·함양군)의 공동 브랜드가 ‘지리산 둘레보고’이다.

▼ 그렇게 100m쯤 내려가다 다리(공사 중인지 이름표도 없었다)를 건너면 ‘화월마을’이다. 아니 정확히는 ‘반월(伴月)’ 마을이다. 마을 뒤로 보이는 저 산의 생김새가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화월마을(벅수 : 삼화실 6.2㎞/ 하동호 3.2㎞)은 자연부락인 함화(咸花, 함박골)와 반월(伴月, 버드리)을 합한 지명이라고 한다. 이중 ‘버드리’는 마을 일대에 버드나무가 많다는 데서 유래했다. 마을 앞 횡천강 냇가에 자생의 버드나무가 울창했으나 논에 피해가 있다고 하여 오래전에 베어버렸단다.

▼ 화월마을의 당산. 아름드리 벚나무 아래는 정자가 들어섰다. 마을 어르신들은 물론이고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그늘 쉼터로 안성맞춤이겠다.

▼ 둘레길은 다시 1003번 지방도를 따른다. ‘횡천면’으로 연결되는 이 길은 벚나무로 가로수를 삼았다. 메타세쿼이아 길처럼 위로 길게 쭉쭉 뻗어 오르지는 않았지만, 굵게 자란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꽃피는 춘삼월에라도 찾아오면 화려한 꽃 대궐을 느긋하게 걸어볼 수도 있을 듯.

▼ 도로를 따라 5분 남짓 걷자 관점마을 입구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도로를 벗어나 마을길로 옮긴다. 초입에 벅수(삼화실 5.7㎞/ 하동호 3.7㎞)는 물론이고 마을 표지석까지 큼지막하게 세워져있으니 길이 헷갈릴 일는 없을 것이다.

▼ 들머리의 저 뜬금없는 안내도는 무엇을 의미할까. 벅수는 물론이고 앱까지 모두가 관점마을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명호교 방향으로 우회하라는 것이다. 오가는 차량을 조심하라는 친절까지 베풀면서 말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러니 너나없이 본래의 탐방로를 따라 진행했음은 물론이다.

▼ 잠시 후 ‘관점교’를 건너자 둘레길은 울창한 대숲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대나무 특유의 상큼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는가 하면, 대나무 이파리들이 속삭이는 숲의 이야기를 듣는 멋진 구간이다.

▼ 오벨리스크를 쏙 빼다 닮은 ‘다리 준공기념비’에 반해 카메라에 담아봤다. 그 예스런 모양새 때문이었을까? 문득 ‘경천묘’를 그냥 지나쳐버렸다는 걸 떠올린다. 둘레길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적지라서 한번쯤 꼭 들러보려고 했는데, 생각 없이 걷다가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 아쉬운 마음에 문화재청에서 자료를 얻어다 올려본다. 경천묘(敬天廟, 경남 문화재자료 제133호)는 신라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敬順王)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공격 경애왕을 죽이고 새로 왕으로 앉힌 인물이 경순왕이다. 왕건이 견훤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이기자 나라를 고려에 넘겨준 뒤, 용화산 학수사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사후 학수사에 사당을 세웠으나, 후세 사람들이 중이리(청암면) 검남산 밑으로 이전했다가 1988년 하동댐이 건설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 경순왕의 어진(御眞, 경남 유형문화제 제474호)은 임금의 관(冕旒冠)을 쓰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하의 예를 갖추는 홀(笏)을 양손에 쥔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신라의 임금이자 고려의 신하였다는 것을 나타냈다고나 할까?

▼ 하동은 두 번째 고향에 터를 잡은 이들이 많다고 한다. 지리산과 땅의 부름을 받아 귀농한 사람들이다. 사연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젠 지리산 기슭에서 자연의 속살을 누빈다는 것이다. 세척된 채소를 문 앞에서 받는 편리함 대신, 가축 분뇨 섞인 흙에서 살아있는 먹거리를 마련하려고 밤낮으로 힘을 쏟는단다.

▼ 반면에 주인을 잃은 집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불편함보다는 편리함이 좋은 이들도 의외로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 ‘관점(冠店)’마을의 경로당을 끝으로 둘레길은 마을을 벗어난다. 참! 마을을 지나는 중에 민박집으로 여겨지는 ‘마굿간 산장’이란 간판도 볼 수 있었다.

▼ 경로당 앞에는 지리산둘레길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매 구간 만나게 되는 시설물로, 제발 좀 고쳐주던지 아니면 치워버리는 게 나은 편의시설이다. 현실과 맞지 않은 게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도 역시 종점을 잘못 표시한데다, 뜬금없이 궁항마을을 볼거리로 내세우고 있었다.

▼ 마을을 벗어난 둘레길은 야트막한 고개를 넘는다. 관점마을 어르신들이 뒷동네로 마실이라도 다녔음직한 고개다.

▼ ‘이 뭐꼬?’. 고개를 넘는데 빈 술병 두 개가 사이좋게 걸려있는 게 아닌가.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나그네들을 격렬히 환영한다는 표식일지도 모르겠다.

▼ 이곳 청암면은 취나물과 표고버섯, 토종꿀을 특산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양봉도 이에 못지않은 듯. 길 가다 만난 양봉 농가의 규모가 만만찮다.

▼ 고개를 내려오면 ‘명호천’. 둘레길은 냇가 옆 ‘명사길’을 따른다.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 이곳에도 벅수(삼화실 4.5㎞/ 하동호 4.9㎞)와 함께 우회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민원(마스크 미착용 및 소음)으로 인해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 관점마을 통행을 금지한다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지켜주지 못한 게 아쉽지만, 아까는 이런 내용을 알 수 없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 둘레길은 이제 명호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로수가 없는 포장길이라서 오뉴월 뙤약볕에는 고난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다.

▼ 잠시 후 명사마을 표지석이 보이는가 싶더니, 돌장승 두 개가 손님을 맞는다. 명사마을에서 아직껏 지내오고 있다는 당산제(堂山祭)와 연관된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그 당산제에서 모시는 신(神)이 바로 ‘당산 할배’와 ‘당산 할매’라니 말이다.

▼ 장승은 생김새에 따라 인면형(人面形)·귀면괴수형(鬼面怪獸形)·미륵형(彌勒形)·남근형(男根形)·문무관형(文武官形) 등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이 장승은 문무관형인 셈이다. 반면 관이 없는 여장승은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있었다.

▼ 도로에는 ‘명사 돌배축제’의 현수막도 걸려있었다. 돌배는 호흡기 질환과 노화방지, 항암작용에 뛰어난 효능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명사마을은 전국에서 친환경 돌배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마을이라고 한다.

▼ 산골짜기 작은 물줄기는 얼음폭포(氷瀑)로 변해있다. 오늘이 우수(雨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절기다. 하지만 고지대의 산골은 계절까지도 잊었나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나 할까?

▼ 저 멀리 ‘하존티’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다랑논에 둘러싸인 작은 산촌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림엽서 같은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

▼ 트레킹 시작 1시간30분(명호천 따라 25분)만에 명사마을 앞(벅수 : 삼화실 3.0㎞/ 하동호 6.4㎞) 애향동산에 도착했다. ‘하존티’ 마을의 입구이기도 한데, 정자를 지어 작은 쉼터로 꾸며놓았다. 참고로 둘레길이 지나가는 존티마을은 하존티와 상존티로 나뉜다.

▼ 쉼터에는 ‘명사마을 안내도’가 세워져 있었다. 청암사(靑岩寺) 터 주변과 절골, 점몰, 상존티, 하존티, 용심정 등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옛 이름은 전두리(田頭里) 또는 석문촌(石門村)이었다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었으나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면서 웰빙과 힐링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란다.

▼ 하존티마을은 둘레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때문에 도로를 걸으며 조망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벅수 : 삼화실 2.6㎞/ 하동호 6.8㎞)을 만난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도로와 헤어진 다음 상존티 마을로 향한다.

▼ 몇 걸음 더 걸어 도착한 ‘명사마을회관’에는 대통령선거 출마자들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제왕의 권력을 지녔다는 한국의 대통령. 그게 좋았던지 무려 14명이나 출마했다. 그나저나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들의 비호감도가 역대 선거 중 가장 높다고 했다. 그렇다고 선택까지 포기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 누군가는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다. 부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 마을 경로당은 ‘미담정(美談亭)’이란 편액을 달았다. ‘따뜻하고 흐뭇한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라니, 이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저 경로당을 드나드시는 모든 마을 어르신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참! ‘상존티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새참사랑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즉석식품 등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기사가 잘못된 것일까?

▼ 상존티 구간은 갈림길이 유난히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벅수를 세워놓았지만 그렇다고 길을 잃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럴 때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놓친 이정표를 다시 확인해보는 편이 낫다. 이정표가 촘촘히 세워져 있기 때문에 금방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이 구간에도 감사의 뜻을 담은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길들을 모아 연결했을 뿐이다. 민관의 협력으로 이루어 낸 윈윈(win-win)의 대표적인 사례라고나 할까? 지역 주민은 낯선 나그네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지자체는 나그네가 헤매지 않도록 안내판과 이정표를 세웠다.

▼ 마을을 빠져나온 길은 울창한 대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오후의 나른한 햇빛에 반사된 대나무 이파리가 바다에 빛나는 잔물결 같아 보인다. 한마디로 아름답다. 대나무 숲이 유독 많은 하동구간. 오늘도 역시 감동의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릴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 대나무 숲은 명품 숲 그대로다. 대나무의 결이 곧고 그 살결도 빛난다. 대나무 공방에서 예술품으로 승화되기에 조금도 부족할 게 없어 보인다.

▼ 하지만 썩 편치 않은 현수막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풀·꽃·열매·나물’은 마음으로만, 눈으로만 담아가란다. 행여 죽순에라도 손대는 이가 있을까 경계하는 시설물일 것이다. 하긴 나그네들에게는 그저 흔하디흔한 죽순일지 모르겠지만, 농민들에게는 소중한 재산이 아니겠는가.

▼ 대숲에 들어앉은 개집에서 느껴지는 서글픔은 나 혼자만의 우려였으면 좋겠다. 현수막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죽순에 손을 대는 이들이 있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 대숲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깡마른 참나무 숲이 펼쳐진다. 하지만 아직은 완만한 경사지이다. 그래선지 습지와 제법 너른 밭들도 눈에 띈다. 우리네 어버이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농사를 지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온통 묵밭 일색이다. 경작지가 남아돈다는 의미일까?

▼ 존티재를 눈앞에 둘 즈음 둘레길은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하긴 질곡이 질펀하던 고갯마루이니 그게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맞다. 삼화실과 명사마을의 경계인 저 고개는 고단한 삶의 현장이었다. 까까머리 산골아이들이 책 보따리 둘러매고 학교로 달려갔고, 시집가는 누님들은 가마멀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내다 팔려는 우리네 아버지는 새벽같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 해발 302m의 고갯마루에는 벅수(삼화실 1.3㎞/ 하동호 8.1㎞) 말고도 ‘스탬프보관함’이라는 아주 특별한 시설물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이 구간의 완주를 인증 받고 싶다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내려가는 길은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만으로도 감사한데, 솔가리까지 수북하게 쌓여 아예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다. 경사도 아까 올라올 때에 비하면 평지나 마찬가지로 변해있다.

▼ 솔숲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밤나무단지가 길손을 맞는다. 80년대 말쯤 이 근처 고령토 광산에 출장을 온 일이 있었다. 당시 난 현장을 안내하던 지자체 관계자로부터 밤 복용법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껍질(내피)을 벗기지 않은 채로 가루를 만들어서 꿀에 재워 장복하면 70살이 넘도록 부부생활이 원활해진다나? 어느 남자든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 몇 걸음 더 걸으면 삼화실마을이 내려다보인다. 하동구간의 전형적인 풍경이라고나 할까? 하동구간은 고즈넉한 농촌 분위기를 간직한 옛길을 비롯해 고갯길, 대나무숲길, 호수길, 둑방길, 개울길 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리산둘레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그 길들이 계절마다 색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말라비틀어진 열매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갑장이자 둘레길 도반인 유 선생이 열매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흘려들어 버렸다.

▼ 잠시 후 임도가 끝나는가 싶더니 ‘동촌마을’의 정자쉼터가 반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이번엔 마을회관. 삼화실로 통칭되는 이곳은 귀농인이 넘쳐나고 고랭지 식물의 보고가 되면서, 언제부턴가 부자동네로 소문나 있다.

▼ 날머리는 삼화실 에코하우스(하동군 적량면 동리)

존티고개을 출발한지 25분 만에 도착한 ‘삼화실’ 마을에는 ‘삼화 에코하우스’가 들어서 있었다. 1999년 폐교된 삼화초등학교를 하동군이 구입한 뒤 리모델링한 다목적 숙박시설이다.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농산물 수확체험 및 판매까지 겸하고 있으나, 우리 같은 나그네들에게는 저곳에 들어선 둘레길안내소가 더 의미가 있다. 스탬프를 찍어놔야 완주 인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벅수(대축 16.7㎞←삼화실→하동호 9.4㎞)는 에코하우스의 문 앞에 세워놓았다. ‘우수 생태환경’을 브랜드로 내건 ‘삼화실’ 마을의 홍보 안내판들도 여럿 보인다. ‘옛길 생태관찰로’도 만들어놓았으니 힐링 삼아 한번쯤 다녀가란다.

▼ 7개 마을(명천·이정·동촌·하서·중서·동점·도장골)로 이루어진 ‘삼화실(三花室)’은 옛날 이곳에 배꽃(이정마을)과 매화꽃(중서마을), 복숭아꽃(도장골)이 많이 핀다는 데서 유래했다. 여기에 과실 실(實)을 붙여 삼화실이다. 다른 주장(설화)도 있다. 신라 때 이곳에서 말을 먹이며 말구유통 3개를 박아놓았는데, 이를 ‘통삼배기’라 부르다가 지명(통삼배기가 있는 곳)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 트레킹은 지리산둘레길의 엠블럼(emblem)이 지키고 있는 에코하우스 앞 주차장에서 종료된다. 오늘은 2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9.26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은 셈이다. 다른 한편으론 구간 거리가 짧다는 것만 빼면, 난이도가 ‘중’으로 올라가는다는 반증도 될 것 같다.

지리산둘레길 10구간(위태-하동호)

 

여행일 : ‘22. 2. 5(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옥종면과 청암면 일원

여행코스 : 위태마을(1.9km)→지네재(0.6km)→오율마을(2.2km)→궁항마을(2.2km)→양이터재(2.6km)→나본마을(2km)→하동호(거리 및 시간 : 11.5km/ 실제는 11.07km를 3시간 20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0구간인 위태-하동호 구간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하동 권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1.5km 밖에 되지 않으나 상당히 높은 고개를 3개나 넘어야하는 탓에 난이도가 ‘상’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롯이 걷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마을안길·숲길·계곡길·호반길·임도 등을 두루두루 걸으며 다양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는 것도 장점이라 하겠다.

 

▼ 들머리는 위태마을(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지리산(중산리) 방향으로 달리다가 창촌삼거리(산청군 단성면 창촌리)에서 좌회전 1005번 지방도, 월회리 삼거리(하동군 옥종면 월횡리)에서 1014번 지방도, 마지막으로 회신삼거리(하동군 옥종면 회신리)에서 우회전하여 59번 국도로 옮기면 잠시 후 위태마을에 이르게 된다.

▼ 위태마을(하동군 옥종면)에서 하동호관리사무소(하동군 청암면 평촌리)까지로 거리(11.5km)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코스이다. 위태리에서 지네재, 오율마을에서 궁항리, 궁항리에서 양이터재에서 만만찮은 오르막을 만나기 때문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인데도 오롯이 둘레길 순례자들의 차지가 되어버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고갯길·호숫가길·개울길 등이 조화로운 옛길을 호젓하게 걸을 수 있다며, ‘인월-금계’에 이어 ‘가장 좋았던 길, 제일 기억에 남는 길’ 2위로 꼽는 기사도 있었다.

▼ 지난번 9구간 때 발견하지 못했던 시·종점 엠블럼(emblem)은 체육공원 앞에 세워져 있었다. 체육공원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과 간이화장실을 쉽게 이용하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이정표랄 수 있는 벅수(하동호 11.5㎞←위태→덕산 9.7㎞)는 이곳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9코스가 53번 국도와 처음으로 만나는 곳)에 있다.

▼ 체육공원 근처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입구에 벅수(하동호 11.3㎞/ 위태 0.2㎞)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잖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 이곳 위태마을은 진등·안몰·중몰·괴정지 등의 자연부락을 합한 행정 단위이다. 마을회관이 있는 이곳 ‘진등’은 마을 뒤에 긴 산등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둘레길은 이곳 ‘진등’에서 서쪽에 위치한 ‘안몰’로 이어진다.

▼ 마을 앞에는 ‘상촌제’라는 자그마한 저수지가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지만 일제 때 팠다니 그 역사만큼은 무시할 수 없겠다. 마을의 옛 이름인 ‘상태’를 아직까지 고집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로 ‘위태’는 새로 얻은 지명이다. 지난 2003년, 청암면에서 옥종면으로 마을이 넘어오면서 본래 이름이던 ‘상촌’이 옥종면에 이미 있던지라 이를 피해 ‘위태’가 되었다.

▼ 저수지를 지나 건너편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때 둘레길 특유의 풍경이 펼쳐진다. 산골마을과 이를 둘러싼 대나무 숲. 마을 앞엔 정자나무가 터를 잡았다. 둘레길은 그 사이사이를 누비듯 이어진다. 맞다. 둘레길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길,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길, 장보러 가던 길이였다. 그런 길들을 모아 지리산 둘레를 둥글게 연결했을 뿐이다.

▼ ‘안몰’ 마을 앞.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당산(堂山)은 상수리나무가 지키고 있었다. 당산은 한 고을의 지킴이신을 모신 성역이다. 하지만 세월의 부침은 성역까지도 인간에게 되돌려 주었나 보다. 아니 정자(인간의 쉼터)의 옆 신목(상수리나무)·신석(돌부처를 닮았다)이 아직도 생생하니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셈이다.

▼ 아직은 마을길이다. 하지만 ‘지네재’라는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 뒤라도 돌아볼라치면 위태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이곳 출신 정규화 시인의 기억을 빌어 잠깐 살펴보자.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인 조리터에 마을이 있으니 상갈티라 한다. 상갈티는 진등과 암몰과 중몰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중략- 사방을 막은 산은 냇물을 흘려보내려고 남쪽만 열려 있었고 그 길을 따라 6·25전쟁의 피비린내가 몰려오기도 했다. -중략- 산비탈엔 가을마다 산국화가 하얗게 피어 있고 무더기 무더기로 모여 있는 억새더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 길을 나선지 10분. ‘정돌이 민박’을 스치듯 지난다. 자기 집에서 묵었던 여행객들을 하동호까지 길라잡이 해준다는 진돗개 ‘정돌이’로 유명한 집이다. 따라오는 이들 중 뒤처지는 사람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자리에 멈춰 기다려주기까지 하던 명물이었다. 오죽했으면 개의 이름으로 상호까지 삼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2년 전 안내를 자처하고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 민박집 우물.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 산골의 매화(梅花)는 꽃망울을 한창 부풀리는 중이다. 이른 봄의 매화는 눈꽃이 덮인 양 화사한 모습으로 봄소식을 전하지만, 2월의 매화나무는 아직 무채색으로 텅 비어있었다.

▼ 8분쯤 더 걸었을까 물레방아가 예쁜 민가(이곳의 벅수는 거리표식이 없다) 앞에서 오른편으로 난 농로로 들어선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벅수 : 하동호 10.1㎞/ 위태 1.4㎞)에서는 왼편이다. 지내재로 오르는 산길로 접어든다고 보면 되겠다.

▼ 톱니바퀴가 달려있는가 하면, 비록 벗겨져 있지만 체인도 눈에 띈다. 그렇다면 얼마 전까지 이 물레방아로부터 동력을 얻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걸 또 가사생활에 필요한 동력원으로 삼았을 거고 말이다. 참고로 물레방아는 ‘물레(실을 자아내는 둥그런 틀)’와 ‘방아(곡식을 찧는)’의 복합어이다. 물에서 얻은 동력으로 방아를 돌리는데, 방아가 없어진 요즘은 그 동력을 소소한 일상생활에 활용해가는 추세다.

▼ 골짜기로 들어서자 온통 감나무 세상이다. 감나무 생육의 최적지라는 산청 땅을 벗어나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거기다 지리산 줄기인 것도 같다. 지리산의 높은 일교차가 최고 품질의 곶감을 만들어 낸다니, 그 달콤한 유혹을 어찌 떨쳐낼 수 있겠는가.

▼ 길은 돌(石)축대 사이사이를 누비며 나있다. 우리네 조상들이 흘린 땀의 흔적들이다.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던 시절, 우리네 어버이들은 돌멩이 하나하나 쌓아올려 다랑이 밭을 만들었고, 그 밭에서 나온 잡곡으로 겨우겨우 보릿고개를 넘겼다.

▼ 재만 넘으면 편해질 것 같은데, 산등성이는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다. 경사도 누그러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라고 해봐야 길이가 500m에 불과하니, 느릿느릿 걷다가 그마저도 힘들 경우 잠시 쉬어가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야 오율마을과 위태마을을 잇는 ‘지네재(해발 416m)’에 올라설 수 있었다. ‘지네재’라는 지명은 주산(오대주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이 지네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게 또 좌우로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이라고 해서 능선 전체를 ‘무등(舞)’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고갯마루에는 벅수(하동호 9.6㎞/ 위채 1.9㎞) 외에도 이곳이 주산의 등산로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지리산 능선을 보며 걷기에 좋다는 주산 등산로가 오른쪽으로 나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반대편 오율마을을 향해 내려간다. 길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하지만 내려서는 도중 만나게 된다는 백궁선원의 팻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대사의 옛터를 잠시 들여다볼 요량이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참고로 백궁선원은 ‘국선도’의 기(氣) 수련장이다. 하지만 내 관심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오대사(五臺寺)라는 절간에 있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가 ‘큰 법이 머무를 곳(大法住處也)’이라 하고, 진억(津億, 고려 인종 때 승려)이 연 ‘수정결사(水精結社)’에 3천명이나 참여했을 정도라니 그 터가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 지네재에서 7분쯤 걸려 내려선 임도에는 쉼터(벅수 : 하동호 9.2㎞/ 위태 1.3㎞)가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보다는 아까 고생고생하며 올랐던 지네재 고갯마루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다.

▼ 쉼터의 주인은 편의시설인 돌의자도 그렇다고 벅수 등의 안내시설도 아니다. 그 옆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더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앗! 남근석이다’라는 내 탄성에 쉬고 있던 여성분이 헛웃음을 짓는다. 조금도 안 닮았다나? 하지만 몇 십억의 남성 가운데 저렇게 생긴 것 하나 없을까?

▼ 주산(831m)의 이정표(정상 1.9㎞)와 ‘등산안내도’도 세워져 있었다. 주산(主山)의 옛 이름은 오대주산(五臺主山). 조선 후기 ‘두류전지(頭流全志)’를 쓴 김선신(金善臣, 1775-1855)은 주산을 ‘오대산’이라 일컬으며 지리산의 명승지 중 하나로 꼽고, ‘시천 서쪽으로 한 봉우리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열 지어 서 있는데 마치 대(臺)와 같다’고 했다. 참! 인근 산청(시천면) 땅에 오대주산(642.6m)이 하나 더 있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시멘트 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자 닥나무(한지의 원료)가 많다는 ‘오율(五栗)’ 마을이다. 고작해야 두서너 채의 민가가 전부인 산골인데, 둘레길이 지나는 이곳은 오율마을(밤실·불당골·여차골·시양골·오대)에 속해있는 ‘오대’라는 단위부락이다. 옛날 이 부근에 ‘오대사’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 집안이야 모르겠지만 입구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꾸며놓았다. ‘ㅏ’자 모양의 틀이 플라스틱 물통을 뒤집어썼는가 하면, 대야를 탐험가의 모자삼아 쓴 장승은 지금 기타 연주가 한창이다. 낡은 우체통에 인쇄물 하나 꽂혀있는데, 저 바위에 쓰인 ‘소승당’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 마을은 가구 수도 적은데다, 그나마 있는 집들마저도 평일에는 비어있는 경우가 많단다. 하지만 매실을 이용한 와인 생산업체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제법 활기를 띠고 있단다. 그렇다면 마을을 통과하는 내내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대체 뭘까?

▼ 궁항(옥종)저수지 방향으로 4~5분쯤 내려가다 삼거리(벅수 8.7㎞/ 위태 2.8㎞)에서 ‘5시’ 방향의 임도로 빠져나온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그냥 길 따라 무심코 걷다 보면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둘레길이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둘레길이 하도 급하게 꺾어 올라가기 때문에 자칫 길을 놓치기 쉽다는 얘기이다.

▼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50m쯤 오르다가 이번에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 이후부터는 산길을 따른다. 돌계단을 놓아야만 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10구간(위태-하동호)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보면 되겠다. 누군가는 산길의 난이도는 길을 가다 뒤돌아보는 횟수에 비례한다고 했다. 자꾸만 멈춰 서서 뒤를 보아진다는 것이다.

▼ 스틱에 의지해가며 힘들게 올라오는 순례꾼들의 모습에서 동병상린(同病相燐)을 느낀다. 저리도 힘들어하지만 그 고생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 첫 번째 안부(벅수 : 하동호 8.5㎞)에서 한숨 돌리는데, 오히려 더 가팔라진 오르막길이 우리에게 손짓을 보내는 게 아닌가. 문득 난이도가 ‘9구간’ 수준이라던 이대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말만 믿고 스틱을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되돌아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 지리산둘레길을 순례길로 분류하는 이들도 있던데, 코로나가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미리 걷는 셈치고 걸어보자.

▼ 오르막과의 힘겨룸을 시작한지 15분. 벅수(하동호 8.4㎞/ 위태 3.1㎞)가 버티고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그런데 고생고생해가며 올라온 보람도 없이 이름조차 없단다. 하다못해 두 마을을 합성한 이름(오율+궁항)이라도 지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거기다 두 마을의 처녀·총각에 얽힌 애틋한 사랑이야기라도 하나 덧붙이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게고 말이다.

▼ 고개를 넘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사자성어에 딱 어울리는 상황으로 변한다. 갑자기 길이 고와졌기 때문이다. 솔숲을 헤집으며 난 오솔길이 경사까지 없는 것이다.

▼ 이때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궁항저수지가 손에 닿을 듯이 나타난다. 옥종면 일대의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이다.

▼ 이곳은 지리산. 산이 크면 품고 있는 동물까지도 몸집을 부풀리는가 보다. 조심하라는 야생동물이 늑대나 멧돼지가 아니라 반달곰인 걸 보면 말이다. 지리산에 반달가슴곰의 방생을 시작한지도 어언 19년, 그게 세를 부풀리는가 싶더니 이젠 텃새까지 부리는 모양이다.

▼ 솔잎이 깔린 흙길은 스펀지 위를 걷는 듯 푹신하다.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진한 솔향기. 산을 오르느라 지쳐있던 내 심신은 어느새 말끔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 그렇게 20분쯤 진행하자 둘레길은 임도(벅수 : 하동호 7.4㎞/ 위태 4.1㎞)로 내려선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 임도를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궁항마을(벅수 : 하동호 7.0㎞/ 위태 4.5㎞)이다. ‘궁항(弓項)’이란 지명은 지형의 생김새에서 유래했다. 약 200년 전 김씨가 입거해 주변을 살펴보니 활(弓/궁)처럼 생겼더란다. 마침맞게 그 활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마을이 들어앉았기에 ‘활목(활의 목)’이라 부르다 한자로 변형하면서 궁항이 됐단다.

▼ 도로변에는 감사장 역할을 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로 내려오는 도중 만났던 팻말. 즉 주민들이 애써 가꾼 농작물에 손대지 말라던 내용과 연계시키면 되겠다. 그런 난처한 상황이 예상되는데도 둘레길 순례자들에게 길을 내준 주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 궁항마을에는 ‘새참사랑방’이 있다. 마을회관(2층)에 일회용 커피와 컵라면, 즉석밥 등을 비치해 두고 둘레길 순례자 스스로 양심껏 값을 지불하고 먹게 하는 ‘무인매점’이다. 참고로 하동권역의 새참사람방은 아까 지나왔던 상존티마을과 앞으로 지나게 될 서당마을과 원부춘마을에도 있다. 하나같이 인적이 드물어 간이매점이 들어서기 난감한 곳들이다.

▼ 마을회관 마당은 홍보의 장으로 꾸몄다. 지리산둘레길(하동호-위태)의 지도를 옛 기법으로 그려놓았는가 하면, 궁항마을의 지도와 마을에 대한 설명, 그리고 마을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꽃들을 월별로 분류해 전시하고 있다.

▼ 궁항마을은 새터·뒷골·안몰·양이터·빙이터·질매재 등의 자연부락을 합한 행정 단위이다. 마을회관이 있는 이곳은 ‘새터’, 새터의 뒤쪽 골짜기에는 ‘뒷골’이 있다. 새터에서 도로를 따라 서북방향으로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안몰’이고 왼쪽 길을 따라가면 ‘질매재’에 이른다. 질매재(궁항에서 묵계로 넘어가는 고개)로 오르다 개울 건너로 보이는 동편 마을은 ‘빙이터’이다.

▼ 잠깐의 눈요기를 즐긴 후 다시 길을 나선다. 궁항마을회관 앞에서 차도를 가로 질러 농로를 지나면서 길은 오르막 콘크리트 임도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도 대나무밭을 자주 만난다. 지난 9구간의 중태마을을 지나면서 보이기 시작한 대나무가 이제는 고개만 들면 눈에 가득 차오른다.

▼ 뒤돌아보면 ‘궁항마을(새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농촌 인구의 노령화가 사회문제가 되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곳 궁항마을은 다른 곳들과는 달리 해마다 정착민들이 늘어나고 있단다. 이중환(擇里志)의 택리지에서 거론되는 가거지지(可居之地)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배산임수에 위치하여 땅기운이 좋은 ‘지리’, 생업에 유리한 ‘생리’, 좋은 사람들이 있어 베푸는 ‘인심’, 풍광이 아름다운 ‘산수’...

▼ 얼마쯤 걸었을까 좌우로 길게 뻗어나간 낙남정맥의 안부. 즉 양이터 고갯마루가 눈에 들어올 즈음 ‘양이터 마을’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양씨(梁氏)와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피난 와서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선지 궁항마을에는 지금도 양씨와 이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단다.

▼ 이 구간은 편백나무 무리를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탓에 규모는 물론 작다. 그렇다고 지닌 향까지 작겠는가. 짙은 솔향이 코끝을 스치는가 싶더니 이곳까지 오면서 쌓인 피로를 한꺼번에 싹 쓸어가 버린다.

▼ 궁항마을을 출발한지 30분. 양이터재 조금 못미처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이곳(벅수 : 하동호 4.8㎞/ 위태 6.7㎞)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가로세로로 걸쳐진 저 파이프는 대체 뭐며,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두레박 모양의 통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서라! 상상은 예술을 낳고 예술은 지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면 되지 않겠는가.

▼ 근처 시멘트바닥에는 ‘우주사고’라고 적힌 스테인리스 판도 박혀있었다. 판에는 외계인의 실상을 알고 싶어 초대했다는 ‘ET’를 그려 넣었다. 저 ET는 영화에서처럼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절개지에 부딪혀 죽고 말았단다. 이전에 그려놓은 지형이 하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라나? 하지만 ET가 타고 왔다던 자전거는 언제부턴가 치워버렸다. 전시가 불가능할 정도로 낡았던 모양이다.

▼ 5분쯤 더 걸어 청암면과 옥종면의 경계인 ‘양이터재(해발 506m)’에 올라선다. 궁항리(옥종면)와 평촌리(청암면) 주민들이 넘나들던 고갯마루로, 이곳은 또 ‘낙남정맥(洛南正脈,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분기해 낙동강 남쪽을 아우르며 내륙과 해안지방을 구분하는 길이 230㎞의 산줄기)’의 한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민과 둘레길 순례자들, 낙남정맥 종주꾼들로 항상 붐빈다. 파고라와 화장실까지 갖춘 반듯한 쉼터를 만들어 놓은 이유일 것이다.

▼ 벅수(하동호 4.5㎞/ 위태 7.0㎞) 곁에 나란히 놓아둔 다섯 개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도법스님과 신영복 작가 등 지리산둘레길 조성에 기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글귀가 자연석에 적혀있다. 지리산둘레길의 시작은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였다고 한다. 지리산 댐 반대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지리산 살리기 운동으로 전환한 결과가 지리산둘레길이란다. 스님이 밥을 빌며 순례하는 수행이 탁발순례다. 밥을 빌려면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지리산둘레길의 가장 큰 특징이 지리산 자락 마을을 꼬박꼬박 방문하는 데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데 건너편에 지리산의 남부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깃대봉(981m)’이 있다. 깃대봉과 성제봉(1,116m)을 연계해서 다녀온 게 15년쯤 되었나? 하지만 몽중루님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저게 깃대봉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몽중루님의 해박함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잠시 후 임도를 버리고 숲속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초입에 벅수(하동호 4.1㎞/ 위태 7.4㎞) 말고도 팻말 하나가 더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이 구간(지름길)은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하게 되므로 임도를 따라 우회하라는 안내판이다.

▼ 들머리에는 작은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길을 나서기 전에 현재의 기상상태를 확인해 보라는 배려 차원의 공간일지도 모르겠다. 장마철에는 이 구간을 이용할 수 없으니 말이다.

▼ 구절초·닭의장풀·얼레지·엉겅퀴·현호색 등 10구간에서 만날 수 있는 야생화를 게재한 안내판도 보인다. 다우니(P&G)와 함께하는 지리산둘레길 들꽃보호 캠페인. 다우니(섬유유연제)와 페브리즈(방향제)로 유명한 ‘한국 P&G’가 ‘사단법인 숲길’과 함께 지리산둘레길의 들꽃 보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얘기일 것이다.

▼ 캠페인 차원에서 세워놓은 다른 팻말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국수나무. 들꽃뿐만 아니라 둘레길 주변의 모든 식생들을 함께 보호하고픈 모양이다.

▼ 길은 계곡을 끼고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서너 곳에서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비가 많이 올 때 우회로를 따르도록 한 이유이다. 아무튼 이 구간은 그 어느 둘레길보다 아름답다.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하늘을 가린 울창한 나무는 연신 상큼한 향을 품어낸다. 그래선지 냇가에 주저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선 숲이 지닌 진한 생명력을 한껏 만끽할 수 있다. 특히 후반부에 만나게 되는 대나무 숲은 아예 축복이다. 대나무 터널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마치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경계처럼 보인다. ‘이 숲에 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이 길을 감히 걸어가도 될까요?’ 누군가 말했다. 다른 세상은 무턱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 울창한 대숲은 한낮인데도 해를 삼켜버렸다. 그 사이를 헤집고 한줄기 빛살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온다. 대나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성이랄까?

▼ 대나무 숲이 끝나자 이번에는 편백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숲에는 작은 쉼터까지 만들어놓았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아니겠는가. 치료의 효능 외에도 심신안정과 피로회복의 기능까지 갖고 있으니, 걷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느긋하게 쉬면서 힐링까지 얻어가라는 모양이다.

▼ 30분 정도 이어지던 숲길이 끝나자 길은 또 다시 임도와 만난다. 아까 양이터재 부근에서 헤어졌던 임도다. 그래선지 벅수(하동호 2.6㎞)와 우회길 안내도에 들꽃보호 캠페인 표지판까지. 아까 들머리에서 만났던 시설물들을 똑 같이 세워놓았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이때 하동호와 그 주변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렇게 10분쯤 내려오자 하동호가 정원처럼 펼쳐지는 ‘나본마을(벅수 : 하동호 2.0㎞/ 위태 9.5㎞)’이다. ‘나본(螺本)’이란 지명은 나동(螺洞, 고동골)과 이곳 본촌(本村, 상배몰)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한다. 하동호가 생기면서 마을은 물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순환도로변에 몇 채의 집만이 남아 마을의 이름과 명맥을 이어간다.

▼ 나본(본촌) 마을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마을 앞 호숫가의 대형 쉼터에 지리산둘레길의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나본마을에서 하동호 댐까지는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로 하동호의 비경을 만끽하며 걷기 딱 좋은 구간이다. 하동호를 한 바퀴 도는 ‘하동호둘레길’과 겹치는 구간이기도 하다.

▼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산과 물이 만들어낸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청학계곡과 묵계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갇혀 산중호수를 이루면서 저런 비경을 만들어냈다. 저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청학동. 최치원이 매료돼 청학을 타고 신선이 되었다는 풍경이 저랬을까?

▼ 탐방로는 공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호숫가를 따라 난 데크로드는 기본. 곳곳에 작은 꽃밭을 만들었는가 하면, 공간이 조금 넓다싶으면 정자까지 갖춘 소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다는 ‘알프스 하동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 둑(dam)에 이르자 수력발전소에서나 볼 법한 시설이 눈에 띈다. 맞다. 이곳 하동호에도 소수력발전소가 들어서있다고 했다. 작은 규모이지만 영농기인 4월부터 9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용수로를 통해 흘러가는 물을 재활용해 전력을 생산한단다.

▼ 댐에 올라서면 하동호(河東湖)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하동호는 1985년 착공하여 1993년에 준공한 농업용 댐에 청학동 계곡과 묵계 계곡의 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거대한 산중호수이다. 이 물로 하동군 10개 읍·면과 사천시 서포면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 인공섬도 두 개나 만들어 놓았다. FRP로 만들었다는데 한가운데 소나무까지 심어져 있었다. 호숫가에 들어선 비바체리조트에서 조경용으로 만들어놓았지 않나 싶다.

▼ 날머리는 하동호관리소(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하동호의 빼어난 풍광을 눈에 담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둑길이 끝나면서 호수를 등진 하동호관리소(한국농어촌공사)가 나타난다. 아담하고 색감이 정겨운 건물 앞 주차장이 10구간의 날머리이다. 관리소 건물 왼쪽에는 엄청나게 큰 표지석과 함께 ‘망향의 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망향(望鄕)은 고향을 그리워하다는 뜻. 그 고향은 하동호가 생기면서 물속에 잠기게 된 마을들일 것이다. 새터·몰랑몰·가마소·고래실 같은 정겨운 이름들이 저 푸른 물속에 잠겨있단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1.07km. 높다란 고개를 세 개나 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10구간과 11구간의 시·종점을 알리는 지리산둘레길 엠블럼(emblem)은 댐의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벅수(위태 11.5㎞←하동호→삼화실 9.4㎞)’와 함께이다. 또한 이곳에는 위태마을에서 대축마을까지 3개 구간(10~12)의 지도를 게시해 둘레길 나그네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지리산둘레길 9구간(덕산-위태)

 

여행일 : ‘22. 1. 15(토)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시천면과 하동군 옥종면 일원

여행코스 : 덕산마을(0.4km)→천평교(3.3km)→중태마을(2.8km)→유점마을(1.1km)→중태재(2.1km)→위태마을(거리 및 시간 : 9.7km/ 실제는 12.35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9구간인 덕산-위태 구간을 걷는다. 5개 코스(60.2km)로 이루어진 산청 권역의 다섯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9.7km밖에 되지 않지만 낙동강 수계인 덕천강과 지리산 줄기인 두방산과 오대주산 등 다양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특히 남명 조식선생을 모시는 덕천서원은 꼭 둘러보아야 할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꼭 배워가 보자.

 

▼ 들머리는 시천면사무소(산청군 사천면 사리)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지리산(중산리) 방향으로 달리다가 사리교차로(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우회전하여 ‘남명로’로 들어서면 잠시 후 9코스의 시점인 ‘남명기념관’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사리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선생이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머무르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선생 탄생 500주년(2004년)을 계기로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건립했다.

▼ 덕산마을(산청군 시천면)에서 위태마을(하동군 옥종면)까지. 거리가 9.7km 밖에 되지 않는데다, 구간 대부분이 평지길이라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걸을 수 있다. 주요 볼거리로는 남명기념관과 덕천서원, 중태재의 대나무 숲이 꼽힌다.

▼ 기념관 옆 민가의 담장에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의 호)에게 보낼 시를 쓰고 있는 남명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다.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부친을 따라 한양에서 살다가 부친 사후 처가인 김해의 신어산 자락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48세에 고향으로 돌아가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그의 나이 61세에 이르자 이곳으로 들어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전에 대한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사후 그의 공이 인정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까지 내려졌다.

▼ 트레킹을 나서기 전 남명기념관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정문인 성성문(惺惺門)을 지나면 남명과 관련된 서책과 유품, 사진자료 등을 전시해놓은 기념관이 있다. 참! ‘성성문’은 선생이 허리에 차고 다녔다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에서 따왔다. 그는 성성자를 마음을 다스리는 ‘경’의 도구로, 경의검은 사사로움을 베어내는 ‘의’의 도구로 삼았다고 한다.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였지만 검과 방울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마치 무사가 몸을 단련하듯 자신의 마음을 단련한 선비, 남명의 실천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케 해준다.

▼ 기념관의 왼편에는 선생의 동상을 가운데 놓고 네 개의 빗돌이 도열해 있다. 왼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神道碑)다. 그 옆에 한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한글로 번역한 국역비(國譯碑)를 따로 세웠다. 오른편의 두 빗돌에는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임금(명종)께 올린 상소문(上疏文) 및 선조에게 올린 무진봉사(상소문)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이중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이유와 국정문란을 비판하는 내용을 적은 상소문(乙卯辭職疏)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글에서 회자된다. 절대 권력자이던 왕을 ‘고아’, 왕의 어머니이던 문정왕후를 ‘궁중의 일개 과부’라 부르며 왕을 꾸짖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예로부터 직언은 임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조정의 과실을 바로잡았다. 또 백성을 고초에서 구했다. 지식인의 직언이 그리운 시대다.

▼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신명사도(神明舍圖)라는 글귀가 가장 먼저 길손을 맞는다. 이는 선생이 심성수양의 요체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성곽의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체의 내외부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의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한다는 결연한 의지란다.

▼ 남명의 영정은 방울을 2개 차고 있었다. 앞에서 얘기했던 ‘성성자(惺惺子)’이다. 선생은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신을 되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영정의 오른쪽에는 선생의 제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남명 조식선생 화상찬’이란 글이 붙어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지은 제문의 일부분으로 서예가 ‘오산 강용순’이 썼단다.

▼ 기념관 내부. 남명 사상의 근간은 경의사상(敬義思想)이다. 경(敬)은 삼가고 두려워하며 순간순간 정신을 집중하고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의(義)는 주어진 상황에서 사리를 판별하는 올바름을 의미한다. 즉, 순간순간 정신을 집중하면 바깥의 외물(外物)에 대해 함부로 동요하지 않으며, 항상 올바르게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신이 나태해 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란 문구가 새겨진 칼(敬義劍)을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 여담 하나. 이황과 조식은 한창 공부할 시기인 나이 스물에 기묘사화를 겪었다. 그리고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다.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던 이황은 을사사화를 보면서 자신의 처세가 옳았음을 확인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명종이 그를 수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청량산 아래 도산서당에서 후학들과 공부에만 열중했다. 조식 또한 명종이 수차례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천왕봉 아래 이곳에다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 기념관의 뒤 ‘여제실(如在室)’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내부는 엿볼 수 없었다.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뜻의 이 가묘(家廟)는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조씨(南平 曺氏, 첫째 부인), 숙부인 송씨(恩津 宋氏, 두 번째 부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하지만 종택은 따로 없다고 한다. 종손도 오래전 ‘파(破)종손’ 된 뒤 새로 봉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 남명기념관의 맞은편은 ‘산천재’ 구역이다. 산천재 경내에는 남명 사후 선조가 나라의 큰 어르신이 돌아가심을 애도하며 하사한 제문을 새긴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 널따란 옛터의 맨 안쪽에는 산천재(山天齋, 주역에서 따온 이름이란다)가 들어앉았다. 남명은 61세에 합천 삼가에서 이곳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 서실 산천재를 지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갈고닦은 학문과 사상을 제자들에게 전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포 정탁,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수우당 최영경,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덕계 오건, 송암 김면 등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정계와 학계를 이끌었고 내암과 망우당, 송암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란 극복에 앞장섰다.

▼ 산천재 뜰에는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남명매(南冥梅)’가 자란다. 남사예담촌의 원정매(元正梅) 및 단속사 터의 정당매(政堂梅)와 함께 산청3매로 불리는데,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가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오른 모습이다. 수령이 460년이나 되는 탓에 윗부분의 가지 일부가 말라 죽기도 했으나 봄이 되면 아직도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을 가득히 피워낸단다. 참고로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나무로 귀한 존재였다. 기껏해야 동네 어귀나 사대부집 뜰에 한 두 그루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 앞마당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려온 덕천강도 물론 함께이다.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남명의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명의 그런 처사적(處士的) 삶은 산천재 벽면에 그려진 ‘허유소부도(許由巢父圖)’에서도 엿볼 수 있다. 허유와 소부는 요임금 시대 기산에 살던 전설적인 은자(隱者)들이다. 요임금이 어느 날 허유를 불러 천하를 선양하려 하자 그는 이를 사양한다. 이어 허유는 다시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며 영수 물가에서 귀를 씻었다. 친구 소부는 한술 더 뜬다. 소부는 영수에 소를 몰고 와서 물을 먹이려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까닭을 듣고는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다.

▼ 9구간 및 8구간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은 산천재를 둘러싼 담벼락의 왼편 끄트머리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그 곁을 지리산둘레길의 엠블럼(emblem)인 ‘벅수’가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 산천재를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덕천강변으로 내려서자 ‘지리산국립공원 50주년 기념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게 1967년.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공원을 조성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우리나라 1호 국립공원에 어울리는 사업이라고나 할까? 안내판은 ‘굿 포토 존’이라며 천왕봉을 배경으로 멋진 추억을 남겨보란다. 그러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공원은 지리산을 형상화 했다. 흙을 도톰하니 쌓아올렸는가 하면, 그 위에다 지리산을 상징하는 기암들을 올려놓았다. 그 뒤로 진짜 천왕봉이 솟아오르고 있으니 터를 제대로 잡은 셈이다. 지리산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 된 반달곰 가족도 배치했다. 뒤로 보이는 천왕봉까지 함께 담으면 인생샷이 될지도 모르겠다.

▼ 공원 뒤에는 ‘파크골프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파크골프(park golf)란 나무로 된 채를 이용해 역시 나무로 만든 공을 쳐 잔디 위 홀에 넣는, 말 그대로 공원에서 치는 골프놀이이다. 장비나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세게 휘둘러도 멀리 안 나가는 까닭에 최근에 부쩍 인기가 높아진 레포츠이다.

▼ 덕천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나무 숲을 조성하는 등 강변을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

▼ 남명이 터를 잡은 스토리를 지자체에서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다. 남명 사상의 보급을 위해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을 들어앉혔다. 입소자들을 대상으로 청렴·인성·예절을 주제로 한 ‘선비문화체험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시설 인프라는 물론이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까지 끼고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단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벤치와 정자는 기본. 심지어는 비올 때를 대비해 요런 터널형의 산책로까지 만들어놓았다.

▼ 면단위의 장 치고는 제법 큰 규모인 ‘덕산 약초시장’도 주요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매 4일과 9일에 장이 서는데 지리산에서 채취한 약초가 주로 거래된다고 한다. 주말에는 특산물 장터도 열린다니 산나물이나 꿀 등 지역 농·특산물을 사보는 게 어떨까?

▼ 시간이 일러서인지 장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역 특산품을 만날 수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노점상 두엇이 곶감과 약초 등을 펼쳐놓고 있었다.

▼ 덕산시장 앞에서 ‘원리교’를 건넌다. 대원사계곡을 흘러내려온 덕천강의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다리이지만, 천왕봉에서 중산리계곡을 거쳐 내려오는 ‘시천천’까지 옆에 둔 모양새이다. 시천천의 물줄기를 합친 덕천강은 이곳에서 그 몸집을 한껏 부풀린다.

▼ 앗! 지리산둘레길의 8구간과 9구간은 ‘원리교’에서도 나뉘고 있었다. 벅수가 현재 위치를 ‘0’으로 삼고 위태와 운리까지의 거리를 각각 9.7km와 13.9km로 적어놓은 것이다.

▼ 다리 건너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대원사. 왼편은 중산리로 연결되는데 둘 모두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주요 길목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왼편 중산리 방향이다.

▼ 탐방로는 ‘원리교’를 지나 왼편으로 꺾어진 뒤 덕산중·고등학교 앞에서 또다시 왼편의 ‘천평교’를 건넌다. 그 사이에 남명의 시비(詩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겨세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듸오 나는 옌가 하노라>. 관직의 부름을 마다하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던 남명이 지리산을 선경의 대명사인 무릉도원에 빗대면서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노래한 시조이다.

▼ ‘천평교’로의 진행을 잠시 미룬 채 직진해본다. 그리고 덕산중·고등학교의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신 ‘덕천서원(德川書院)’을 만났다. 1576년 문인들이 세운 이 서원은 ‘강우(江右)48가(家)’의 본산으로 불린다. 낙동강 오른쪽 경상우도 유림의 본거지란 뜻이다. 그래선지 광해군 때는 사액까지 받았다. 하지만 대원군 시기 훼철을 피하지 못해 사라졌다가, 1926년에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서원은 단출한 규모로 이루어져 있었다. 홍살문과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을 연거푸 지나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그리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이 이루어지던 장소이고,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다.

▼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온다.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정여립 사건의 무고로 옥사한 고제(高弟) 수우당 최영경도 함께 모시고 있다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 덕산중·고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천평교’를 건넌다. 다리는 곶감축제(1.6-23)에 맞춰 내건 홍보용 깃발들로 뒤덮여있었다. ‘대한민국 대표과일, 산청곶감’. ‘산청곶감’의 원료감인 ‘고종시’가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산림청·한국과수농협연합회가 주관하는 ‘2021년 대한민국 대표과일 선발대회’에서 6년 연속 ‘최우수상’에 선정됐다는 자랑일 것이다.

▼ 다리를 건너는 도중 ‘시천천’의 물이 ‘덕천강’에 합류하는 양단수(두물머리)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명이 선경(仙境)이라던 바로 그 물줄기이다. 관직의 부름도 마다하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던 은둔자 남명은 지리산을 선경의 대명사인 무릉도원에 빗대며 그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 천평교 건너 ‘산청곶감 유통센터’에 이르자 금환낙지(金環落地)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일대(원리·사리·천평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형상이 금가락지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들녘 어딘가에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민초들은 그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삶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을 게고 말이다.

▼ 천평교를 건넌 둘레길은 자동차가 유(U)턴을 하듯이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는 조금 전 거슬러 올라왔던 덕천강의 물줄기를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내려간다. 강변길 오른편은 ‘천평(川坪)’. 냇가에 자리한 들녘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 강변길을 걷다보면 아까 눈에 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다만 나타나는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다. 어느 여행가는 ‘되감기 화면’이란 멋진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 ‘둘레길’은 덕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모양새이다. 그 거리는 대략 3km. 그게 부담스럽다면 산천재 근처의 징검다리(벅수 : 위태 8.2㎞/ 덕산 1.5㎞)를 이용하면 된다. 실제 산천재에서 만난 어느 팀(여행사에서 진행하는 것 같았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 탐방로는 ‘곶감축제’ 깃발이 펄럭이는 20번 국도의 교각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 200m쯤 더 걸었을까 ‘숲&물 펜션’을 스치듯 지난 탐방로는 덕천강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중태천’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 펜션 정원수의 기괴한 생김새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20년 전쯤 독일에 연수차 갔을 때 보았던 풍경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낭만가도로 유명한 ‘로텐부르크(Rotenburg)’로 기억되는데, 흉측스러울 정도로 뭉툭 잘라놓은 플라타너스(독일 친구는 마로니에라 우겼다)를 보며 감성이 여린 나는 당시 마음까지 아파했었다.

▼ 골짜기로 들어서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뀌어 버린다.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감나무뿐인 것이다. 맞다. 산청. 특히 이곳 덕산분지(시천·삼장)는 곶감의 본고장으로 알려진다. 덕산(德山) 지역의 감은 고려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의 감은 씨가 거의 없고 맛이 빼어나다는 게 특징. 조선 말엽 고종황제께 진상품으로 보내지면서 ‘고종시(高宗枾)’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이 고종시로 만든 곶감이 ‘산청곶감’이라는 브랜드가 됐다.

▼ 중태마을에 들어서자 감나무들은 그 밀도를 한층 더 높인다. 가히 곶감의 본고장이라 할만하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곶감은 맛 좋고 질 좋은 것으로 소문났다. 지난 2010년에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게 선물로 전달돼 감사 편지를 받기도 했으며, 2018 평창올림픽 때는 청와대 만찬의 후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쫀득하고 찰진 식감과 백분발생이 적은 투명한 선홍빛 자태가 이방인들의 기호에도 딱 맞아 떨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중태마을(벅수 : 위태 6.0㎞/ 덕산 3.7㎞)의 당산나무 아래는 ‘지리산둘레길 중태안내소’가 들어앉았다. 인증스탬프를 찍거나 트레킹에 필요한 정도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참! 이곳 중태마을은 오래전부터 닥종이 생산지로 유명했던 마을이다. 하지만 닥종이 소비가 끊기면서 지금은 닥나무 대신 감나무가 들어섰단다.

▼ 중태마을에서 멀어질수록 골짜기는 좁아진다. 소수로 다수를 막을만한 지형이랄까? 맞다. 이곳 중태마을은 동학혁명 때 마지막 녹두꽃이 떨어졌던 곳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추격하던 관군을 맞아 이곳에서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관군의 눈을 피해 농민군의 주검을 인근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가족들이 찾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농민군의 시체가 가매장되었던 골짜기는 지금도 ‘가장골’로 불린단다.

▼ 유점마을을 향해 오르다 보면 포장길 옆으로 중태천이 흐른다. 얼음 반 물 반인 개울 주변도 역시 감나무들 세상이다. 국민 간식인 곶감은 일반적으로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의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즘은 산청곶감도 이에 못지않게 입소문을 탄다. 위의 두 고장과 차별화 된 모양과 최고의 품질로 곶감의 차별화와 대중화를 선언했다. 최근에는 ‘곶감축제’까지 열고 있을 정도다.

▼ 울창한 대나무 숲속에 서너 채의 민가가 들어섰다. ‘지리산 선 단식원’. 뭔가를 위해 참선과 단식을 병행한다는 얘기일 게다. 하지만 체력을 더 중요시하는 나는 이렇게 둘레길을 걷는다. 육체적인 힘이 받쳐주어야만 나를 일깨워주는 정신도 맑아질 수 있지 않겠는가.

▼ 커다란 바위에 매달린 ‘놋점골 쉼터’란 팻말이 눈길을 끈다. 너럭바위의 위에서 잠시 쉬어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9구간은 이처럼 자연환경이나 오두막 등의 기존 시설물들을 쉼터로 활용하고 있었다.

▼ 유점마을 초입의 ‘지리산 천왕봉 죽염’ 간판이 귀에 익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죽염의 제조과정을 소개하던 어느 기사가 생각나서이다. 죽염을 만들려면 우선 3년 이상 된 직경 8~10cm의 대나무를 마디마디 자른 뒤 습기를 제거한다. 그런 다음 대나무에 천일염을 채워 1300도가 넘는 가마에서 4시간 이상 굽는다. 불이 꺼지면 12시간쯤 그대로 둔다. 이때 녹아내린 소금기둥만 남게 되는데, 이것을 분쇄기로 갈아 분말로 만든다. 이런 과정을 9번 반복하면 죽염이 탄생된다.

▼ 천왕봉죽염은 달걀노른자 맛이 난다고 했다. 유황성분을 머금은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금과 유황은 강력한 살균 작용을 해 병원균을 박멸시키고 피를 맑게 해준다. 면역력을 증진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다. 400m만 들어가면 된다니 짬을 내어 한 봉지 사갈까 보다.

▼ 골은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그래도 생육의 최적지라는데 감나무가 없겠는가. 맞다. 이곳 덕산분지 일대는 표토의 98.2%가 사양토·양토·미사질양토로 이루어져있어 감나무가 자라는데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거기다 지리산의 높은 일교차가 최고 품질의 곶감을 만들어 낸단다. 그건 그렇고 곶감은 호랑이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러니 까짓 코로나19 정도야 벌벌 떨며 도망치지 않겠는가. 새해 들어 첫 번째로 나선 지리산둘레길. 호랑이도 무서워할 패기로 올 한해를 시작해보자.

▼ 민폐를 막고자하는 노력은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감을 예로 들어보자. 나그네들에게는 그저 흔하디흔한 주전부리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주민들에게는 애써서 가꾼 자식처럼 소중한 재산이 아니겠는가.

▼ 감사의 뜻을 전하는 팻말도 보인다. 농작물 피해가 우려되는데도 길을 내준 유점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린단다.

▼ 트레킹을 시작하고 2시간쯤 지나 유점마을에 도착했다. 산꼭대기 바로 밑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유기(놋그릇)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 역시 우리나라는 믿음의 천국이다. 손가락으로 헤아려도 될 만큼 자그만 마을인데도 그럴 듯한 교회가 떡하니 들어서있는 걸 보면 말이다.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유점마을은 1938년부터 제7일안식일 교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단다. 유점이란 이름을 버젓이 놓아두고 ‘안식교 마을’로 불리는 이유이다.

▼ 유점마을은 대나무 숲속에 갇혀있는 모양새이다. 그러다보니 마을을 벗어나려면 대나무 숲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 그 숲속에서 시간이 멈춘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풍경을 만났다. 의자와 판자, 그리고 어린이 장난감 같은 소품들을 잔뜩 진열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여간 이색적이지 않다.

▼ ‘오늘도 당신은 따뜻하다’, ‘당신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달려온 당신 오늘도 수고 했어’. 누가 적었는지는 몰라도 하나같이 가슴에 와 닿는 말들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적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시편이 적힌 걸로 보아 안식일교회에서 꾸며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대숲을 빠져나오면 언덕배기에 수령이 꽤 되어 보이는 정자나무 몇 그루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유점마을에서 가장 오래 묵은 나무란다.

▼ ‘중태 정자쉼터’. 나무 아래 정자도 둘레길의 쉼터(벅수 : 위태 3.0㎞/ 덕산 6.7㎞)로 활용되고 있었다.

▼ 둘레길은 ‘중태재’를 향해 숨을 헐떡인다. 시멘트 포장길인데도 완연한 가풀막이다. 그런데도 주변은 온통 감나무 천지다. 어느 기자는 저런 풍경을 ‘산이 감나무 밭이고 감나무 밭이 산’으로 표현했었다. 그러면서 덕산장이 곶감장으로 유명한 이유를 저런 풍경에서 찾았었다.

▼ 중태재에 가까워질 무렵 가로수 대용으로 심어놓은 차나무를 만났다. 중태재를 넘으면 하동 땅.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시배지(始培地)다. 그런 사실을 알려주려는 의도일까?

▼ ‘밀원 조림지’라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수종이 ‘아카시나무’란다. 1960~70년대 치산녹화 사업 때 심었다가, 녹화사업이 종료된 다음에는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제거당한 비운의 나무가 아카시나무가 아니었었던가. 그런 나무를 밀원(蜜源). 즉 꿀을 채취하기 위해 다시 심는다는 것이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 유점마을에서 1km쯤 더 오르자 둘레길은 임도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선다. 벅수(위태 2.1㎞/ 덕산 7.6㎞) 옆에 벤치가 놓여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방금 준비해온 막걸리로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다.

▼ 둘레길은 이제 산길로 변한다. 처음으로 만나는 숲길, 그것도 보드라운 흙길이 반갑다. 경사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다.

▼ 그렇게 10분쯤 진행했을까 ‘위태재’에 올라선다. 주산(831m)과 깃대봉(오대주산 642m)을 잇는 능선의 안부이자, 산청(시천면 내공리)과 하동(옥종면 위태리)의 경계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고갯마루는 인근 주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소금이나 비료를 구하려는 덕산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었고, 하동사람들은 덕산장을 보기위해 오르내리던 고개다. 그들에게 이 고갯마루는 고된 다리품을 팔던 쉼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둘레길 나그네들의 쉼터로 변해있다.

▼ 벅수(위태 1.9㎞/ 덕산 7.8㎞)는 중태재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하동 사람들로부터는 ‘위태재’로 불린다고 한다. ‘갈치재’, ‘갈티재’ 또는 ‘갈퇴재’로도 불린다니 고개 하나에 이름이 다섯 개나 되는 셈이다.

▼ 위태리로 내려가는 구간은 편하기로 소문난 9구간 가운데서도 가장 편안한 길이다. 경사가 완만할 뿐만 아니라 보드라운 흙길이 흡사 양탄자 위를 걷는 것처럼 폭신폭신하기 짝이 없다.

▼ 잠시 후 대숲으로 들어선다. 숲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대나무들 천지다. 담양의 죽림이나 태화강의 십리숲길만큼은 아니어도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느낌의 대나무 숲길이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몸통도 거제의 ‘맹종죽’보다는 못해도 여간 굵은 게 아니다.

▼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대나무는 음이온이 다량 발생하여 신경안정과 피로회복 등 병에 대한 저항성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다. 숲길을 걸으며 머리가 맑아진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좋은 길을 열어준 주민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대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다. 대낮인데도 빛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그래서일까? 자못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 대숲이 끝나면 오솔길이 뒤를 잇는다. 오리나무 그늘의 벤치에서 그동안의 여정을 정리해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벤치에 앉자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고사리 밭’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농작물에 손대지 말라던 팻말은 저 고사리들에 대한 예방차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조금 더 내려서자 이번에는 아름다운 저수지가 반긴다. 손바닥만한 크기지만 그 빼어난 풍경만큼은 여느 명승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반영(半影)도 기막히다. 물속에 아랫도리를 담근 수양버들에 주변 산봉우리들까지 더해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런 경관을 감상해보라는지 두어 개의 벤치까지 놓아두고 있었다.

▼ 이후의 둘레길은 산자락을 따라 구불대는 농로를 따른다. 이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 산자락에 둥지를 튼 산촌은 저마다 개성 넘치는 풍경화를 그린다. 모두 실핏줄처럼 가는 지리산길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정을 나눈 이웃들이다. 이렇듯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자락에 살던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옛길을 복원해 놓았다.

▼ 내려오는 도중 또 다른 대숲을 만났다. 아니 터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까보다 오히려 한수 위이다. 대숲 사이로 청량한 초록바람이 흐른다. 사각사각 잎이 스치는 소리가 무척 상쾌하다.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풍경이라 하겠다.

▼ 날머리는 위태마을(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중태재를 내려선지 30분(덕산재에서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3시간). 위태마을에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앱이 찍고 있는 거리는 12.35km, 남명선생의 유적지를 꼼꼼히 둘러보았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큼 쉬운 코스였다는 반증도 되겠다. 참고로 위태마을의 옛 이름은 ‘상촌’이었다고 한다. 진등·안몰·중몰·괴정지 등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이곳은 ‘진등’이다. 둘레길 간이화장실과 버스정류소를 옆에 끼고 있다는 편의성 때문에 둘레길의 시·종점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 9구간과 10구간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벅수(하동호 11.5㎞←위태→덕산 9.7㎞)는 지금껏 걸어온 농로와 53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들과는 달리 지리산둘레길의 엠블럼(emblem)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지리산둘레길 7구간(성심원-운리)

 

여행일 : ‘21. 12. 4(토)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산청읍과 단성면 일원

여행코스 : 성심원(2.3km)→아침재(2.5km)→웅석봉 하부헬기장(6.4km)→점촌마을(1.5km)→탑동마을(0.7km)→운리마을(거리 및 시간 : 13.4km/ 실제는 13.11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7구간인 성심원-운리 구간을 걷는다. 5개 코스(60.2km)로 이루어진 산청 권역의 세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3.4km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 미터도 넘는 웅석봉의 8부 능선을 넘어야하기 때문에 지리산둘레길에서 가장 힘든 구간으로 꼽힌다. 대신 산청의 지리산둘레길 중 가장 호젓한 구간이라는 점도 기억해 두자.

 

▼ 들머리는 성심원(산청군 산청읍 내리 풍현마을)

통영-대전고속도로 산청 TG를 빠져나와 좌회전하여 산청교차로(산청읍 지리)까지 온 다음, 우회전하여 3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강 건너에 있는 성심원이 눈에 들어온다. 6구간과 7구간의 경계인 성심원의 정문은 국도를 빠져나와 ‘성심교’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성심원은 가톨릭 재단법인 프란체스코회(작은형제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이다. 당초 프란체스코회 중심의 ‘한센인 정착 자립마을’이었으나 현재는 한센인 생활시설과 중증장애인시설이 하나로 통합돼 운영되고 있다.

▼ 산청읍 내리의 성심원에서 단성면의 ‘운리’까지. 거리는 13.4km(어천마을을 경유하면 2.7km가 늘어난다) 밖에 되지 않으나 웅석봉의 턱밑인 800m고지까지 올라가야 하는 힘든 구간이다. 또한 탑동마을까지 내려가는 임도도 지루할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에 둘레길 순례자들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아 하는 편이다.

▼ 7구간의 시작점은 성심원의 정문이다. 그런데 성심원은 오늘도 통행금지란다. 길을 나서기 전 ‘십자가의 길’을 걸어볼까 했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제 성탄절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예수의 사형 판결’을 시작으로 ‘무덤에 안장됨’까지 총 14개로 구성된 십자가의 길. 성탄절을 맞는 마음가짐으론 이보다 더 나은 게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벅수가 오늘은 등산용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깜빡 잊고 놓아두고 간 것인지는 몰라도, 길 떠나는 나그네들에게는 묘한 감회를 제공한다.

▼ 어천마을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떠나는 나그네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볼거리는 ‘나루터’다. 다리가 놓이기 전 성심원은 철선(鐵船) 한 척이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참고로 음성 나환자들의 집단 정착촌인 풍현마을(성심원)은 1959년에 문을 열었다. 그게 62년, 하지만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많은 갈등과 치유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나와 다르다’는 편견으로 사람이 사람을 냉대하던 시절이 우리 주변에 만연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리도 1972년이 되어서야 놓인다. 섬 아닌 섬에 갇혀서 죄인처럼 살아야만 했던 것

▼ 안내판은 나루터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1972년에 놓인 다리는 두 번이나 유실되었고, 덕분에 이 나루터는 세 번째 다리가 놓인 1988까지 제 몫을 수행했단다. ‘사랑은 전염성이 있지만 음성 나환자는 전염성이 없다’는 계도성 문구는 이제 흘러간 옛 얘기가 되었지만, 이제라도 동반자로 사는 게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곳(성심원)으로 발전했다니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5분. 경호강을 왼편에 두고 강변길로 곧게 뻗어나가던 둘레길이 경호강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임도를 이용해 산기슭으로 파고든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둘레길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고, 다른 하나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나무다리를 건너란다. 다리를 건너면 어천마을로 연결된다. 예전엔 ‘어리내’라 하고 우천(愚川)으로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어천(漁川)으로 변한 산골마을이다. 웅석봉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마을 앞을 지나는데 이 개울에 쏘가리며 뱀장어·가재·메기·꺽지 등이 바글바글 했기 때문이란다.

▼ 벅수(운리 12.6㎞/ 성심 0.8㎞)도 두 방향 모두에 붉은색을 칠했다. 마음에 드는 방향을 골라잡으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그 보증은 다리 앞의 ‘구간별 안내도’가 해준다. 본래의 루트는 오른편의 임도이나, 왼편의 어천마을 방향으로 가더라도 이따가 아침재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이어서 산골짜기를 숨 가쁘게 거슬러 올라간다.

▼ 웅석봉(熊石峰)은 ‘곰’의 전설을 안고 있는 산이다. 그에 딱 어울리는 현수막이 걸려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반달가슴의 활동지역이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반달가슴곰의 방생을 시작한지도 어언 19년, 세를 부풀리는가 싶더니 이젠 텃새까지 부리는 모양이다.

▼ 길가엔 벌통도 놓여있었다. 꿀은 곰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저것은 분명 곰이 아닌 사람의 소유이다.

▼ 숨 가쁘게 오르던 임도가 끝내 ‘갈 지(之)’자를 쓰고야 만다. 곧장 뻗어나가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얘기일 것이다.

▼ 숨도 고를 겸해서 고개를 돌리자 정수산과 둔철산이 눈에 쏙 들어온다. 그 산자락에는 다랑이논으로 둘러싸인 범학마을이 들어앉았다. 국보 제105호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이 발견된 곳으로, 탑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어천마을에서 성심원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길 정상에 자리한 ‘아침재’에 올라섰다. 성심원 쪽에서 보면 아침이 밝아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곳은 아까 어천마을로 나뉜 순환코스가 다시 합쳐지는 ‘삼거리’이기도 하다.

▼ 하지만 벅수(운리 11.1㎞/ 성심 2.3㎞/ 성심 5.0㎞)는 어천마을 방향은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표지판이 떨어져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구간별 안내판’가 현재의 위치를 알려준다.

▼ 합체를 이룬 임도는 이제 점점 깊은 산속으로 파고든다. 이때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키는 철조망이 눈에 띈다. 얼마나 많은 산악회가 이곳을 찾았으면 저리도 많은 리본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을까?

▼ 아침재 부근에서 어천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저 일대는 한국전쟁 때 웅석봉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파르티잔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던 곳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대개 그렇듯이, 개발 붐을 타고 땅값이 오르면서 마을을 지키며 살아 온 주민들은 대부분 떠났다. 주민이 떠난 자리에 펜션과 별장 같은 집들이 들어섰다. 그게 이국적 뉘앙스를 풍기면서 이방인이 자주 찾는 마을이 되었다.

▼ 한결 나긋해진 임도를 따라 걷다가 특이한 표지석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119 농원(벅수 : 운리 10.8㎞/ 성심원 2.6㎞)’의 표지석인데 농원의 이름과 전화번호는 그렇다 치고 주인장의 인물사진까지 자연석에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의 얼굴이 얼마 전 작고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쏙 빼다 닮았다.

▼ 잠시 후 둘레길은 웅석사(熊石寺)를 스치듯 지나간다. 암자라고 해야 걸맞을 정도로 작은데다, 생김새도 여느 여염집과 다름없다. 그래도 ‘절 사(寺)’자가 들어간 어엿한 사찰이다.

▼ 임도는 포장과 비포장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길을 걷다보면 붉고 보드라운 흙이 속살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때 산청을 대표하던 특산물인 ‘고령토’다. 질 좋기고 소문난 산청의 고령토는 선별 과정을 거쳐 많은 양이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 길을 걷다보면 출입을 금한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판을 심심찮게 만난다.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보고 야속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민들의 심정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동안 이 길을 지나간 많은 사람들이 주민에게는 자식처럼 소중한 재산인 농작물을 함부로 꺾거나 채취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둘레길은 임도를 벗어나 개울(벅수 : 운리 9.6㎞/ 성심 3.8㎞)로 내려선다. 웅석봉으로 올라가는 여러 등산로 가운데 하나인 ‘어천마을 코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1983년 11월 23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웅석봉은 이밖에도 밤머리재와 지곡사, 바람재(성심원), 청계리 등 다양한 곳에서 오를 수 있다.

▼ 내려선 어천계곡(상류이니 대통골이 맞을 수도 있겠다)은 만추(晩秋), 아니 완연한 초겨울의 풍경을 보여준다. 떨어진지 이미 오래인 낙엽은 물론이고, 끝물로 남아있는 단풍까지도 모두 말라 비틀어졌다. 그러니 울긋불긋한 단풍은 이미 오래 전 얘기가 되어버렸다.

▼ ‘어린내’라고도 불리는 어천계곡은 개울 수준이었다. 웅석봉이라는 거대한 산줄기에 어울리지 않게 수량도 적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고나 할까? 개울물에 손을 담그자 소스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온다.

▼ 이제 웅석봉으로 오를 차례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가파르다. 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고나 할까? 가히 웅석봉(熊石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산세라 하겠다. ‘곰바위산’이라는 게 본디 정상에서 놀던 곰이 북사면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니 말이다.

▼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면서 고도를 높여간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오가는 폭이 좁은 탓에 버거움까지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 ‘이건 둘레길이 아니다’를 외쳐대며 오르는데 ‘구호지점 표시목’이 눈에 들어온다. 맞다. 이 정도로 험한 곳이라면 저런 시설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밖에 없겠다.

▼ 독일의 신낭만파 시인 ‘칼 부세(Carl Busse 1872-1918)’는 사람들의 말을 빌려 산 너머 고개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찾아가보니 산 너머 고개 너머 더욱 더 멀리 행복이 있다고 하더란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과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내다보기에 이제 다 올라왔나 싶었는데, 막상 올라와보니 하늘은 진행방향 저만큼으로 성큼 도망가 있지 않겠는가.

▼ 돌탑도 눈에 띈다. 하긴 이렇게 험한 곳에 어찌 돌탑 하나 없겠는가. 그것도 둘레길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하나씩만 소원을 빌었었어도 돌멩이는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 오르는 게 버거운 나그네는 멈추는 횟수를 늘려갈 수밖에 없다. 호흡도 가다듬을 겸해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그때마다 정수산과 둔철산을 품은 산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난다. 그 산줄기는 쉬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수위를 낮추어 간다.

▼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겁이 덜컥 난다. 내가 과연 정상(여기서는 헬기장을 말한다)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나보다도 함께 걷고 있는 집사람이 더 걱정이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지인의 한마디. 산에 이골이 나다시피 한 친구인데, 산이 높고 험할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르라고 했었다. 그러다보면 정상이 나온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까지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게 없다’고 했다. ‘이제 그만!’을 얼마쯤 외쳐댔을까? 하늘이 활짝 열리는가 싶더니, 먼저 온 이들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그네에게 어서 오라 손짓을 보내온다.

▼ 그렇게 올라선 웅석봉의 하부 헬기장은 정자를 세워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버거운 싸움을 치른 이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들머리인 성심원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40분이 걸렸다. 벅수(운리 8.6㎞/ 성심원 4.8㎞)는 어천골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km로 적고 있다. 평지라면 한걸음에 달려갈 거리를 50분도 넘게 올라온 것이다.

▼ 지리산둘레길(7구간)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구간의 설명과 함께 주요 볼거리를 적고 있는데, 구간의 시점이 성심원이 아니라 어천마을이다. 지리산둘레길이 운영을 시작한지도 벌써 13년(시범을 포함한 횟수다). 그동안 7구간의 노선에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곳은 웅석봉으로 오르는 주요 길목 가운데 하나이다. 어천마을이나 어천고개, 청계리를 시점으로 삼은 등산로가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 그래선지 웅석봉으로 오르는 길목에다 큼지막한 ‘등산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마치 웅석봉이 저 위에서 여러분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 이후부터는 청계임도를 따른다. 그런데 내려가지 않고 웅석봉을 향해 올라가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5분쯤 지나면 구불대며 오르던 임도가 해발 768m 지점에서 둘로 나뉘기 때문이다. 둘레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아래로 내려간다. 삼거리에는 벅수(운리 8.2㎞/ 성심 5.2㎞) 말고도 이정표(웅석봉 2.28㎞/ 청계 6.65㎞/ 한재 3.83㎞) 하나가 더 세워져 있었다. 청계리를 들머리로 삼을 경우 이곳을 거쳐 웅석봉으로 오른다는 얘기일 것이다.

▼ 둘레길을 겸한 임도는 ‘달뜨기능선’을 오른편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로 이어진다. 여순사건으로 지리산으로 향하던 남부군의 사령관 이현상이 웅석봉을 바라보며 ‘동무들! 저기가 바로 달뜨기 산이요! 이제 우리는 살았소!’라며 오랜 행군에 지친 부하들을 독려했다는 그 능선이다. 웅석봉에서 감투봉까지의 능선을 일컫는데, 지리산 서북능선에서 바라보면 웅석봉 쪽에서 달이 떠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 임도 변 산자락은 고로쇠 채취를 위한 시설들로 어지럽다. 고로쇠 채취가 인근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고로쇠나무는 뼈에 이로운 나무라는 뜻으로 골리수(骨利水)라는 어원을 갖고 있으며, 수액은 인체 내의 모든 노폐물을 배출시켜주는 신비의 약수로 불린다. 현대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이유이다. 나 역시 산촌마을의 찜질방에 들어앉아 팬티만 입은 채로 마셔대던 기억이 있다.

▼ 뒤돌아볼라치면 웅석봉(1,099m)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웅석봉은 산청의 중앙에 솟아 홀로 떨어진 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리산 자락이다. 천왕봉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중봉 하봉을 지난 다음,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높이 솟아오르는데 그게 웅석봉이다.

▼ 헬기장에서 다시 길을 나선지 30분. 7구간의 정중앙임을 알리는 벅수를 만났다. 지금까지 6.7km를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꼭 그만큼의 거리를 걸어야 한단다.

▼ 임도는 둘레길 순례자나 웅석봉 등산객들만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차량까지도 다닐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 고개를 돌리자 면도를 하듯 깔끔하게 정리된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웅석봉에 흘러나와 수리봉과 석대산을 일군 후 ‘경호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웅석봉은 한때 천왕봉 대신 백두대간의 시·종점으로 조명을 받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이 가지를 쳤다고나 할까?

▼ 3일 후면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엄동설한인가 보다. 물기 머금은 바위벼랑이 저렇게 꽁꽁 얼어붙었으니 말이다. 하긴 해발이 700m를 넘기고 있으니 능히 그럴 만도 하겠다.

▼ 임도는 심심찮게 시야를 열어준다. 이때 웅석봉과 수리봉, 석대산 등 주변의 산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저 멀리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진양호도 지리산둘레길이 보여주는 소중한 풍경 가운데 하나다.

▼ 탑동마을까지의 임도 구간은 상당히 길다. 거기다 메모를 해야 할 만큼 특이한 볼거리도 없다. 지루해지기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하지만 인간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걷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자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 우린 어느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할까나?

▼ 헬기장을 출발한지 1시간 10분. 성불정사(成佛精舍)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매달린 깃발로 보아서는 신흥종교가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내 정보에는 이 사찰이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놓고 마음 편하게 해주는 곳’이다. 곡차도 얻어 마실 수 있다니 발길이 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런데도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집사람이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곡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었다.

▼ 얼마쯤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청계저수지(淸溪池)가 얼굴을 내민다. 이름 그대로 맑은 시내가 흘러든다는 저수지다. 이런 호재를 놓칠 외지인들이 아니다. 저수지 주변은 이미 외지인들이 지어놓은 펜션과 전원주택 차지가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또 피서차 찾아와 그곳에서 머문다.

▼ 20분쯤 더 걷자 차단기로 길을 막아놓았다. 그럼 아까 만난 성불정사의 신자들은 절까지 걸어서 다니란 얘기일까? 그나저나 벅수(운리 2.4㎞/ 성심 11,0㎞)는 종점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 임도를 벗어나자 잘 지어진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옥외풀장까지 갖춘 곳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삼거리(벅수 : 운리 2.2㎞/ 성심 11.2㎞)를 만났다. 왼편은 청계저수지(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점촌마을’의 아픈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둘레길은 오른편으로 간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시야가 툭 트이면서 운리(雲里) 일대의 들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운리’란 지리산의 험준한 산속에 파묻힌 ‘구름에 덮인 마을’에서 유래된 지명인데, 이곳 역시 다랑이논으로 유명한 산촌마을이다. 산이 산에 기대고, 사람들은 그 산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오거리(벅수 : 운리 1.2㎞/ 성심 12.2㎞)’에서는 5시 방향의 금계사 쪽으로 크게 휜다. 다섯 중 가장 좁은 길로 들어선다고 보면 된다.

▼ 탑동마을로 들어가기 직전 ‘금계사’에 들렀다. 암자 형태의 작은 사찰인데 단속사의 옛 이름인 금계사(錦溪寺)를 차명해왔지 않나 싶다. 금계사가 누렸다는 성황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래선지 몰라도 시주는 넉넉한 듯. 큼지막한 대웅전은 단청까지 입혔다. 참고로 금계사로 불릴 당시 단속사는 중들이 수도하기도 힘들 정도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수도정진을 위해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도승의 도움을 받아 ‘단속사(斷俗寺)’로 이름을 바꿨고. 절간은 인적이 끊기면서 불까지 나 망해버리고 말았단다. 말이 씨가 되었다고나 할까?

▼ 요 아래 단속사지의 삼층석탑에시 이름을 빌려온 듯한 탑동마을은 벽화부터가 예스럽다. 고전적인 동양화를 그려 넣어 탑동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준다. 거기다 돌담인지 외벽인지 모를 옛집들이 고향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가 하면, 처마에는 정갈하게 묶인 옥수수 단이 매달려 있었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정당매(政堂梅)’가 나온다. 늙은 선비를 닮았다는 토종매화 ‘산청 3매’ 중 하나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 ‘강회백(姜淮佰, 1357-1402)’이 유년 시절 요 아래 단속사에서 수학할 때 심었다는 매화나무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랐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정당매’라 불렀다. 강회백은 46세로 일생을 마치기 전 자신이 손수 심은 정당매를 찾아와 ‘단속사에 심은 매화(斷俗寺 手種梅)’라는 시를 읊기도 했단다.

▼ 하얗게 꽃을 피운다는 ‘정당매’는 현존 한국 최고(最古)의 매화 가운데 하나이다. 수령 640년, 3.5m 높이까지 자랐던 나무는 현재 옛 줄기들이 대부분 고사 상태다. 그나마 봄이면 원줄기에서 뻗어 나온 손자 줄기들이 꽃망울을 토해낸다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 부지 안에는 ‘정당매각(政堂梅閣)’도 들어서 있었다. 이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비각을 세운 이유를 적은 정당매각기(政堂梅閣記)와 통정공 강회백의 시, 강회백 후손들이 지은 시 등 여러 편의 시가 적혀 있다고 한다.

▼ 정당매 근처에서 피어난 들꽃이 하도 예뻐 카메라에 담아봤다. 찬 서리 속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는 국화를 보고 내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연명도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이라 읊지 않았던가. 이런 삶 가운데 참 뜻이 있다면서 말이다.

▼ 정당매에서 몇 걸음 더 내려오자 울타리를 두른 석탑 2기(보물 72호와 73호)가 얼굴을 내민다. 이곳이 ‘지리산 4대 사찰’에 끼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단속사지(斷俗寺址)’이다. 서쪽의 화엄사와 남쪽의 쌍계사 그리고 북쪽의 실상사는 익히 알 것이고, 동쪽에는 이곳 단속사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속(斷俗)은 속세를 단절한다는 의미. 절의 이름이 속세를 단절한다고 할 만큼 강한 결의를 가진 고찰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불에 탄 뒤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단다. 현재는 동서로 ‘3층 석탑’ 2기만이 남아 옛 영화를 알려줄 따름이다.

▼ 단속사지는 현재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그러니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덕분에 단속사지의 또 다른 볼거리인 ‘당간지주’를 놓치고 말았다. 참고로 사찰에서는 절의 경계에 깃발을 세우고 법회 의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절의 문 앞에 깃발을 걸어 이를 알린다. 이때 사용한 깃발을 ‘당(幢)’이라 하며, 당을 묶어놓는 기둥을 ‘당간(幢竿)’이라 한다. 우리가 놓친 ‘당간지주’는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이다.

▼ 운리로 들어서기 직전 다물민족학교의 평생교육원(벅수 : 운리 0.2㎞/ 성심 13.2㎞)을 만났다. ‘다물민족학교’는 구한말 대성학원과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잇는 자생적 민족교육기관으로 1990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다물(多勿)은 ‘되돌려놓는다’, ‘되찾는다’는 의미로 고구려 동명성왕의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한다’는 취지를 본뜬 ‘다물정신’으로, 왜곡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건강한 민족혼이 교육 이념이란다.

▼ 하지만 내리초등학교를 리모델링했다는 교육원은 왠지 썰렁한 느낌이다. 인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명성왕(BC 58-BC 19)은 수천 명의 고조선 유민들로 ‘다물군’을 조직해 한나라를 물리치고 고구려를 세웠다. 그 정신은 발해의 건국정신, 고려의 북진정책, 조선의 북벌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니... 내가 잘못 생각한 거겠지?

▼ 날머리는 운리마을 주차장

헬기장을 출발한지 2시간 20분. 운리(雲里)에 이르면서 힘들었던 7구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운리는 탑동과 본동, 원정마을이라는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본동마을쯤 되겠다. 아까 탑동마을을 지나왔고, 원정마을은 8구간 때 만나게 되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11km. 웅석봉의 8부 능선까지 올랐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 했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그녀는 내 곁을 지켜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나대는 나를 진정시키는 청심환 같은 역할도 소화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캣’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지리산 둘레길 6구간(수철-성심원)

 

여행일 : ‘21. 11. 20(토)

소재지 : 경남 산청군 금서면과 산청읍 일원

여행코스 : 수철(0.8km)→지막(1.8km)→평촌(1.6km)→대장(3.4km)→내리교(1.1km)→지성(1.7km)→지곡사지(1km)→선녀탕(2.6km)→바람재(1.9km)→성심원(거리 및 시간 : 15.9km, 실제는 16.41km를 3시간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6구간인 수철-성심원 구간을 걷는다. 5개 코스(60.2km)로 이루어진 산청 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지리산 동쪽기슭의 지막·평촌·대장 마을을 지나 산청읍을 휘돌아 흐르는 경호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쉼 없이 흐르는 강의 흐름을 느끼며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순한 길이기도 하다. 웅석봉 자락에 들어앉은 선녀탕까지 에둘러가는 순환코스도 개발됐으나 이 경우도 수월하기는 마찬가지다. 강변 대신에 완만한 경사의 임도를 따라 걷는다는 게 다를 뿐이다.

 

▼ 들머리는 수철마을(산청군 금서면 수철리 406-2)

통영-대전고속도로 산청 TG를 빠져나오자마자 우회전. 국도 59호선을 타고 시천 방면으로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향양마을(금서면)’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편 길로 들어섰다가 곧이어 나타나는 마을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수철마을이 코앞이다. 마을회관 앞 주차장이 5·6구간의 경계이다.

▼ 수철마을(금서면)을 출발해 성심원(산청읍 내리)에서 끝을 맺는 12km 구간으로 오롯이 평지만을 걷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지리산 동쪽기슭의 지막·평촌·대장마을을 지나 산청읍을 휘돌아 흐르는 경호강을 따라 걷게 되는데, 그게 밋밋하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우리처럼 웅석봉의 산자락에 있는 선녀탕까지 에둘러 갈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강변 대신에 임도를 걷게 되는데, 거리도 4km쯤 늘어난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걷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 6구간 및 5구간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은 마을회관의 외벽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그 곁을 지리산둘레길의 엠블럼(emblem)인 ‘벅수’가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지나가는 얘기 하나. 우리네 어릴 때 ‘아이고, 이 벅시 같은 놈아’라는 소릴 지청구처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꾸중이 아니라 ‘너는 하늘 아래 제일 믿음직한 미래의 장군감’이라는 격려의 말이었단다. ‘벅수’가 단순한 장승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켜주는 수호신이기 때문이다.

▼ 회락정(會樂亭)을 스치듯 지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함께 모여 즐거움을 나누는 정자’라는 뜻을 품었는데, 동네 주민들뿐만 아니라 둘레길 나그네들에게도 쉼터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는 고마운 정자이다.

▼ 마을 뒤 언덕(벅수 : 성심 11.9㎞/ 수철 0,1㎞)으로 올라선 둘레길이 이번에는 논두렁을 따른다. 지리산둘레길은 이렇듯 산길과 들길, 강변길에 마을길까지 지리산 주변의 모든 길들을 두루두루 지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걷게 된다. 이틀만 지나면 소설(小雪). 겨울나기 준비에 바쁜 절기다. 들녘이 텅 비어있는 이유일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5분여. ‘지막마을’에 이른다. 닥종이를 생산하던 마을이라는데, 벅수(성심 11.4㎞/ 수철 0.6㎞)는 마을 앞 삼거리에서 개울(향양천)을 따라 내려가란다. 다리 난간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동마을’이 나온다고 알려준다.

▼ 마을로 들어서는데 지막마을의 들녘이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성큼 다가온다. 꼬불꼬불한 ‘S라인’으로 층층이 쌓아올린 다랭이 논.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야했던 지리산자락 사람들의 대역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 마을회관 앞에서 개울을 건넌다. 이때 물가에 자리를 틀은 ‘옥계정(玉溪亭)’이 눈에 들어온다. 정자 옆에는 물레방아까지 만들어놓았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향양천이 그만큼 맑다는 얘기일 것이다.

▼ 길가 감나무들은 ‘까치밥’을 매달았다. 대지의 저자인 펄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이 반한 풍경이다. 그녀는 감을 따면서도 날짐승의 먹이까지 챙겨주는 인심에 반해 자신의 고국보다도 우리나라를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맞다. 우리네 선조들은 씨앗을 심어도 셋을 심었다. 하나는 하늘(새)이, 둘은 땅(벌레), 나머지 하나만 내가 먹겠다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 둘레길은 이제 마을과 마을을 잇는 들길을 따른다. 수철마을에서 대장마을에 이르는 구간은 이렇듯 마을 사이사이를 지난다. 그러다보니 평화로운 농촌마을 풍경을 있는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왕산’과 ‘필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반야봉이나 국사봉 등 지리산의 모든 봉우리들은 끝에 ‘봉(峰)’자를 붙인다. 지리산에 속한 봉우리일 뿐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왕산은 ‘산(山)’이라는 지명을 쓴다.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고나 할까?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는 신문에 대서특필 될 일이다.

▼ 길을 나선지 22분. 둘레길은 ‘신촌교’를 건너자마자 도로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둑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 물길을 따라 100m쯤 내려갔을까 ‘두물머리’가 나오는가 싶더니, 둘레길은 이제 금서천의 둑길을 따른다.

▼ 100m쯤 더 걷자 이번에는 ‘평촌교’를 건넌다. 다리는 썩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다리 건너에 들어서게 될 ‘한방항노화산업단지’를 대비해 새로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 평촌교를 건넌 둘레길은 잠시지만 59번 국도를 따른다. 도로 왼편에 보행자용 길이 따로 만들어져 있으나. 도로를 횡단할 때는 오가는 차량을 잘 살펴 볼 일이다.

▼ 평촌마을 앞 버스정류장은 ‘한방촌 쌀’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곳 산청은 허준과 그의 스승인 유의태가 활약하던 고을이다. 전광렬 주연의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하도 인기가 높았던 덕분에 이곳 산청 땅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고, 그게 인연이 되어 쌀의 브랜드까지 내걸리게 된 모양이다.

▼ 버스정류장에서 도로를 벗어나 평촌마을로 들어선다. 이때 폐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해동선원’을 살짝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아니 한번쯤은 꼭 들어가 볼 일이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내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수많은 불교관련 석조물들이 잠깐의 눈요깃감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 평촌마을은 ‘평평할 평(坪)’과 ‘마을 촌(村)’자를 쓴다. 평평하면서도 너른 들녘을 지닌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주변을 살펴보니 지리산 자락에 들어앉은 산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널따란 들녘이 마을 주변에 펼쳐지고 있었다. 참고로 평촌은 4개의 자연부락(들말·서재말·제자거리·건너말)을 품고 있단다. 이들을 합쳐 ‘들말’이라 불러오다가 한자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평촌이 되었다.

▼ 마을을 빠져나와 ‘평촌2교(벅수 : 성심 9.1㎞/ 수철 2.9㎞)’와 새로 뚫린 굴다리를 지나자 금서천 건너에 들어선 금서농공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산골치고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인데, 특히 ‘한국항공우주산업’은 항공·우주라는 이미지만큼이나 거대하다. 거기다 흡사 ‘컨벤션센터’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게 잘 지어놓았다.

▼ ‘대장마을’에서는 길을 놓치는 우(愚)를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벅수가 남의 집 앞마당을 가리키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널찍한 포장길을 따르게 되었고, 끝내는 벅수 대신 나타난 요런 이정표(대장교←/ 내리교→/ 평촌마을↓) 앞에서 길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건너게 될 두 다리가 각기 다른 방향이니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 길이 꼬인 사람은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하긴 누군들 우리 같은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아무튼 우린 경호강을 방향 삼아 신라 때 어느 대장이 쉬고 갔다는 풍수 좋은 마을 안길을 사이좋게 걸었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산길샘’이라는 앱의 도움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 마을을 빠져나와 ‘대장교’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기 전, 경호강으로 연결되는 둑길(공사로 인해 막혀있었다)이 나있으나 개의치 말 일이다. 곧장 다리를 건넌 다음,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통영·대전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면 된다.

▼ 잘 나가던 길은 ‘경호강’이 가로막아버린다. 때문에 ‘경호1교’까지 에둘러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다. 거리가 조금 늘어난 대신 가을빛으로 한껏 치장한 아름다운 강변길을 걷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하고 1시간 남짓. ‘경호1교’에 올라서니 ‘지리산둘레길 산청군센터’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다녀오는 것까지는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다. 자유로운 여행을 핑계로 ‘스탬프 북’까지 사양한 우리 부부에겐 의미가 없는 시설이었기 때문이다.(아래의 사진 둘은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왔다)

▼ 다리 초입에서 의문의 ‘표지석’을 만났다. 마을 이름이 ‘산음’이라는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허준 선생이 ‘산음(山陰)’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의 산음은 이곳이 아니라 이웃 동네인 생초면이다. 그런데도 ‘산음마을’이라 적은 표지석을 큼지막하게 세워놓았으니 어찌 의외롭지 않겠는가.

▼ 다리 건너의 산청읍에서는 경호강변을 따라 걷는다. 경호2교 아래를 지나 경호1교를 건넌 다음 다시 경호2교, 그러니까 뒤집은 유(U)자 형태로 길을 잇는다. 강변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 절반은 우레탄까지 깔아놓았다. 잠시지만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걷느라 고생한 두 발에게 휴식을 주는 구간이다.

▼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항노화 산들길’ 중 ‘느림의 길’이다. 산청군청 뒤편에서 경호강변을 거쳐 청소년수련관으로 이어지는데, 이밖에도 꽃봉산 전망대로 오르는 트래킹 코스인 ‘청춘의 길’과 산청소방서에서 수계정이 있는 산청공원으로 이어지는 ‘명상의 길’이 더 있다.

▼ 경호강(鏡湖江)의 수면은 이름처럼 주름 하나 없이 잔잔한데, 그 위로 도시의 풍물을 담은 풍경화가 그려진다. 추색이 완연한 산자락으로도 모자라 백색의 빌딩까지 더해가며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조물주가 아니면 저런 예쁜 그림을 어찌 그려낼 수 있겠는가.

▼ 오른편 발아래로 ‘경호강’이 따라온다. 경호강이란 산청군의 생초면(어서리 강정)에서 진주의 진양호까지 80여리(약 32km)의 물길을 말한다. 강폭이 넓지만 큰 바위가 없어 강물의 흐름이 조용한 봄·가을·겨울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주고, 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이면 레저스포츠의 대명사인 래프팅의 명소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두루 엮어 ‘경호강 비경‘이라는 이름으로 ‘산청 9경’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길가에 래프팅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 ‘래프팅타운’에서 보트를 타면 내리·용소·성심원·신기 등에서 급류를 거치게 되는데, 강폭이 넓은데다 유속까지 빨라 래프팅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단다.

▼ 길가 화단에는 남천(南天)을 심었다. 그런데 이게 여간 고운 게 아니다. 붉디붉은 게 단풍보다도 훨씬 더 곱다. 거기다 유익하기까지 하단다. 천식을 앓는 사람들에겐 약재로, 풀섶을 찾는 겨울철 작은 새들에게는 더 없는 먹이가 되어준단다.

▼ 정신 나간 철쭉 몇 송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렸다. 옛 사람들은 24절기 중 하나인 소설(小雪)을 소춘(小春)이라고도 했다.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따뜻한 햇볕이 간간이 내리쬔다고 해서다. 저 철없는 철쭉들은 그런 햇살에 봄날인줄 알았으리라. 아닐 수도 있겠다. 세상은 요즘 대통령선거의 열풍으로 들끓는 중이다. 시절이 하도 하수상하다보니 꽃들까지도 덩달아 미쳐가지 않았을까?

▼ 산 좋고 물 맑은 산청은 들어선 학교까지도 아름답게 채색됐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自然歌)’인데 분위기에 맞나? 참! 학교 앞에는 면학정(勉學亭)이란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내리교’를 건넌다. 그리고 내리의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인 ‘마당머리 마을’로 들어선다. 참! 이곳에서 우린 ‘꽃봉산’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꼭대기에 올라앉은 정자는 조망의 명소라고 한다. 산청시가지는 물론이고, 웅석봉과 경호강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산청 제일의 전망대로 알려져 있다.

▼ 다리 건너에는 좀 특이한 벅수(성심← 4.5㎞/ 성심↑ 8.7㎞/ 수철↓ 7.5㎞)가 세워져 있다. 가야할 방향(붉은색)이 둘이나 되기 때문이다. 경호강변을 따르는 본래의 루트는 왼편, 하지만 웅석봉 자락에 있는 ‘선녀탕’을 둘러보고 싶다면 직진하는 순환코스를 따르면 된다. 이곳에서 나뉜 둘레길은 이따가 바람재에서 다시 하나가 된다.

▼ 우리 부부는 순환코스를 따라 선녀탕까지 에둘러가기로 한다. 그리고 100m쯤 걷다가 ‘마을경로당’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벅수 및 석불사 안내판의 방향표시를 참조하면 되겠다.

▼ 마을과 마을을 잇는 들길을 걷다가 의외의 장소에서 절간을 만났다. 들어앉은 곳이 산속이 아니어선지 이름까지도 ‘웅석 연화암(熊石 連花庵)’이다. 웅석봉에서 ‘봉우리 봉(峰)’자를 쏙 빼버렸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뒷뜰마을’이다. 둘레길은 이 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해버린다. 그러니 너무 몰리는 것보다는 띄엄띄엄 떨어져 걷는 게 어떨까? 하나 더. 마을을 지날 때는 마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가도록 하자.

▼ 뒤뜰마을부터는 2차선 도로인 ‘웅석봉로’를 따른다. 웅석봉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녹색농촌체험마을’이란 낯선 이름의 건물도 만날 수 있다. 농업소득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농촌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농림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녹색농촌 체험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쉽게 말해 래프팅 및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민박시설로 보면 되겠다.

▼ 통영·대전고속도로 아래로 난 굴다리(벅수 : 성심 7.6㎞/ 수철 8.6㎞)는 곰들로 치장을 했다. 조금 더 가면 웅석봉이 나온다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 지성마을은 여느 산촌마을과 다를 게 없다. 아니 도심의 아파트단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반듯한 체육공원과 어린이놀이터를 갖춘 점은 다른 마을들과 확실히 다르다 하겠다. 래프팅을 상징하는 조형물도 보인다. 내리마을 권역의 물길이 이 마을 앞으로 흘러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지성마을 다음은 지곡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매점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캔 맥주로 목부터 축이고 보는데, 청량감이 목구멍에서 창자 끝까지 단번에 관통한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주인 할아버지의 넋두리로 인해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도둑년 소릴 들었지만 그래도 박근혜 때는 제법 팔렸는데’. 코로나라는 놈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 지곡마을을 지나면서 웅석봉이 한층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들녘은 찾아볼 수 없고,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능선과 능선 사이를 파고드는 골짜기뿐이다. 둘레길은 그 골짜기 속으로 파고든다.

▼ 내리저수지에 이를 즈음 빗돌 하나를 만났다. ‘세진교(洗塵橋)’. 옛날 이 부근에 세진(洗塵)이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기록에 의하면 산청의 지곡사 입구에 세진교라는 홍예다리가 놓여있다고 했다.

▼ 가을의 전령 단풍은 아직도 임무를 마치지 못했나보다. 아직도 저렇게 핏빛 정열을 불사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옛 사람들은 저런 모습에 도취되어 ‘단풍은 연홍(軟紅)이요 황국(黃菊)은 순금이라, 신도주(新稻酒) 맛이 들고 금은어회(金銀魚膾) 더 좋다. 아희야 거문고나 켜라 자작자가(自酌自歌)하리라.’라고 노래 불렀다. 나도 박주 한 잔에 풍월이나 읊어볼까?

▼ 길에서 내려다본 내리저수지는 환상적이다. 지리산 속 청정골 산청은 때 묻지 않은 한갓진 산골이다. 그런 해맑은 풍경들이 잔잔한 수면위에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20년 전 워드워즈의 생가를 들러볼 겸해서 찾았던 영국의 글라스미어. 그곳에서 만났던 원더미어 호수가 딱 저랬었다. 당시 난 그 호젓함에 가슴을 떨며 울먹이고 있었다.

▼ 저수지 둑(벅수 : 성심 6.5㎞/ 수철 9.7㎞)에는 우회노선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둑길로 인도되는 본래의 둘레길은 에움길(굽어있는 길)로 이어져 저수지를 반 바퀴 돈 다음 지곡사 아래 개어귀에 이른다. 하지만 범람할 수도 있으니 장마철에는 곧장 도로를 따르라는 것이다.

▼ 둘레길은 내리저수지를 경계삼아 웅석봉 자락으로 파고든다. 십자봉 능선과 왕재·기산 능선 사이의 골짜기로, 웅석봉이 빚어낸 깊은 계곡 중 하나라서 수량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선녀탕’이다.

▼ 그래선지 저수지 위에다 ‘웅석봉군립공원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이곳 내리저수지를 들머리 삼아 웅석봉으로 방법은 두 가지. 선녀탕과 왕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방법 말고도 십자봉을 거치는 또 다른 루트까지 나있단다.

▼ 저수지 위 언덕에는 ‘지곡사(智谷寺)’가 걸터앉았다. 통일신라 때 응진이 창건한 천년고찰로 초기 이름을 국태사(國泰寺). 고려 광종 때는 대각국사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의 5산문(원주 거돈사, 진주 지곡사, 해주 신광사, 여주 고달사, 가수현 영암사)에 들어갈 정도로 사세가 컸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을 전후하여 폐사되었다가, 1958년 강덕이(姜德伊) 스님이 옛 지곡사의 산신각 자리에 새롭게 절집을 지어 옛 지곡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단다. 하지만 선객과 시인들이 즐겨 찾던 영남의 으뜸 사찰은 간 곳 없고, 대웅전과 산신각, 종각이 전부인 한적한 사찰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 절간 앞 계곡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홍예다리가 빛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 근처에 놓여있었다는 ‘세진교(洗塵橋)’의 모습이 마치 오색 무지개가 공중에 걸린 듯 했다니 말이다.

▼ 몇 걸음 더 오르니 ‘심적사’의 입간판이 얼굴을 내민다. 500m만 더 들어오면 신라시대(929년)에 창건했다는 또 다른 천년고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례길 나그네에게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500m나 올라갔다 되돌아 올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허준 약수터’에 대한 궁금증까지 사라지겠는가. 저 심적사가 드라마 ‘허준’에서 삼적대사(정욱 扮)가 나환자를 치료하던 바로 그곳?

▼ 심적사 갈림길을 지나면서 임도가 시작된다. 이어서 낙엽이 수북한 숲길을 따라 18분쯤 더 걷자 ‘선녀탕’이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18분 만인데, 길가 벅수(성심 5.0㎞/ 수철 11.2㎞)는 6구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 ‘선녀탕’은 웅석계곡과 왕재계곡의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빚어놓은 폭포(네이버지도는 ‘강신등폭포’라 적고 있었다)와 소(沼)인데, 턱없이 높은 이름값에 비해 지닌 자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그저 이름처럼 선녀가 몸을 씻을 수 있도록 탕이 은밀하게 숨어있다는 정도랄까? 하지만 한국자연보존협회의 눈은 나와는 달랐던 모양이다. ‘한국 명수 1백선’으로 꼽았다니 말이다.

▼ 둘레길나그네들에게는 이곳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나치다가 완주를 인증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이젠 웅석봉임도를 걸을 차례이다. 선녀탕에서부터 시작되는 임도는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십자봉 5거리’까지 1.6km가량 계속되는데, 거의 평지를 걷는다고 보면 되겠다. 참! 가로수처럼 길가에 심어놓은 나무는 ‘고로쇠’라고 한다. 그래선지 엄지손가락 굵기의 호스로 나무들을 연결시키고, 훼손시 고발조치하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었다. 봄철마다 수액 채취로 마을 주민들의 짭짤한 수입원이 되어준다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낙엽 쌓인 임도를 걷다보면 가마득히 솟아오른 웅석봉이 올려다 보이기도 한다. 가을빛으로 가득한 산세가 아름답기까지 한데, 아쉽게도 역광으로 이해 온전한 형체까지는 눈에 담을 수 없었다.

▼ 선녀탕에서 출발한지 15분. 내리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이정표 : 내리저수지 0.46㎞/ 선녀탕 1.16㎞)를 만났다. 저수지에서 이곳까지는 500m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트레커들은 너나없이 선녀탕까지 돌아오느라 오롯이 2.3㎞를 걸었다. 내처 오르려고만 하지 않고 에둘러가는 여유를 되찾은 결과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재미가 바로 이것이다. 꼭 어디서 어디까지 종주를 하지 않아도 된다. 때론 숲길을 걷고 때론 강변이나 마을을 따라가며 산과 들, 냇물,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된다.

▼ 10분쯤 더 걸어 길이 여럿으로 나뉘는 고갯마루(벅수 : 성심 3.4㎞/ 수철 12.8㎞)에 올라선다. 6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227m)이지 싶은데, 이정표(십자봉 2.25㎞/ 내리저수지 0.76㎞, 선녀탕 1.45㎞)는 이곳이 십자봉을 거쳐 웅석봉으로 오르는 들머리임을 알려준다.

▼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가 울창한 왕대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나있다.

▼ 내려가는 도중 아까 내리교에서 헤어졌던 경호강의 물길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오는데, 이때마다 황매산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준다.

▼ 꽤 여러 곳에서 갈림길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벅수만 잘 살펴보며 걸으면 되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길을 잃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그럴 때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놓친 이정표를 다시 확인해보는 편이 낫다. 이정표가 촘촘히 세워져 있기 때문에 금방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십자봉들머리에서 내려선지 15분 만에 ‘바람재’에 도착했다. 성심원과 한밭마을로 가는 갈림길이자 경호강 강바람이 넘나드는 야트막한 고개이다. 누군가는 이 고개를 운치 있다 표현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고갯마루는 둘레길 나그네들이나 간간히 넘어 다니는 그저 그렇고 그런 고개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었다.

▼ 바람재의 벅수(성심 2.0㎞/ 수철 13.9㎞/ 수철 10.0㎞)도 역시 방향표시가 셋이다. 하지만 빨강색이 둘이던 내리교와 달리 이번에는 검은색이 둘이다. 벅수의 방향표시 색깔은 정방향과 역방향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니 아까 내리교에서 나뉘었던 길이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고 보면 된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특용작물을 심었다는 밤나무 단지를 지나자 귀여운 징검다리가 나오기도 한다.

▼ 8분쯤 더 걸었을까 메타세쿼이아로 치장된 산청군분뇨처리장(벅수 : 성심 0.8㎞/ 수철 11.2㎞)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길은 경호강변으로 내려선다. 강 건너에는 정수산과 둔철산이 그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다.

▼ 강가에는 쑥부쟁이가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가을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몸짓이랄까? 이를 보며 김용택 시인의 ‘구절초 꽃에서’를 떠올리는 것은 두 꽃이 비슷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 아직도 푸릇푸릇한 잎새를 자랑하는 채마밭을 지나자 성심원(사진은 강 건너에서 찍었다)이 얼굴을 내민다. ‘성 프란치스꼬 형제회’가 운영하는 요양시설로 1959년에 문을 열었다. 그게 62년,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저 시설은 많은 갈등과 치유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나와 다르다’는 편견으로 사람이 사람을 냉대하던 시절이 우리 주변에 만연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리도 1972년이 되어서야 놓인다. 섬 아닌 섬에 갇혀서 죄인처럼 살아야만 했던 것. 그게 지금은 동반자로 사는 게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곳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 성심원 담벼락은 꽃문양으로 메꿔졌다. 60~70년대의 교복을 입은 학생도 보이는데, 집사람은 그게 추억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냉큼 다가가더니 포즈부터 취하고 본다. 맞다. 당시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아프기까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에게 꿀밤을 맞는 건 기본,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거나 심지어는 엉덩이를 몽둥이로 찜질 당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던 선생님은 언제나 존경스러웠고, 우리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 날머리는 성심원 정문(산청군 산청읍 내리)

날머리인 성심원의 정문은 다리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나온다. 하지만 성심원의 내부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코로나 예방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이고, 화장실과 매점까지도 사용불가라니 ‘역사관’을 둘러보는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했던 소외된 이들의 역사를 한번쯤 둘러보고 싶었기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16.41km를 3시간30분 만에 걸었다. 시간당 4.7km를 걸었으니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큼 길이 편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 5코스(동강-수철)

 

여행일 : ‘21. 11. 6(토)

소재지 : 경남 함양군 휴천면과 산청군 단서면 일원

여행코스 : 동강마을(1.2km)→자혜교(1.5km)→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1.8km)→상사폭포(1.7km)→쌍재(0.9km)→산불감시초소(1.4km)→고동재(3.6km)→수철마을(거리 및 시간 : 12.1km/ 실제는 12.18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5구간인 동강-수철 구간을 걷는다. 5개 코스 60.2km로 이루어진 산청권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마을과 마을을 이어가는 다른 구간들과는 달리 코스 대부분이 산길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답게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산불감시초소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군봉들은 5구간의 백미라 하겠다.

 

▼ 들머리는 동강마을(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광주-대구고속도로 함양 IC에서 내려와 1084번 지방도를 이용 함양으로 들어온다. 잠시 후 위천교를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삼거리(함양읍 이은리)에서 좌회전하여 1001번 지방도로 옮긴다. 화촌리(유림면소재지)를 코앞에 둔 삼거리(유림면 서주리)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60번 지방도를 따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기마을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정류장 근처의 ‘엄천교’를 건너면 동강마을이다. 5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벅수는 마을 방향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있다.

▼ 동강마을(함양군 휴천면)과 수철마을(산청군 단서면)을 잇는 12.1km짜리 구간으로, 둘레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길을 걷는 다는 느낌이 강하다. 덕분에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걸으며 산행하는 즐거움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다. 또한 아픈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도 살짝 엿듣게 된다.

▼ 동강(桐江) 마을 앞을 지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그런데 ‘오동나무 동(桐)’자를 쓰는 지명과는 달리 이 마을에는 오동나무가 없단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 앞 엄천강(儼川江)에서 따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후한(後漢) 때의 은자인 엄광(嚴光, BC 37-43)이 은거했다는 곳이 임천의 또 다른 이름인 ‘엄천강’이고, 권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 간 엄광의 모습이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등의 제목으로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 마을 앞은 엄천강(임천)이 흐른다. 남원 쪽에서 내려오는 달궁의 물과 뱀사골 물에 한신계곡 물과 백무동 물이 합쳐지면서 마천으로 흘러든다. 여기에 다시 칠선계곡과 국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더해져 엄천강(儼川江)이 된다. 이 엄천강은 ‘엄광(儼光)’이 낚시하고 살았다는 냇물이요 강물이라는 뜻이다. 중국 후한시대 광무제의 동기동창 중 엄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황제가 된 친구가 좋은 벼슬을 준다고 해도 거절하고 산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해서, 한자문화권 식자층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 마을길이 끝나면 들길. 확 트인 들녘을 낀 평지가 주를 이루는데 옆으로 천이 흐르고 멀리는 산의 능선이 꼬리를 문다. 짱짱한 산들을 바라보면서 꽤 오래 들녘을 걷는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고 편히 걷는 구간이다. 한여름 뙤약볕이라면 힘들 수도 있겠지만 가을이라면 불편할 것도 없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엄천강의 강가에 눌러앉은 마을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왼편은 조금 전 트레킹을 시작했던 동강마을. 오른편 강 건너에는 동호마을이 있다.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만든 ‘관영 차밭 조성 터’가 있는 마을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4분 남짓. 들길을 지나 마을과 멀어지면 찻길이 나온다. ‘자혜교’ 근처의 삼거리인데 다리를 건너면 ‘상촌마을’. 둘레길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방곡마을’로 향한다. 방곡마을 및 점촌마을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과 표지판이 각각 세워져 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 이제 둘레길은 지리산 자락을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시원스레 뚫린 차도이지만 자동차는 거의 볼 수 없다.

▼ 잠시 후 점촌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6.25로 더 익숙한 한국전쟁 당시 양민 집단학살사건이 일어났던 아픔의 현장이지만 둘레길은 점촌마을로 들어서지는 않고 스치듯 지나친다. 참고로 이 슬프고도 무서운 사건은 이곳 말고도 가현마을과 방곡마을, 서주마을 등이 더 있다. 이 모두 지리산 고동재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들이고 지금은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 점촌마을을 끝으로 지리산둘레길의 함양구간은 막을 내린다. 이어서 산청구간이 시작된다. 그 시작점에 방곡저수지가 놓여있다. 2022년 말 준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인데, 완공되면 금서면과 생초면 일대의 농경지 345ha가 혜택을 받게 된단다.

▼ 길을 나선지 30분. 차도가 지겨워질 무렵 2단으로 맞배지붕을 올린 ‘회양문(廻陽門)’이 나온다. 이 문은 6.25전쟁 당시 빨치산 소탕이라는 구실 아래 우리 국군의 총검에 무고하게 학살당한 양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한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의 정문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7일 우리 육군(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견벽청야’라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수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함양군 점촌마을(휴천면)과 서주마을(유림면), 그리고 산청군(금서면) 가현·방곡마을 주민 705명의 영령들을 모셨다.

▼ 산청함양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일대의 공비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중 양민을 통비분자(通匪分子)로 간주하여 집단학살한 처참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다. 1951년이니 전쟁이 한창일 때이고 빨치산에 의한 피해가 극심하던 시절이라 군인들의 적개심도 최고조에 달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토벌 작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여 적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높아진 순간 집단의 광기가 폭발하였고 그 대상은 엉뚱하게도 그 지역의 양민이었다. 어느 한 집단이 광기에 휩싸이고 그 광기가 증폭되면 상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 높디높은 계단을 오르니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위패를 모셔놓은 ‘봉안각(奉安閣)’은 합동묘역 뒤 언덕에 걸터앉았다. 다녀오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인지라 위령탑 앞에서 묵념하는 것으로 갈음하기로 했다. ‘부디 영면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회양(廻陽)’이라는 정문의 편액처럼 슬픔·고통·음지의 과거를 극복하고 새 시대의 역사를 열어가는 상생과 양지로의 화합을 만들어가길 빌어본다.

▼ 참! 희생자합동묘역의 안내소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지리산둘레길 완주를 인증받기 위해서는 이곳에 비치된 스탬프를 찍어가야만 하니 말이다. 또 하나. 이왕에 왔으니 역사교육관에 들러 한국전쟁의 참상과 함께 당시 사용하던 옛 물건들을 구경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 추모공원에서 직진하면 방곡마을이다. 하지만 둘레길은 방곡마을을 직접 거치지 않는다. 추모공원의 바로 위에 있는 ‘당산 숲’에서 찻길을 벗어나 왼편 계곡 방향으로 내려선다. 코너에 ‘지리산둘레길 산청구간별 안내도’와 함께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 이때 마을 방향에 세워놓은 ‘공개바위’ 팻말이 눈길을 띈다. 바위 다섯 개가 비스듬하게 쌓여있다는 것이다. 맞다. 거리가 꽤 멀기 때문에 다녀올 수는 없었지만 방곡마을 뒷산에는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마고할미가 공기놀이를 하다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꽤 유명한 바위가 있다. 5개의 육면체 바위가 석탑모양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가 12.7m나 되는데다 30도나 기울어져 있다고 해서 ‘한국판 피사의 사탑’이라고도 불린다.

▼ 야외 풀장까지 갖춘 ‘방곡둘레길 체험마을’을 지나 ‘방곡1교’를 건넌다. 새로 놓은 티가 역력한 것이 요 아래 방곡저수지에 물이 채워질 때를 대비해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저수지가 완공되면 다리 아래까지 물이 넘실댈 테니까 말이다.

▼ 다리 아래로는 ‘오봉천’이 흐른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물답게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 지리 동부능선의 왕등능선에서 흘러내린 저 물은 이곳 방곡마을을 지나 임천에 합류한다.

▼ 둘레길은 이제 방곡저수지의 가장자리를 따른다. 그러다보니 시야가 툭 트이면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 공사 현장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둑과 취수장 등 시설물 공사는 이미 끝났고, 지금은 바닥을 정리하는 마감공사가 한창이다.

▼ 조금 전에 들렀던 ‘합동묘역’도 시야에 들어온다. 아니 추모공원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아까보다 오히려 더 낫다.

▼ 다리를 건넌지 5분. 작은 개울을 만난 둘레길은 이 개울을 건너지 않고 거슬러 올라간다. 점점 깊은 산중으로 끌어들이는 좁은 숲길이지만, 무너진 곳은 메우고 끊긴 곳을 이어놓은 덕택에 산보하듯 가볍게 계곡을 오를 수 있다.

▼ 조형미 넘치는 바위 계곡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물길은 바위 표면을 따라 구불구불 휘감아 떨어져 내린다. 그 뒤로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단풍이 배경이 되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간을 산청의 지리산 둘레길 중 백미로 꼽는다.

▼ 콧노래 나오는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발아래 계곡에는 이름 없는 작은 폭포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폭포가 있으니 소(沼)와 담(潭)은 필수. 개중에는 저렇게 깊은 소도 눈에 띈다.

▼ 길 내기가 옹색한 곳에는 데크 계단을 놓았다. 누군가는 이 길을 옛날 지리산자락 장꾼들이 함양·산청·덕산을 오가며 생을 이어가던 길이라고 했다. 험난했을 게 뻔한 옛길은 저렇게 덧칠을 한 다음 지리산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 길은 개울을 왼편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길가는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다. 다음 주초에 가을비가 찾아온다고 했으니 저런 아름다움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비 지나간 산자락은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있을 테니까 말이다.

▼ 계곡으로 들어선지 13분. 길다면 길게 치고 오르자 왼편으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열린다. 5구간의 자랑거리인 ‘상사폭포’로 연결되는 지점인데, 이정표가 세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곳이기도 하다. 길을 인도하던 대장님 말로는 ‘바닥만 보며 걷는’게 원인이라지만 글쎄다.

▼ 그 원인을 나는 이정표(왕산↑ 3.1km/ 상사폭포← 10m/ 추모공원↓ 1.4km)에서 찾고 싶다. 원목의 색깔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주변 숲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30m쯤 들어갔을까 ‘상사폭포’가 나타난다. 높이가 20m쯤 되는 이 폭포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절함이 담긴 전설이 깃든 폭포이다. 한 남자가 속으로만 사모하던 여인네를 못 잊어 상사병에 걸려 죽고 말았더란다. 그렇게 죽은 남자가 뱀으로 환생해 그 여인의 몸속으로 꼬리를 감추고 들어가려는데, 놀란 여인이 손으로 뿌리쳐 그만 뱀이 죽고 말았다. 이때 뱀이 죽은 자리가 지금의 상사계곡이 되었고, 여인은 폭포의 바위가 되어 계곡물과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여인을 희롱하듯 여러 갈래로 바위를 쓰다듬으며 흘러내리는 폭포 물줄기가 무척 에로틱하게 보인다.

▼ 폭포를 빠져나오자 이번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폭포의 위로 올라가는 구간으로 돌계단에 밧줄난간까지 설치해 놓았다.

▼ 폭포 위로 올라와서도 길은 개울을 벗어나지 않는다. 개울을 좌우로 갈아가며 이어지는데, 경사까지 완만해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이렇듯 왕산자락을 잇는 지리산 둘레길은 푸근하게 웃는 낯으로 길손을 받아들인다.

▼ 얼마쯤 걸었을까 앞서가던 집사람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나무에 매달린 CCTV 카메라를 가리킨다. ‘세상에 이런 일이’. 우리나라는 범죄자들이 숨을 곳은 없다던 어느 범죄심리학자의 말에 수긍이 간다. 이런 심심산골에까지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니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는가.

▼ 폭포에서 30분쯤 더 올라가자 산자락에 들어앉은 민가 한 채가 스르르 나타난다. 부침개와 도토리묵을 안주삼아 약주 한잔 들이킬 수 있는 ‘주막’이다. 이곳은 지리산둘레길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약초 농사를 해온 석재규씨 가족의 보금자리라고 한다. 그래선지 자연산 약초와 고로쇠 수액, 약초달임액, 효소, 칡즙, 감식초, 짱아치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아무튼 안주를 기다릴만한 여유가 없어 캔 맥주만 마시고 나왔는데, 이 또한 둘레길에서나 만날 수 있는 소소한 재미가 아닐까 싶다.

▼ 둘레길은 주막 위에서 ‘왕산 임도’와 만난다. 그리고는 왕산의 산허리를 에두르며 ‘쌍재’로 향한다.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한 임도다.

▼ 이 구간은 둘레길만 빼꼼히 남겨놓고는 온통 철망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다. 산약초재배지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출입금지’ 팻말도 걸려있다. 이를 보고 야속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민들의 심정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동안 이 길을 지나간 많은 사람들이 주민에게는 자식처럼 소중한 재산인 농작물을 함부로 꺾거나 채취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 임도를 따라 10분쯤 더 걷자 ‘쌍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요리보고 저리 봐도 고갯마루가 아니니 문제다. 그저 세 갈래의 임도가 만나는 지점에 불과한 것이다. ‘큰재’와 ‘바람재’를 합쳐서 지금의 ‘쌍재’가 되었다고 했으니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 5분쯤 더 걸으니 진짜 고갯마루가 나온다. 아무래도 ‘쌍재’는 이곳을 말하지 않을까 싶다(kakaomap도 이곳을 쌍재로 표기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쌍재는 함양(휴천)에서 산청으로 넘어가던 고갯마루로 예전에는 상당히 큰 대로가 나있었다고 한다. 주막과 제법 큰 마을도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한 가구만이 약초를 재배하며 마을을 지키고 있단다.

▼ 고갯마루에는 이정표가 두 개나 된다. 지리산둘레길(수철 5.8㎞/ 동강 6.3㎞)과 동의보감둘레길에서 세운 것인데, 이름표가 없는 탓에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고갯마루에서 임도를 버리고 능선으로 올라선다. 능선을 따라 난 길은 널찍하면서도 경사가 거의 없다. 가끔은 가파른 구간이 나오기도 하지만 침목계단을 놓아 오르는데 부담이 없도록 했다.

▼ 지리산둘레길은 종종 제주올레길과 비교되곤 한다. 해안을 따라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올레길과는 달리 둘레길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리산 둘레를 광범위하게 휘도는 산간 트레일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지리산의 허리쯤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는 구간도 있다. 이때는 고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시야가 확 트이면서 드라마 속에서처럼 지리산 능선을 마주할 수 있으니 까짓 고생쯤이야 언감생심이 아니겠는가.

▼ 앞서가던 집사람이 손짓을 보내온다. 사진 찍을만한 풍경이 나타났다는 일종의 사인이다. 맞다. 육산 특유의 밋밋한 능선을 따르다가 바윗길을 만났으니 어찌 특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쌍재에서 능선을 탄지 23분 만에 산불감시초소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섰다. 해발은 643m(핸드폰의 앱이 알려준 높이다). 쌍재-고동재 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데, 그 덕분에 사방으로 시야가 터지면서 일망무제의 조망이 펼쳐진다.

▼ 사람이 많이 찾기로 유명한 구간인데 어찌 돌탑하나 없겠는가. 쌓아올린 솜씨도 가히 예술이다. 바라는 바가 얼마나 지극했으면 저리도 정성들여 쌓았을까 싶다.

▼ kakaomap은 이곳을 ‘조망점’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조망에 자신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구간을 조성한 ‘사단법인 숲길’에서 그걸 놓칠 리가 있겠는가. 동서 양쪽에 조망도 두 개를 세워 실물과 대비해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 먼저 천왕봉부터 살펴보자. 누군가는 지리산둘레길을 일러 ‘천봉만학(千峰萬壑)을 거느린 지리산 주능선이 눈을 떠도 보이고 눈을 감아도 보이는 길’이라 했다. 그가 말한 풍경을 이곳 산불초소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1915m의 천왕봉을 위시한 수많은 봉우리들을 가슴에 담으며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에 들어섰음을 느낀다.

▼ 반대방향에는 왕산(王山, 925.6m)과 필봉산(筆奉山, 858.2m)이 있다. 왕산은 가락국의 멸망을 지켜본 구형왕의 능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射臺)가 있는 산이다. 그 오른편에 있는 필봉산은 선비의 고장인 산청을 상징하는 산이다. 산의 이름대로 붓끝처럼 뾰쪽하니 솟아올라 필봉(筆峰) 또는 문필봉(文筆峰)으로도 불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똑 같은 생김새인데도 여자의 가슴이 연상된다며 유방봉 또는 유두봉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니 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 왕산·필봉산 능선과 오른편의 웅석봉 능선 사이에는 잠시 만나게 될 수철마을이 놓였는데, 산기슭을 타고 올라 계단처럼 된 ‘다랭이논’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그 너머에서는 다음 구간 때 지나게 될 산청읍이 반갑게 맞아들이겠다며 손짓을 보내온다. 한마디로 멋진 풍광이다. 이는 산에 오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 고동재를 향해 산을 내려간다. 이 구간도 역시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이번에는 고도를 까먹어가며 내려간다는 게 다를 뿐이다.

▼ 산불감시초소에서 내려선지 15분. 삼각점이 설치된 601m봉에 올라섰다. 특별할 게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한쪽 귀퉁이에서 조망이 터지니 놓치지 말고 눈에 담도록 하자.

▼ 이번에는 오봉천 주위의 마을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아까 지나왔던 점촌마을과 방곡마을과 그 위에 위치한 가현마을. 하나같이 함양산청사건의 피해지이다. 토벌대는 저 마을들에서 끔찍한 집단광기의 만행을 저질렀다.

▼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능선은 한마디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설악을 붉게 물들인 단풍이 산 능선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세력을 떨치더니 어느덧 지리산에까지 이르렀나 보다. 하지만 그 기세의 절정기는 고작해야 한 달뿐. 그러니 걷는 걸 서두르지 말 일이다. 그리곤 오색향연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대끼고, 마음으로 느끼며 걸어보자.

▼ 참! 산경표(山經表)를 따라 산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이 능선을 왕산분맥(王山分脈)이라 부르고 있었다.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간 웅석지맥(중봉과 하봉, 웅석봉, 백운산, 황학산을 일군 뒤 진양호에서 그 숨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56.5km의 산줄기)의 왕등재에서 분기해 고동재와 쌍재를 지나 왕산과 필봉산, 사자봉을 일군 다음 남강의 두물머리(경호2교)에서 숨을 다하는 12km의 산줄기란다.

▼ 삼각점봉을 지나친지 15분. ‘고동재’에 내려섰다. 수철리에서 방곡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지형이 고동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근처 습지에 사는 산고동이 우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그나저나 이 고개는 수철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국군(11사단 9연대 3대대)이 빨치산 토벌을 명목으로 지났던 길이기도 하다. 이들 군인들에 의해서 가현마을과 방곡마을, 점촌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 고갯마루에는 눈길을 끄는 시설물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는 천하대장군이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산불 조심을 하잔다. 그게 신기해 ‘왔다 갔다’를 반복해봤는데 이에 질세라 똑 같은 소리를 쏟아낸다. 고놈 참! 결국에는 내가 항복하고 말았다.

▼ 이정표(수철 3.5㎞/ 동강 8.6㎞)는 5구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일까? 문득 군 생활 말년에 배째라며 내뱉던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려운 구간이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나머지 구간은 오롯이 내려가는 길이다. 경사까지 완만해서 걷기가 여간 편한 게 아니다. 대신 포장도로라서 다소 지루하다는 단점도 있다.

▼ 이 구간은 가끔가다 시야가 트이기도 한다. 이때는 어김없이 왕산과 필봉산이 나타나는데, 가끔은 산청시가지가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 그렇게 23분쯤 내려서자 임도의 지루함을 달래줄 쉼터가 나온다. 하동 출신인 박두만씨가 부인과 함께 운영한다는 ‘고동재 농원’인데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손수 담근 오미자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석청(깊은 산의 절벽이나 바위틈에 든 자연산 꿀)과 산나물도 팔고 있었다. 맞다. 주인장 박씨는 3대째 이어온 석청 채취꾼이라고 한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전문가란다.

▼ 주막의 액자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어중이떠중이 다 지리산으로 오라는 글귀에서 요즘 화재가 되고 있는 tvN의 드라마 ‘지리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산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사고를 파헤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드라마로 드라마 상에서 주인공들은 지리산 국립공원 레인저로 등장한다. 지난주에 방영된 3·4회에서도 주인공들이 거친 산길을 누비고 있었는데, 그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모처럼 지리산에 들어섰으니 극의 주인공이 되어 힘차게 걸어보자.

▼ 주막 근처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글쟁이는 저런 풍광을 보고 ‘단풍 빛이 맑다. 맑아서 곱다. 맑고 고와서 순수하다’고 읊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서면 까닭 없이 뉘우치고,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이 일어난다고 했다. 맞다. 단풍에 감염이라도 된 듯 붉게 물든 집사람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 길이 좋아져서인지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그런데 종주꾼들 복장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같이 산책삼아 나온 듯한 가벼운 옷차림인 것이다. 그래 이 구간은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지리산 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당시 이 구간을 걷던 이수근이 ‘탐구생활’이란 주제로 청개구리와 만나 천진하게 노는 장면을 연출했었는데, 이게 흥미로웠던지 방영 이후 이 구간을 찾는 일반인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 이 구간도 역시 민박이나 펜션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시골의 정취를 제대로 맛보려면 푸짐한 시골밥상까지 먹어볼 수 있는 민박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이 구간은 종점인 수철마을에 숙소가 많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 가을의 전령은 단풍만이 아니다. 가을을 대표하는 또 다른 풍경. 억새가 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뭉게구름 머무는 하늘을 배경삼아 하얗게 부서지는데, 이게 가을의 풍취를 여과 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 수철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새 단장이 한창이다. 왕복 2차선의 포장길로 바꾸는 중이란다. 하지만 함께 걷던 어느 분은 이런 풍경이 영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자신의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해오고 있다면서 계속해서 툴툴거리고 있었다.

▼ 산행날머리는 수철마을(산청군 금서면 수철리)

고동재를 출발한지 55분. 수철마을에 이르면서 5구간 트레킹이 종료된다. 가야왕국이 마지막으로 쇠를 구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지리산둘레길은 이곳에서 또 다른 연결을 기다린다. 참고로 ‘수철’이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무쇠로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던 철점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4구간과 5구간의 교차점임을 알리는 벅수는 마을회관의 처마 밑에 세워져 있었다. 지리산둘레길 산청구간의 전체도도 보인다. 산청과 연계된 지리산둘레길은 5구간부터 9구간까지 5개 구간 60.2㎞에 이르는데, 오늘은 그중 5구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2.18km. 이를 3시간 40분 만에 걸었으니, 절반 이상이 산길로 구성되어있지만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고 보면 되겠다.

지리산 둘레길 4코스(금계-동강)

 

여행일 : ‘21. 10. 30(토)

소재지 : 경북 함양군 마천면과 휴천면 일원

여행코스 :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의중마을(0.7km)→벽송사(2.1km)→모전마을(2.8km)→세동마을(2.3km)→운서마을(3.3km)→구시락재(0.7km)→동강마을(0.8km)(거리 및 시간 : 12.7km/ 실제는 15.10km를 4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4구간인 금계-동강 구간을 걷는다. 23km로 이루어진 함양권역의 중심 구간으로, 산길이 대부분인 다른 구간과는 달리 이 구간은 냇가를 따라 이어진다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벽송사라는 선승(禪僧)의 요람을 들를 경우에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전체적으로는 임도길과 마을길을 반복해가며 걷게 되는데, 이때 예쁘면서도 정겨움이 가득 묻어나는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 들머리는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센터(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광주-대구고속도로 함양 IC에서 내려와 IC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주차장회전사거리(함양읍 용평리 924)까지 온다. 이어서 남원방면으로 달리다 조동마을사거리(함양읍 구룡리)에서 좌회전하여 1023번 지방도로 옮기면 지안재와 오도재를 넘어 금계마을(의탄리)에 이르게 된다. 마을 앞 임천변에 자리 잡은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055-964-8200)’가 4구간의 시작점이다. 청마산악회처럼 지리산 IC에서 나와 60번 지방도를 이용해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니 참조한다.

▼ 마천면 금계마을(의탄리)에서 휴천면 동강마을(동강리)까지 지리산 자락과 임천의 냇가에 들어앉은 6개의 산촌마을을 잇는 옛길. 구간(11km) 대부분이 임천을 따라 이어지지만, 우리 부부처럼 벽송사와 서암정사라는 의미 있는 볼거리를 둘러볼 경우에는 1.7km 남짓 다리품을 더 팔아야만 한다. 그것도 오롯이 산길을 따라 걷게 된다.

▼ 지원센터 앞 ‘의탄교’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나이가 36살이나 먹은 노후 교량으로, 2015년 새로 놓인 ‘지리산제1교’에게 ‘칠선계곡 관문’ 자리를 내어주고 이젠 둘레길 순례자들이나 건너다니는 뒷방늙은이로 눌러앉았다.

▼ 이때 임천(臨川, 칠선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저 지점에서 임천에 합류된다) 건너에서 ‘의평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저 마을은 산중에 위치하면서도 마천면에서 가장 넓은 평지에 터를 잡았다 해서 ‘의평(義坪, 평정말)’이란 이름을 얻었다. 마을이 널찍하다보니 옛날 하동포구에서 벽소령을 넘어온 보부상들이 저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서 장을 열고 소금 등을 팔기도 했단다.

▼ 다리를 건너니 ‘물길지리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함께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그리고 그 위에다 수심을 표시했다. 물놀이를 오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 길을 나선지 7분. 의탄마을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꺾어 100m쯤 더 걷자,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가파른 침목계단이 얼굴을 내민다. 들머리를 발견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곳이다. 이정표(동강 10.6㎞/ 금계 0.4㎞)가 반대편 길가에 세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의중마을로 이어주는 침목계단은 꽤 가파르다. 거기다 길기까지 하다. 벽송사를 경유하는 구간이 빡세다고 하더니 처음부터 기라도 죽이려는 심산일까?

▼ 길을 나선지 12분.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에 ‘의중마을(이정표 : 동강 10.5㎞/ 금계 0.5㎞)’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해발이 300m나 되는 산촌마을이다. 그런데 오른편으로 의평마을에서 올라오는 도로가 나있는 게 아닌가. 좋은 길 놓아두고 고생을 일부러 사서 사는 꼴이 됐다. 참고로 ‘의중(義仲, 중말)’이란 지명은 의탄리의 3개 자연부락(의중·의평·추성) 중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 동구 밖 쉼터에는 마을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이런 안내판은 4구간에 걸터앉은 여섯 개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따로 검색해 보지 않고도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그나저나 안내판은 이곳의 지명을 ‘의탄리(義灘里)’로 적고 있었다. 고려시대 행정조직인 ‘의탄소(義灘所)’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지방특산물인 탄(숯, 灘)을 중앙에 공납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행정구역인 소(所)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대나무 숲에는 ‘죽포대(竹圃臺)’가 들어앉았다. 1905년의 을사늑약 때 항일의병을 일으킨 죽포 이규현(竹圃 李圭鉉, 1848-1935)이 지팡이를 놓고 쉬던 곳이란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의 동맹록(同盟錄, 의병에 참여한 지사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이스타항공 회장이자 현(21대) 국회의원인 이상직씨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 대숲을 벗어나자 당산나무 몇 그루가 600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벽송사에 오르는 수행자는 물론이고 각박한 현실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범부들에게도 벗이 되어주었을 느티나무 아래에는 원두막 말고도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완주 인증을 받고 싶다면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 전망 좋은 곳에 서자 건너편 산자락에서 거대한 불상(佛像) 하나가 얼굴을 내민다. 건축 마감재로 유명한 ‘마천석(馬川石)’을 캐내고 남은 단면에다 돋을새김 방식으로 조성하고 있는 ‘천왕대불’이다. 2025년에 완공되면 세계 최대(높이 108m)를 자랑할 것이라는데, 얼마나 큰지 현재 얼굴 부분만 조각되어 있는데도 이처럼 멀리서도 바라보이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마천면은 우리나라 3대 화강석인 ‘마천석’의 주산지이다. 검정 계열의 화강석으로 강도가 높은데다 고급스러운 느낌이 강해 건축 마감재로 가장 선호되는 석재다.

▼ 의중마을의 당산은 ‘용유담’으로 직행하는 숲길과 벽송사를 거쳐 용유담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나뉘는 지점이다. 용유담으로 바로 가는 길은 임천을 왼편에 두고 산기슭을 따라 산책하듯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여행자가 선정한 ‘둘레길 베스트 숲길 5’에 들 만큼 걷기에 편하고 또 아름답단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벽송사를 거치는 산길을 타기로 했다. 산허리를 헤집으며 내놓은 이 길은 오래된 숲과 화전민의 흔적에 돌계단까지. 오래된 정취가 더욱 향기로운 정겨운 옛길이다.

▼ 안내판은 이 길을 ‘절로 가는 길’이라 적고 있었다. 절에 기대어 살던 사하촌(寺下村) 사람들이 절을 찾아가던 옛길이란다. 추성마을로 가는 신작로가 뚫리면서 이제 흔적만 남아있지만, 옛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러, 산나물이랑 약초를 캐러, 땔감 하러 산을 오르기 위해 석축을 쌓고 바위를 쪼아가며 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의봉당영골탑(義峯堂 靈骨塔)이라 새겨진 바위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의봉당(수도자가 아닐까 싶다)의 유골을 모셔놓았다는 얘기인데, 낯선 나라 낯선 곳에서 만난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의 묘역이 딱 이랬었다.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로 우리에게 익숙한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로, 그의 묘도 역시 생가(Bergen 소재) 근처 바위절벽에다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고 있었다.

▼ 이 길은 옛날 세사를 시름하는 이들이 지리산을 찾아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였다. 그들은 이 길에서 기도와 순례. 때로는 세상을 호령할 호연지기로 통과의례를 삼았다. 유배나 유폐를 겪는 이들은 초연과 침묵을, 불기둥 같은 혁명가에겐 장엄함을, 그리고 이곳에 깃든 민초들은 일상의 평화로움을 지리산과 함께 호흡했을 것이다.

▼ 길을 나선지 45분, ‘서암정사(瑞庵精舍)’에 도착을 했다. 둘레길은 절간을 피해 오른편으로 향한다. 그렇다고 이야깃거리로 가득한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서암정사는 1989년부터 불사를 시작했으니 역사로만 보면 최신식 사찰이다. 그런데도 자그만 암자를 연상시키는 이름과는 달리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적지 않다. 첫 번째 만남은 천왕문 역할을 하고 있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다. 용틀임 조각에 한자로 법문을 새겨 넣었다. 마하대법왕(摩河大法王) 조어삼천계(調御三千界). 거룩하고 위대하신 부처님께서 온 세상을 조화롭게 이끄신다니 일단은 믿어보자.

▼ 그 뒤는 사천왕상이 버틴다. 하지만 전각 안에 양쪽으로 둘씩 서있는 여느 사찰들과는 달리, 절간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절벽의 자연석에 사천왕상이 일렬로 부조되어 있다. 증장천왕, 광목천왕, 지국천왕, 다문천왕이 순서대로 조각되어 있는데, 그 위에 낀 푸른 이끼가 마치 바위와 한 몸처럼 느껴진다.

▼ 사천왕상을 지나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대방광문(大方廣門)’이 나온다. 대웅전으로 연결시키는 문이니 ‘불이문(不二門)’이라 할 수 있겠다.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진리가 본래 둘이 아님을 뜻한다. 불교의 진리가 불이문을 통해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된다. 그래서 금당(金堂)이 바로 보이는 곳에 세우는 게 보통이다.

▼ 대방광문을 통과하면 붉은 기운을 띤 황금빛 대웅전이 얼굴을 내민다. 서암정사는 벽송사의 원응스님이 창건해 한 뿌리라고 할 수 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특이한 창건 목적이 그 원인이지 싶다. 모태라 할 수 있는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야전병원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국군에 의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는데, 그 과정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찰이 바로 서암정사이기 때문이다.

▼ 마당을 가로지르면 ‘굴법당(窟法堂)’이다. 이름대로 바위 굴 내부 자연석에 불상을 조각해 법당으로 활용한 특이한 구조다. 법당 안은 아미타불을 위시해 8보살과 10대 제자, 신장단 등을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흡사 석굴암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그밖에도 원응 스님이 15년간 필사해서 완성했다는 60만여 자의 금니화엄경을 비롯해 다수의 사경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사진촬영은 금지란다.

▼ 범종각 옆의 연못도 인공적이지만 독특한 느낌을 준다. 뒤편 굴법당과 바위벼랑, 그리고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산자락까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하긴 ‘함양팔경’ 가운데 하나(서암석불)로 꼽힌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 조망도 뛰어난 편이다. 대웅전 앞에 서면 낮은 담장 너머로 지리산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산은 아마 ‘창암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너머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건 형제봉?

▼ 절간을 빠져나오는데 일주문 격인 큰 돌기둥이 작별을 고한다.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문구)은 백천강하만계류(百千江河萬溪流), 동귀대해일미수(同歸大海一味水), 삼라만상각별색(森羅萬象各別色), 환원원래동근생(還源元來同根生)라 적고 있다. ‘수많은 시내가 흘러 바다에 돌아가니 같은 물맛이고, 삼라만상의 다양한 모습도 근원에 돌아가니 한 몸이라’는 뜻으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지만 실은 서로 연계되어 있기에 세상 만물이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상이다.

▼ 벽송사로 가는 길은 서암정사에서 내려와 새롭게 시작된다. 일주문(돌기둥)을 빠져나오자마자 나타나는 삼거리. 둘레길은 직진,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추성마을을 거쳐 칠선계곡으로 들어서게 된다.

▼ 서암정사와 벽송사는 차도로 연결된다. 하지만 자동차까지도 거친 숨을 내뿜어야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하긴 한국불교 최고의 종가가 어디 그리 쉽게 길을 내주겠는가.

▼ 그렇게 10분 남짓 올라섰을까 ‘벽송사(碧松寺)’에 이른다. 너른 마당과 3단으로 층이 나뉜 구성이 인상적인 사찰로 1520년(중종 15년) 벽송당(壁松堂) 지엄(智嚴, 1464-1534)이 옛 절터에 절집을 중건하고 자신의 당호로 절 이름을 삼는데서 유래했다. 이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경내에 있는 석탑에서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할 뿐이란다. 1704년(숙종 30년)과 한국전쟁 때는 소실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된 적도 있다. 이런 배경으로 국군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됐고, 1963년 원응 구환스님이 전각들을 다시 짓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는데, 대웅전과 일주문 등은 아직도 복원이 안 되고 있단다.

▼ 절은 여느 사찰과는 확연히 다르다. 절의 중심에 금당(金堂)이 아닌 ‘벽송선원’이 들어앉았다. 대부분의 전각은 단청(丹靑)도 하지 않은 채로 맑고 고요한 기운을 내뿜는다. 내로라하는 대사들을 배출한 사찰치고는 소박한 외모다. 아니 흐트러짐 없는 선원의 이미지에서 오히려 선불교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맞다. 벽송사는 한국 선불교의 종가다. 벽송대사가 산문을 연데 이어, 벽송의 제자이자 한국 선불교의 양대 산맥인 청허(서산대사·1520-1604)와 부휴(1543-1615)가 수행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 등 선교 겸수 대종장도 108명이나 배출됐단다.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 )이라는 별명은 그래서 나왔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조선시대 선종의 법맥을 지켜냈고, 흐트러진 불교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 보물 474호 ‘삼층석탑’은 절의 뒤쪽 가장 높은 곳에 따로 있었다. 탑이란 본디 법당 앞에 있는 게 보통이니, 원래의 사찰과 중창된 현재의 사찰 위치가 틀리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 탑은 조형예술이 발달한 신라석탑의 기본양식을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예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보존된 탑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그저 남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보물 한 점을 눈에 담았다는 보람이 전부랄까?

▼ 삼층석탑 곁에는 ‘미인송’과 ‘도인송’이라는 노송 두 그루가 전설을 안고 서있었다. 도인송을 향한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미인송의 구애가 눈물겹다. ‘미인이 도인에게 연정을 품고 유혹을 했으나 도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미인은 연정을 버리고 존경의 마음으로 곁에서 바라보기로 했다’는 것이 이들 소나무에 얽힌 전설이다. 하지만 미인송은 사모의 마음을 마저 버리지는 못했나 보다. 버팀목에 의지해가면서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도인송을 향해 기울고 있다. 참!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한번쯤 시도해보면 어떨까?

▼ 언덕에 서면 넉넉한 절간 너머로 맞은편 지리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함양을 둘러싼 지리산과 덕유산은 이 지역 어느 곳에서든 힘찬 산세를 담은 풍경을 넉넉하게 제공해준다.

▼ 절에는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다. 속계와 법계의 가름이 없다는 얘기일까? 아니 비 가림 보호각 안에 모셔진 2개의 목장승이 이를 대신한다. 원래 사찰 초입에 세워져 수문과 호법의 신장(神將) 역할을 했으나 보존을 위해 경내로 옮겨 놓았단다. 이 목장승에 기원하면 부부의 애정이 돈독해진다는데, 사람들은 그 근거로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에서 찾는다고 한다. 가루지기타령에 ‘변강쇠가 옹녀와 지리산으로 들어와 살면서 나무대신 장승을 땔감으로 사용하다 혼쭐이 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주요 무대가 벽송사를 중심으로 한 함양군 마천면 일대라는 것이다.

▼ 둘레길은 목장승 전각 옆에서 산등성이로 이어진다. 숲은 단풍이 한창이다. 4구간(금계-동강) 전체로 보면 단풍이 많지 않은데 이곳은 노랗고 빨갛게 물오른 단풍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그게 여심을 자극했나보다. 어느 하나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만의 포즈를 취하느라 열심인 걸 보면 말이다.

▼ 능선으로 오르는 이 구간은 동네 뒷산 하나 정도의 오름을 해야만 하는 수고로움이 더해진다. 솔숲을 헤집으며 난 산길은 꽤 가파르다. 스틱을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할 만큼 버거운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맞다. 오색단풍 영롱하고 자연조화가 절묘한 풍경 속으로 빨려드는데, 그런 잡생각이 파고들 틈새가 어디 있겠는가.

▼ 벽송사를 벗어나 20분. 사람들이 ‘벽송(왼쪽의 송대동과 모전마을 그리고 오른쪽은 추성동의 광점동을 가르는 능선)’이라 부르는 능선에 올라섰다. 이어서 소나무와 참나무가 적당히 섞인 평범한 능선을 따라 걷게 된다. 이 길을 서산대사도 넘고 승병들도 넘었을 것이다. 목탁대신 창을 들어야 했던 스님들은 얼마나 참담했으랴. 내 산하를 지키기 위함이지만 입가의 ‘나무아미타불’은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 능선을 5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모전마을 갈림길(이정표 : 동강 8.9㎞/ 금계 3.8㎞)’이 나온다. 삼거리인데 둘레길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모전마을로 내려선다. 계속해서 능선을 타다 ‘송대동 삼거리’에서 탈출해 송대마을을 거쳐 송전마을로 내려서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송대마을로 가는 길은 현재 끊어져있다. 발단은 일부 둘레길 도보꾼들이 농산물에 손을 대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길은 폐쇄되고 만다. 이는 또 주민과 주민 간에 서운한 사연들이 실타래처럼 엮이게 만들었다. 도보꾼들이 풀어놓던 푼돈이 함께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둘레길을 다시 열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니 기대해 볼 일이다.

▼ 오르막이 가파르면 내리막 또한 가풀막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 모전마을까지의 구간은 가파른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그것도 통나무계단을 놓아야 했을 만큼 가파른 구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탐방로의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기 때문이다.

▼ 그렇게 30분 정도를 내려왔을까 시야가 툭 트이면서 임천과 그 건너의 법화산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 5분쯤 더 내려서자 이번에는 아담한 계곡과 나무데크 교각을 만난다. 지친 다리를 풀고 가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우리 부부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곤 지난번 3구간 때 우리를 초대해 주셨던 노익장 도반들을 모시고 작은 술상을 차렸다.

▼ 달콤한 휴식을 취한 뒤, 모전마을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선다. 임천과 법화산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내는 멋진 구간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모전마을 삼거리’는 아까 의중마을에서 헤어졌던 주 둘레길과 다시 합쳐지는 지점이다. 이정표도 본래코스(동강 6.9㎞/ 금계 4.1㎞)와 순환코스(동강 7.1㎞/ 금계 5.6㎞)로 나누어 적고 있었다. 참! 벽송사를 거쳐 온 사람들에게 이곳은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정표가 지시하는 동강마을로 가다보면 4구간이 자랑하는 절경인 ‘용유담’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용유담은 이정표가 가리키는 금계마을 방향으로 100m쯤 거슬러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

▼ 엄천강(임천)을 오른편에 끼고 잠시 걷다보면 엄천강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용유담(龍遊潭)이 얼굴을 내민다. 지리산의 맑은 계류가 억겁의 세월 동안 흐르며 깎고 다듬어 빚은 하얀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용유담을 가로지르는 합성형 라멘교(상판과 보, 교각을 일체형으로 지은 다리)도 여간 예쁜 게 아니다. 주인공인 용유담보다도 더 눈길을 끌었다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 절경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다리(용유교) 위에서 바라본 용유담은 특별할 게 하나 없는 물길에 불과했다. 맞다. 용유담의 진가는 반야정사 쪽으로 내려서 물가로 다가서야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인위적으로 깎은 듯 오목하고 볼록한 기암괴석들은 물론이고 지리산을 찾았던 옛 선비들의 자취까지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남명 조식 장구지소’란 글씨 옆엔 점필재 김종직도 보인단다. 정여창과 김일손은 함양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다.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은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을 찾아와 직접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 용유담 옆 바위벼랑에 걸터앉은 반야정사로 들어가니 용(龍) 두 마리가 날아오르고 있다. 마적도사의 전설을 형상화 해놓은 게 아닐까 싶다. 아홉 마리의 용과 함께 지내던 마적도사가 용들이 다투는 소리 때문에 아끼는 나귀가 죽어가는 것을 알고서 두고 있던 장기판을 던져 용들을 용유담에서 쫓아냈다는 전설이다. 이때 던진 장기판 조각들이 용유담 주변 바위가 됐고, 소(沼)는 아홉 마리의 용이 놀던 곳이라 하여 용유담이라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 ‘모전마을 삼거리’로 되돌아가다 엄천강변으로 내려가는 샛길(이정표 : 세동마을 2.1㎞/ 용유담 0.3㎞)을 만났다. 수달은 물론이고 지리산 계곡에만 서식하는 가사어(袈裟魚)가 산다는 이 청정 물길이 좋았던지 선두대장은 아래로 내려가란다. ‘용유담 전설탐방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 탐방로는 물가까지 내려서는 건 아니다. 강변 비탈을 따라 옛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진행이 여의치 않은 곳에는 데크길을 새로 놓았다.

▼ 걷다보면 용유담이 내다보이기도 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지만 지리산댐이 건설될 경우 물에 잠길 수도 있단다. tvN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을 촬영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인데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 탐방로는 썩 편치가 않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바닥에 깔려있어 걷기가 영 불편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곧장 ‘지리산둘레길’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모전마을에서 세동마을까지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이어지니 말이다.

▼ 강변으로 내려간 길은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도로(송전길)로 다시 올라선다. 아까 모전마을에서 헤어졌던 지리산둘레길과 다시 만난 것이다.

▼ 강 건너 산비탈에도 마을이 들어섰다. 층층의 다랑논에 걸터앉은 산촌마을은 한적하면서도 평화롭다. 그림엽서 같은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만든다. 조금 더 내려가면 ‘백연마을’도 눈에 담을 수 있다. 황금을 강에 던져 버린 일화로 유명한 이억년과 조년 형제 중 형인 억년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이조년은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되는 ‘다정가’를 쓴 고려의 문신. 이들 형제 중 맏형인 백년이 동생 억년과 함께 저곳으로 낙향했다고 해서 ‘백연’이란 지명이 생겨났단다.

▼ 도로를 따라 10분쯤 더 걷자 ‘세동마을’이 나온다. 송전리의 5개 자연부락(세동·송대·마적동·고양터·모전) 중 하나로 한국전쟁 때는 큰 고통을 겪었던 곳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또 다른 단어는 ‘닥종이’. 40년 전까지만 해도 닥종이(한지) 생산으로 이름난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이 최근 산촌생태마을로 거듭났다고 한다. 철마다 농산물 수확 등 다양한 체험행사를 펼치는가 하면, ‘쪽’을 이용한 천연 염색 체험도 진행한단다. 산림청이 우리나라 3대 산촌생태마을로 꼽았다면 대충 이해가 갈지 모르겠다.

▼ 운서마을로 넘어가는 도로변 언덕에는 ‘정려(旌閭)’가 지어져 있었다.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을 지낸 신영언(申永彦)의 효행을 기리는 빗돌을 모셔놓은 곳이다. 문헌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으나 종4품의 조봉대부(朝奉大夫)까지 증직 받은 걸로 보아 효심이 꽤나 지극했던 모양이다.

▼ ‘마적도사 전설탐방로’에 대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이곳 세동마을에서 송대마을을 거쳐 용유담(모전마을)까지 옛길을 따라 마적도사에 얽힌 전설을 담은 탐방로를 조성해놓았다는 것이다. 용유담을 비롯해 길을 따라가며 만나는 거품소, 나귀 바위, 장기판 바위, 마적동과 마적사 터 등이 모두 마적도사 전설과 관련된 곳이란다.

▼ 둘레길은 계속해서 엄천강을 옆구리에 차고 간다. 그 언저리에는 작은 마을들이 그림처럼 들어앉았다. 닥나무를 삶고, 종이를 뜨는 일로 항상 분주하던 마을이다. 하지만 종이 뜨는 일상과 샛집 지붕의 산촌 풍경은 이제 옛 얘기가 되어 버렸다. 양지에 밀려 한지는 설 자리를 잃었고, 억새를 띠로 이어 얹은 샛집은 이제 색깔도 고운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 세동마을을 지나친지 25분. ‘송문교(이정표 : 동강 3.1㎞/ 금계 7.9㎞)’를 앞에 둔 곳에서 이색적인 입간판을 만났다. 커피가 무료이니 한잔 마시고 가라는 것이다. 숙박하는 집도 아니고, 영업하는 집도 아니니 마음 놓고 마시란다. 세계 일주를 목표로 해외여행을 시작한지도 벌써 7년. 그동안 40개 가까운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이런 상황을 처음으로 만났으니 TV 프로그램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딱 어울리는 상황이랄까?

▼ 옛길로 올라서니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정수기가 손님을 맞는다. 믹스커피와 종이컵도 넉넉하고, 한가롭게 마시며 쉬어가라는 듯 비치파라솔에 의자까지 놓아두었다. 고마운 마음을 포스트잇에 담아놓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가슴은 왜 이리 먹먹해지는지...

▼ 운서마을로 가는 구간은 지리산 자락 깊숙이 들어온 산촌마을과 엄천강을 함께 만나는 길이다. 엄천강을 따라 걷는 옛길과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임도를 차례로 걷는다. 그 길을 걷다보면 발아래로는 엄천강이 까마득하게 흐르고, 산자락에 둥지를 튼 산촌마을들은 기껏해야 한두 채가 전부다. 그 순박한 산촌의 전경이 나그네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엄천강의 물돌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한마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니 그보다는 저 어디쯤에 있을 ‘새우섬’이 그 고움을 아련한 아픔으로 덧칠해버린다. 새우섬은 엄천강 물줄기가 급하게 휘돌면서 만들어놓은 육지 속 섬(지금은 삼각주가 되어 위리안치가 풀린 지 오래다)이다. 세종대왕의 12번째 왕자인 ‘한남군’이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돼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서른 한 살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새우섬에서 마감했다.

▼ 동강마을까지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무인카페를 출발한지 30분. 둘레길은 그 첫 번째 고개인 운서고개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특별한 볼거리는 없는 구간이다. 아니 도열하듯이 늘어서있는 노송이 볼거리라면 볼거리일 수도 있겠다.

▼ 잠시 후 올라서게 된 고갯마루에는 정자를 지어놓았다. 이정표(동강 1.8㎞/ 금계 9.2㎞)는 이곳을 ‘운서쉼터’로 표기하고 있었다. 올라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잠시 쉬었다가라는 모양이다.

▼ 고개를 내려서자 운서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저 마을은 산촌으로 유명한 휴천면에서도 가장 좁은 농경지를 지닌 마을로 알려진다. 마을의 3/1 이상이 국립공원 안에 있으며, 나머지도 산악지대라서 약간의 텃밭이 있을 뿐이란다. 그래선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가하면, 담도 낮아 집안일을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다. ‘귀농인들이 마을 주민과 잘 어울려 사는 곳’이라 소개하던 운서쉼터의 안내판 글귀가 가슴에 와 닿는 풍경이라 하겠다.

▼ 이 땅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흔적을 쫓아가노라면 자연과 인간은 한 몸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초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 둘레길은 이제 두 번째 고개인 구시락재로 향한다. 가파른 산비탈로 다닥다닥 논밭이 이어지고 길은 그 중턱으로 연결돼 있다. 고단함으로 일궈낸 그 풍경에 눈이 아리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작은 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롭게만 보인다. 그림엽서 같은 모습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

▼ 운서마을을 지나친지 12분. ‘구시락재’에 올라섰다. 운서마을과 동강마을을 잇는 고갯마루로 조선조 성종 때 김종직이 지리산 기행을 위해 넘었던 고개이기도 하다. 기행문인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그는 이 고개를 넘고 운서마을을 지나 천왕봉으로 올랐다고 적고 있다. ‘구시락’이라는 지명이 주는 이름이나 김종직의 품었을 호연지기와는 달리 고갯마루는 보잘 것이 없었다. ‘십이월의 항구’이라는 산양삼 생산 농가에서 널어놓은 ‘도라지·배 즙’이 전부랄까?

▼ 고개를 넘으면 엄천강이 널따란 들녘과 함께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 건너의 ‘원기마을(院基洞)’은 조선시대 나라의 긴급사항을 전달하거나 민의를 수렴하기 위한 심부름꾼들이 머무르던 숙소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역원(驛院)이 있던 터(基)’라는 것이다. 마을의 기원을 ‘새우섬’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새우섬에 유배된 한남군을 감시하기 위해 찾아온 관리들이 쉬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 고갯마루에서 10분 거리에는 동강마을의 ‘당산 쉼터’가 있다. 이름처럼 오랫동안 지역민들의 쉼터 역할을 해왔는가 하면, 신성하게 여겨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온 곳이기도 하다. 한편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도 이곳을 화암(花巖)으로 소개하고 있다. 쉼터 뒷산의 모양새가 연꽃봉우리처럼 생긴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예로부터 ‘꽃봉산’으로 불려왔단다.

▼ 트레킹날머리는 ‘동강마을’

물기 하나 없는 개울가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자 동강마을이 나오면서 4구간의 장정이 막을 내린다. 이색적인 모양새의 화장실 앞에 동강마을의 안내판과 함께 벅수와 이정표(수철 12.1㎞/ 금계 11.0㎞)를 세워 이곳이 4구간과 5구간의 경계임을 알리고 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 3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은 15.10km 찍는다. 용유담 및 사찰을 둘러보느라 제시된 거리보다도 2.4km를 더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오늘도 역시 집사람과 함께 했다. 우리 부부는 주말이면 여행이건 산행이건을 가리지 않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다. 그곳은 일정에 따라 멀고 가까움만 있을 뿐 다른 세상과의 새로운 만남이라서 때와 장소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낯선 풍경을 만나고 느끼면서 걷는 게 좋을 뿐이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인월-금계)

 

여행일 : ‘21. 10. 16(토)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인월면·산내면,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일원

여행코스 : 구인월교→중군마을(2.1km)→수성대(2.9km)→배너미재(0.8km)→장항마을(1.1km)→서진암(2.5km)→상황마을(3.5km)→등구재(1km)→창원마을(3.1km)→금계마을(3.5km)(거리 및 시간 : 20.5km/ 실제는 중군마을에서 장항마을까지를 빼고 16km를 4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3구간인 인월-금계 구간을 걷는다. 4개 코스 46km로 이루어진 남원권역의 세 번째 구간으로 이 구간의 끄트머리에서 둘레길은 경남(함양군 마천면) 땅으로 들어선다. 구간이 긴데다 두 개의 큰 고개까지 넘어야하기 때문에 지리산둘레길 22개 구간 가운데 가장 힘든 코스로 꼽힌다. 하지만 올망졸망한 산촌마을과 계단식 다랑논, 그리고 지리산의 주능선을 바라보는 재미는 이 구간이 지닌 가장 큰 자랑거리다.

 

▼ 들머리는 구인월교(남원시 인월면 인월리 688-5)

광주-대구고속도로 지리산 IC에서 내려와 ‘인월장터로(나들목-구인월교)’를 타고 인월면소재지를 통과하면 ‘구인월교(24번 국도에서 시가지로 들어오는 곳에 ‘인월교’라는 새로운 다리가 놓이면서 ‘옛 구(舊)’ 자를 덧붙이지 않았나 싶다)’가 나온다. 지리산둘레길 3구간의 들머리는 다리 건너(‘달오름마을’ 방향)에서 열린다.

▼ 인월면(전북 남원시) 월평마을(인월리)에서 마천면(경남 함양군) 금계마을(의탄리)까지 지리산 자락에 들어앉은 6개의 산촌마을을 잇는 옛길로, 거리(20.5km)가 먼데다 등구재(해발 635m)와 배너미재까지 넘어야하기 때문에 종주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구간이다. 그래서 산악회 대부분은 2구간에 3구간의 일부를 더해 일정을 짠다. 청마산악회에서도 지난번 2구간 때 3구간의 중군마을까지 걸었었다.

▼ 3구간(인월-금계)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 곁에는 ‘인월 전통시장’에 대한 홍보판도 세워놓았다. 맞다. 화개장과 더불어 영호남 소통의 장터라니 구경삼아 한번쯤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길을 나서기 전에 시장에 들러 뜨끈한 순댓국으로 배를 채워도 좋겠고 말이다. 끝자리 3·8일에 오일장이 열리지만 4~10월 토요일에는 풍물시장, 할머니장터, 음악공연도 열린단다.

▼ ‘구인월교’에서 활처럼 휘어진 람천(濫川)의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벚나무가 터널을 만들어내는 멋진 길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곳이 일본 땅도 아닐진대’로 치부해버리는 풍경이기도 하다. 물론 과거 일본인이 제주도에 있는 왕벚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일본 벚나무’의 시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왕벚나무를 가져가서 개량해서 그네들의 국화를 만들었고, 실제 우리가 아름답다며 사방에 심고 있는 벚나무들이 왕벚나무가 아닌 그네들이 개량해 놓은 종자라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 구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은 람천의 건너편에 있다. 다리(구인월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100m만 가면 나오니 길의 상태나 기상 상황 등을 센터에서 확인하고 나서는 게 좋겠다(월요일은 휴관). 구간지도와 숙박정보, 주변관광지 안내 리플릿 등도 얻어 볼 수 있다. 일을 보고 난 다음 센터 앞의 물막이(堡)를 건너면 둘레길에 합류된다.

▼ 인월청년회에서 조성했다는 숲길은 흥부고을에 대한 홍보까지 하고 있었다. 박을 절반으로 잘라 의자를 만들었는가 하면, 박과 제비 그리고 흥부로 여겨지는 조형물로 치장을 했다. 참고로 이곳 인월면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아영면 성리마을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의 하나인 흥부전의 배경이다. 전해 내려오는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곳이라 굳게 믿는단다.

▼ 1.5km쯤 이어지던 둑길이 끝나면 탐방로는 60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그렇다고 안전에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다. 도로변에 따로 길은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나 실컷 즐기면 되겠다. 인월면의 들녘을 꾸려나가던 ‘람천’은 저곳에서 또 다시 협곡(덕두산의 동쪽) 속으로 빨려든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산내면의 들녘을 만들어낸다.

▼ 500m쯤 더 내려가면 3구간의 첫 번째 마을인 ‘중군마을(이정표 : 금계 18.4km/ 인월 2,1km)’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을 나선지 30분 만에 만난 이 마을의 역사도 역시 이성계로부터 시작된다. 마을 이름도 고려 말(1380년) 왜구를 토벌하러 온 이성계가 이곳에 중군(中軍)을 둔데서 유래되었다. 고려의 군대는 중·전·후·좌·우군의 오군으로 편성된다. 이 가운데 중군이 주둔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고려 말이라면 람천을 따라 난 이 길이 호남의 남원과 영남의 마천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전주 한옥마을의 한쪽을 옮겨놓은 듯 까만 기와집 수십 채가 옹기종기 들어앉은 마을로 들어서면 소담한 벽화가 길손을 반긴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벽화들과는 달리 이곳은 민화로 채워졌다. 민속마을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게 다는 아니다. 잣과 호두, 다람쥐를 그려 넣음으로써 이 마을이 본업인 농사 외에도 호두와 잣이 많이 생산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 중군마을에서 장항마을까지 4.5km 구간은 생략하기로 했다. 특별한 이야깃거리나 볼거리가 없다는 게 이유지만, 실제는 집사람의 체력을 안배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곳은 장항마을의 ‘당산소나무’. 마을 뒤 언덕에서 천왕봉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한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다. 그런데 수령이 400년도 넘다보니 신기(神氣)까지 띠었나보다. 마을 지켜준다고 해서 당산제까지 지내오고 있단다.

▼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의 자랑거리는 지리산에 대한 조망이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중봉과 제석봉·촛대봉을 낀 지리산의 주능선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진다.

▼ 당산소나무보다도 더 오래 묵어 보이는 느티나무를 향해 내려서면서 오늘의 여정을 시작한다. 참! 운봉이 호수일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배넘이재’까지 올라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만두기로 해봤다. 고갯마루 있다는 ‘H빔’ 형상의 나무, 즉 한 뿌리에서 나온 소나무가 둘로 나뉜 뒤 다시 손을 맞잡고 나란히 하늘로 향하는 소나무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해야 3구간만의 매력이라는 주막에서 막걸리라도 한잔 맛볼 수 있잖겠는가.

▼ 느티나무에서 오른편으로 내려서니 ‘장항마을(獐項里)’이 발아래다. 덕두산 줄기의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산세가 노루목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노루 장(獐)’자, ‘목 항(項)’자를 써서 장항리라 했단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노루목이 더 익숙하다나?

▼ 장항마을 앞 도로(이정표 : 금계 13.5㎞/ 인월 7.0㎞)에는 ‘신선둘레길’이 나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반대편에 종합안내도까지 세워놓고 신선처럼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걸어볼 것을 권한다. 이곳 장항마을을 출발해 원천마을과 팔랑마을, 팔랑치를 거쳐 바래봉에서 끝을 맺는 길이 9.5km의 1코스와 이곳에서 내령과 뱀사골을 거쳐 달궁마을로 이어지는 2코스(15.8km)가 있단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장항교’ 아래로는 ‘람천’이 흐른다. 산내면의 들녘에서 만수천의 물줄기를 보탠 냇물은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에서 다시 협곡을 통과하면서 ‘임천(瀶川)’이 된다. 이 임천은 남강, 남강은 본류인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흐른다.

▼ 다리(장항교)를 건너자 나타나는 60번 지방도(이정표 : 금계 13.2㎞/ 인월 7.3㎞). 그런데 도로 표지판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오른쪽 함양 방향으로 길을 잡는데, 산내면이 마치 함양군에 속해있는 것처럼 표기해 놓았다.

▼ 도로변을 200m쯤 걸었을까 산내우체국(이정표 : 금계 13.0㎞/ 인월 7.5㎞)이 나오는가 싶더니 둘레길은 또 다시 도로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곤 감식초공장 방향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참! 길이 나뉘는 곳에는 둘레길 순례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 집사람에게도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다. 텅 빈 논밭과는 달리 둘레길 주변의 가을은 도리어 푸르디푸르렀기 때문이다. 냉이와 민들레가 봄나물 못잖게 푸른데 집사람이 그걸 놓칠 리가 있겠는가. 씨앗에서 자라난 가을 냉이가 진미라면서 채취에 여념이 없다. 저 냉이는 다음 주 내내 우리 집 밥상을 즐겁게 해줄 것이다.

▼ 저녁노을보다 더 붉게 물든 고추, 다랑논에서 황금빛으로 춤추는 벼로 대변되는 가을 풍경이지만 한로(寒露)를 떠나보낸 지금은 온 들녘이 텅 비었다. 하지만 일손이 바쁜 농부는 과일밭 가을걷이까지는 마치지 못했나보다. 용광로보다 뜨거운 여름을 온몸으로 견뎌낸 열매가 흙을 떠날 채비를 마치고 농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 임도(천왕봉로)로 올라선지 20분 남짓. 둘레길은 매동(梅洞) 마을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임도(매동길)를 보탠(이정표 : 금계 11.8㎞/ 인월 8.7㎞) 다음 실상사의 부속암자인 ‘서진암’으로 향한다. 이어서 10분쯤 더 걷자 서진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는데, 길가에 놓인 지게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암자까지는 걸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둘레길은 오솔길로 변한다. 그리고는 산비탈을 횡으로 째며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하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는 덕분에 지루하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코끝을 스쳐가는 솔향기가 이렇게 짙은데 그런 생각이 파고들 틈새가 어디 있겠는가.

▼ 이 길은 남원과 함양 사람들이 오가던 옛길이다. 그 연륜이 죽은 나무까지도 변화시키나 보다. 쓰러지기 직전인 고사목이 저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길 10분 남짓. 길이 둘로 나뉜다. 벅수(금계 10.5㎞/ 인월 10.0㎞)야 둘레길의 방향만 표시하고 있지만 오른편은 중기마을(산내면 대정리)로 연결된다.

▼ 갈림길에는 ‘지리산 길섶’이라는 갤러리의 홍보용 팻말도 세워져 있었다. 사진작가인 강병구씨가 운영하는 카페 겸 갤러리인데, 숙박은 물론이고 아침저녁 식사까지 제공된단다. 조금 우회는 하지만 둘레길과 연결되니 순례길 나그네들에게 잠시 쉬었다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 울창한 솔숲을 헤집으며 난 둘레길은 걷는 맛이 일품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길 정비가 잘 돼 있어 어린 자녀와 함께 걸어도 좋을 것 같다. 맞다. 이 길은 옛날 마천과 인월을 잇는 가장 빠른 길로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마천 주민들이 인월장을 오갈 때 이용하던 ‘지리산 옛길’이다.

▼ ‘사람의 손이 떠났다’는 안내판의 문구가 눈길을 끌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한때 고추가 익고 벼가 고개를 숙이던 논밭은 농부의 발길이 끊기자 묵밭이 되었고, 그 빈자리에 나무가 들어서면서 숲으로 다시 태어났단다.

▼ 산이 크니 골짜기 또한 클 것은 당연. 그래선지 우천시 통행이 제한되는 곳도 두어 번 만날 수 있었다. 안내판은 이런 사정을 적고 그려놓은 지도를 따라 우회할 것을 권한다.

▼ 산비탈을 따란 난 길은 작은 고갯마루(이정표 : 금계 9.9㎞/ 인월 10.6㎞)를 넘는다. 이어서 임도를 따라 중황마을로 들어선다. 유원지 느낌이 들 정도로 민박과 쉼터가 많이 들어선 마을인데, 그 첫 번째 만남은 ‘머루랑다래랑’이라는 펜션 겸 쉼터이다. 담쟁이로 뒤덮인 돌담을 끼고 있는데, 천왕봉과 주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 문구로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었다.

▼ 등구재로 향하는 둘레길은 이제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을 차례로 지난다. 지리산둘레길은 이렇듯 둑길과 농로, 숲길, 산길, 임도, 차도 등 길이라는 길은 모두 만난다. 마을의 관통도 수시로 한다. 그러다보니 시도 때도 없이 갈림길을 만나게 되고,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행여 갈림길이라도 나올라치면 어김없이 이정표를 세워두었고, 그 간격이 길 경우에는 곳곳에 둘레길 특유의 리본을 매달아놓았다.

▼ 천석꾼이 살았다는 상황마을 주변은 온통 다랑논 일색이다. 다랑논은 산골짜기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된 좁고 긴 논을 말한다. 지리산 자락 완만한 비탈을 따라 조성된 다랑논은 무수히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풍경이다.

▼ 탐방로 주변에는 반듯하게 지어진 주택들이 의외로 많았다. 주인은 외지에서 들어온 이들이 대부분인데 주로 펜션으로 운영된다. 들리는 얘기로는 심심산골인데도 불구하고 계곡이나 물가의 좋은 자리는 이미 웬만한 중소도시의 부동산 가격 못지않게 올랐다고 했다. 웰빙이나 힐링에서 행복을 찾는 세태가 불러온 변화일 것이다.

▼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 걷는다. 집은 물론이고 밖에서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동반자이다. 아니 내 여행기를 마무리까지 지어주니 도반(道伴)이랄 수도 있겠다. 그녀와 함께 들어선 곳은 중황마을(이정표 : 금계 8.9㎞/ 인월 11.6㎞)의 ‘상순이 쉼터’. 눈에 익은 메뉴가 구미를 당기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민물새우 파전(1만5천원)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두 병(만원)이나 비우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지역경제를 살려야한다는 핑계로 집사람이 채 썰어 말린 산밤 한 봉지(2만원)를 챙겨들었음은 물론이다.

▼ 앗! 이런 심심산골에서 중국음식점을 만나다니... 전화번호까지 적혀있는 걸 보면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외침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 연화사 갈림길을 지난 둘레길은 물레방아로 치장된 ‘산그늘 민박’ 앞에서 숲속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나타나기에 이쯤에서 등구령이 나오겠지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등구령은 한참을 더 진행하고서야 만날 수 있었다. 맞다. 등구재를 향하는 길은 수평으로 걷다가 잠시 오르막이 이어지고 또다시 마을쪽으로 내리막을 그리는 길이다.

▼ 숲길이 끝나자 이번에는 ‘논들길 쉼터’가 길손을 맞는다. 이름 그대로 둘레길은 이곳에서 밭두렁 논두렁을 지난다. 수양버들이 운치를 더하는 작은 저수지(상황소류지)도 만날 수 있었다. 저수지 앞에는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시야가 툭 터진다는 증거일 것이다.

▼ 맞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일품이었다. 중황리(상황·중황·하황마을)의 다랑논이 계단처럼 아래로 향하는데, 그 너머에는 달궁계곡이 들어앉았다. 지리산의 주능선과 서북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짐은 물론이다.

▼ 둘레길은 등구재를 향해 막바지 힘을 쏟는데, 주변은 아직도 다랑논 일색이다. 다랑논을 만들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축대가 마치 돌담처럼 정겨운데, 개중에는 어른 키로 두길 이상이나 되는 높다란 것도 보인다.

▼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굽이굽이 다랑이 논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낸다. 황금빛 다랑논을 기대했지만 산골 농부는 이미 추수를 마쳐버렸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수직으로 쌓아 올린 논 축대가 이곳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 해 가슴이 찡하다.

▼ 진행방향 저만큼에 등구재가 나타날 즈음 ‘등구령쉼터’가 반긴다. KBS2TV 인기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이 다녀가면서 더 유명해진 쉼터다. 그런 유명세를 그냥 지나치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가파른 오르막길은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 쉼터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고갯길은 가파르게 일어서고 내쉬는 숨결도 덩달아 가팔라진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걷는 내내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 산내우체국 앞에서 임도로 들어선지 2시간 10분 만에 ‘등구재(이정표 : 금계 6.6㎞/ 인월 13.9㎞)’에 올라섰다. 삼봉산에서 금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고갯마루로 ‘거북이가 기어 올라가는 지형’과 닮았다 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이 고개를 기준으로 걸어온 길은 남원시 산내면 땅이고, 가야 할 길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 땅이다. 참고로 등구재 외에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고개로는 오도(吾道)재, 제안재, 팔량치(八良峙) 등이 있다.

▼ 남원과 함양의 경계인 등구재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고 또 이어주는 길목이다. 남원의 목기가 등구재를 넘어 함양 어느 집 제사상에 올랐고, 함양의 어느 색시는 등구재를 넘어 남원으로 시집을 갔다. 또한 이 길은 창원마을 사람들이 인월장을 보기 위해 넘었던 곳이며 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마천면으로 통하는 유일한 고개였다. 팔 물건을 이고 지고 가서 산 물건을 또 이고 지고 넘던 고개가 이 등구재이다.

▼ ‘서쪽 만복대에 노을이 깔릴 때, 동쪽 법화산 마루엔 달이 떠올라 노을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고갯길(등구재 안내판에 적힌 글)’로 포장된 등구재를 넘으면 길은 숲을 따라 이어진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갑자기 고도를 뚝 떨어뜨린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침목계단을 그것도 나선형으로 만들어 멋까지 잔뜩 부려놓았다.

▼ 그렇게 10분쯤 내려섰을까 오두막 같은 쉼터(이정표 : 금계 5.9㎞/ 인월 14.6㎞)’를 만난다. 삼거리인 이곳에서 둘레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창원마을로 향하는 빠른 길은 오른쪽이다. 그런데도 안내판은 왼쪽으로 에둘러가라고 적고 있었다.

▼ 위에서 얘기한 안내판이다. 창원마을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오른편 임도를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민원발생 사유지’라니 소유주가 둘레길 순례자들의 통행을 반대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 뭐라 하겠는가마는 김삿갓의 ‘네 절 인심 고약타! 지옥가기 꼭좋타!’라는 싯구가 떠오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는 노릇이다.

▼ 지름길을 빼앗긴 둘레길은 빙 에둘러 간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가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시멘트포장길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 막바지에 이를 즈음 하늘금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지리산 주능선이 그야말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감탄할 수밖에 없는 멋진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리운 이를 갑자기 어는 길목에서 만나는 기분이랄까?

▼ 길가 오두막은 순례자들의 멋진 포토죤이 되기도 한다. 하긴 TV에서 아무 이유 없이 이 구간을 소개해 주었겠는가. 이 구간은 TV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강호동과 이승기가 걷던 길이자, ‘미운 오리 새끼’에서는 이상민과 김준호, 박군이 걸었다. 그만큼 보여줄게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논두렁밭두렁에 산길, 마을길을 넘나들며 걷다보면 아련한 기억 속 고향을 떠올리고, 지리산 주능선이 바라보이는 탁 트인 전망에 호연지기를 느끼게 된다.

▼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꼭 필요한 샘물도 만날 수 있었다.

▼ 산촌의 농부는 쉴 겨를이 없나보다. 다랑논의 가을걷이를 끝낸 게 엊그제이련만 농부는 벌써부터 내년 농사를 준비한다.

▼ 둘레길은 김해김씨(횡성현감공파) 제각 앞(이정표 : 금계 3.6㎞/ 인월 16.9㎞)에서 마을을 피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 이어서 잠시 후에는 창원마을을 지켜주는 보호수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마을의 수문장을 자처하는 당산나무는 진초록을 넘어 이젠 짙은 묵빛으로 향하고 있다. 조금 더 있으면 저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길 것이다. 하지만 변해버린 외모에 관계없이 오가는 길손의 안녕을 빌어줄 것이다. 참! 벅수(이정표 : 금계 3.5㎞/ 인월 17.0㎞)는 이곳을 ‘창원당산’으로 적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당산제를 모셔오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당산에는 3구간의 두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전망데크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사진의 배경이 될 만한 조망은 결코 아니다.

▼ 마을로 내려서자 창원마을의 산촌생태휴양관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산촌체험을 위해 찾아온 이들이 머무는 숙소로 이용된다. 참고로 이곳 창원마을은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마을’로 대변되는 하늘 아래 첫 동네이다. 지난 2008년 11월 故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금계마을까지 둘레길을 걷는 중에 들러 반홍시를 먹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꼭 다시 한 번 오겠다’고 주민들과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 마당으로 들어서자 하봉에서 천왕봉을 거쳐 칠선봉과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주능선이 흡사 파노라마처럼 널따랗게 펼쳐진다. 체험관에서 세워놓은 조망도와 비교해가며 조망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 창원마을을 지났으니 둘레길 3구간의 8부 능선은 이미 넘은 셈이다. 하지만 나머지 구간도 만만치가 않다. 휴양관을 빠져나온 둘레길이 마을 안길을 통과하지 않고 또 다시 산자락을 향해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 이때 창원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원래 이름은 창말(또는 창촌). 조선시대 마천면 내 각종 세금으로 거둔 약초 등의 물품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지면서 창원마을이 됐다. 창고마을이었던 유래처럼 지금도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농·산촌 마을 가운데 하나란다.

▼ 시멘트포장길이 끝나자 둘레길은 또 다시 산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둘레길이라기 보다 등산로에 가까운 산길(이 구간을 ‘숲터널재’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을 한참이나 오르내리게 된다. 3구간의 또 다른 난코스라 할 수도 있겠다. 하긴 ‘순례자의 길’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 대신 그에 대한 보상은 컸다. 고개를 넘자 눈에 담아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사이 전사처럼 제 몸을 붉게 단장한 잘생긴 소나무들 사이로 뻗어나간 나무계단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소나무 사이사이로 천왕봉까지 내다보이는 것이다. 잠시지만 눈의 호사가 이루어지는 구간이다.

▼ 30분 정도의 숲길이 끝나자 시야가 툭 트이면서 진행방향 저 아래로 금계마을이 나타난다. 여정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는데 앞산의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지 않겠는가. 줌으로 당겨보자 분주하고 움직이는 중장비도 보인다. 국내 유일의 검은색 화강암인 ‘마천석’을 채굴하는 채석장이라고 한다. 색깔이 검은 이유는 운모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라는데, 인테리어 자재로 꽤나 유용해 가격도 제법 나간단다.

▼ 드디어 금계마을이다. 이 마을은 안국사 아래 생겨난 사하촌(寺下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금계라는 이름의 유래는 뒷산 이름이 금산이었고, 마을의 모양이 닭을 닮았다 해서 금계가 되었단다. 하지만 원래 이름은 노디목. 물을 건널 때 딛는 디딤돌, 즉 징검다리마을을 의미한단다. 이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한국전쟁 때이다. 당시 군경 토벌대는 지리산 산간 지역에 흩어져 있던 마을들이 빨치산의 식량 보급처이자 은거지가 된다고 판단해 대대적인 소개 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때 근동에 흩어져 있던 추성·의평 등의 여러 마을을 불태우고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그들이 이주해 온 곳이 바로 이곳 금계마을인 것이다.

▼ 트레킹 날머리는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마을안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자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가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폐교된 마천초등학교 의탄분교의 건물을 리모델링해 둘레길 지원시설을 만들었는데, 농산물판매장과 간이음식점, 휴게실 등 다양한 시설들이 함께 들어서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13.81km를 걸었다. 지난번 2구간 때 추가로 걸었던 중군마을까지의 거리를 합하면 16km(중군마을에서 장항마을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했다)쯤 걸은 셈이다. 걷는 데는 4시간 40분이 결렸다. 산길이 많은데다 집사람이 나물까지 뜯느라 서서히 걸었던 모양이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운봉-인월)

 

여행일 : ‘21. 10. 2(토)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인월면 일원

여행코스 : 운봉읍→서림공원(0.2km)→북천마을(0.8km)→신기마을(1.1km)→비전마을(2km)→군화동(0.8km)→흥부골자연휴양림(2.9km)→월평마을(1.5km)→구인월교(0.2km)(거리 및 시간 : 9.9km, 실제는 10.23km을 2시간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2구간인 운봉-인월 구간을 걷는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남원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운봉고원(해발 500m)의 너른 들녘과 마을길을 걸으며 즐기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조망이 자랑거리이다. 특히 걷는 도중 만나게 되는 비전마을은 2구간의 하이라이트,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창시자인 송홍록 선생과 국창(國唱) 박초월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 들머리는 운봉읍사무소 앞 사거리(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광주-대구고속도로 지리산 IC에서 내려와 국도 24호선을 타고 남원 방면으로 들어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운봉읍’에 이르게 된다. 운봉읍행정복지센터 바로 직전의 사거리가 지리산둘레길 1, 2구간의 경계이다. 만일 승용차로 왔다면 서림공원 앞으로 가면 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100m쯤 들어가면 나오는 서림공원 앞에 널따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 남원시 권역의 두 번째 구간으로 운봉읍 서천리와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9.9km 길이의 둘레길이다. ‘통영별로(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과 한양을 잇는 옛길)’와 람천의 둑길을 따라 걷게 되는데, 이때 좌우로 펼쳐지는 고리봉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과 고남산·수정봉 등 백두대간의 준봉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구간이다. 황산대첩비, 송흥록 생가 등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은 덤이라 하겠다.

▼ 지리산둘레길 2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은 읍사무소에서 인월면(引月面) 방향으로 첫 번째 사거리에 세워져 있다. 장승을 형상화한 이정표(인월 9.9㎞/ 주천 14.7㎞)도 이곳이 1, 2구간의 경계임을 알려준다.

▼ 첫 번째 만남은 ‘서림공원(西林公園)’이다. 운봉 읍민들의 휴식처이자 문화공간으로 당산(느티나무 숲)을 중심으로 운동장과 충혼탑, 그리고 식수대·모정·화장실 등의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당산(堂山)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문화적 가치(국가민속문화재 제20호)와 아름다운 경관(남원의 숨은 보석 10선)을 동시에 인정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서림공원에는 남녀 한 쌍의 ‘돌장승’이 있다. 장승은 민간 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하면서 잡귀를 물리치는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한다. 보통은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 장승은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해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각각의 가슴에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男)과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女)을 음각했는데. 벙거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자유 분망한 표정이 매우 재미있다.

▼ 축구장과 테니스장 등의 체육시설도 서림공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귀촌이 장려되는 추세이어선지 요즘은 저런 체육단지 하나쯤 갖지 않은 읍·면은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 됐다.

▼ 2구간의 스탬프보관함은 ‘서림교’ 앞에 있었다. 지리산둘레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스탬프보관함을 매 구간마다 하나씩만 세워놓았다는 점이다. 완주를 인증 받으려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옆에는 2코스 안내판과 ‘벅수’도 세워놓았다. 장승의 다른 표현이 벅수인데, 우직하거나 바보스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단다. 그 우직스러움 덕분에 ‘지리산둘레길’의 이정목이 되기도 했다. ‘지리산둘레길’의 우직함과 묵묵함을 잇고자하는 마음에서란다. 세상은 촌각을 다투듯 바쁘고 정신없지만 지리산에 깃들어 보면 참 우직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과 숲이 있다면서 말이다.

▼ 람천(濫川)의 둑길을 따라 걸으면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벚나무가 숲을 이루는 이 길은 ‘전북천리길’도 함께 쓴다. ‘달을 끌어당기는 마을을 향한 여정’이라는 부제를 달아선지 동일한 여정(운봉→인월)인데도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참고로 전북천리길은 전라북도가 열네 개 시군에 놓인 길 중에 빼어나게 아름답거나 옛 선인들의 발자취가 각별한 길만을 따로 모아 놓은 길이다.

▼ 엿새만 더 있으면 한로(寒露)이다.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날이니, 농부는 더 추워지기 전에 추수를 마쳐야 한다. 특히 운봉고원 들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들녘에는 추수를 마친 논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바닥에서 말라가고 있어야 할 볏짚 대신에 하얀색 ‘곤포 사일리지(일명 공룡알)’만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2분 만에 ‘신기교(이정표 : 인월 9.0㎞/ 운봉 0.9㎞)’를 건넌다. 두 번째 다리이나 첫 번째 다리인 ‘협동교(인월 9.3㎞/ 운봉 0.6㎞)’는 건너지는 않고 스치듯이 지나쳤다. 참고로 협동교에서 시작된 북천마을은 이 다리를 끝으로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신기교를 건너면 신기마을이 시작된다.

▼ 다리 아래로는 ‘람천(濫川, ‘넘칠 람’자를 쓰는 걸 보면 옛날 속깨나 썩였던 모양이다)’이 흐른다. 지리산의 고리봉에서 발원하여 남원시 운봉읍·인월면·산내면을 지나 함안군 마천면에서 임천에 합류되는 하천이다. 람천은 중간에 소하천(주촌천·운봉천·준향천·풍천·만수천)을 보태 몸집을 불린 다음 임천으로 흡수되고, 이어서 남강과 낙동강을 거쳐 남해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반대편 둑길, 그러니까 람천을 오른쪽 옆구리에 차고 이어진다. 이곳은 늦게 심어선지 벚나무가 자잘하다. 그늘을 만들어주지 못해 오뉴월 삼복더위에는 힘들 수도 있겠다.

▼ 하지만 보여주는 경관이 빼어난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오른편은 운봉고원의 젖줄인 ‘람천’이 흐르고, 그 너머로는 고리봉에서 출발한 지리산 서북능선이 고리봉을 거쳐 덕두산으로 헌걸차게 뻗어나간다.

▼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이번에는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너른 들녘이 나타난다. 뒤로 보이는 고남산과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북풍의 바람막이가 되어주니 어찌 풍요롭지 않겠는가.

▼ 신기교를 건넌지 15분 화백나무(花柏, 난 측백나무인줄 알았다) 가로수가 멋을 부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사반교(인월 7.8㎞/ 운봉 2.1㎞)’가 다리를 건너란다. 이어서 탐방로는 오른쪽 둑길을 탄다. 참! 다리를 건너기 전, 왼편으로 가면 신기마을이 나온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 아직도 탐방로는 운봉고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런 너른 들녘을 놓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가 지리산을 경계로 영토다툼을 치열하게 벌였다. 그래서 운봉 주변을 둘러싼 지리산 줄기엔 산성터가 여럿 남아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수원, 밀양과 함께 벼개량사업, 소 종자개량사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만에 동편제마을 방문자센터에 도착했다. 이곳 전촌마을과 람천 건너에 위치한 비전마을을 합쳐 사람들은 ‘동편제마을’ 즉 동편제의 태동지라 부른다. 판소리 중시조인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 운봉은 국내 3대 악성 중 하나이자 거문고의 달인인 ‘옥보고’가 거문고를 크게 발전시킨 곳이기도 하다. 국악 전통유물 400점을 모은 ‘국악의 성지’가 이곳에 들어선 이유일 것이다.

▼ 브런치 하우스를 겸하고 있는 센터의 곁에는 ‘길 따라 소리 따라 동편제’라는 부제를 단 상설 무대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무대에는 추임새를 넣는 고수(鼓手)뿐이다. 그럼 판소리는 어디서 누가 부른다는 얘기일까? 참고로 판소리란 소리광대라고 하는 가수가 북재비라는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민족가요의 한 형식이다. ‘타령(打令)’, ‘광대소리’, ‘창조(唱調)’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도지방에서 태동과 발전을 했다. 그러니 당시 판소리명창들이 남도지방에서 배출되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오늘날 판소리를 ‘남도창’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판소리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르러 음조가 점차 지역적 특색을 띠게 되면서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의 유파로 갈라지는데 이곳 운봉에서 태어난 송홍록이 주가 된 유파가 곧 ‘동편제’이다. 또 하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완성시킨 이는 아전출신인 신재효(1811~1884년)이다. 그가 정리한 ‘춘향가’, ‘심청가’, ‘횡부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의 판소리 여섯마당이 전해지고 있다.

▼ 다리(대첩교)를 건너면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사적 제104호)’다. 황산대첩은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다. 전투는 1380년 왜구가 오백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진포(군산)에 침입하면서 시작된다. 이때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 화포로 배를 불태우고 왜구를 무찌르니 이게 ‘진포대첩’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왜구들이 옥천을 거쳐 경상도 지역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여 다시 약탈을 시작하면서 성주·함양을 약탈하고 북상하기 위해 인월에 주둔하게 된다. 이를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무찌른 것이 황산대첩이다.

▼ 안으로 들어가면 세 개의 비각(碑閣)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이다.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년)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왕명을 받아 고려사와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고증해 세웠다고 한다.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중종의 사위 송인이 썼으며, 운봉 현감 박광옥이 비를 세웠다. 하지만 1944년 9월 패망을 직감한 일제가 비문을 폭파해버렸고, 현재의 빗돌은 1957년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운 것이다.

▼ 일제가 파괴해버린 비석을 모아놓은 곳이 ‘파비각(破碑閣)’이다. 글자도 인위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역력하다는데 직접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 맨 위의 비각에는 ‘황산대첩사적비(荒山大捷事蹟碑)’가 들어앉았다. 고종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비각비’를 1958년 중건한 것이란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적혀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황산대첩은 변방의 무명 장수에 불과하던 이성계를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황산 싸움의 승리는 결국 그에게 ‘새로운 꿈, 새로운 세상 조선 건국’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 발판이자 꿈을 이룬 요새로 작용했다.

▼ 밖으로 나오니 공연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격년제로 열린다는 황산대첩을 재연하는 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했으니 이를 위한 무대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배치된 악기는 ‘동편제 국악축제’로 적고 있었다. 국악의 고장 ‘운봉’을 대변하는 축제라 하겠다.

▼ 사적지를 빠져나오니 길가에 북이 하나 놓여있다. 곁에는 판소리에 한창인 남녀도 보인다. ‘동편제 마을’, 그 가운데서도 가왕 송홍록과 국창 박초월이 태어난 탯자리인 비전마을임을 알리는 조형물이다.

▼ 몇 걸음 더 걸으니 초가집이 보인다.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이며 가왕(哥王)으로 불리는 송흥록(宋興祿, 1801-1863)선생과 국창 박초월(朴初月, 1917-1983)의 생가이다. 이 마을에서 송흥록과 송만갑 선생이 출생하였고 명창 박초월 선생이 성장했다고 한다. 10여 가구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송홍록이 살던 당시의 초가를 복원(2000년)해 놓았다.

▼ 어린이를 위한 안내가 돋보이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딱딱한 어조의 문구로 가득 채워진 빗돌을 읽어볼 어린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를 대비해 송홍록에 대한 얘기를 만화로 꾸며놓은 것이다.

▼ 안으로 들어서서 맨 뒤쪽의 초가부터 둘러본다. 송흥록과 박초월이 살던 당시의 초가를 2000년에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누군가 뒤의 것이 ‘송흥록’,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게 ‘박초월’의 생가라던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마당에서는 판소리 공연이 한창이다. 고수의 장단에 맞춰 노래 삼매경인 송홍록 선생을 재현해 놓았는가 하면, 이에 발이라도 맞출세라 마침맞게 판소리 가락까지 울려 퍼진다. 덕분에 흥겨움에 어깨춤을 한참이나 들썩일 수 있었다. 이밖에도 판소리와 관련 된 듯한 조형물들을 여럿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비전마을은 황산대첩비와 전각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색다른 무엇인가라도 있을까 해서 마을로 들어가는데, 초입의 ‘말뚝박기 놀이’ 벽화가 시선을 붙든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우리 세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간혹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특별한 날 즐기고 있는 민속놀이인데 어찌 눈길을 끌지 않겠는가. 무너져 내리라며 날쌔게 날아 힘껏 올라타던 어린 시절의 치기...

▼ 생가를 빠져나오니 정자 하나가 쉬었다가라며 옷깃을 붙잡는다. ‘소리쉼터’. 이름부터 그럴 듯하니 일단은 들러보자. 그리고 떠나버린 애인에 대한 송흥록 선생의 애달픈 넋두리도 한번쯤 되새겨 보자. 만갑의 맹렬아 잘 가거라... 날 버리고 가려거든 정마저 가려무나, 몸은 가고 정만 남아 쓸쓸한 빈 방안에 애를 태우니 병 안될소냐.

▼ 아련한 판소리를 뒤로하고 둑길을 따라가면 황산교(이정표 : 인월 5.7㎞/ 운봉 4.1㎞)가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군화동 마을(이정표 : 인월 5.1㎞/ 운봉 4.8㎞)’에 이른다. 이 마을은 지난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의 가옥을 군인이 주둔하면서 건립하였다고 해서 군화마을로 이름 지어졌다. 마을 뒤로 보이는 산은 ‘황산’이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황산대첩의 장소이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의 장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지리산의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이 지역의 문화·역사 유적을 함께 볼 수 있다.

▼ 군화마을 어귀의 쉼터도 길손을 유혹한다. 바쁘지 않으면 잠시 쉬었다가란다. 아니 잠시 후 고갯마루를 넘어야 하니 무거운 먹거리일랑 이곳에서 비워버리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 탐방로는 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농로로 역할을 바꾼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이어진다. 가을의 풍취를 물씬 풍기는 코스모스 꽃밭을 양쪽 옆구리에 차고 걷는 호사스런 구간이다.

▼ 람천을 따라 내려가는데 오른편 산자락에 ‘지리산 고사리학교’라는 현판이 보인다. 이곳 지리산 남원권역은 전국 최초로 고사리 재배가 시작된 지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맛좋고 튼실한 고품질의 고사리를 생산하고 있단다. 그동안의 노하우를 저 학교에서 전해준다는 얘기일 것이다. 또한 한잎새라는 회사에서는 우수한 품종을 분양해주고 말이다.

▼ 군화동 쉼터에서 5분쯤 더 걸었을까 부처님을 머리에 인 모전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원명대선사’의 부도탑이라는데 나에게는 그저 생소한 이름일 따름이다. 나중에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김해 원명사(금불암)의 주지였다는데, 이곳 황산벌에서 사라져간 백제 군사들의 영혼을 제도하기 위해 그가 생전에 보아둔 자리였다나? 옆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이라는 빗돌을 세웠다. 비문은 부처의 계보를 적은 것 같은데, 78대가 ‘원명’이니 그가 부처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얘기일까? 아니기를 빌어본다.

▼ 모전탑 옆에서 24번 국도를 만난 탐방로는 ‘화수교’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다 뒤돌아보면 좁디좁은 협곡이 눈에 들어온다. 운봉고원의 너른 들녘을 흠뻑 적셔주던 ‘람천’은 저 좁은 협곡(황산과 덕두산 사이)을 지나 인월면으로 흘러든다. 그리고는 아영면과 인월면을 유역으로 하는 풍천을 보태 덩치를 부풀린다.

▼ 다리를 건넌 탐방로는 이제 인월면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대덕리조트(‘CNKC리조트’라고 적혀 있었다)’의 앞마당을 지난다. 본관으로도 모자라 별관까지 거느린 대규모 리조트이나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다.

▼ 리조트를 지나면 산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임도라서 널찍한데다 경사까지도 만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평지는 아니니 너무 방심하지는 말자. 지그재그로 계속되는 임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자 옥계저수지(玉溪湖)가 얼굴을 내민다.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쌓아올린 저수지로 둑의 높이가 무려 42m나 된단다. 길이도 261m에 이른다니 심심산골에 들어있는 저수지치고는 어마어마한 규모라 하겠다.

▼ 지리산둘레길 2구간은 둑길과 산길이 절반씩이라고 보면 된다. 절반은 람천의 둑길을 들판을 바라보며 걸었다면 남은 절반은 이렇게 숲길을 걷는다. 덕분에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용솟음치는 젊음을 한껏 불태우고 난 입새들이 스러져가는 모습에서 내 인생을 반추해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남은 생을 보다 알차게 보내보자 다짐해본다.

▼ 고개를 넘다가 안면이 있는 이들로부터 귀한 초대를 받았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주 트레킹을, 그것도 20킬로나 되는 구간까지 완주를 하시는 분들이다. 서로 술잔을 나누다가 눈에 익은 나까지 초대를 해주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잠시 후 도착한 다른 일행까지 합석해 술잔을 나누게 되었고, 구수한 분위기에 젖어 참으로 오랜만에 불콰하게 취해볼 수 있었다.

▼ 뒤따라오던 총무님이 열매 하나를 내밀며 식용 여부를 묻는다. 배가 고파 몇 개를 따먹었다는 것이다. 정체부터 밝히면 ‘산딸나무’다. 과육이 부드럽고 달콤한 열매는 물론 식용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녀를 골려주고 싶은 난 식용이 불가능한 열매로 몰아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다. 그만큼 내 입이 헤퍼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 고갯마루를 넘어서면서 만난 모자가 너무 보기 좋아 카메라에 담아봤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했을 어린 아들과 함께 걸으며 자연을 벗 삼는 풍경이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 화수교를 건넌지 40분 만에 ‘흥부골 자연휴양림(이정표 : 인월 2.2㎞/ 운봉 7.7㎞)’에 내려선다. 지리산 서북능선을 마무리 짓는 덕두봉(1,150m)의 산자락에 들어앉은 시설로, 건강·오락·휴식을 위해 지난 2002년에 개장했단다. ‘흥부골’이란 이름은 인근의 ‘흥부마을(아영면 성리)’에서 따왔지 않았나 싶다. 남부지역 최대의 잣나무숲과 바래봉 철쭉군락지까지 연결되는 등산로가 자랑거리라는데, 다녀간 이들의 평은 썩 좋지 않은 듯...

▼ 문학비도 만날 수 있었다. 마천석에 수필가 김한호의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수필 일부를 적었다. 비에 새겨진 글은 그가 2008년 광주문인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할 때 제1회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광양에서 태어난 그가 이곳 흥부골과는 어떤 인연을 맺고 있을까?

▼ 관리사무소 건물은 카페(놀부)도 함께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곳도 드라마의 한 장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자연휴양림이 tvN에서 이달 23일에 방영 예정인 드라마 ‘지리산’의 촬영지라니 말이다. 지리산 국립공원 최고의 레인저 서이강(전지현 분)과 말 못 할 비밀을 가진 신입 레인저 강현조(주지훈 분)가 산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사고를 파헤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드라마라니 TV화면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 이제 종점으로 향하는 마지막 구간이다. 자연휴양림관리사무소를 지나 도로를 따라 100m쯤 내려가면 표지판이 오른쪽 숲길(이정표 : 인월 2.1㎞/ 운봉 7.8㎞)로 안내한다. 숲길 구간은 개울을 건너기도 하는데, 그래선지 물이 불어났을 때는 되돌아가라는 안내판을 입구에 세워놓았다.

▼ 숲길로 들어서자 ‘무인 쉼터’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옷깃을 붙잡는다. 술과 음료가 들어있는 냉장고와 테이블 서너 개가 놓여있는 간이주막이라고 보면 되겠다. 커피포트를 비치해 컵라면도 끓여먹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주인은 없다. 알아서 챙겨 먹은 후 이에 해당하는 금액을 돈통에 집어넣으면 된다.

▼ 개울을 건넌 탐방로는 이제 울창한 숲속으로 파고든다. 2구간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숲길이라고 보면 되겠다. 조금 전 고개를 넘어올 때는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랐으니 말이다.

▼ 그렇게 5분쯤 내려갔을까 아까 헤어졌던 도로(이정표 : 인월 1.7㎞/ 운봉 8.2㎞)가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도로를 따르지 않고 그냥 횡단해 다시 숲속으로 들어선다.

▼ 이후로도 숲길은 한참이나 계속된다. 울창한 숲과 고사리밭 외에는 특별히 눈에 담을 볼거리는 없지만, 이 구간에서는 심심찮게 시야가 열리면서 인월면 소재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 그렇게 12분 정도를 더 내려서자 드디어 ‘월평마을’이다. ‘달오름 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와 싸울 때 주변이 너무 어두워 적을 분간할 수 없자, 달이 떠오르도록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자로는 ‘인월(引月)’, 우리말로 풀이하면 ‘달오름 마을’이 된다. 인월리의 옛 인월마을과 원평마을이 합쳐져 ‘달오름 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는데, 지명의 유래처럼 동쪽을 향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아 달의 기운이 온 마을에 가득해진다고 한다.

▼ 마을의 담벼락은 온통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블로큰 잉글리시’를 구사하고 있는 외국인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지리산 산나물밥을 홍보하는 듯한 그림도 눈길을 끄는데, ‘산을 밥에, 몸에 담다’라는 멘트를 내건 식당도 실제로 있었다. 이곳 달오름마을에서 흥부전과 달오름을 주제로 하는 농촌전통체험 마을을 운영한다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위한 숙소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면서 말이다.

▼ 달오름마을을 빠져나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구인월교가 나타나면서 지리산둘레길 2구간은 끝을 맺는다. 2구간을 걷는 데는 2시간 20분이 걸렸다. 핸드폰에 깔아놓은 앱은 10.23km를 찍고 있다. 전체 구간의 절반 정도가 숲길이었던 점을 감한하면 제법 빠른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만큼 걷기가 편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참! 산악회에서는 구간 거리가 짧은 2구간에다 너무 긴 3구간의 일부(중군마을까지)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는 다음 번 3구간에서 한꺼번에 하겠다.

▼ 다리 입구에 이르자 3구간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구간의 끝은 곧 다음 구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을 것이다. 모든 결말이 결코 끝이 아니니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얘기이다. 또 다시 시작될 일들을 철저히 준비한다면 보다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게 아니겠는가.

▼ 다리 근처에는 ‘영월정(迎月亭)’이 들어서,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둘레길을 걷는 트레커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람천’에 기대어 지어진 정자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섬멸할 때 달빛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알려진다. 1960년 터만 남아있던 곳에 지역주민들이 힘을 모아 중건했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나 돈을 덜 들였는지 예스런 풍모는 조금 덜하다. 참! 냇가에는 영월대(迎月臺)라 각서 된 바위도 있었는데 사진이 별로여서 게제는 하지 않았다. 이 바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인월8경에도 꼽힌다지만 어쩌겠는가.

▼ 이왕에 왔으니 어찌 ‘인월장’을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리를 건너 200m쯤 더 걸어 도착한 ‘전통시장’은 화개장과 더불어 영호남 소통의 장터다. 예로부터 인월은 함양과 운봉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남해에서 올라온 소금과 해산물 그리고 지리산에서 나온 산나물과 콩 등이 거래되는 장소였다. 인월과 하동을 거점으로 산물을 나르던 염두고도(鹽豆古道)라는 옛길이 있어 인월에서 출발한 콩 지게꾼들과 하동에서 출발한 소금 지게꾼들이 벽소령에서 지게를 바꿔지고 내려가 인월장과 화개장에 풀었다고 한다.

▼ 투가리처럼 우악스러운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섞여 오간다는 장날 풍경은 엿볼 수 없었다. 장날(매 3일과 8일)을 못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을 처마에 붙어있는 옛 풍경사진으로 달래보기로 했다. 솥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전대를 두른 생선 장사는 ‘아침에 올라온 거라며 겁나게 싱싱해요’를 외친다. 시쳇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시장은 남녀노소로도 모자라 강아지까지 꼬리를 친다. 반대편 처마도 비워놓지 않았다. 권선징악을 대변하는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민화로 그려 넣었다.

 

지리산둘레길 1구간(주천-운봉)

 

여행일 : ‘21. 9. 4(토)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주천면과 운봉읍 일원

여행코스 : 주천면(둘레길 안내센터)→내송마을(1.1km)→구룡치(2.5km)→회덕마을 (2.4km)→노치마을(1.2km)→가장마을(2.2km)→행정마을(2.2km)→양묘장(1.7km)→운봉읍(서림공원, 1.4km)(거리 및 시간 : 14.7km/ 실제는 15.43km를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둘레길이 시작되는 주천-운봉 구간을 걷는다. 4개 코스로 이루어진 남원권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운봉고원(해발 500m)의 너른 들녘과 마을길을 걸으며 즐기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조망이 자랑거리이다. 하지만 해발 583m인 구룡치를 넘어야하는 힘든 구간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들머리는 지리산둘레길 남원주천안내센터(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완주-순천고속도로 오수 IC에서 내려와 국도 17호선을 타고 구례·남원 방면으로 내려온다. 방자교차로(남원시 광치동)에서 산업로(구례·순천방면)로 옮겨 고죽교차로(남원시 고죽동)까지 간 다음 국도 19호선으로 바꾸어 탄다. 잠시 후 육모정교차로(남원시 주천면 호기리)에서 빠져나와 지리산국립공원·정령치 방면으로 1.5km쯤 들어오면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063-635-0850)’가 나온다. 안내센터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둘레가 800리에 이른다는 지리산. 그 둘레를 걷는 길로 이은 것이 ‘지리산 둘레길’이다. 지리산을 한 바퀴 걷는 동그라미 형태로 22개 구간, 약 300km에 걸쳐 이루어져 있으며, 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도보여행(순례)길이 되었다. 이 길의 특징은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한 땀 한 땀 수놓듯 잇고 보듬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길을 걷다 만나는 사람,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모든 생명들의 속삭임을 귀 기울이며 걸어보자.

▼ 남원시 권역의 첫 번째 구간으로 주천면 외평마을(장안리)과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코스. 운봉고원의 너른 들녘과 6개의 마을을 잇는 옛길, 그리고 제방길로 구성되는데, 하루 코스로 적당한 거리(14.7km)지만 초반에 구룡치(해발 583m)를 넘어야하기 때문에 만만하게 볼 수만은 없다. 다만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 즉 주민들이 남원장이나 운봉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옛길의 모습이 아직도 잘 남아있다니 이를 염두에 두고 걷다보면 힘든지 모르고 완주할 수도 있겠다. 특히 걷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조망은 1코스의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 첫 발을 떼는데 기념사진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남원 권역의 지도가 들어간 안내판을 배경 삼아 사진부터 찰칵! 지리산둘레길 전 구간이 다 들어갔더라면 금상첨화겠지만 눈에 띄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꿩 대신 닭’이랄까?

▼ 지원센터 앞 도로를 건너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다시피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많을 걸 보면 우리처럼 ‘스탬프 북(1만원이라는데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는 우리 부부는 구매하지 않았다)’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 ‘장안교’ 옆의 들머리에는 1구간(주천→운봉)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특이한 외형의 이정목이 더 눈길을 끈다. 저 이정목은 ‘장승’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장승라는 게 본디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신물이니 제대로 가져온 셈이다. 진행방향(화살표)은 ‘벅수(지리산둘레길에서 부르는 장승의 또 다른 이름이다)’의 귀에다 붉은색(순방향)과 검정색(역방향)으로 표시했다. 거리는 벅수의 가슴 부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개울가를 따르다 잠시 후에는 그 물길을 건넌다. 산수유로 유명한 용궁마을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인데 징검다리를 놓아 예스러운 멋을 더했다.

▼ 개울 건너에는 ‘지리산권역 홍보관’이 들어앉았다. 내부까지 기웃거려보지 않고도 설치목적은 대충 알겠는데, 옥상에 설치해놓은 풍차조형물만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상징이랄 수 있는 풍차와 ‘지리산’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을까?

▼ 목교를 이용해 ‘원천천’을 건넌다. 주천 들녘을 적셔주는 물줄기로 조선말까지 이 부근에 있었다는 ‘원천원(元川院 : 국가에서 운영하는 숙박업소)’에서 이름을 따왔지 않나 싶다. 참고로 통일신라 때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던 이곳 외평마을은 국가에 납품하는 물자를 생산해낸 지역(원부곡)이었으며, 1885년(고종 22년) 면 중앙지로서 위치를 정하고 하원천방(下元川防)의 소재지로서 원터라는 마을 명칭으로 불려왔다.

▼ 다리를 건너자 ‘비부정’이란 식당이 길손을 부른다. ‘나그네가 쉬어가는 곳’이라며 말이다. 잘 꾸며진 식당은 규모도 제법 크다. 하지만 그보다는 안내판이 더 눈길을 끈다. ‘그 옛날 그 길목에 주막 하나 있었네’로 시작되는 안내판은 이곳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전남지방(동부에 경남 일부가 포함되었을 것이다)에서 한양으로 가는 유일한 옛길에 지금은 ‘비부정(沸釜亭)’이란 쉼터가 들어섰단다. ‘끓을 沸’자에 ‘가마 釜’자를 썼으니 분명 음식점인데 ‘정자 亭’자를 덧붙여 하마터면 옛 정자로 깜빡 속을 뻔했다.

▼ 조금 더 걸으면 남원-주천을 잇는 ‘장백산로’로 올라서는데, 가로수 대용으로 심어놓은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수십 년은 족히 묵었음직한 것만으로도 훌륭한 눈요깃거린데 거기다 외모까지 잘 생긴 것이다.

▼ 4분쯤 걷자 작은 쉼터가 잠시 쉬어가란다. 내송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인데 느티나무 그늘에다 반달 모양의 예쁜 의자를 배치했다. 목마른 나그네를 위한 식수대와 깔끔한 화장실까지 갖췄다. 작지만 알찬 쉼터라 하겠다. 참! 길가에는 음식물을 사먹을 수 있는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 쉼터에는 오르막 구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해발 600m의 운봉고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곳의 고도는 170m. 2km를 걸으며 고도를 400m나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큰일이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구룡계곡을 구경하면서 회덕마을(지리산둘레길과 합류되는 지점이다)로 가려고 스틱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구룡계곡 코스가 막힌 것도 모르고 계획을 짠 내 무모함이 부른 화이니 참고 견딜 수밖에.

▼ 내송마을로 들어가는 길. 널디너른 들녘 너머로 펼쳐지는 헌걸찬 산릉은 만복대에서 고리봉과 세걸산을 지나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일 것이다. 저 가운데 고리봉부터는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고리봉에서 바래봉으로 흐르는 지맥을 갈려 보낸 백두대간은 고기리로 내려가고, 이어서 노치마을을 거쳐 수정봉으로 오른다.

▼ 둘레길은 산길이나 들길, 물길을 따라 걷는 게 일반적이다. 마을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마을 안길과의 첫 대면은 내송마을(이정표 : 개미정자 450m/ 육모정/ 외송마을 버스정류장 250m)에서 이루어진다. 마을에는 와야재(臥野齋)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집도 보였다. 엎드려 들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주인장의 여유로운 삶이 엿보이는 이름이다.

▼ 마을에는 ‘와야제’ 같은 현대식 건물만 있는 게 아니다. 예스런 느낌을 퐁퐁 풍기는 전통가옥도 눈에 띈다. 탐방로는 그런 가옥들을 스치듯 지나 산속으로 파고든다. 도중에 아담한 ‘은송저수지’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랑논’도 눈에 담을 수 있다.

▼ 벌초 삼매경에 빠진 농부도 눈에 띈다. 추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중요한 민족의 대 명절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벌초’부터 떠 올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 추석이 이제 2주밖에 남지 않았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0분 만에 숲속으로 들어선다. 1구간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초입(이정표 : 운봉 13㎞/ 주천 1.7㎞)에서 ‘개미정지 쉼터’를 만났다. 그런데 ‘개미정지’라는 지명이 낯선 듯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 왜일까? 이웃 동네인 순창(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에서는 ‘부엌’을 ‘정지’라 부른다. 그러니 ‘개미’라는 곤충의 뒤에 붙일만한 단어는 아니다. 어쩌면 ‘개미정자 쉼터’가 변음되지 않았나 싶다. 정자나무가 특정한 나무를 가리키지 않고 마을의 소원을 비는 신앙처이자 휴식을 주는 큰 나무를 이르니 말이다. 안내판도 비슷한 내용을 적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내송마을 출신 조경남 의병장이 이곳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는데, 개미들이 발을 물어뜯어 적의 침입을 알렸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 이 길은 예전 운봉 사람들이 남원장에 가기 위해 넘던 길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던 서어나무는 이제 세월의 녹이 끼었고 속이 비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이를 거절함이 없이 여전히 그 넉넉한 품을 내어준다. 그래선지 ‘지리산둘레길’과 ‘전북천리길’ 모두 이곳에 ‘스탬프보관함’을 설치해놓았다.

▼ 산길이 시작된다. 이 구간은 옛 운봉현과 남원부를 잇던 옛길로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잘 남아있다고 한다. 하긴 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다니던 살아있는 길이었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아무튼 내송에서 회덕까지의 옛길(4.2km)은 길 폭이 넉넉하고 노면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니 옛날 운봉고원의 사람들이 남원으로 장보러 다니던 심정으로 걸어보면 어떨까. 어깨에 걸려있는 배낭을 당시 민초들이 지었을 등짐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 혹자는 이 길을 경사도가 완만하여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걸을만하다고 했다. 맞다. 길은 대부분 완만했고 약간이라도 가팔라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돌계단이 놓았다. 사람의 손길을 조금이라도 덜 타게 하려는 노력도 엿볼 수 있었다.

▼ 그렇게 20분 남짓 진행하자 능선의 안부에 올라선다. 통나무의자 두 개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는데, 양쪽으로 길이 나 있으니 이정표(이정표 : 운봉 12.1㎞/ 주천 2.6㎞)의 진행방향 표시를 잘 살펴보도록 하자. 오른편으로 난 길도 또렷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서 걷던 등산객 몇도 오른편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 길은 능선의 허리를 잘라먹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기에 저렇게 홈이 파였을까 싶다. 그런 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가자 또 다른 쉼터가 나온다. 그런데 이곳은 솔숲에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첨부된 지도에 나오는 ‘솔정지’가 아닐까 싶다.

▼ 내송마을은 ‘안 내(內)’에 ‘소나무 송(松)’자를 쓴다.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은 마을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름에 걸맞게 둘레길 주변은 온통 소나무들 세상이다. 그것도 나이가 사오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것 같은 노송이 대부분이다.

▼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던 산행대장의 설명과는 달리 구룡치로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아홉 마리 용이 또아리를 튼 듯,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야만 한다. 하긴 백두대간은 아닐지라도 그 곁에 붙어있는 산자락이니 어디 그게 만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선지 반대방향에서 내려오는 이들을 꽤 자주 만날 수 있었다. 1구간은 주천(해발 170m)에서 운봉방향의 구룡치고개(580m)로 치고 오르는 지형이다. 그러니 저 사람들은 1구간 답사를 가장 편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 숨이 턱에 차오를 즘에야 ‘구룡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개미정지를 출발한지 50분.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1시간 10분 만이다. 이정표(운봉 11,1㎞/ 주천 3.6㎞)와 구호지점표시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갯마루는 벤치를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높이 580m의 고지를 점령했으니 그 보상으로 잠시 쉬어가라는 모양이다. 그것도 솔향기 가득한 소나무 숲속에서 말이다.

▼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들어앉았다는 것 뿐. 구룡치 고갯마루는 눈에 담을만한 볼거리가 일절 없었다. 명찰 달린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참고로 ‘구룡치’는 아홉 마리의 용(龍)이 사는 구룡계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리산둘레길은 구룡계곡을 들르지 않는다. 혹여 구룡계곡을 둘러보고 싶다면 국제신문의 탐방 기사를 참조하면 되겠다.

▼ 회덕으로 내려가는 길은 운치있는 숲길이다. 길은 넓지도 좁지도 않다. 소나무 숲이 워낙 좋다. 해마다 백중날이면 마을별로 구간을 나눠 이 고갯길을 보수했다더니 그게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공동의 길이니 말이다.

▼ 10분쯤 내려오자 작은 나무가 큰 나무를 휘감아 도는 형상의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용소나무’라는데 연리지(連理枝)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비상하려는 용(龍)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거나 소원을 빌면 행운과 건강이 오래오래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신령스러운 나무이다. 용소나무 아래 팻말에는 소설가 윤영근이 쓴 ‘사랑은 하나이어라’는 시(詩)가 적혀 있었다. <백두대간 천 세월 묻어둔 이야기로/ 아낌없이 몸 비벼 싹 튀운 정/ 산 속에 잠재운 그 사랑노래 늘 아름답구나>

▼ 이후로는 편안한 소나무 산책길이 이어진다. 솔향기가 코를 찌르는 솔숲 길을 느긋이 걷다보면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가을의 초입이지만 이런 산길에서는 소매도 걷고 가슴자락도 풀어 헤치는 게 좋다. 사람에게 그리도 좋다는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느끼는 산림욕 숲속 길. 집사람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답게 걷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 작은 연못도 만날 수 있었다. 샘이 아니라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이만하면 산짐승들이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게다가 웃자란 잡초에 둘러싸여 풍경까지도 괜찮지 않은가.

▼ 하산을 시작한지 20분. ‘사무락다무락(이정표 : 운봉 9.8㎞/ 주천 4.9㎞)’을 지난다. 구룡치를 넘는 소나무 숲길에 돌을 얹고 무사안위를 기원하던 곳으로 ‘사무락’은 사망(事望)에서 변화된 말로 소망을, 그리고 ‘다무락’은 담벼락을 뜻하는 남원지역의 사투리이다. 그러니 ‘소망을 비는 돌담’이라 할 수 있겠다.

▼ 그렇다면 ‘사무락다무락’이란 저 축대를 이르는 말이 된다. 옛날 산에다 논밭을 만들 때 축대를 쌓아 외형을 잡았는데 그 축대를 ‘다무락’이라 부르기도 했다니 말이다. 하지만 믿음은 가지 않는다. 높이가 600m에 가까운 고갯마루를 힘들게 넘나드는 사람들이 어느 겨를에 저런 축대를 쌓아올릴 수 있었겠는가.

▼ 그 옆에 있는 돌탑에 더 믿음이 가는 이유이다. 회덕·노치 등 운봉고원에 살던 사람들이 남원장터에 물건을 내다팔면서 갈 때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돌 하나 쌓고, 오는 길에는 가족들 잘되라고 다시 돌 하나 쌓으면서 지나다녔다니 딱 저런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았겠는가.

▼ 이후로도 둘레길은 걷기 딱 좋은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서자 작은 개울(비로 물이 불면 우회로를 따라야 한다)을 만나고, 징검다리를 건너자 2차선 도로에 올라선다. 도로변에는 화장실까지 만들어놓았다. 구룡치 옛길을 넘어온 순례자들에게 꾹꾹 눌러온 생리현상을 해결하라는 배려일 것이다. 참! 화장실 뒤에 있는 ‘정자나무 쉼터’는 들러보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또 다른 쉼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둘레길 것과는 다른 이정표(운봉방면 8.3㎞/ 구룡폭포 1.3㎞/ 주천방면 6.0㎞)도 눈에 띈다. 구룡폭포 순환코스가 포함된 안내판도 함께 세워놓았다. 맞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구룡계곡’이 나온다. 뱀사골이나 피아골·대원사계곡·대성골 같은 지리산 주능선의 계곡들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계곡이다. 길이는 짧지만 굽이굽이 이어지는 수많은 소와 폭포가 만들어내는 비경은 여느 계곡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한국자연보존회가 선정한 ‘한국의 100명수(名水)’에 끼었다면 대충 이해가 갈 것이다. 특히 판소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편제에 속하는 명창들이 득음을 위해 수련을 쌓은 계곡으로도 유명하다.

▼ 이후부터 탐방로는 도로(구룡폭포길)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회덕마을(이정표 : 운봉 8.7㎞/ 주천 6.0㎞)에 이른다. 회덕마을의 옛 이름은 ‘모데미’. 사람들이 모였던 마을이란 뜻이다. 양반부터 장돌뱅이까지 주막이 있었던 회덕마을에서 쉬었다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모데기를 ‘모덕’이가 변음된 것으로 보고, 풍수지리설에 의해 덕두산(德頭山),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의 덕을 한곳에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이란다. 그래선지 괴질이 피해갔을 정도로 이 마을은 오랫동안 평온하고 번창해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 집 한 채 남기지 않고 불타버렸다. 지리산 공비가 완전히 소탕된 뒤 다시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회덕마을은 평야보다 임야가 많기 때문에 짚을 이어 만든 지붕보다 억새를 이용해서 지붕을 만들었다고 한다. 억새를 이용해서 만든 샛집(전북 민속문화재 제35호)은 둘레길을 지나면서 꼭 들러봐야 할 곳으로 꼽힌다. 하지만 난 들러보지 못했다. 아니 들머리를 찾아 헤매다 귀찮아져 그만 포기해 버렸다.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일반가옥도 볼거리지만 그보다 집 앞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줄지은 봉우리들이 일품이라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회덕마을 다음은 노치마을이다. 10분쯤 도로변을 따르던 탐방로는 노송 대여섯 그루가 무리를 짓고 있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노치마을로 향한다. 이때 운봉고원의 풍요로운 들녘을 옆구리에 차고 걷게 된다. 고원을 에워싸고 있는 지리산 서북능선도 조망된다. 고리봉과 만복대, 세걸산, 바래봉 등을 잇는 산세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지리산 주능선의 변화무쌍한 산세를 조망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길이다.

▼ 서북능선을 바라보다 문득 산이 나를 바라보게 하지 말고, 자신이 산을 바라보라던 법정스님은 말씀이 떠오른다. 스님은 산을 그저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뿐이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자신이 산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분주하게 살아갈 때는 산이 나를 내려다보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자신이 산을 바라보게 된다고도 했다. 늘 바쁘고 힘들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에 여유를 갖고 살아가라는 메시지이지만 트레킹을 하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도 딱 맞는 표현이 되어 버렸다. 앞만 보고 걷다보니 막상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들을 많이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 회덕마을을 지난 지 20분 만에 노치마을에 이른다. 노치(蘆峙)는 ‘갈대가 많은 고개’ 즉 ‘갈재’라는 뜻이다. 정령치(6km)와 여원치(6.7km)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둘레길은 노치마을 앞(이정표 : 운봉 7.5㎞/ 주천 7.2㎞)에서 오른편으로 휜다. 하지만 난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노치마을은 둘레길과 백두대간 길이 만나는 곳. 백두대간 종주의 옛 추억을 더듬어보기 위해서이다. 19년이나 지난 빛바랜 추억이 되어버렸으나 강행군(당시는 매 구간마다 20km가 넘었었다)의 여독을 풀던 추억이 솔솔 돋아나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먼저 찾아본 곳은 동구 밖 느티나무. 수령이 500년도 더 되는 느티나무는 ‘산천은 의구(依舊)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옛날이나 다름없이 그 넉넉한 품을 나그네에게 내주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것도 눈에 띈다. 백두대간과 14정맥을 담은 한반도 조형물 및 호랑이 한 쌍을 배치해 이곳이 백두대간에 놓여있다는 것을 자랑한다. 맞다. 이곳 노치(蘆峙)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관통하는 전국 유일의 마을이다. 때문에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마룻금을 중심으로 동쪽은 운봉읍, 서쪽은 주천면)이 존재하는 특이한 얘깃거리도 제공한다.

▼ 슬픈 역사를 품은 ‘목돌(목 조임석)’도 생소하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정기의 기(氣)와 맥(脈)을 끊으려고 설치한 것들로, 마을 앞들의 경지정리를 하던 중 출토되었다고 한다. 반원형으로 생긴 목돌을 서로 연결하면 하나의 조임석이 되는데, 노치마을 앞들에 방죽을 파 지맥을 끊으면서 그 안에 목돌 3기(6개)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쇠말뚝이 이곳에서는 목돌로 바뀌어 나타난 셈이다.

▼ 정자나무 뒤로 돌아가자 추억의 ‘노치샘’이 옛날처럼 달고 시원한 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해 바가지를 놓아두었는가 하면, 금방 청소를 끝낸 것처럼 주변도 깨끗했다. 하긴 매월 1회씩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온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마음 놓고 마시라며 수질분석표까지 붙여놓았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실컷 마신 것만으로도 부족해 물통까지 가득히 채워올 수 있었다.

▼ 골목길을 통과해 마을 뒤로 오르면 네 그루의 오래된 거송을 만난다. 백두대간 마루금에 서서 마을을 굽어 보살피는 이 소나무(산림청 보호수)는 수령이 무려 260년이나 되었단다. ‘天龍后土地之神位’라는 빗돌이 세워진 걸 보면, 신목으로 모시고 당산제까지 지내는 모양이다. 이곳은 백두대간 종주꾼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헌걸찬 마루금을 가슴에 담다보면 그간의 피로가 씻을 듯이 사라진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회덕·노치마을 사람들이 운봉장을 보러 다니던 옛길을 따른다.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는데 저 멀리 건너편으로 지리산 서북능선이 따라 온다. 이 구간에서는 유일하게 논두렁길을 걷기도 한다.

▼ 오른편으로 덕산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탐방로는 저수지를 피해 산자락을 휘감아 돈다.

▼ 노치마을을 출발한지 15분 만에 ‘질매재’에 도착했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농로를 버리고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 이곳도 구룡치 옛길처럼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산길이지만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예쁜 길이다. 앞서가던 집사람이 잘생긴 한 아름 노송에 다가가 안아도 보고 기대기도 해보는 여유를 부린다. 그녀에게도 이 구간이 흥에 겨웠던 모양이다.

▼ 또 다른 눈요깃거리도 있다. 왼쪽 사면이 활짝 열리면서 운봉고원(雲峰高原)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다. ‘신선의 땅’이라 회자되는 운봉고원은 조선 중기의 예언서인 ‘정감록’에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살기 좋은 열 곳을 일컫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꼽혔으며,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운봉이 없으면 호남도 없다.’라고 했을 만큼 예부터 정치․국방의 요충지였다. 최근에는 고대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알려진 철을 생산하던 다수의 제철유적이 발견되었고, 철을 바탕으로 가야의 기문국을 비롯하여 후백제까지 찬란한 문화를 펼쳤던 역사의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 그렇게 걷길 10분. 잘 단장된 ‘동복 오씨’ 묘역에 이른다. 후손들은 그 아래에 마음을 닦는다는 뜻의 심수정(心修亭)을 지어놓았다. 정자에 올라 덕산 저수지를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닦인다는 뜻일까? 정자 아래에는 쉼터도 들어서 있었다. 양심함이란 계산대가 놓여있는 걸로 보아 무인점포인 모양인데, 컵라면 외에는 먹고 마실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럼 운봉막걸리에 해물파전으로 목을 축이려던 내 작은 소망은 어쩌란 말인가.

▼ 정자 앞에는 소망탑도 만들어져 있었다. 옛날 장꾼들이 운봉장에 들렀다 각종 생필품을 둘러메고 낑낑 올라오면서 하나씩 올려놓은 돌들이 저렇게 쌓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러기에는 정성들여 쌓아올린 흔적이 너무 역력하다.

▼ 묘역에서 내려서자 ‘가장마을(이정표 : 운봉 5.4㎞/ 주천 9.3㎞)’이다. 가장마을은 ‘아름다운 가(佳)’에 ‘농막 장(庄)’자를 쓴다. 운봉고원의 널찍한 들녘에 들어선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옛날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화장하는 형국이라 하여 ‘아름다울 가(佳)’자와 ‘분장할 장(粧)’자를 썼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옥녀봉 아래 옥녀가 베를 짜는 옥녀직금의 천하명당이라고 믿는단다.

▼ 오늘은 꽃 대신에 탱자를 꼽아봤다. 가을을 상징하는 코스모스를 위시해서 들국화, 철지난 능소화 등 많은 꽃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누렇게 익은 탱자 또한 가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특히 비타민이 풍부해 피부미용과 피부질환에 효과가 좋고, 감기를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과일인가.

▼ 가장마을 앞에서 탐방로는 60번 지방도로 올라선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만나게 되는 ‘덕산교’에서 이별을 고한다. 이때 오른편에 보이는 마을이 ‘덕산마을(德山里)’이다. 1580년 무렵 김씨와 오씨가 수정봉의 정기가 맺힌 명당터를 찾던 중 버려진 황무지가 명당인지라 터를 잡고 정착했다는 마을이다.

▼ 이후부터 둘레길은 주촌천의 강둑을 따라 내려간다. 이때 오른편 개울 건너로 덕산 들녘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저 들녘은 원래 황무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가꾸어보니 기름진 옥토더란다. 살림이 풍요로워지면 인심 또한 좋아질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한번 정착한 사람들은 마을을 떠날 줄 모른다는 마을이다.

▼ 10분 후, ‘가장교(이정표 : 운봉 4.2㎞/ 주천 10.5㎞)’를 건너면 이번에는 주촌천을 왼편에 끼고 걷는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것이 다음에 만나게 될 마을은 넉넉한 살림이 보장되겠다. 참! 제방에서 만난 웃자란 풀을 보고 ‘갈대’라고 했다가 집사람에게 된통 얻어들었다. 아직도 억새와 갈대를 혼동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그 둘이 적당히 뒤섞여 있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 풍요로움이 넘치는 들녘을 7분쯤 걷다가 행정마을로 들어선다. 행정마을은 ‘은행나무 행(杏)’에 ‘정자 정(亭)’자를 쓰는데, 개척 시조인 ‘창녕 조씨’가 새로 들어와 정착할 무렵 이곳 일대가 은행나무가 숲을 이뤘다는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게 아름다워 은행마을 또는 은행몰이라 불리었는데, 이게 한문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은행리(銀杏里)’가 되었고, 또 이걸 줄이면서 ‘행정’으로 고쳐져 지금에 이른단다. 하지만 지금은 ‘서어나무’로 주인이 바뀌었고, 또 이게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으로까지 꼽히고 있으니 서어나무 숲도 한번쯤은 꼭 찾아보자.

▼ 동구 밖 행정교에서 개천을 따라 잠시 내려가자 ‘서어나무 숲’이 나온다. 행정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기 위해 200여 년 전 조성한 인공 숲으로, 마을을 지켜 주는 비보림(裨補林)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풍수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때문에 마을 숲들은 대개 풍수적으로 마을의 위치와 방향, 주변의 산세 등을 고려해 인공으로 조림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행정리 주민들의 쉼터로 바뀌었는지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참고로 행정리 서어나무숲은 지난 2000년 새 천년을 맞아 산림청과 ‘생명의숲’이 주최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마을 숲 대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 아씨와 이 도령이 노닐던 그 숲이기도 하다.

▼ 숲속으로 들어서자 200여 년 된 서어나무 70여 그루가 빼어난 질감을 자랑한다. 하나같이 훤칠한 키에 미끈한 몸매를 과시하는 근육질이다. 그래서 서어나무를 ‘근육질나무’로 부르기도 한단다. 한때 저 나무에는 그네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이가 타던 그 그네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 속 장면으로만 남았다.

▼ 숲을 빠져나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람천을 왼편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운봉고원의 너른 들녘이 눈에 들어오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구간이다. 그저 람천과 주촌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를 볼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말이다.

▼ 람천을 따르던 둘레길은 날머리를 1.6k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산림청의 ‘남원양묘사업소’ 안마당을 가로지른다. 양묘사업소는 국유림이나 가로수로 쓸 묘목을 키우는 곳. 낙엽송(물을 주고 있던 분이 알려주었다)이나 잣나무·전나무·금강소나무·느티나무 등의 묘목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 1만8000여 평의 부지에는 각종 나무 외에도 들꽃 300여 종이 식재되어 있단다. 양묘사업소를 관통하는 둘레길 양쪽에 식재된 ‘천일홍’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나에게 천일홍은 첫 만남이다. 유난히도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양묘장을 벗어나 조금 더 걸으면 운봉(雲峰) 읍내로 들어선다. 이곳 운봉은 백두대간의 동쪽 고원지대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생산해낸 창의적 땅이었다. 동편제의 소리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흥부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기문가야(己汶國)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지로 주목 받고 있다. 하나 더. 조선 중기의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은 이곳을 난리를 피해 살기 좋은 열 곳을 일컫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민초들의 이상향이랄까?

▼ 중심가에서 ‘동편제 소리길’ 조형물을 만났다. 맞다. 이곳 운봉은 동편제의 본고장이다. 동편제의 시조로 불리는 ‘송홍록(宋興祿)’과 근대 5대 명창의 한 사람인 ‘송만갑(宋萬甲)’을 비롯해 김정문과 이화중선, 박초월, 강도근 등 수많은 명인·명창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참고로 판소리는 전승계보에 따라 음악 특성이 달라지는데 이를 ‘제’(制)라고 한다. 호남의 판소리는 대개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은 동편제(東便制), 서쪽은 서편제(西便制)로 불린다. 운봉·남원·구례·곡성 등에서 발달한 동편제는 대마디 대장단을 선호하며 잔기교를 덜 부리고 감정을 절제하는 창법을 구사한다. 소리를 꿋꿋하고 튼실하게 내며 소리 끝을 여운 없이 탁 그치며 마친다. 영화 ‘서편제’로 잘 알려진 서편제는 익산·고창·광주·나주·목포 등지에서 발달했는데, 소리가 애절하고 구성지며 기교적이다. 붙임새도 다양하고 소리의 꼬리도 길어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 운봉농협도 ‘동편제 거리’ 홍보를 거들었다. 문화센터 벽면을 할애해 이곳 운봉이 ‘동편제 소리’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그 오른편에는 ‘조선 십승지’ 중 하나라는 내용도 적어 넣었다. 하긴 조선시대의 이상향, 즉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니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 상가의 벽면은 아예 판소리(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다섯 마당으로 도배를 해놓았다. 판소리란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 장단에 맞추어 창·아니리·발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이다. 원래는 12마당이었으나 지금은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흥보가 등 다섯 5마당만이 전한다. 2013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기도 했다

▼ 탐방로는 운봉초등학교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학교 앞에는 이 길이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임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왜군의 거짓 정보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불가한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풀려난 뒤에는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의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전쟁에 임하라는 ‘백의종군’ 명령을 받는다. 이로부터 120일 후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 받을 때까지 장군이 움직인 동선(動線)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이다. 당시 장군은 운봉에서 이틀을 머물었다고 한다.

▼ 날머리는 서림공원 앞 주차장(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42)

읍내를 빠져나와 국도(24호선)을 건넌다. 이 지점(이정표 : 인월 9.9㎞/ 주천 14.7㎞)이 지리산둘레길 1구간과 2구간이 나뉘는 지점이다. 2구간(운봉→인월)이 시작됨을 알리는 안내판도 이곳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산악회 버스가 세워진 서림공원 주차장까지는 100m쯤 더 걸어야 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은 15.43km를 찍고 있다. 해발이 580m나 되는 구룡치 옛길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빨리 걸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