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9구간(덕산-위태)

 

여행일 : ‘22. 1. 15(토)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시천면과 하동군 옥종면 일원

여행코스 : 덕산마을(0.4km)→천평교(3.3km)→중태마을(2.8km)→유점마을(1.1km)→중태재(2.1km)→위태마을(거리 및 시간 : 9.7km/ 실제는 12.35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9구간인 덕산-위태 구간을 걷는다. 5개 코스(60.2km)로 이루어진 산청 권역의 다섯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9.7km밖에 되지 않지만 낙동강 수계인 덕천강과 지리산 줄기인 두방산과 오대주산 등 다양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특히 남명 조식선생을 모시는 덕천서원은 꼭 둘러보아야 할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꼭 배워가 보자.

 

▼ 들머리는 시천면사무소(산청군 사천면 사리)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내려와 20번 국도를 타고 지리산(중산리) 방향으로 달리다가 사리교차로(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우회전하여 ‘남명로’로 들어서면 잠시 후 9코스의 시점인 ‘남명기념관’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사리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선생이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머무르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선생 탄생 500주년(2004년)을 계기로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건립했다.

▼ 덕산마을(산청군 시천면)에서 위태마을(하동군 옥종면)까지. 거리가 9.7km 밖에 되지 않는데다, 구간 대부분이 평지길이라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걸을 수 있다. 주요 볼거리로는 남명기념관과 덕천서원, 중태재의 대나무 숲이 꼽힌다.

▼ 기념관 옆 민가의 담장에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의 호)에게 보낼 시를 쓰고 있는 남명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다.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부친을 따라 한양에서 살다가 부친 사후 처가인 김해의 신어산 자락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48세에 고향으로 돌아가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그의 나이 61세에 이르자 이곳으로 들어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당시의 정치적 모순과 민생안전에 대한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사후 그의 공이 인정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까지 내려졌다.

▼ 트레킹을 나서기 전 남명기념관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정문인 성성문(惺惺門)을 지나면 남명과 관련된 서책과 유품, 사진자료 등을 전시해놓은 기념관이 있다. 참! ‘성성문’은 선생이 허리에 차고 다녔다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에서 따왔다. 그는 성성자를 마음을 다스리는 ‘경’의 도구로, 경의검은 사사로움을 베어내는 ‘의’의 도구로 삼았다고 한다.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였지만 검과 방울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마치 무사가 몸을 단련하듯 자신의 마음을 단련한 선비, 남명의 실천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케 해준다.

▼ 기념관의 왼편에는 선생의 동상을 가운데 놓고 네 개의 빗돌이 도열해 있다. 왼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神道碑)다. 그 옆에 한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한글로 번역한 국역비(國譯碑)를 따로 세웠다. 오른편의 두 빗돌에는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임금(명종)께 올린 상소문(上疏文) 및 선조에게 올린 무진봉사(상소문)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이중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이유와 국정문란을 비판하는 내용을 적은 상소문(乙卯辭職疏)은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글에서 회자된다. 절대 권력자이던 왕을 ‘고아’, 왕의 어머니이던 문정왕후를 ‘궁중의 일개 과부’라 부르며 왕을 꾸짖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예로부터 직언은 임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조정의 과실을 바로잡았다. 또 백성을 고초에서 구했다. 지식인의 직언이 그리운 시대다.

▼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신명사도(神明舍圖)라는 글귀가 가장 먼저 길손을 맞는다. 이는 선생이 심성수양의 요체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성곽의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체의 내외부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의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한다는 결연한 의지란다.

▼ 남명의 영정은 방울을 2개 차고 있었다. 앞에서 얘기했던 ‘성성자(惺惺子)’이다. 선생은 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신을 되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영정의 오른쪽에는 선생의 제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남명 조식선생 화상찬’이란 글이 붙어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지은 제문의 일부분으로 서예가 ‘오산 강용순’이 썼단다.

▼ 기념관 내부. 남명 사상의 근간은 경의사상(敬義思想)이다. 경(敬)은 삼가고 두려워하며 순간순간 정신을 집중하고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의(義)는 주어진 상황에서 사리를 판별하는 올바름을 의미한다. 즉, 순간순간 정신을 집중하면 바깥의 외물(外物)에 대해 함부로 동요하지 않으며, 항상 올바르게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신이 나태해 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란 문구가 새겨진 칼(敬義劍)을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 여담 하나. 이황과 조식은 한창 공부할 시기인 나이 스물에 기묘사화를 겪었다. 그리고 스승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다.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던 이황은 을사사화를 보면서 자신의 처세가 옳았음을 확인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명종이 그를 수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청량산 아래 도산서당에서 후학들과 공부에만 열중했다. 조식 또한 명종이 수차례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천왕봉 아래 이곳에다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 기념관의 뒤 ‘여제실(如在室)’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어서 내부는 엿볼 수 없었다.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뜻의 이 가묘(家廟)는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조씨(南平 曺氏, 첫째 부인), 숙부인 송씨(恩津 宋氏, 두 번째 부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하지만 종택은 따로 없다고 한다. 종손도 오래전 ‘파(破)종손’ 된 뒤 새로 봉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 남명기념관의 맞은편은 ‘산천재’ 구역이다. 산천재 경내에는 남명 사후 선조가 나라의 큰 어르신이 돌아가심을 애도하며 하사한 제문을 새긴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 널따란 옛터의 맨 안쪽에는 산천재(山天齋, 주역에서 따온 이름이란다)가 들어앉았다. 남명은 61세에 합천 삼가에서 이곳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 서실 산천재를 지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갈고닦은 학문과 사상을 제자들에게 전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포 정탁,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수우당 최영경,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덕계 오건, 송암 김면 등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정계와 학계를 이끌었고 내암과 망우당, 송암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란 극복에 앞장섰다.

▼ 산천재 뜰에는 남명이 손수 심었다는 ‘남명매(南冥梅)’가 자란다. 남사예담촌의 원정매(元正梅) 및 단속사 터의 정당매(政堂梅)와 함께 산청3매로 불리는데,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가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오른 모습이다. 수령이 460년이나 되는 탓에 윗부분의 가지 일부가 말라 죽기도 했으나 봄이 되면 아직도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을 가득히 피워낸단다. 참고로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나무로 귀한 존재였다. 기껏해야 동네 어귀나 사대부집 뜰에 한 두 그루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 앞마당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려온 덕천강도 물론 함께이다.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남명의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명의 그런 처사적(處士的) 삶은 산천재 벽면에 그려진 ‘허유소부도(許由巢父圖)’에서도 엿볼 수 있다. 허유와 소부는 요임금 시대 기산에 살던 전설적인 은자(隱者)들이다. 요임금이 어느 날 허유를 불러 천하를 선양하려 하자 그는 이를 사양한다. 이어 허유는 다시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며 영수 물가에서 귀를 씻었다. 친구 소부는 한술 더 뜬다. 소부는 영수에 소를 몰고 와서 물을 먹이려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까닭을 듣고는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다.

▼ 9구간 및 8구간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표지판은 산천재를 둘러싼 담벼락의 왼편 끄트머리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그 곁을 지리산둘레길의 엠블럼(emblem)인 ‘벅수’가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 산천재를 오른편 옆구리에 끼고 덕천강변으로 내려서자 ‘지리산국립공원 50주년 기념공원’이 길손을 맞는다.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게 1967년.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 공원을 조성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우리나라 1호 국립공원에 어울리는 사업이라고나 할까? 안내판은 ‘굿 포토 존’이라며 천왕봉을 배경으로 멋진 추억을 남겨보란다. 그러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공원은 지리산을 형상화 했다. 흙을 도톰하니 쌓아올렸는가 하면, 그 위에다 지리산을 상징하는 기암들을 올려놓았다. 그 뒤로 진짜 천왕봉이 솟아오르고 있으니 터를 제대로 잡은 셈이다. 지리산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 된 반달곰 가족도 배치했다. 뒤로 보이는 천왕봉까지 함께 담으면 인생샷이 될지도 모르겠다.

▼ 공원 뒤에는 ‘파크골프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파크골프(park golf)란 나무로 된 채를 이용해 역시 나무로 만든 공을 쳐 잔디 위 홀에 넣는, 말 그대로 공원에서 치는 골프놀이이다. 장비나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세게 휘둘러도 멀리 안 나가는 까닭에 최근에 부쩍 인기가 높아진 레포츠이다.

▼ 덕천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트레킹이 시작된다. 소나무 숲을 조성하는 등 강변을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았다.

▼ 남명이 터를 잡은 스토리를 지자체에서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다. 남명 사상의 보급을 위해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을 들어앉혔다. 입소자들을 대상으로 청렴·인성·예절을 주제로 한 ‘선비문화체험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시설 인프라는 물론이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까지 끼고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단다.

▼ 탐방로는 한마디로 곱다. 보드라운 흙길에 벤치와 정자는 기본. 심지어는 비올 때를 대비해 요런 터널형의 산책로까지 만들어놓았다.

▼ 면단위의 장 치고는 제법 큰 규모인 ‘덕산 약초시장’도 주요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매 4일과 9일에 장이 서는데 지리산에서 채취한 약초가 주로 거래된다고 한다. 주말에는 특산물 장터도 열린다니 산나물이나 꿀 등 지역 농·특산물을 사보는 게 어떨까?

▼ 시간이 일러서인지 장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역 특산품을 만날 수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노점상 두엇이 곶감과 약초 등을 펼쳐놓고 있었다.

▼ 덕산시장 앞에서 ‘원리교’를 건넌다. 대원사계곡을 흘러내려온 덕천강의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다리이지만, 천왕봉에서 중산리계곡을 거쳐 내려오는 ‘시천천’까지 옆에 둔 모양새이다. 시천천의 물줄기를 합친 덕천강은 이곳에서 그 몸집을 한껏 부풀린다.

▼ 앗! 지리산둘레길의 8구간과 9구간은 ‘원리교’에서도 나뉘고 있었다. 벅수가 현재 위치를 ‘0’으로 삼고 위태와 운리까지의 거리를 각각 9.7km와 13.9km로 적어놓은 것이다.

▼ 다리 건너에서 길이 둘로 나뉜다. 오른편은 대원사. 왼편은 중산리로 연결되는데 둘 모두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주요 길목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왼편 중산리 방향이다.

▼ 탐방로는 ‘원리교’를 지나 왼편으로 꺾어진 뒤 덕산중·고등학교 앞에서 또다시 왼편의 ‘천평교’를 건넌다. 그 사이에 남명의 시비(詩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겨세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듸오 나는 옌가 하노라>. 관직의 부름을 마다하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던 남명이 지리산을 선경의 대명사인 무릉도원에 빗대면서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노래한 시조이다.

▼ ‘천평교’로의 진행을 잠시 미룬 채 직진해본다. 그리고 덕산중·고등학교의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신 ‘덕천서원(德川書院)’을 만났다. 1576년 문인들이 세운 이 서원은 ‘강우(江右)48가(家)’의 본산으로 불린다. 낙동강 오른쪽 경상우도 유림의 본거지란 뜻이다. 그래선지 광해군 때는 사액까지 받았다. 하지만 대원군 시기 훼철을 피하지 못해 사라졌다가, 1926년에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서원은 단출한 규모로 이루어져 있었다. 홍살문과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을 연거푸 지나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그리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이 이루어지던 장소이고,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다.

▼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온다.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정여립 사건의 무고로 옥사한 고제(高弟) 수우당 최영경도 함께 모시고 있다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 덕산중·고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천평교’를 건넌다. 다리는 곶감축제(1.6-23)에 맞춰 내건 홍보용 깃발들로 뒤덮여있었다. ‘대한민국 대표과일, 산청곶감’. ‘산청곶감’의 원료감인 ‘고종시’가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산림청·한국과수농협연합회가 주관하는 ‘2021년 대한민국 대표과일 선발대회’에서 6년 연속 ‘최우수상’에 선정됐다는 자랑일 것이다.

▼ 다리를 건너는 도중 ‘시천천’의 물이 ‘덕천강’에 합류하는 양단수(두물머리)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명이 선경(仙境)이라던 바로 그 물줄기이다. 관직의 부름도 마다하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던 은둔자 남명은 지리산을 선경의 대명사인 무릉도원에 빗대며 그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 천평교 건너 ‘산청곶감 유통센터’에 이르자 금환낙지(金環落地)라는 빗돌이 눈길을 끈다. 이 일대(원리·사리·천평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형상이 금가락지를 닮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들녘 어딘가에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민초들은 그 자리를 찾아 집을 짓고 삶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을 게고 말이다.

▼ 천평교를 건넌 둘레길은 자동차가 유(U)턴을 하듯이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는 조금 전 거슬러 올라왔던 덕천강의 물줄기를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내려간다. 강변길 오른편은 ‘천평(川坪)’. 냇가에 자리한 들녘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 강변길을 걷다보면 아까 눈에 담았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다만 나타나는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다. 어느 여행가는 ‘되감기 화면’이란 멋진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 ‘둘레길’은 덕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모양새이다. 그 거리는 대략 3km. 그게 부담스럽다면 산천재 근처의 징검다리(벅수 : 위태 8.2㎞/ 덕산 1.5㎞)를 이용하면 된다. 실제 산천재에서 만난 어느 팀(여행사에서 진행하는 것 같았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 탐방로는 ‘곶감축제’ 깃발이 펄럭이는 20번 국도의 교각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 200m쯤 더 걸었을까 ‘숲&물 펜션’을 스치듯 지난 탐방로는 덕천강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중태천’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 펜션 정원수의 기괴한 생김새가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20년 전쯤 독일에 연수차 갔을 때 보았던 풍경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낭만가도로 유명한 ‘로텐부르크(Rotenburg)’로 기억되는데, 흉측스러울 정도로 뭉툭 잘라놓은 플라타너스(독일 친구는 마로니에라 우겼다)를 보며 감성이 여린 나는 당시 마음까지 아파했었다.

▼ 골짜기로 들어서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뀌어 버린다.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감나무뿐인 것이다. 맞다. 산청. 특히 이곳 덕산분지(시천·삼장)는 곶감의 본고장으로 알려진다. 덕산(德山) 지역의 감은 고려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의 감은 씨가 거의 없고 맛이 빼어나다는 게 특징. 조선 말엽 고종황제께 진상품으로 보내지면서 ‘고종시(高宗枾)’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이 고종시로 만든 곶감이 ‘산청곶감’이라는 브랜드가 됐다.

▼ 중태마을에 들어서자 감나무들은 그 밀도를 한층 더 높인다. 가히 곶감의 본고장이라 할만하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곶감은 맛 좋고 질 좋은 것으로 소문났다. 지난 2010년에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에게 선물로 전달돼 감사 편지를 받기도 했으며, 2018 평창올림픽 때는 청와대 만찬의 후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쫀득하고 찰진 식감과 백분발생이 적은 투명한 선홍빛 자태가 이방인들의 기호에도 딱 맞아 떨어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20분. 중태마을(벅수 : 위태 6.0㎞/ 덕산 3.7㎞)의 당산나무 아래는 ‘지리산둘레길 중태안내소’가 들어앉았다. 인증스탬프를 찍거나 트레킹에 필요한 정도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참! 이곳 중태마을은 오래전부터 닥종이 생산지로 유명했던 마을이다. 하지만 닥종이 소비가 끊기면서 지금은 닥나무 대신 감나무가 들어섰단다.

▼ 중태마을에서 멀어질수록 골짜기는 좁아진다. 소수로 다수를 막을만한 지형이랄까? 맞다. 이곳 중태마을은 동학혁명 때 마지막 녹두꽃이 떨어졌던 곳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추격하던 관군을 맞아 이곳에서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관군의 눈을 피해 농민군의 주검을 인근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가족들이 찾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농민군의 시체가 가매장되었던 골짜기는 지금도 ‘가장골’로 불린단다.

▼ 유점마을을 향해 오르다 보면 포장길 옆으로 중태천이 흐른다. 얼음 반 물 반인 개울 주변도 역시 감나무들 세상이다. 국민 간식인 곶감은 일반적으로 충북 영동과 경북 상주의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요즘은 산청곶감도 이에 못지않게 입소문을 탄다. 위의 두 고장과 차별화 된 모양과 최고의 품질로 곶감의 차별화와 대중화를 선언했다. 최근에는 ‘곶감축제’까지 열고 있을 정도다.

▼ 울창한 대나무 숲속에 서너 채의 민가가 들어섰다. ‘지리산 선 단식원’. 뭔가를 위해 참선과 단식을 병행한다는 얘기일 게다. 하지만 체력을 더 중요시하는 나는 이렇게 둘레길을 걷는다. 육체적인 힘이 받쳐주어야만 나를 일깨워주는 정신도 맑아질 수 있지 않겠는가.

▼ 커다란 바위에 매달린 ‘놋점골 쉼터’란 팻말이 눈길을 끈다. 너럭바위의 위에서 잠시 쉬어가라는 얘기일 것이다. 9구간은 이처럼 자연환경이나 오두막 등의 기존 시설물들을 쉼터로 활용하고 있었다.

▼ 유점마을 초입의 ‘지리산 천왕봉 죽염’ 간판이 귀에 익어 카메라에 담아봤다. 죽염의 제조과정을 소개하던 어느 기사가 생각나서이다. 죽염을 만들려면 우선 3년 이상 된 직경 8~10cm의 대나무를 마디마디 자른 뒤 습기를 제거한다. 그런 다음 대나무에 천일염을 채워 1300도가 넘는 가마에서 4시간 이상 굽는다. 불이 꺼지면 12시간쯤 그대로 둔다. 이때 녹아내린 소금기둥만 남게 되는데, 이것을 분쇄기로 갈아 분말로 만든다. 이런 과정을 9번 반복하면 죽염이 탄생된다.

▼ 천왕봉죽염은 달걀노른자 맛이 난다고 했다. 유황성분을 머금은 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금과 유황은 강력한 살균 작용을 해 병원균을 박멸시키고 피를 맑게 해준다. 면역력을 증진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다. 400m만 들어가면 된다니 짬을 내어 한 봉지 사갈까 보다.

▼ 골은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그래도 생육의 최적지라는데 감나무가 없겠는가. 맞다. 이곳 덕산분지 일대는 표토의 98.2%가 사양토·양토·미사질양토로 이루어져있어 감나무가 자라는데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거기다 지리산의 높은 일교차가 최고 품질의 곶감을 만들어 낸단다. 그건 그렇고 곶감은 호랑이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러니 까짓 코로나19 정도야 벌벌 떨며 도망치지 않겠는가. 새해 들어 첫 번째로 나선 지리산둘레길. 호랑이도 무서워할 패기로 올 한해를 시작해보자.

▼ 민폐를 막고자하는 노력은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감을 예로 들어보자. 나그네들에게는 그저 흔하디흔한 주전부리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겠지만, 주민들에게는 애써서 가꾼 자식처럼 소중한 재산이 아니겠는가.

▼ 감사의 뜻을 전하는 팻말도 보인다. 농작물 피해가 우려되는데도 길을 내준 유점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린단다.

▼ 트레킹을 시작하고 2시간쯤 지나 유점마을에 도착했다. 산꼭대기 바로 밑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유기(놋그릇)를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 역시 우리나라는 믿음의 천국이다. 손가락으로 헤아려도 될 만큼 자그만 마을인데도 그럴 듯한 교회가 떡하니 들어서있는 걸 보면 말이다.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유점마을은 1938년부터 제7일안식일 교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단다. 유점이란 이름을 버젓이 놓아두고 ‘안식교 마을’로 불리는 이유이다.

▼ 유점마을은 대나무 숲속에 갇혀있는 모양새이다. 그러다보니 마을을 벗어나려면 대나무 숲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 그 숲속에서 시간이 멈춘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풍경을 만났다. 의자와 판자, 그리고 어린이 장난감 같은 소품들을 잔뜩 진열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여간 이색적이지 않다.

▼ ‘오늘도 당신은 따뜻하다’, ‘당신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달려온 당신 오늘도 수고 했어’. 누가 적었는지는 몰라도 하나같이 가슴에 와 닿는 말들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적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시편이 적힌 걸로 보아 안식일교회에서 꾸며놓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 대숲을 빠져나오면 언덕배기에 수령이 꽤 되어 보이는 정자나무 몇 그루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유점마을에서 가장 오래 묵은 나무란다.

▼ ‘중태 정자쉼터’. 나무 아래 정자도 둘레길의 쉼터(벅수 : 위태 3.0㎞/ 덕산 6.7㎞)로 활용되고 있었다.

▼ 둘레길은 ‘중태재’를 향해 숨을 헐떡인다. 시멘트 포장길인데도 완연한 가풀막이다. 그런데도 주변은 온통 감나무 천지다. 어느 기자는 저런 풍경을 ‘산이 감나무 밭이고 감나무 밭이 산’으로 표현했었다. 그러면서 덕산장이 곶감장으로 유명한 이유를 저런 풍경에서 찾았었다.

▼ 중태재에 가까워질 무렵 가로수 대용으로 심어놓은 차나무를 만났다. 중태재를 넘으면 하동 땅.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시배지(始培地)다. 그런 사실을 알려주려는 의도일까?

▼ ‘밀원 조림지’라는 안내판도 눈에 띈다. 그런데 수종이 ‘아카시나무’란다. 1960~70년대 치산녹화 사업 때 심었다가, 녹화사업이 종료된 다음에는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제거당한 비운의 나무가 아카시나무가 아니었었던가. 그런 나무를 밀원(蜜源). 즉 꿀을 채취하기 위해 다시 심는다는 것이다.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 유점마을에서 1km쯤 더 오르자 둘레길은 임도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선다. 벅수(위태 2.1㎞/ 덕산 7.6㎞) 옆에 벤치가 놓여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방금 준비해온 막걸리로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다.

▼ 둘레길은 이제 산길로 변한다. 처음으로 만나는 숲길, 그것도 보드라운 흙길이 반갑다. 경사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만하다.

▼ 그렇게 10분쯤 진행했을까 ‘위태재’에 올라선다. 주산(831m)과 깃대봉(오대주산 642m)을 잇는 능선의 안부이자, 산청(시천면 내공리)과 하동(옥종면 위태리)의 경계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고갯마루는 인근 주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소금이나 비료를 구하려는 덕산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었고, 하동사람들은 덕산장을 보기위해 오르내리던 고개다. 그들에게 이 고갯마루는 고된 다리품을 팔던 쉼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둘레길 나그네들의 쉼터로 변해있다.

▼ 벅수(위태 1.9㎞/ 덕산 7.8㎞)는 중태재로 적고 있었다. 하지만 하동 사람들로부터는 ‘위태재’로 불린다고 한다. ‘갈치재’, ‘갈티재’ 또는 ‘갈퇴재’로도 불린다니 고개 하나에 이름이 다섯 개나 되는 셈이다.

▼ 위태리로 내려가는 구간은 편하기로 소문난 9구간 가운데서도 가장 편안한 길이다. 경사가 완만할 뿐만 아니라 보드라운 흙길이 흡사 양탄자 위를 걷는 것처럼 폭신폭신하기 짝이 없다.

▼ 잠시 후 대숲으로 들어선다. 숲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대나무들 천지다. 담양의 죽림이나 태화강의 십리숲길만큼은 아니어도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느낌의 대나무 숲길이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몸통도 거제의 ‘맹종죽’보다는 못해도 여간 굵은 게 아니다.

▼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대나무는 음이온이 다량 발생하여 신경안정과 피로회복 등 병에 대한 저항성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다. 숲길을 걸으며 머리가 맑아진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좋은 길을 열어준 주민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대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다. 대낮인데도 빛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그래서일까? 자못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 대숲이 끝나면 오솔길이 뒤를 잇는다. 오리나무 그늘의 벤치에서 그동안의 여정을 정리해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벤치에 앉자 눈에 들어오는 게 온통 ‘고사리 밭’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농작물에 손대지 말라던 팻말은 저 고사리들에 대한 예방차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조금 더 내려서자 이번에는 아름다운 저수지가 반긴다. 손바닥만한 크기지만 그 빼어난 풍경만큼은 여느 명승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반영(半影)도 기막히다. 물속에 아랫도리를 담근 수양버들에 주변 산봉우리들까지 더해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그런 경관을 감상해보라는지 두어 개의 벤치까지 놓아두고 있었다.

▼ 이후의 둘레길은 산자락을 따라 구불대는 농로를 따른다. 이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 산자락에 둥지를 튼 산촌은 저마다 개성 넘치는 풍경화를 그린다. 모두 실핏줄처럼 가는 지리산길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정을 나눈 이웃들이다. 이렇듯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자락에 살던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옛길을 복원해 놓았다.

▼ 내려오는 도중 또 다른 대숲을 만났다. 아니 터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까보다 오히려 한수 위이다. 대숲 사이로 청량한 초록바람이 흐른다. 사각사각 잎이 스치는 소리가 무척 상쾌하다.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풍경이라 하겠다.

▼ 날머리는 위태마을(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중태재를 내려선지 30분(덕산재에서 트레킹을 시작한지는 3시간). 위태마을에 내려서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앱이 찍고 있는 거리는 12.35km, 남명선생의 유적지를 꼼꼼히 둘러보았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빨리 걸은 셈이다. 그만큼 쉬운 코스였다는 반증도 되겠다. 참고로 위태마을의 옛 이름은 ‘상촌’이었다고 한다. 진등·안몰·중몰·괴정지 등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이곳은 ‘진등’이다. 둘레길 간이화장실과 버스정류소를 옆에 끼고 있다는 편의성 때문에 둘레길의 시·종점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 9구간과 10구간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벅수(하동호 11.5㎞←위태→덕산 9.7㎞)는 지금껏 걸어온 농로와 53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들과는 달리 지리산둘레길의 엠블럼(emblem)은 눈에 띄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