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3구간(서당-하동읍)

 

여행일 : ‘22. 3. 5(토)

소재지 : 경남 하동군 적량면과 하동읍 일원

여행코스 : 하동읍(2.6km)→바람재(1.5km)→율곡마을(0.8km)→관동마을(1.5km)→상우마을(0.6km)→서당마을(1.8km)→버디재(0.9km)→이정마을(0.8km)→삼화실(거리/시간 : 7.0km+3.5km/ 실제는 10.04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3구간인 하동읍-서당 구간과 12구간의 일부(서당-삼화실)를 걷는다. 늘린 구간을 합쳐도 거리가 10km에 불과하니 다들 쉽게 생각하겠지만, 고개를 두 개나 넘는데다가 고도를 상당히 높여야(오늘처럼 역방향으로 걸을 경우)하기 때문에 난이도를 ‘중·상’ 정도로 꼽아야 한다. 주요 볼거리로는 널따란 들녘을 품은 풍요로운 마을들과 섬진강, 그리고 걷는 내내 만나게 되는 매화꽃을 꼽을 수 있다.

 

▼ 들머리는 ‘7-eleven’ 앞(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428-3)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50km쯤 내려오면 하동읍사무소가 나온다. 사무소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7-eleven’ 앞 도로가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 13구간은 원래 서당마을에서 하동읍까지다. 그런데 거리가 7km밖에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대신 삼화실에서 대축마을까지 이어지는 12구간은 16.9km나 되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시키기 위해 12구간의 일부(삼화실↔서당, 3.5km)를 13구간에 포함시켜 걸었다. 대신 다음 12구간은 서당마을에서 대축까지 13.4㎞만 걸으면 된다.

▼ 편의점과 회영루(중국음식점) 사이의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골목 끄트머리에 ‘하동지역 자활센터’의 주황색 간판을 보았다면 길을 제대로 찾은 셈이다.

▼ 언덕을 향해 50m쯤 올라가면 ‘지리산둘레길 하동센터’가 있다. (사)숲길 사무소도 함께 들어서있어 지리산둘레길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그러니 길을 나서기 전에 필요한 지역정보를 얻어 보는 게 어떨까? 운 좋으면 함께 걸을 길동무라도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 앞마당에 놓인 돌멩이에는 실상사 주지인 해강스님의 말씀이 적혀있었다. <사회문제의 책임이 양심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 자신, 종교인, 지식인에 있음을 바로 봅니다.> 어느 글에선가 양심이란 이렇다고 적고 있었다. 조작되지 않고 거짓 없는 진리의 소리이자 신의 소리라고. 그런 마음으로 지리산둘레길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 몇 걸음 더 오르면 나타나는 갈림길. 하동지역자활센터로 오르는 길목의 벅수는 한쪽 방향만 가리킨다. 이곳에서부터 지리산둘레길(하동-서당 구간)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주황색 간판의 자활센터를 왼편에 끼고 돈다. 도중에 갈림길도 만난다. 이렇듯 13구간의 초입은 도심 골목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때문에 길은 휘어졌다 꺾어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갈라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때마다 벅수가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 ‘기쁜소식 하동교회’를 스치듯 지나면 2차선 도로(산복1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고층아파트(금화마을)를 향해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때 왼편 언덕(길을 사이에 두고 금화마을 맞은편)에 ‘하동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니 잠시 들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공원은 일제강점기 하동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과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조성됐다.

▼ 발아래로 내려다보는 하동시가지 풍경도 이 구간만의 자랑거리다. 그 풍경은 오르면 오를수록 더 넓어진다. 시가지 뒤 ‘너뱅이들(‘넓은 벌’이라는 뜻)’ 너머로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아스라하다.

▼ 공원입구에서 50m쯤 떨어진 곳(이곳의 벅수는 방향만 지시한다)에서 둘레길은 도로를 버린다. 그리고는 더 높은 언덕을 향해 치고 오른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삼거리. 곧장 직진하면 하동중학교가 나온다. 하지만 둘레길은 왼쪽으로 빠져나가 산자락을 파고든다. 이 구간은 돌계단을 놓는 등 인위적이 색체가 짙다. 대신 매화나무로 가득한 멋진 능선을 가로지른다. 볼거리를 찾아 길을 새로 내었지 않나 싶다.

▼ 이곳의 벅수(서당 6.5㎞/ 하동읍 0.5㎞)도 눈여겨 볼만하다. 정 방향(빨강색)과 역 방향(검정색)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양쪽 모두를 녹색으로 칠해놓았다. 13구간(서당-하동읍)이 지리산둘레길의 곁가지다보니 시·종점을 따로 둘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 산자락으로 들어서자 주변이 온통 매화 꽃밭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탐매(探梅)’ 나들이가 될 수도 있겠다. 옛 선비들이 이른 봄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매화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탐매’라 했으니 말이다.

▼ 매화는 봄을 알리는 꽃이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피어 강인함과 지조를 상징한다. 기품 있는 자태로 고고함을 대표하며,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옛 선비들은 또 사군자(四君子) 중에서도 매화를 맨 앞에 두었다. 이는 혹독한 겨울을 지나 도도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 매화 한 송이가 고매한 군자를 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란다.

▼ 작은 고갯마루를 사뿐히 넘어서자 섬진강 물줄기가 눈앞에 펼쳐진다. 유구한 세월을 흘러온 ‘섬진청류(蟾津淸流)’를 만나는 기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굽이굽이 모래톱에 의지한 섬진강의 하얀 백사장이 정겹게 다가온다.

▼ 양지의 봄은 이미 무르익었다. 부지런한 매화는 이미 꽃잎 몇 개를 거센 바람결에 흘려보낸다. 하동 땅은 그렇게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인생무상이랄까? 선승들의 열반송(涅槃頌)에는 봄날의 꿈이나 허공 꽃, 아침 이슬, 물거품이란 단어들이 유독 많다. 이승과의 인연을 다하고 떠나는 그들의 눈에는 지나간 인생이 공(空)하고 무상(無常)한 시간으로 비쳐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저 꽃잎처럼 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또 다른 고갯마루(벅수 : 서당 6.1㎞/ 하동읍 0.9㎞)에 올랐다. 길가 이정표는 곧장 직진하면 중앙중학교가 나옴을 알려준다. 하지만 둘레길은 산자락을 향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 이후부터는 능선을 탄다. 함께 걷던 ‘몽중루’님께서 귀띔해주신 이름은 ‘삼신지맥’. 삼신지맥(三神枝脈)이란 낙남정맥상의 삼신봉(지리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해 관음봉과 칠성봉, 구제봉, 분지봉을 일구고 횡천강이 섬진강에 합수되는 하동읍 신기리에서 그 숨을 다하는 길이 36km의 산줄기이다. 동서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지리산의 조망이 자랑거리인데 그 산줄기를 지금 걷고 있다는 것이다.

▼ 앗! 우리나라에도 저런 곳이 있었나? 공동묘지의 한가운데에 민가가 들어서있는 것이다. 묘역과 가옥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외국에서야 흔한 풍경이지만, 묘역을 경외(敬畏)시 하는 우리나라에서야 어디 그리 흔한 풍경이겠는가.

▼ ‘지리산둘레길’의 특징은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이 들일 나가던, 옆 마을에 일보러 가던, 장보러 가던 그 길이었다. 그런 길들을 모아 지리산 둘레를 둥글게 연결했을 뿐이다. 그런데 13구간만은 예외인 모양이다. 초반. 그러니까 중앙중학교 입구부터 바람재까지의 산길은 새로 낸듯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축대나 계단을 만드느라 쌓아올린 돌멩이들은 아직까지도 이끼 하나 피어나지 않았다.

▼ ‘어머낫!’ 호들갑스런 집사람의 외침에 달려가 보니 두꺼비 한 마리가 나들이를 나왔다. 맞다. 오늘은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절기 경칩(驚蟄)이다. 저 두꺼비는 우리네 선현들이 허투루 절기를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곳 하동은 누가 뭐래도 차(茶)의 고장이다. 차 시배지(始培地, 삼국사기는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일대에 심었다고 전한다)도 이곳 하동(쌍계사 근처)에 있다. 그런 인연으로 2023에는 ‘세계 차 엑스포’까지 열 계획이란다. 그래선지 둘레길 주변까지 녹차나무로 도배했다. 차나무가 길 양옆에 무성하게 자라는 이런 차밭 길은 ‘바람재’까지 쭉 이어진다.

▼ 크고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던 산길은 어느덧 ‘바람재’에서 한숨을 돌린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만이다.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고개를 넘어오는 바람은 의외로 잔잔하다. 아니 그렇게나 심하게 불던 바람이 어느새 사그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해발 182m의 이 고갯마루에서 길은 셋으로 나뉜다. 직진은 분지봉을 거쳐 구제봉. 왼편은 ‘율동(하동읍에 있다 해서 ’하동 밤골‘이라고도 한다)’로 이어진다. 나머지 하나는 물론 둘레길로 연결되는 ‘적량 밤골’이다.

▼ 바람재는 ‘삼신지맥’의 중요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벅수(서당 4.4㎞/ 하동읍 2.6㎞)말고도 등산용 이정표(분지봉↑ 4.5㎞/ 적량밤골→/ 중앙중학교↓ 1.7㎞)와 ‘구재봉 등산로 안내판’을 따로 세워두었다.

▼ 삼신지맥과 헤어진 둘레길은 오른편(적량 밤골)으로 방향을 틀어 포장 임도를 따른다. 이후부터는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자 발아래로 적량면의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자로 잰 듯 경지정리 된 계단식 논들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첩첩 산중에 갇혀있다.

▼ 바람재에서 10분쯤 내려왔을까 삼거리(벅수 : 서당 3.7㎞/ 하동읍 3.3㎞)가 나오기에 오른편으로 들어가 봤다. 그리고 그곳에서 ‘뒷밤골’로 여겨지는 작은 마을을 만났다. 하지만 이름(밤골)과는 다르게 대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었다.

▼ 조금 더 내려오면 이번에는 ‘율곡마을’이 길손을 맞는다. 구재봉에서 남쪽으로 줄기차게 뻗어 내린 산줄기가 감싸고 품은 산골마을이다. 그 산자락에 얼마나 많은 밤나무가 자라면 동네 이름까지 ‘밤골(栗谷)’로 지었을까? 참고로 하동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밤나무 재배면적이 넓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밤나무가 많은 곳이 율곡마을이라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 마을회관 뒷벽은 마을 주민들이 직접 그린 둘레길 벽화로 채워졌다. 조선시대의 지도를 연상시키는 그림은 원색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뭘 의미하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로 시작되는 하여가(何如歌)를 연상시키기에 딱 좋다.

▼ 마을 주민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풍경도 눈에 띈다. 의자를 놓아 둘레길 나그네가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 율곡마을부터는 평지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늘이 없어 오뉴월 뙤약볕이라도 내려쬔다면 최악의 코스가 될 수도 있겠다. 대신 시원스레 트이는 적량들판의 모습에서 넉넉한 농촌의 삶을 오롯이 느끼며 걷게 된다.

▼ 오른편은 널디너른 적량들판이 펼쳐진다. 하동읍의 너뱅이들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산골에 펼쳐지는 보석 같은 황금 들녘이다. 들녘은 분지(盆地) 지형이다. 구재봉과 분지봉에서 뻗어 나온 높이 200~400m의 산줄기가 첩첩이 감싼 모양새이다. 때문에 이곳은 난이 있을 때마다 피난지로 선호되었다고 한다.

▼ 그렇게 7분쯤 걸었을까 삼거리(벅수 : 서당 2.8㎞/ 하동읍 4.2㎞)가 나오는데, 적량면소재지에서 들어온 길이 둘(율곡 및 관동)로 나뉘는 지점답게 마을 표지석도 둘이다. 이곳에서 둘레길은 관동마을로 향한다.

▼ 소담제(笑談齊). ‘우스운 이야기가 오가는 곳’답게 이 집은 장승까지도 익살스럽다. 머리도 모자 대신에 솥뚜껑과 솥단지를 뒤집어썼다. 참고로 장승은 무서운 형상이 보편적이다. 역병이나 잡신·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강한 능력을 가진 무서운 장수나 제왕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집의 장승이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의 이름표를 달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 소담제 뜨락에는 홍매(紅梅)가 활짝 피어났다. ‘홍매가헌(紅梅佳軒)’이랄까? 그런데 이게 붉다 못해 검붉다. 입바른 사람들은 흑매화(黑梅花)라고 고집부릴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봄의 전령’ 홍매화는 보통 2월 중순부터 개화한다. 그런데 연일 계속되던 맹추위로 인해 이제야 꽃망울을 열어 제켰나보다.

▼ 잠시 후 관동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관리(館里)의 4개(죽치·금강·율곡·관동) 자연부락 중 가장 오래된 것만은 확실하단다. 옛 이름이 ‘나우래’였던 이곳은 구한말까지만 해도 하동에서 진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고 한다. ‘관동(館洞)’이란 지명은 당시 관리들의 관사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 마을회관 앞 벅수(하동지선 011, 거리표시는 없다)에는 코스가 변경되었음을 알리는 코팅지가 매달려 있었다. 캠핑장과 개사육장 대신 마을 안길을 통과하란다. 덕분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는 개사육장은 보지 않아도 되었지만 개가 떼를 지어 울부짖는 소리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 마을안길로 들어서자 잘 지어진 정자가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13구간에서 만난 마을들은 너나없이 정자를 지어놓고 있었다. 최근의 화두가 되고 있는 ‘정주여건 개선’의 일환이지 싶다. 하지만 저렇게 잘 지어놓고도 편액을 달지 않은 건 흠이라 하겠다. 함께 걷던 이석암 선생(‘마음을 다스리는 산행’의 저자)의 말마따나 하다못해 ‘관동정(마을 이름을 따서)’이라고만 해도 한층 돋보일 텐데 말이다.

▼ 조금 더 걷자 둘레길이 직각으로 방향을 튼다. 무심코 걷다가는 지나쳐버리기 딱 좋은 지점이다. 실제 그냥 지나쳐버린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러니 길가에 세워놓은 벅수(서당 2.1㎞/ 하동읍 4.9㎞)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 마을을 빠져나오면 아까 마을회관 앞에서 헤어졌던 옛 탐방로(벅수 : 서당 1.9㎞/ 하동읍 5.1㎞)와 다시 만난다.

▼ 상우마을로 넘어가는 도중에 만난 ‘황금농원’. 어떤 과일을 재배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무 하나만은 눈에 담기에 충분했다. 하나같이 한쪽 방향으로만 가지를 뻗으면서 기괴한 풍경을 연출한다.

▼ 관동마을을 출발한지 30분, 상우마을에 도착했다. 법정 단위인 ‘우계리(牛溪里)’에 속한 자연부락의 하나로 마을 앞이 확 트인 들녘인데다, 우계천의 여러 보(洑)와 우계저수지의 수로로 인해 관개(灌漑)가 원활하다. 농사짓기에 알맞은 천혜의 땅이라고나 할까? 참! 이 마을도 역시 밤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밤밭촌’이라는 옛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말이다.

▼ 들녘 너머는 우계리의 또 다른 자연부락인 ‘원우마을’이다. 6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우계리의 중심마을이기도 하다.

▼ 길은 농로를 따라 이어지는데 부지런한 산골 농부는 일 년 농사 준비로 분주하다. 옛말에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지런한 저 농부의 올 농사는 틀림없이 풍년일 것이다.

▼ 서당마을과 상우마을은 본래 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상우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서당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강화천을 건너자 늙은 당산나무 아래 작은 쉼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당산나무가 이팝나무라는 게 이채롭다. 하긴 가난했던 시절, 신기루처럼 나타난 쌀 꽃에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었을 수도 있었겠다. 참고로 옛날 우리네 선조들은 이팝나무를 ‘쌀나무(친근하게는 쌀낭구)’라고 불렀다. 이팝나무 꽃이 백미(白米, 도정한 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늙은 몸으로 길손을 맞는 이팝나무는 300년 전부터 이곳을 지키는 영목(靈木)이라고 한다. 옛날 저 나무는 인근 주민들에게 한해의 기상과 농사일까지 예측해주었단다. 이른 봄, 꽃이 아래쪽에 많이 피면 비가 적게 와서 물이 안 차는 물아래 들녘에 풍년이 들고, 위쪽에 많이 피면 비가 자주 와서 물위 들판이 풍년이 들었다나? 특히 계묘년 보리 흉년에는 일 년 내내 잎이 피지 않았고, 임진왜란 때는 이 나무에 옷과 밥이 매달려있기도 했단다. 하지만 얘기는 얘기일 따름. 믿고 말고는 자신의 몫이다. 참! 봄마다 하얀 꽃으로 장관을 이루는 서울 청계천의 이팝나무 가로수가 저 나무의 자손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씨를 받아 키운 묘목을 옮겨 심었다.

▼ 몇 걸음 더 걸어 서당마을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 만이다. ‘서당’이란 지명은 ‘서당(書堂)이 있던 마을’에서 유래했다. 함덧거리(마을회관 근처)에 오래전부터 서당이 있었고, 뒷골 큰 대밭에도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1947년경 한학자인 의령사람 현산 남정이 이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단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가없다.

▼ 13구간(하동-삼화실)의 시·종점임을 알리는 엠블럼(emblem)은 마을회관에 기대듯 세워놓았다. 하단에는 아까 관동마을에서 보았던 지도. 즉 둘레길의 일부가 변경되었음을 알리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 엠블렘 옆에 세워놓은 벅수(서당 0,2㎞/ 하동읍 6.8㎞)도 눈여겨 볼만하다. 붉은색(진행방향)과 검정색(역방향)으로 나타내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이곳에는 검정색 대신 녹색(정과 역의 구분이 필요 없는)으로 표현했다. 끝과 끝을 잇는 순환형의 지리산둘레길이 아닌, 곁가지 노선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 추가된 구간(서당-삼화실), 그러니까 12구간의 시점인 삼화실로 가려는데 ‘지리산둘레길 서당마을안내소’가 눈에 띈다. 지리산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한 ‘갤러리’이자 ‘새참사랑방’이다. 스탬프북이나 지도, 손수건(둘레길 지도가 그려진) 등의 소품들 말고도 간단한 요깃거리(컵라면)와 음료(술 포함)를 덤으로 판매한다. ‘주막갤러리’로 더 잘 알려진 이유일 것이다.

▼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참새가 들른 주막. 내부 벽면은 추억의 사진들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마을주민이 가지고 있던 옛 사진을 연도별, 사연별로 정리했단다. 그래서 주막은 ‘갤러리’를 보탰고, 이곳을 찾은 나그네들은 마을의 옛 모습과 풍습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 옛 멋이 퐁퐁 넘쳐나는 지도도 정겹다. 서당과 학교를 함께 묶은 재치가 돋보이고, 함덧(덛)거리’나 피목과 같은 낯선 지명도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래 전 이곳 서당마을에는 지리산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마을주민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그 호랑이들을 잡기 위해 지금의 마을회관 아래에 엄청 큰 구덩이(함덧거리)를 파놓았다나?

▼ 둘레길 나그네들의 사랑방답게 안은 먼저 온 손님들로 꽉 차있다. 생명평화운동(지리산둘레길의 모태인 것 같은데)을 추구한다는 단체인데 순례길 떠나기 전 요기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궁여지책으로 캔맥주나 하나 챙겨가려는데 마침 냉장고까지 텅 비었다. 허탈해 하는 내 표정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리더로 보이는 이가 하동읍에서 구입해왔다며 막걸리 한 병을 선뜻 내주는 게 아닌가. 악양 지역의 프리미엄 막걸리인 ‘정감’이란다. 글을 빌어서나마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본다.

▼ 새참사랑방에서 새참을 즐기다가 불콰해진 얼굴로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런데 이게 만만찮게 가파르다. 술기운을 빌어 오르기에 딱 좋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 오르는 도중 물레방아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만났다. 하지만 리어카 바퀴처럼 생긴 물레방아는 작동을 멈추었고, 물을 떨어뜨리는 호스도 메마른지 오래다.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벽면에 상황에 맞지 않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물레야 너는 한곳에서 계속 돌고 있구나. 나는(우리는) 먼 길을 돌고 간다. 머나먼 둘레길>

▼ 앞서가던 집사람이 탐방로를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내려간다. 얼떨결에 따라가니 꽃망울을 활짝 연 홍매화가 피어있는 게 아닌가. 이해인 수녀님의 ‘매화 앞에서’처럼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그곳에 앉아 있었다.

▼ 꽃을 좋아하는 집사람. 나들이삼아 나간 지난 장날에도 달랑 화분 두 개만 챙겨들었을 정도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홍매화 뒤로 숨었다. 이를 보고 술을 떠올린 난 대체 무슨 심보일까. 아니다. 그림 의뢰비로 받은 3천량에서 2천량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나머지 8백량(2백량은 쌀과 나무를 샀다)으로는 술을 사서 친구들과 함께 마신 ‘김홍도’도 있지 않겠는가. 김홍도는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했다나?

▼ 그렇게 눈요기를 즐기며 걷는 나들이에 질투라도 났을까 편안하게 이어지던 둘레길이 갑자기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드디어 버디재로 오르는 산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참고로 버디재는 ‘밥봉’ 능선에 놓인 고갯마루다. 달이 밥봉의 위로 뜨면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이후는 전형적인 산길이 이어진다. 그것도 꽤나 가파르다. 아래처럼 중간에 쉼터를 만들어놓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다시 출발한 산길은 한술 더 떴다. 곧장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를 높일 수 있었을 정도로 버거운 구간도 만난다.

▼ 서당마을을 출발한지 50분. 해발 261m의 버디재(벅수 : 삼화실 2.2㎞/ 대축 14.7㎞)에 올라섰다. 서당마을과 이정마을을 잇는 고갯마루로 옛날 농우(農牛)를 가보로 여기던 시절에는 우계와 삼화 젊은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단다. 버디재 먼당(산마루의 방언)을 경계삼아 이쪽저쪽에다 소를 풀어먹이고, 자신들은 편을 갈라 잔디위에서 씨름도하고 만세놀이도 하면서 정을 키워왔단다. 하지만 그럴만한 터가 눈에 띄지 않으니 이 또한 믿거나 말거나이다.

▼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집사람에겐 내려가는 게 더 고통이니 어찌할까나.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가파르지 않는가. 아예 거꾸로 돌아서서 내려가고 있는 그녀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마음 같아서는 업어서라도 내려다주고 싶은데...

▼ 7부 능선쯤으로 내려오자 임도를 만난다. 그 접점에 돌 의자 몇 개를 놓아 작은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아픈 무릎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한 집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랄까?

▼ 지리산둘레길(삼화실-대축)의 안내판도 눈에 띈다. 이 구간은 마을을 많이 지나고 논·밭·임도·숲길 등 다양한 길들이 계절별로 다른 모습을 선사한단다. 봄에는 꽃동산을, 그리고 가을이면 황금으로 물든 풍요로움이 지리산 자락을 펼쳐놓는다며 너스레까지 떨고 있다.

▼ 임도를 따라 잠시 내려오자 진행방향 저만큼에 ‘이정마을’이 나타난다. 마을회관 앞의 우뚝한 느티나무가 장관인 산골마을이다. 법정 단위인 ‘동리’의 3개 마을 중 하나로 원래 이름은 ‘배나무정’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삼’으로 변했다가 1995년 하동군 조례에 의해 현재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 마을엔 ‘창녕 조씨’의 제실인 ‘동화제(東花齊)’가 있었다. 출입문(三樂門)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이정마을이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 마을 앞 느티나무는 대소사와 굿은 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지켜보며 150여 년 동안이나 마을을 지켜온 ‘수호목’이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이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세월이 흘러 요즘은 한술 더 떴다. 정자(梨花亭)를 지었는가 하면 커다란 TV에 냉장고까지 갖췄으니 초호화 쉼터라 할 수 있겠다.

▼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커다란 빗돌도 눈에 띈다. 지리산둘레길이 복권기금(산림청 녹색자금)으로 조성되었음을 알려주는데,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지원했기에 저렇게나 클까나.

▼ 삼화실로 가는 길. 왼편으로 꽤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구제봉과 칠성봉에서 흘러내린 ‘남산천’이 만들어놓은 들녘이다. 그런데 눈이라도 내린 듯 온통 하얀색 일색이다. 이 지역 특산물인 취나물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일 것이다.

▼ 이정마을에서 모퉁이 하나를 돌아서면 트레킹이 종료되는 ‘삼화실’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삼화초등학교 주변 세 개의 마을(이정, 상서, 중서)을 합한 지명이 삼화실(三花實)이다. 배꽃의 이정마을, 복숭아꽃의 도장골(지금의 상서마을), 매화꽃의 중서마을에다 과실(實)을 붙였다.

▼ 날머리는 ‘삼화실 에코하우스’

구간의 시·종점을 알리는 엠블럼(emblem)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삼화실 에코하우스’ 앞에 세워져 있다. 그나저나 오늘은 3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찍은 거리가 10.04km인 점을 감안하면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코스의 난이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거기다 덜 나은 집사람의 무릎도 속도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