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짙어간다.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개울가에는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성급한 나뭇잎들은 서릿바람에 우수수 무너저내린다. 나는 올 가을에 하려고 예정했던 일들을 미룬 채 이 가을을 무료히 보내고 있다.

 

..................... 생략....................................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취를 뒤돌아 보면, 그것은 하나의 과정으로 순례의 길처럼 여겨진다. 지나온 과거사는 기억으로 우리의식 속에 축적된다. 대개는 망각의 체에 걸러져 가맣게 잊어버리지만, 어쩐 일은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다.

 

그러나 지나온 과거사가 기억만으로는 현재의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사를 자신의 의지로 소화함으로써 새로운 눈이 열리고 귀가 트인다. 그래서 그 과거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망각은 정신위생상 필요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망각 때문에 어리석은 반복을 자행할 수도 있다.

 

보다 바람직한 자기관리를 위해서는 수시로 자신의 삶을 개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남의 눈을 빌어 내 자신의 살림살이를 냉엄하게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자기를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실해야 한다. 작은 이익에 눈을 파느라고 큰 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탐욕스런 사람들은 눈앞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 중략....................................

 

내 솔직한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내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을 뿐이다.

 

......................... 후략..................................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바깥 소리에 팔릴게 아니라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깃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재대로 관리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가?

 

 

법정스님의 '오두막 편지'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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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안가져가도 괜찮아요. 친구들이 준비해 온거 같이 나누어 먹으면 되니까요"

 

평소 우리집 애들의 나들이 때에 하는 말이다.

 

요즘 부쩍 가을을 타는지 만사가 싫었고, 그냥 의미없는 외로움에 빠지다보니 애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아침에 밥 챙겨주는 것까지 얽매임으로 생각되고... 모든게 귀찮아져 애들에게 신경질 부리는 일까지 잦았던것 같다.

 

오늘은 그동안의 미안함도 해소시킬겸 애들과 함께 볼링 몇게임 한뒤 모처럼 외식까지 하려 했는데 둘째가 친구들과 야외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야외에 갈때에 필수가 김밥인데도 김밥을 말줄 모르기에 나도모르게 둘째에게 짜증을 부리게 되고, 도시락이 필요없다는 둘째의 어른스러움에 더 마음이 아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나들이 따위는 왜하는냐고 야단치는건 부족함이 많은 아빠의 투정이 아닐까?

 

일반 도시락이라도 가지고 가겠다는 둘째의 대답을 듣고서야 나들이를 승낙하고, 일주일분 부식거리도 살겸 삼부자가 양제동 하나로마트에 들른후 돌아오는 길에 저녁은 피자로 해결....

 

다섯시에 일어나 둘째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는데, 큰애가 자기것도 싸 달랜다. 오늘 태권도 관원들 데리고 승단심사에 가는데 소풍기분좀 내겠다나?

 

도시락 하나엔 밥만, 나머지 하나에 반찬을 담으니 공간이 넓어 꽤 들어간다.

김치는 비닐로 싸고, 고기산적, 동그랑땡, 쏘쎄지는 두개씩 넣은 다음 위에다 케찹을 뿌리고, 단무지, 멸치볶음은 조금, 계란후라이 하나, 오이는 몇 조각 넣은 다음 고추장을 살짝 뿌려주고....

 

내가 생각해도 이정도면 훌륭한 나들이 도시락이 아닐까 한다. 몇번을 애들에게 보이며 자랑한 다음 포장을 해 주었다.

 

거기다 어제 사온 밤고구마와 밤을 쪄서 넣고, 후식으로 사과 두개, 사이다캔 2개에, 며칠전 주유소에서 받은 생수 두개를 챙기게 한 후, 용돈 2만원.....

 

싱글벙글하며 힘차게 현관을 나가는 둘째의 뒷모습이 너무 너무 보기 좋고, 모처럼 부모노릇한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

 

조금 후 큰놈이 부르는 소리에 현관으로 나가니 자기도 용돈달라며 손을 벌린다.

 

기분 좋은 김에 2만원을 주니 얼마만에 받아보는 용돈이냐며 입으로 여러번을 쪽쪽거리며 집을 나선다. 사실 큰애 아르바이트 시작한 후로는 용돈 한푼 주어본 일이 없었다.

 

다들 집을 나간 후의 집안에 적막이 찾아든다.

 

또 다시 찾아온 외로움을 피해보려 창문있는대로 다 열어 제키고 대청소를 시작한다. 현관까지 열면 좋겠으나 팬티만 입고 청소를 하기에 조금은 덥지만 참을 수 밖에 없다.

 

땀 뻘뻘 흘리며 청소마치고 찬물로 샤워하니 외로움이 어디로 도망갔나 보다.

 

지금은 오디오에 클레식 CD올려 놓고 나른한 휴식 중...애들 반대로 파출부 부르려던게 수포로 돌아가 원망을 제법 했더랬는데, 오늘 보니 애들 의견에 따른게 잘된거 아닌가 한다. 잠깐이나마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아빠! 아침식사 거르지 마세요"

이른 세벽 기숙사에 들어간 있는 둘째로부터의 전화입니다.

 

벌써 아빠를 챙길 정도로 저렇게 훌쩍커버렸나봅니다.

 

사무실에 출근해 언젠가 써 두었던 글을 찾아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전부터도 어른스러웠던 아이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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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에 한주, 한북정맥에 또 다른 한주,
'산과 하늘(daum cafe)'과 함께 하나의 주말을 보내고,
마지막 남은 주말마저도 서울 근교의 산을 찾으니 주위에선 산에 미쳤다고 그러더군요.

 

홀로된 외로움을 달래려 찾기 시작한 산이 어느덧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젠 평생을 곁에 머물며 지켜주고 싶은 이가 생겼는데도 말입니다.
지난 주말에 난 한북정맥을 찾았습니다. 내사랑 조이님과 함께요.
산의 초입부터 비오듯 흐르는 땀. 어느새 봄은 땀과 함께 우리 곁에 와 있었습니다.

 

산의 초입에서 만난 진달래는 꽃망울 터뜨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더군요.
아스라한 세월의 끄트머리에서 추억 한점 끄집어내어 꽃술 한입 베어물어봅니다.
아~써! 아직은 이른 봄이었습니다.

한켠에는 복수초 한송이가 낙엽을 들추며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군요. 나도 있다면서요.
그 샛노란 아름다움은 외로운 슬픔보다는 차라리 요염한 손님 맞이였습니다..

 

사방에 널린 생강나무는 노란 꽃술을 내밀며 마음껏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는 내가 여러사람을 웃길 수 있게 해준 고마운 나무였습니다.
전문가가 가르켜준지 채 십분도 되지 않아 내 입에서 자연스레 나온말은 당근나무...
당근이나 생강이나 김치에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제 연상기억법의 오차였답니다.

 

산행중 다라이(얼마나 크지 알지요?)에다 나물 그득 넣어 만든 비빔밥은
둘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그 맛이 가히 일품이었습니다.
따뜻한 봄날, 꽃 속에 둘러 쌓여,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깔깔거리며 먹는 산밥...
이런 행복이 있어 산을 오르는게 아닐까요? 전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에도 산을 찾았습니다.

 

산행 끝내고 한강 둔치에서 뒷풀이까지...
족발 풀어 해치고 산행의 안전을 위해 참았던 쐬주...그렇게 난 취해갔습니다.
저녁내내 속 풀어주느라 고생하신 조이님... 아마 조이님댁 꿀단지 다 비워버렸을 것입니다.

 

아직도 쓰린 속을 부여안고 또 산을 찾아 나서는 나... 산에서 무엇을 찾으려함일까요.
그 답은 단 하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랍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만남이 있고, 대화가 있는 산을 찾지 않을 수 없는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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