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악산(斗岳山, 723m)-덕절산(德節山, 780.2m)

 

산행일 : ‘14. 2. 23()

소재지 : 충북 단양군 단성면과 대강면의 경계

산행코스 : 단성파출소단봉사두악산뒷들재덕절산암릉가산교(산행시간 : 알바시간과 휴식시간을 뺄 경우 4시간이면 충분)

같이한 산악회 : 군자마운틴

 

특색 :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천양지차(天壤之差)인 산들이 있다. 충북 단양에 위치한 두악산과 덕절산이 바로 그런 산들이다. 두악산은 산상공원(山上公園)으로 불러도 좋을 정도로 관리가 잘되고 있는 반면에, 덕절산은 이정표 하나 없이 철저하게 버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니고 있는 산세(山勢)만큼은 두악산이 결코 덕절산을 따라오지 못한다. 소금무지의 전설(傳說)을 제외하면 밋밋한 육산(肉山=흙산)일 따름이 두악산에 비해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릉을 끼고 있는 덕절산은 스릴(thrill)과 눈요기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덕절산의 등산로들은 관리청인 월악산국립공원관리소에서 출입을 막고 있다.

 

 

산행들머리는 단성삼거리(단양군 단성면 상방리)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서 내려오면 T.G를 나서자마자 5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단양방면으로 들어가면 대강면소재지인 장림리를 거쳐 단성면 소재지인 상방리에 이르게 된다. 상방리에 있는 단성삼거리가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삼거리에서 두악산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왼편에 등산안내도와 이정표(두악산, 소금무지산)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파출소 앞을 지나 100m즘 더 올라가면 만나는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곳에도 이정표(단봉사 0.8Km, 두악산 2.2Km)가 세워져 있으니 헷갈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삼거리에서 단봉사까지는 시멘트포장 임도(林道)로 연결된다. 임도는 관광버스의 진입은 어렵겠지만 승용차는 조금만 조심하면 비켜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제법 넓다.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임도를 따라가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면 발아래에 단성면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편에는 충주호(忠州湖)가 펼쳐진다. 충주호가 생기기전 이 부근은 단양읍이었다. 충주호가 생기면서 읍()은 신단양으로 옮겨가고 이곳은 단성면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15분 가까이 되면 등산로는 임도를 벗어나 산자락으로 접어든다.(이정표 : 두악산 정상 2.2Km/ 단봉사 0.25Km/ 단성면내 0.55Km)

 

 

 

 

 

산자락으로 들어서기 전에 잠깐 단봉(丹鳳寺) 들러보기로 한다.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앉아있는 단봉사는 전체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주는 풍경이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비좁은 땅에다 대웅전과 범종루, 그리고 산신각, 요사채 등 전각(殿閣)들을 촘촘히 들어앉힌 탓일 것이다. 절집과 살림집이 나란히 있는 모습의 단봉사는 사찰(寺刹)이라기보다는 여염집의 분위기를 느끼게 만든다. 단봉사(丹鳳寺)는 천태종 소속 사찰이다. 본래 이곳에는 200여 년 전부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사찰이 6·25전쟁 때 불탄 것을 전쟁 후에 성암스님(법호 만허)이 재건했다고 한다. 비록 오래된 암자(庵子)는 아니지만, 제법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봉사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다시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 나온다. 단봉사에서 두악산 정상으로 곧장 오르는 산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요사(寮舍)채 앞마당을 가로질러 산자락 아래까지 가보았다면 산길이 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도삼거리에서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길은 임도를 벗어나서도 널따란 것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시멘트 포장이 비포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산길의 주변은 온통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군락, 발바닥을 타고 전해오는 폭신폭신한 촉감은 아마 두툼하게 깔려있는 솔가리(소나무 落葉) 덕분일 것이다.

 

 

 

산길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이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거기다가 길의 폭도 줄어들 줄을 모른다. 그야말로 소풍 수준의 산행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길가에는 의자까지 설치해 놓았다. 그만큼 이곳 단양사람들이 두악산을 아끼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런 길에서는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가로이 23분 정도를 걸으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두악산 정상 0.95Km/ 두악산 정상 1.05Km/ 단성면내 1.8Km)로 나뉜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정상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왼편은 북릉으로 해서 정상에 이르게 되고, 오른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남릉을 통해 정상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별히 가슴에 담아 두어야할 눈요깃거리도 없는 길을 일부러 돌아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갈림길을 지나면서 산길은 전형적인 오솔길로 변한다. 경사(傾斜)도 약간 더 가팔라지고 길의 폭도 좁아진 것이다. 그러다가 능선위로 올라서게 되면서 북하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이정표 : 정상 0.39Km/ 북하리 1.4Km/ 단성면내 2.36Km)를 만난다. 이곳 삼거리를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오르막구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정상을 190m 정도 남겨두고 시작되는 긴 침목(枕木)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23분 후에는 드디어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두악산 전망대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15분이 지났다. 그러나 단봉사에 다녀온 시간과 올라오면서 쉬었던 시간을 제외할 경우 55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소금무지봉 정상은 나무데크로 작은 광장(廣場)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광장을 빙 둘러서 돌담을 쌓아 성역화(聖域化)를 시켜놓고 소금단지 세 개를 묻어놓았다. 정상표지석(721.5m)은 항아리 뒤에 서있는 참나무의 두 기둥 사이에 끼어져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정상에 묻혀있는 항아리는 단양의 기운에 대한 전설(傳說)과 관련이 있다. 옛날 단양 상방리와 하방리 일원에는 꽤 많은 민가(民家)들이 있었는데, 큰 불로 인해 마을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어느 도인(道人)이 단양은 단()과 양()이 공히 불()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 화마(火魔)를 방지하려면 읍내 중앙에다 연못을 파고 남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산 정상에 항아리를 묻고 바닷물을 부으면 앞으로 화재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마을 주민들은 그의 말대로 읍내 중앙에 연못을 파고 산 정상 부위에 항아리 3개를 묻었다. 그 항아리 세 개 중 한 곳에는 물을 담고 양쪽 항아리에는 한강물(漢江水)을 가득 부었더니 그 이후로 큰 화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읍내에 있었다는 연못은 충주댐 건설 이후 수몰로 인해 그 흔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또한 소금무지봉에는 아기를 못 낳는 부인이 한강수와 소금을 갖다 붓고 기도를 드리면 득남(得男)을 한다는 전설(傳說)도 전해진다. 그 영험하다는 소문 덕분으로 항아리 속의 물과 소금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차있었을 것이다. 단성면발전협의회는 이런 전설을 계속 보전하기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 전날에 두악산 정상에서 소금무지제'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소금무지 전망대(展望臺)에서의 조망(眺望)은 매우 뛰어난 편이다. 사방이 막힘이 없이 트여있기 때문이다. 서쪽 아래로는 깊게 패어 내린 단양천 협곡(峽谷)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이고, 단양천 건너에 보이는 것은 제비봉에서 사봉을 거쳐 용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일 것이다. 첩첩이 쌓인 산릉들이 희미해서 어느 산이 어느 산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산하가 온통 희뿌연 연무(煙霧)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햇살 가득한 날이라면 월악산과 금수산은 물론이고 대간(大幹)의 마루금도 보일 듯하다.

 

 

전망대에서 아까 올라왔던 곳의 맞은편 방향(남릉)의 계단으로 내려서며 산행을 이어간다. 계단 아래에 이정표(소선암공원 2.1Km/ 단성면내 2.75Km)가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이정표를 지나면 산길은 오른편으로 휘면서 아래로 떨어진다. 소선암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러나 덕절산으로 가려면 계속해서 능선을 타야만 한다. 덕절산을 향해 맞은편 산봉우리로 오르려는데 월악산국립공원사무소에서 길을 막아 놓고, 무단출입을 할 경우에는 관련법에 의거 과태료에 처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경고판(警告板)까지 매달아 놓은 것이 보인다. 산 아래에서 보았던 등산안내도에는 이 능선을 경유해서 뒷들재까지 간 다음 대잠교나 북상리로 하산하는 등산로가 그려져 있었는데 막아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면 두악산의 정상은 올라가보지도 말라는 얘기인가? 막혀있는 지점의 위가 두악산의 진짜 정상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태료를 물을 각오를 하고 금()줄을 넘고 본다. 눈앞에 정상을 놓아두고 어찌 발길을 돌릴 수 있겠는가. 두악산 정상에는 충청북도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인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각진 정상표지석(720m)이 놓여있다. 조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것을 보면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날 것이 분명하다. 만일 날씨만 좋다면 소백산과 금수산, 도락산 등 단양을 대표하는 명산들이 사방으로 조망(眺望)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짙은 스모그(smog)는 산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의 자태까지도 흐릿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짙다.

 

 

 

 

두악산 정상에서 산길은 두 갈래(이정표 : 대잠리 2.5Km/ 소선암공원 2.3Km/ 정상 0.1Km)로 나뉜다. 덕절산으로 가려면 대잠리 방향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덕절산으로 향하는 남릉을 타고 작은 봉우리 몇 개를 넘다가 마지막 봉우리인 727봉에서 산길은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그리고 2~3분 후에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으니 독도(讀圖)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능선을 벗어나 왼편 산비탈로 떨어져야 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따라온 산악회는 이 지점을 놓쳐버리고 능선을 따라 계속해서 내려간 덕분에 25분 정도 알바를 하고야 말았다. 아마도 내려가는 길의 들머리에 매달려있는 다른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알바에 동호인산악회의 특징인 잦은 휴식시간, 그리고 오랜 점심시간 등 오늘 산행은 소요시간이 큰 의미가 없는 산행이 되어버렸다.

 

 

가파른 산비탈을 미끄러지듯이 내려오면 울창한 낙엽송 군락지(群落地)가 나오고 이어서 아름드리 나무가 반기는 뒷들재에 닿는다. 능선 갈림길에서 덕절산을 보고 내려선지 19분 정도가 지났다. 뒷들재는 옛날 하선암 방면 대잠리 주민들이 단양장을 보러 다니던 길로, 대잠리에 학교가 없었던 탓에 충주호가 생길 무렵까지 학생들이 단양(현 단성)으로 등하교하는 통학길이기도 했다.

 

 

 

 

 

뒷들재을 지나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거기다가 음지(陰地)인 탓에 눈까지 쌓여 있어서 미끄럽기 까지 하다. 그런데도 굳이 아이젠(Eisen)을 착용하지 않는 이유는 신었다 벗었다 하는 번거로움이 싫어서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벗어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행여 미끄러질까 조바심을 하며 35분을 올라서면 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물론 올라오다 중간에서 쉬었던 시간 포함이다. 동호인산악회의 특징대로 또 다시 멈춰선 그들은 막걸리로 목을 축인 다음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20분 가까이 쉬었을 것이다. 능선에 올라서서 만나게 되는 두 번째 봉우리에 서툴게 쌓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누군가가 이곳이 덕절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알기론 이곳이 지형도(地形圖) 상의 780.2m봉이기 때문이다. 이 봉우리에서 다시 멈춰선 동호인들은 술상을 곁들인 점심상을 차린다. 산행 중에는 간식으로 때우고, 하산 후에 식사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나에겐 참으로 낯선 풍경이다. 점심시간은 무려 35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780봉에서는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남서릉을 탄다. 두텁게 쌓인 참나무 낙엽(落葉)들 때문에 걷기는 비록 힘들지만 생각보다 길은 뚜렷한 편이다. 덕절산으로 향하는 능선은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계속해서 오르내려야 한다. 덕절산으로 향하는 능선의 특징은 능선이 온통 굴참나무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간혹 소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가뭄에 콩 나듯이일 정도일 뿐이다. 덕분에 조망(眺望)은 일절 터지지 않는다 

 

 

 

저 봉우리가 정상이겠기 하며 오르면, 건너편에 또 하나의 봉우리가 나타나기를 수도 없이 하다보면 드디어 덕절산 정상(780m)이다. 그러나 사실 이곳의 높이는 740m에 불과하니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잘못 잡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덕절산 정상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능선상의 그저 그렇고 그런 봉우리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거기다 능선을 가득 메운 참나무들 탓에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다. 그저 충청북도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오석(烏石)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덕절산을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나뭇가지에 의지하면서 20분 정도를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오른편에 보이는 사면(斜面) 길을 따라야 한다. 길가에 선바위가 보이니 참고하면 된다. 그러나 무작정 오른편으로 내려서지 말고 왼편으로 잠시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떨까. 전망바위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2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소백산과 도락산이 잘 조망(眺望)된다.

 

 

 

 

 

사면 길로 접어들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통과하면 산길은 왼편에 암벽(巖壁)을 끼고 크게 휜다. 이곳 휘는 지점도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아래로도 길의 흔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깜빡 길이 헷갈린 나는 그냥 아래로 내려서는 우()를 범해버리고 말았다. 한 발짝 내려딛기조차 힘든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10분 정도 진행하다가 그만 포기하고 다시 거꾸로 올라오고야 말았다. 길의 흔적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행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산행기록에서 보았던 풍경(風景)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길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위험을 감수한 모험 덕분에 괜찮은 사진을 몇 장 건지는 행운도 있었다.

 

 

 

 

 

 

다시 돌아와 암벽을 끼고 왼편으로 휘면 제법 거친 암릉이 시작된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윗길은 거친 만큼 보여주는 풍경은 일품이다. 곳곳에 자리 잡은 노송(老松)들은 주변의 바위들과 잘 어울리고, 거기에다 고사목(枯死木)까지 구색을 맞추니 진경(珍景) 산수화(山水畵)가 따로 없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인 것이다.

 

 

 

 

 

 

바윗길이 끝나면 송전탑이 나오고, 송전탑(送電塔)을 지나서도 심심하다싶으면 어김없이 바윗길이 나타난다. 제법 긴 슬랩(slab)을 서서 내려가는 모험도 해보고, 바위벽에 매달린 로프에 의지해서 내려서다보면 두 번째 송전탑을 만나게 된다.

 

 

 

산행날머리는 가산교()

두 번째 송전탑을 지나면서 산길을 유순해진다. 소나무 숲 아래로 난 보드라운 흙길을 따라 6분 정도 내려가면 대강면 직티리와 단성면 가산리를 잇는 군도(郡道)에 내려서게 된다. 날머리에 내려서면 아까 두악산에서 보았던 출입금지 경고판이 다시 보인다. 산세(山勢)만 놓고 볼 때에 두악산보다 차라리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덕절산을 아예 통째로 막아놓고 있는 것이다. 도로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단양천을 가로지르는 가산교를 건너면 가산리이다. 가산리는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류산(御留山 490m)-마니산(摩尼山, 639.8m)-노고산(老高山, 429m)

 

산행일 : ‘14. 2. 9()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심천면, 양산면 그리고 옥천군 이원면의 경계

산행코스 : 태조마을임도어류산546사자머리봉마니산480노고산죽산마을(산행시간 : 5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어류산과 마니산, 그리고 노고산에 대한 첫 느낌은 한마디로 버려졌다는 것이다. 마니산 외에는 정상표지석 조차 보이지 않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산이니 등산로 정비가 안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바위로 이루어진 산세(山勢)는 의외로 수준급이다. 만일 천태산 등 명산(名山)들로 넘쳐나는 지역(영동군)만 아니었다면 귀한 대접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에 이골이 난 산꾼들이 아니라면 어류산과 노고산은 권하고 싶지 않다. 바윗길이 너무 거칠고, 산길 또한 아마추어들이 찾기에는 그 흔적이 너무 희미하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기호리 태소마을(영동군 심천면)

대전-충무고속도로 금산 I.C에서 내려와 영동방면으로 달리면 송호국민관광단지를 지나 외마포삼거리(영동군 양강면 묵정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잠시 후에 심천면 명천리에 있는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호교(: 심천면 기호리 665)를 건너면 기호리이다. 금호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금강을 따라 내려가면 산행들머리인 태소마을에 이르게 된다. 도로변에 커다란 자연석으로 만든 태소(太沼)마을표지석과 마을의 유래가 적혀있는 빗돌이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을 표지석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어서자마자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보호수(保護樹 : 영동 7-5, 51)로 지정된 떡갈나무, 이곳 주민들이 나뭇잎의 많고 적음을 보고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쳤다는 전설(傳說)을 갖고 있는 나무라고 한다. 들어가는 길에 보면 전면에 어류산이 보무도 당당하게 서있다. 어류산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유명세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산은 험한 모습, 성채(城砦)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절벽은 인간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할 것 같지가 않다.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라 5분쯤 들어가면 차단기(遮斷機)가 길을 막고 있다. 차량의 통행을 막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국유림(國有林)인 모양이다. 차단기를 넘어 5분쯤 더 올라가면 산길이 오른편으로 열린다. 그러나 산길의 흔적은 또렷하지가 않다. 그 흔한 산악회의 시그널(signal)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저 어류산 정상이 있는 방향을 눈대중으로 삼으면서 무작정 올라갈 수밖에 없다.

 

 

 

초입부터 이를 데 없이 가파르던 산길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누그러질 줄을 모른다. 거기다가 길의 흔적까지 사라진 산길은 온통 잡목(雜木)과 가시넝쿨(명감나무) 천지이다. ‘에이~ ××’ 육두문자(肉頭文字)가 절로 튀어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산길이 거친 것이다. 긁히고, 찔리고, 싸대기를 얻어맞는 것으로도 부족했던지 낮게 깔린 나뭇가지들은 아래로 지나가는 것까지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예 납작 엎드려야만 겨우 길을 열어주는 정도이다. 그래 오늘은 예절교육까지 받아야 하는 날인가 보다.

 

 

 

거친 산길을 오르느라 입에서 단내가 날 즈음이면 능선에 닿으면서 오른편이 열린다. 오른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까 태소마을에서 출발할 때 위풍당당하게 보이던 바위절벽(絶壁)의 위로 올라선 것이다. 바윗길을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그에 따른 보상은 넉넉한 편이다.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는 대신에 시야(視野)가 열리는 것이다. 바위벼랑 아래에 산행을 시작했던 태소마을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그 뒤에는 금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능선에 날카롭게 선 바위들을 잡고 오르거나,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바위들은 우회(迂廻)하면서 능선을 치고 오르면 어느덧 어류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50분이 지났다. 어류산 정상은 어렵게 올라선 보람도 없이 보잘 것이 없다. 정상임을 알려주는 정상표지석도, 그렇다고 쉬었다갈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위벼랑 끄트머리에 위치한 덕분에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아찔한 고도감(高度感)이 느껴지는 벼랑 끝을 딛고 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산하(山河)는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황홀하기 그지없다. 속리산과 민주지산, 덕유산을 잇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산릉이 헌걸차고, 가까이로는 백화산과 월이산 등이 눈앞에서 출렁이고 있다. 물론 발아래에서는 금강의 물줄기가 유유히 흘러간다.

 

 

 

 

마니산으로 가는 길은 정상 근처에서 왼편으로 열린다. 내려가는 길은 아찔할 정도로 경사(傾斜)가 가파른 내리막길,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모두들 아이젠(Eisen)을 착용하고 있다. 다들 긴장된 표정들이다. 그만큼 산비탈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산길은 곧장 아래로 내려서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자를 그리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스틱과 산길 주변의 나무들에 의지해서 18분 정도를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능선 안부에 이르게 된다. 안부에서부터는 임도(林道)로 보이는 산길을 따라 걷게 된다. 구태여 임도로 보인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길에 잡목(雜木)들이 가득한 탓에 임도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정비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임도는 고맙게도 산봉우리 하나(441?)를 오른편으로 우회(迂廻)하더니, 15분 후에는 임도를 벗어나 능선으로 연결된다.

 

 

능선으로 들어서면 산길은 다시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비록 아까 올랐던 어류산만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쉽지는 않다. 그 기세(氣勢)를 약간 누그러뜨렸을 뿐 가파르기는 매 한가지인 것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듯이 20분 정도를 치고 오르니 사자머리봉이라고 쓰여 있는 종이 한 장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흩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선두대장인 이상혁선생이 붙여 놓은 모양이다. 그러나 사자머리봉은 이곳(546)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 하나는 다음에 오르게 될 능선의 전망대이고, 다른 하나는 전망대에서 조금 더 나간 지점에 있다. 세 번째 지점에는 서래야 박건석선생이 만든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가 매달려 있다.

 

 

 

 

546봉에서 15분 정도를 가파르게 내려서면 안부에서 왼편으로 희미한 갈림길 하나가 나뉜다. 이정표는 없지만 아마 중심이마을로 내려가는 길일 것이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 바라본 546, ‘사자머리를 닮았네요.’ 누군가가 감탄하지만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으니 문제다. ‘부처의 눈에는 모든 게 부처로 보인다.’라는 무학대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안부에서 다시 맞은편 능선으로 가파르게 치고 오르면 거대한 바위벽이 앞을 막는다. 바위벽을 왼편으로 우회(迂廻)하여 오르면 그다지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는 슬랩(slab)이 길손을 맞는다. 구태여 엎드릴 필요도 없이 슬랩을 통과하면 바위전망대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사자머리봉이라고 불리는 봉우리 중의 하나인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곳을 사자머리봉으로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바위로 이루어진 생김새가 사자머리에 가장 가깝게 보였기 때문이다. 안부에서 이곳까지는 25분 정도가 걸렸다.

 

 

 

 

전망대에서 다시 마니산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3분쯤 걸었을까 길가 나뭇가지에 코팅(coating)지 하나가 매달려있는 것이 보인다. ‘사자머리봉 562m’, 만드느라 고생하신 서래야 박건석선생의 노고에는 감사를 드리지만, 봉우리의 위치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고유(固有)의 이름을 갖기에는 너무나 밋밋하고 평범한 봉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마니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면 산길은 다시 내리막길로 변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깊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내려서기에 딱 좋을 정도로 완만(緩慢)한 길을 얼마간 내려오면 산악회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안부에 이르게 된다. 중심이재일 것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하산하면 중심이 마을로 이어지는 계곡길이고 오른편으로 하산하면 평계리 평촌마을이다.

 

 

 

중심이재에서 다시 한 번 짧게 치고 오르면 너럭바위인 마당바위를 만나게 된다. 향로봉의 모습을 가장 멋지게 마주할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 어류산과 마니산 사이에 우뚝 선 향로봉의 위용은 단연 압권(壓卷)이다. 거의 100m가 넘는 수직 바위봉으로 이루어진 향로봉(520m)은 오늘 산행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일 것이다. 마당바위에서 그다지 험하지 않은 슬랩을 치고 오르면 또 다시 향로봉의 전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마당바위에서 마니산으로 향하는 능선은 오르내림이 거의 없이 이어진다. 중심이재를 출발해서 30분 조금 넘게 지나면 낮은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마니산성(山城)터이다. 성곽(城郭)은 아이들이 돌팔매질 할 때 몸을 숨기기 딱 좋을 만큼의 높이다. 그만큼 낮다는 이야기이다.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쫓기던 공민왕은 옥천까지 내려와서 왕가권속들은 영국사에 머물게 하고 자기는 마니산성에서 독전(督戰)하였다고 한다. 그때 쌓은 성이 마니산성이다. 이렇게 험하고 깊은 산이라면 설사 왕이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왕을 잡겠다고 일부러 올라올 적군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성곽을 높이 쌓아올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마니산에서 영국사로 넘어가는 길에는 누교리란 지명이 있는데 이는 공민왕이 영국사를 왕래할 때 우피(牛皮 : 소가죽)을 이어매어 놓은 소가죽다리를 이용하여 왕래하였다 하여 생긴 지명(地名)이라 한다. 또한 영국사는 나라의 안녕과 전란(戰亂)이 하루빨리 평정되기를 밤낮없이 빌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성터를 지나면서 눈꽃잔치가 시작된다. 더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상고대(霧氷 : rime)잔치이다. 상고대란 안개 등의 미세한 물방울들이 영하(零下)의 기온으로 인해 나뭇가지 등에 얼어붙은 현상을 말한다. 당연히 고산지대(高山地帶)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눈요깃감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미세한 얼음조각들은 가히 환상 그 자체이다.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묵묵히 발걸음만 옮기던 일행이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다며 핸드폰을 건네면서 하는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주변은 온통 황홀한 아름다움만 가득하다. 하긴 이런 곳에 어찌 부정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상고대잔치에 심신을 내맡기며 걷다보면 어느덧 마니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10평 정도의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충청북도 특유의 검고 각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놓여있다.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잡목(雜木)들로 인해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이곳 마니산은 조금 전에 지나온 어류산과는 다른 모양이다. 어류산은 사람의 발자국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꽤 많은 등산객들이 꾸역꾸역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시끌벅적함이 싫어져 정상에서 머무는 것을 포기하고 노고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참고로 마니산(640m)의 전체적인 지형은 한 마리의 문어가 금강을 향해 발을 뻗친 모양이라 한다.

 

 

 

노고산으로 향하는 산길이 오늘의 하이라이트(highlight)이다. 바윗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길은 바위와 바위 사이를 오가며 이어지고, 길게 매달린 로프를 잡고 슬랩을 내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마디로 스릴이 넘치는 코스라는 이야기이다.

 

 

 

 

 

바윗길이 끝나면 산길은 다시 숨을 죽인다. 그리고 건너편에 480봉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저게 노고산일까요?’ 같이 걷고 있는 일행의 질문에서 이제 그만 산행을 끝마쳤으면 하는 마음이 저절로 묻어나오고 있다. 그만큼 오늘 산행이 길면서도 험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능선안부에 가까워지자 왼편에 갈림길 하나가 얼핏 보인다. 역시 중심이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정상에서 33분이 지난 지점이다. 갈림길에서 3분 정도 더 걸으면 능선안부, 그러나 이곳에서는 갈림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안부에서 다시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경사(傾斜)는 그다지 심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수월하지는 않다. 경사가 약한 대신에 바위들이 나타나면서 길이 사나워진 것이다. 능선에 박혀있는 거친 바위들만 장애물(障碍物)이 아니다. 능선에 가득한 잡목(雜木)들이나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얽히고설킨 가시덤불 또한 피하고 싶은 장애물이다.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차라리 전쟁(戰爭)과 같다. 그렇게 22분 정도 악전고투(惡戰苦鬪)를 치르다보면 480봉에 올라서게 된다. 480봉 정상에서 다시 한 번 조망이 터진다. 동쪽에는 시루봉과 어류산, 그리고 남쪽에는 민주지산 등 백두대간이 거대한 장막을 치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천태산과 갈기산, 물론 북쪽에는 월이산과 서대산이 보인다. 물론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은 보너스다. 한마디로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480봉에서 능선은 오른편으로 휜다. ‘거기가 노고산인가요?’ 함께 걷던 일행이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외친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노고산은 왼편에 보이는 다른 산봉우리인 것이다. 480봉에서 오른편으로 휜 산줄기는 앞의 봉우리에서 왼편으로 급하게 휘면서 내리막길을 만든다. 내리막길은 다행이도 경사(傾斜)가 가파르지 않다. 자기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늘어진 소나무 숲을 지나면 너른 공터, 아마 묘역(墓域)을 조성하려고 벌목(伐木)을 한 모양이다. 이어서 능선안부에 이르게 된다. 480봉에서 25분이 걸리는 지점이다.

 

 

 

안부에서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능선을 치고 오르면 노고산이다. 노고산 정상은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상 주위에 옛날 할머니들이 앞치마로 날라 쌓았다는 작고도 초라한 노고산성(老姑山城)의 흔적만이 눈에 띌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서툴게 쌓아올린 작은 돌탑이 하나 보인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하나하나 올려놓고 간 결과일 것이다. 다행이도 나무기둥에 노고산 429m’라고 쓰인 코팅지가 하나 매달려있다. 선두대장인 이상혁선생이 만들어 붙여 놓은 모양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만일 코팅지만 아니었더라면 자칫 정상 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번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480봉에서 40, 안부에서는 15분이 걸렸다.

 

 

 

 

하산은 왼편 능선을 타고 내려선다. 잠시 능선을 따라가다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산길이 갑자기 험해진다. 언뜻 보면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산비탈은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때문에 산길은 곧장 아래로 향하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낮추어 간다. 눈과 낙엽, 그리고 급경사(急傾斜), 이런 길에서 엉덩방아는 필수이다. 한 손은 스틱,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길가 나뭇가지에 의지하면서 미끄러지듯 내려서는 고된 실랑이는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산행날머리는 죽산마을쏟아질 듯 깊이 떨어진 뒤에야 산길은 제 모습을 찾아간다.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을 지나 물기 하나 없는 작은 계곡을 건넌 후, 맞은편 산릉을 하나 더 넘으면 잘 꾸민 묘역(墓域)이 나타난다. ‘밀양 박씨들의 선산(先山)이다. 문외한(門外漢)이 보아도 명당(明堂) 같네요.’ 함께 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이 하는 말마따나, 전면이 시원스럽게 열리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명당으로 보일 정도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묘지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는 침목(枕木)계단까지 길게 놓여있다. 자손들이 잘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계단을 내려선 후, 농로(農路)를 따라 잠시 더 걸으면 이내 죽산마을회관 앞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노고산 정상에서 35분이 걸렸다.

 

 

 

금단산(金丹山, 768.2m) - 덕가산(德加山, 693m)

 

산행일 : ‘14. 1. 26()

소재지 : 충북 보은군 산외면과 괴산군 청천면, 청원군 미원면의 경계

산행코스 : 싸리재주봉체메기고개신선봉금단산임도덕가산급경사능선사담교(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금단산과 덕가산, 그리고 주봉과 신선봉은 산이 위치한 곳을 떠올릴 경우에는 바위산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조령산과 낙영산, 도명산, 속리산 등 근처의 산들이 하나같이 남성미(男性美)가 물씬 넘치는 근육질의 바위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4개 산 모두 전형적인 흙산(肉山)들이다. 덕분에 금단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하나도 없다. 때문에 금단산을 제외하고는 구태여 오를 필요가 없는 산들이다. 특별히 오지(奧地)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금단산을 제외한 다른 산들은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하나 없이 방치된 채로 버려져 있다.

 

 

산행들머리는 싸리재(보은군 산외면과 청원군 미원면의 경계인 고갯마루)

청원-상주고속도로 보은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괴산(보은) 방면으로 달리다가 봉계1교차로(交叉路 : 보은읍 학림리)에서 575번 지방도로 옮겨 산외면방향으로 들어가면 원평삼거리(산외면 탁주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청천면 방향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 들머리인 원평교()에 이르게 된다. 원평교를 건너서 조금 더 올라가면 청원군 미원면(계원리)과 보은군 산외면(원평리)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산행들머리인 싸리재이다.

 

 

 

산행들머리는 고갯마루에서 보은군 방향으로 50m정도 떨어진 곳에서 오른편으로 열린다.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林道)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산비탈을 치고 오르면서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산길은 시작부터 사람의 기()를 죽여 놓고 본다. 산으로 들어서자마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쉽게 누그러지지 않던 산길이 산행을 시작한지 10분을 조금 넘기면서 갑자기 그 기세(氣勢)를 뚝 떨어뜨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산길은 다시 가파름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그렇게 능선 상에 있는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서 정상을 향해 고도(高度)를 높여가는 것이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벌목(伐木)을 한 모양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또 다른 능선이 주봉의 정상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혹시 계획대로 원평교에서 산행을 시작했더라면 저 능선을 따라 올라왔을지도 모르겠다. 산행을 시작한지 40분 정도가 되면 주봉의 정상에 도착한다.

 

 

 

아무런 특징(特徵)도 보여주지 못하는 주봉의 정상에는 정상표지석 대신에 판자(板子)로 만든 정상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 어제 주마산에서도 만났던 것이 인연으로 작용했던지 부쩍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지(奧地)의 산에 오를 때마다 자주 접하게 되는 대구 신암산악회의 김문암씨가 직접 판각(板刻)한 작품인 것이다. 주봉 정상에서는 머무름을 사양하고 그냥 발걸음을 옮긴다.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는 곳에서 더 이상 머물러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주봉에서 신선봉으로 향하는 능선은 끝없는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내리막길은 경사(傾斜)가 가파르기까지 하다. 다음에 올라야할 신선봉(644m)이 조금 전에 올랐던 주봉(583m)보다 더 높은데도 자꾸만 고도(高度)를 떨어뜨리고 있는 능선이 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능선은 계속해서 가파르게 고도를 낮춘다. 다시 올라가야할 높이가 자꾸만 늘어나는 것이다.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혹시 내가 이념(理念)의 현장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능선을 기준으로 왼편 사면(斜面)은 온통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들이 독차지하고 있고, 오른편 사면은 참나무들의 세상인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내리막길이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며 30분 정도를 내려서면 드디어 능선안부를 가로지르는 임도(林道)에 내려서게 된다. 체메기고개이다. 고갯마루의 오른편 숲속에 숨어있는 작은 마을은 보은군의 대표적 오지(奧地)마을 중의 하나인 체메기 마을이다. 아까 내려오는 길에 보았던 철망(鐵網)으로 된 담장과 철망에 걸려있던 임산물 체취 금지경고(警告) 플래카드(placard)는 저 마을 사람들이 설치해 놓았던 모양이다.

 

 

 

체메기고개를 가로질러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서 신선봉으로 향한다. 산길은 초입부터 가파르게 시작된다.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힘들게 가파른 능선을 치고 오르면 잣나무 숲이 나타난다.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길의 흔적이 희미하기 때문에 눈어림만으로 진행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잣나무 숲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치고 올라야 한다. 진행방향에 자작나무를 닮은 나무숲이 보이니 참조하면 된다.

 

 

 

체메기고개에서 35분 정도를 힘겹게 오르면 드디어 신선봉 정상이다. 신선봉 정상도 역시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는 제공하지는 못한다. 밋밋한 흙봉우리인데다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에는 아까의 주봉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구의 김문암씨가 제작한 정상표지판이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구태여 주봉과 다른 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이곳에는 신선봉길(1.47Km)을 걷을 때 소모되는 칼로리를 적어 놓은 안내판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남녀별, 체중별로 구분해 놓은 안내판에 따르면 난 370KCal가 소모될 모양이다. 신선봉 정상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금단산으로 가는 길이 그 하나이고, 두 번째는 주봉에서 이곳으로 왔던 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미원면과 청천면의 경계를 가르는 산줄기이다. 참고로 이곳 신선봉은 최치원 선생이 잠시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선봉에서 금단산으로 향하는 길은 급경사(急傾斜) 내리막길로 시작된다. 오늘 산행에서 경사가 가장 가파른 구간일 것이다. 때문에 오늘 산행에서 유일하게 안전로프가 매달려 있다.

 

 

 

신선봉에서 일단 고도(高度)를 낮춘 다음에는 큰 어려움 없이 산행을 즐길 수가 있다. 비록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경사(傾斜)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짧게 내려섰다 길게 오르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육산(肉山)임에도 불구하고 능선에는 가끔 바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절편(切片)이 진 암석(巖石)들이다.

 

 

신선봉에서 내려서서 676, 711봉 등 능선상의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며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가다보면 50분 후에는 금단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 상에 날카롭게 솟아오른 흙봉우리인 금단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인산불감시탑이다. 가장 높은 곳에 감시탑이 세워져 있는 탓이다. 감시탑 옆에는 삼각점(속리26/1982재설)이 심어져 있다. 그러나 윤기가 도는 오석(烏石)의 정상표지석은 감시탑 아래에 있는 헬기장의 끄트머리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다.

 

 

 

 

 

금단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일망무제(一望無題)이다. 사방으로 시야(視野)를 가로막을 만한 장애물이 일절 없기 때문이다. 역시 산이 많은 곳답게 사방으로 수많은 산봉(山峰)들이 파노라마(panorama)를 연출하고 있다. 조봉에서 낙영산을 거쳐 가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수려하고, 도명산과 군자산, 백악산 등 주위를 감싸고 있는 암봉들이 더할 나위 없이 정겹게 다가온다.

 

 

 

 

덕가산으로 가는 길은 감시탑 뒤에 있는 삼각점 근처에서 열린다. 삼각점 근처에 ‘C코스라고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덕가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길손을 맞는다. 안전시설이 없는 내리막길을 10분 정도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임도사거리이다. 이곳에서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이정표(신월리 4.9km/ 상신리 4km/ 활목고개 2.8km)를 만나게 된다. 임도(林道)는 사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정표는 세 곳의 방향만 표시하고 있다. 금단산 방향표시판은 떨어져 나간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가려고하는 덕가산은 보이지 않고, 대신 덕가산 위치한 방향에 상신리라고 쓰인 표시판이 붙어있다. 아마 덕가산을 거쳐 상신리까지 가는 거리인 모양이다.

 

 

 

 

 

임도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20분 남짓 치고 오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게 731봉이다. 먼 길을 걸어왔을 사람들을 배려해서인지 고맙게도 산길은 731봉의 정상을 오르지 않고 왼편 사면(斜面)으로 우회(迂廻)를 시키고 있다. 이어서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은 듯한 헬기장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임도에서 35분 정도 되는 지점이다. 하산지점인 사담교로 가려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덕가산을 답사한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갈림길에서 짧게 떨어졌다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능선을 다시 치고 오르면 덕가산 정상이다. 덕가산 정상도 아무런 볼 것이 없다. 그저 밋밋하게 솟아오른 산등성이에 불과할 따름인 것이다. 조망(眺望)까지도 트이지 않으니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다. 아까 신선봉과 주봉에서 보았던 김문암씨가 붙여 놓은 정상표지판만 카메라에 담고 발걸음을 돌린다. 갈림길에서 정상까지 왕복하는 데는 15분 정도가 걸렸다. 참고로 덕가산은 솟굼산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와 사담리 방향으로 내려선다. 처음에는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던 산길이 20분쯤 지난 지점에서 왼편으로 갈림길 하나를 분가시키더니 갑자기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노송(老松)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지역만 해도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노송군락을 지나면 바윗길이 시작되는데 내려서기가 여간 사나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경사(傾斜)가 보통이 아닌데다가 작은 절편(切片)들로 이루어진 바위 위에 두텁게 쌓인 떡갈나무 잎들로 인해 엄청나게 미끄럽기까지 한 것이다. 최소한 서너 번의 엉덩방아를 찧지 않고는 결코 내려올 수 없는 구간이다.

 

 

 

 

산행날머리는 사담교(沙潭橋 : 사담리 공림사 입구)

바윗길 비탈능선은 지루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어진다. 능선의 양 옆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볼 수도 없으니 그저 묵묵히 능선을 따라 내려설 따름이다. 그러다가 신월천() 가에 내려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길이 끊어져 버리는 것이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래도 바윗길이 시작되기 전에 오른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는 산행이 종료되는 사담교 근처에서 확인되었다. 오른편에 덕가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코스를 잘못 잡은 덕분에 능선을 내려와서도 신월천을 1Km이상 거슬러 올라와야만 사담교에 이르게 된다. 덕가산 갈림길에서 사담교까지는 1시간10분 정도가 걸렸다. 산행이 종료되는 사담(沙潭)마을엔 마을 이름에 얽힌 전설(傳說)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사담마을의 이름에 모래 사()자와 연못 담()자가 들어가 있지만 사실 이 마을에는 모래나 연못이 없다고 한다. 이는 마을을 마주보고 있는 낙영산이, 마치 용()이 마을을 공격할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라서, 공림사 입구에 두꺼비 바위를 만들어 먹이를 마련해 주고 그래도 못 믿기어서 뱀()이 싫어하는 모래와 연못을 마을 이름에 넣었다는 것이다.

 

 

 

겸암산(謙菴山, 865m)

 

산행코스 : 구인사주차장구인사구봉팔문전망대보발재봉수대터겸암산온달산성온달관광지(산행시간 : 4시간10)

소재지 :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가곡면의 경계

산행일 : ‘14. 1. 19()

같이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색 : 오늘 찾은 겸암산은 산세(山勢)는 크게 볼만한 것이 없다. 산이 높지도, 그렇다고 깊지도 않으니 특별한 볼거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 이곳에는 온달산성이 있다. 온달산성은 우리가 깊이 배워야할 많은 것들을 알려주는 역사(歷史)의 현장이다. 먼저 온달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충()이 그 첫째이며 온달이 그의 어머니에게 행한 효()가 그 둘째, 그리고 바보 온달의 성공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바친 평강공주가 내조(內助)가 그 셋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온달이 명장으로 변하기 위한 자기혁신(自己革新) 등 어찌 그 수를 손으로 꼽을 수 있겠는가. 그보다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가 이곳 전투에서 패했다는 점이다. 만일 그가 승리(勝利)했고 그 승리가 계속되었더라면, 어쩌면 우리의 영토(領土)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넓었을 것이다. 최소한 요동반도까지는 미치고 있지 않을까? 자라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한번쯤은 들러 뭔가 하나쯤은 배워갔으면 좋겠다.

 

산행들머리는 구인사(救仁寺)주차장

중앙고속도로 단양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 단양·제천방면으로 달리다가 단양삼거리(단양읍 상진리)에서 우회전하여 59번 국도 영월방면으로 바꿔 달리면 향산삼거리(가곡면 향산리)에 이르게 된다. 삼거리에 향산쉼터휴게소가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향산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95번 지방도로 옮겨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발고개에 올라서게 되고, 구렁이가 똬리를 틀듯이 구불대고 있는 고갯길을 내려가면 한국불교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인 구인사(救仁寺 : 영춘면 백자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서 내려 **)구인사(救仁寺)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一柱門) 조금 못미처에 있는 공용터미널까지 셔틀버스가 다니지만 구인사 신도들만 무료탑승(無料搭乘)이 가능하단다. 버스기사에게 부탁을 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용할 수야 있겠지만 그냥 절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본다. 일주문까지는 800m,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구인사(救仁寺)는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總本山)이다. 1945년 천태종의 중흥시조라는 상월원각(上月圓覺)스님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사찰이 자리 잡은 곳은 구봉팔문(九峰八門)의 연화지(蓮華地)로서 풍수설에서 말하는 이른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가히 하나의 종파가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뒤 천태종의 교세(敎勢)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구인사도 대가람(大伽藍)으로 발전하였다. 이 절에는 5층 높이에 900평 넓이의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법당, 135평의 목조강당인 광명당(光明堂), 400평의 3층으로 된 총무원 건물과 30칸의 수도실인 판도암(辦道庵), 특별선원인 설선당(說禪堂) 등이 있으며, 불사(佛舍)와 침식용인 향적당(香寂堂) 등 편의시설까지 50여 채의 건물이 있다. 또 사천왕문에는 국내 최대의 청동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 천태종단은 염불(念佛) 중심의 의례종교를 탈피하고, 생활 속에 자비를 실현하는 생활·실천 불교를 지향하며, 주경야선(晝耕夜禪)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참고로 천태종(天台宗)594년 중국의 지자대사가 불교의 선()과 교()를 합하여 만든 종파로 지자대사가 머물던 천태산에서 이름을 따 천태종이라 부른다. 고려 숙종 2년에 대각국사 의천스님에 의해 우리나라의 천태종 역사가 시작되었다.

 

 

 

협곡(峽谷)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15분이면 일주문(一柱門)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건물이 천왕문(天王門)이다. 그런데 천왕상(天王像)은 보이지 않는다.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청동 사천왕상은 이층에다 안치해 놓은 모양이다. 확인해보는 것까지는 생략하고 곧장 발걸음을 옮긴다. 천왕문을 지나면 구인사의 안마당에 들어선 샘이 된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각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많은 전각(殿閣)들이 하나 같이 고층(高層)들이다. 일반적으로 사찰(寺刹)들은 대부분 너른 터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구인사에는 평평한 곳이 없다. 절이 좁다란 협곡에 위치하고 있는 탓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들을 위로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보이는 육중한 5층 건물이 인광당이다. 승려와 신도 교육을 위한 시설이 모인 건물이다. 이어 종무소와 우체국 등이 자리한 장문당실을 지나면 5층 건물인 대법당에 이른다. 국내 최대 규모의 법당이란다. 대법당이 자리 잡은 곳은 상월원각 스님이 1946년 구봉팔문 연화지에 세운 삼간짜리 초암(草庵)이 있던 자리이다. 초가(草家)가 이런 대가람으로 변모했으니, 구인사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법당을 지나면 장독이 늘어선 관음전을 지나 향적당에 닿는다. 여러 좋은 향기가 모였다는 뜻의 향적당은 사찰의 부엌이다. 향적당부터 시작한 긴 계단길이 끝나는 지점에 6층 규모 광명전이 버티고 있다.

 

 

 

 

광명전 건물을 오른쪽으로 비켜 오르면 상월원각 스님을 모신 대조사전(大祖師殿)이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27m 높이에 3층 구조의 목조 건물인 대조사전은 구인사에서 가장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십이지신상이 늘어선 널따란 광장 앞에서면 누구나 한번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것이다. 보통의 절집들은 가장 좋은 터에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앉히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 구인사에는 가장 좋은 터에 대조사전을 앉히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시 구인사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상월원각(上月圓覺)스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여간 구인사에는 대웅보전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대조사전 오른쪽 솔숲으로 이어진 오솔길이 적멸궁(寂滅宮)으로 가는 길이다. 들머리에 있는 나무지팡이들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기를 죽이지만 막상 들어서고 나면 그다지 힘이 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비록 시멘트 계단길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솔숲이 보내주는 상큼한 공기가 가슴속까지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탓에 힘들다는 생각이 들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가끔은 호젓한 옛길까지 군데군데 끼어있어 걷는 맛이 그런대로 괜찮다. 지그재그로 된 계단을 20분쯤 오르면 적멸궁(寂滅宮)에 닿는다. 천태종 신자들의 주요한 참배 대상인 곳이다. 사찰에서 궁()이란 보통 도량(道場)을 일컫는데, 구인사의 적멸궁에는 전각(殿閣)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묘() 하나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의 창시자이자 1대 종정(宗正)상월원각(上月圓覺)스님(19111974)’의 묘란다. 삼척에서 태어난 그(속명 : 朴準東)는 중국과 서장(西藏)의 불교성지들을 순례한 뒤 귀국하여 1946년 정월에 소백산의 연화지(蓮華地)에 초암(草庵)을 짓고 정진하였다. 후에 그를 따르는 신도가 수만 명에 이르게 되자 회삼귀일(會三歸一), 원융삼제(圓融三諦)로써 국토통일의 이념을 삼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법화교지(法華敎旨)로써 생활불교의 지표로 삼아, 1967124일에 천태종을 창종(創宗)하였다. 1974죽고 사는 것이 본래 공적(空寂)’이라는 임종계(臨終偈)를 남기고 64세로 입적(入寂)하자 불교의 전통예식인 다비(茶毘)를 행하지 않고 구인사의 주봉인 이곳(수리봉)에 봉분을 만들어 안장한 것이다. 상월선사는 생전에 화장을 원치 않는다며 미리 이 묘 자리를 잡아놓았다고 한다.

 

 

 

 

적멸궁 바로 뒤편에 전망대(展望臺) 하나가 있다. 바로 구봉팔문(九峰八門)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곳이다. 구봉팔문이란 봉우리 9개와 그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 8개를 법문에 비유해 부르는 이름이다. 소백산 국망봉이 북서쪽으로 뻗어내려 남한강을 만나기 직전, 봉우리 9개를 부챗살처럼 펼쳐놓는다. 신기한 것은 노적가리처럼 솟은 아홉 봉우리가 모두 비슷하게 생겼고, 특히 5봉인 덕평문봉을 중심으로 정확하게 한자의 팔() 자 모형을 이룬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교에 입문한 한 불제자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쓴 곳이라 한다. 여기서 유래해 법월팔문(法月八門)으로도 부른다. 후세에 이 법문을 넘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 스님이라고 한다. 참고로 구인사는 4봉 뒤시랭이문봉과 5봉 덕평문봉 사이 연화지(蓮華地)에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하게는 뒤시랭이문봉 앞의 영주봉(수리봉)이 두 팔 벌려 구인사가 선 협곡을 감싸 안은 형국이란다.

 

 

 

전망대에서 구봉팔문을 가슴에 품은 뒤에는 다시 적멸궁으로 돌아 나와야한다. 보발재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적멸궁 입구에서 갈리기 때문이다. 적멸궁에서의 하산은 다시 계단으로 시작된다. 다만 아까 올라올 때와 다른 점은 아까는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비해 이번에는 침목(枕木)계단으로 된 점이 다를 뿐이다. 계단은 이리저리 오고감을 반복하면서 고도(高度)를 낮추어간다. 한꺼번에 고도를 낮출 수가 없음이 이유일 것이다.

 

 

 

적멸궁에서 4분쯤 내려오면 장의자까지 갖춘 안부 쉼터(이정표 :구인사/ 화장실; 적멸궁)에 이르게 된다. 이정표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 이곳은 사거리이다. 이곳에서 보발재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임도(林道)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고, 능선을 따라 맞은편 산봉우리를 넘는 방법이 다른 하나이다. 아까 적멸궁으로 오를 때에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친절하게 산길을 알려 주시던 곱상하게 생긴 보살님의 안내를 무시하고 능선으로 향한다. 명색이 주말마다 산을 찾을 정도로 산에 이골이 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정도 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면 임도를 걷는 것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내 마음을 헤아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맞은편 산봉우리(655)에서는 시계(視界)가 시원스럽게 열린다. 구인사 뒤편의 구봉팔문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655봉에서의 하산길은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내리막길이 생각보다 가파르지만 안전시설이 전혀 없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면 모르겠지만 눈이라도 쌓여 있을 경우에는 아이젠(Eisen)이 꼭 필요한 구간이다. 655봉에서 15분 가까이 내려왔을까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이색적(異色的)인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네를 타고 있는 아낙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치마저고리의 격식을 갖춘 한복(韓服)을 있었더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겠지만, 등산복을 입은 모습도 괜찮은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마 오랜만에 보는 동양화(東洋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네가 있는 곳에서 보발(寶發)고개는 2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능선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5분 이상 걸린다. 산길이 산비탈(斜面)을 따라 옆으로 길게 우회(迂廻)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발고개는 해발(海拔)540m, 비록 1m 내외의 두문동재나 화방재 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해발이 꽤 높은 샘이다. 이곳이 강원도 같이 깊은 산골이 아닌 것을 감안할 때 말이다. 오늘 올라야할 겸암산의 높이는 865m, 300m남짓만 오르면 되니 오늘은 공짜산행을 하게 되는 샘이다. 보발재로 오르기 전에 꼭 들러야할 곳이 하나 있다. 구인사 방향에 있는 전망대(展望臺)이다. 이곳에 가면 전형적인 고갯길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이 한없이 구불대고 있는 고갯길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정확히 1시간30분이 지났다.

 

 

 

 

보발재에서 산길은 이정표(온달관광지 5.0Km) 뒤로 열린다.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낯선 빗돌(碑石)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보발재를 지나가는 도로 준공에 대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한다. 당시 이 길은 3관구의 군인(軍人)들이 닦았던 모양이고, 그 책임자(사령관)김종구장군이었던 모양이다.

 

 

 

공덕비에서부터 급하기 시작된 가파른 오르막길은 200m쯤 후에 잠깐 완만(緩慢)해졌다가 다시 급경사(急傾斜)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서 봉수대(烽燧臺)터를 만나게 된다. 보발재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봉수대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후기(後記)가 아니라면 설마 이곳이 봉수대가 있었던 곳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다. 그저 자그만 돌들이 둥그렇게 놓여 있을 따름이다.

 

 

 

봉수대를 지나면서 길은 순해진다. 부드러운 흙길에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능선길이 계속되는 것이다. 봉수대에서 잠깐 떨어졌다가 다시 가파르게 치고 오른 후부터는 산길은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잠시 웃자란 소나무들이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는 구간을 통과하고 나면 드디어 겸암산 정상이다. 널따란 분지도 그렇다고 뾰쪽한 봉우리도 아닌 겸암산 정상은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영춘 회전테마숲/ 회전 테마숲)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발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이면 족하다.

 

 

 

소나무 숲이 참으로 울창하다. 자기가 소나무인 것을 잠시 잊은 양, 마치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처럼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위를 향해 쭉쭉 뻗어 오르고 있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짙은 소나무향’, 갑자기 묵직하던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한다. 솔향속에 묻어오는 피톤치드(phytoncide)의 영향일 것이다. 식물들이 병원균(病原菌)이나 해충(害蟲), 곰팡이 등에 저항하려고 내뿜거나 분비하는 물질이 바로 피톤치드이다. 사람들이 피톤치드를 마실 경우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가 편백나무와 소나무 등 상록활엽수이다. 그런데 지금 걷고 있는 산길이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오늘 산행은 몸이 호사(豪奢)를 누리는 산행이 된다. 요즘의 트렌드(trend)인 힐링(healing)산행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겸암산의 정상표지석은 의외로 말뚝모양으로 되어 있다. 직사각형 오석(烏石) 만들어진 충청북도 고유의 디자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도() 차원에서는 관리할 가치가 없는 산이란 말인가? 하긴 아름다운 산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의외로 보잘 것이 없다. 정상이 온통 잡목(雜木)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시야(視野)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가장자리로 나아가면 조망이 트이겠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어 하산을 서두른다. 이왕에 정상에 올랐으면 정상에 얽힌 옛이야기 한 토막 정도는 되새겨보고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곳 겸암산은 겸암(謙菴) 유운룡(楡雲龍)과 인연이 있는 산이다. 그의 묘()가 있었던 이곳 정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운룡은 조선중기(1539~1601)의 문신(文臣)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때의 명신이었던 유성룡의 형으로 알려진 그는 요 아래 남천리의 대어구에서 산수(山水)를 즐기다가 임종(臨終)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장(移葬)해갈 때까지 그는 이곳 겸암산의 정상에 묻혀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이산의 이름이 겸암산(謙庵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겸암산의 다른 이름인 계명산(鷄鳴山)은 어떠한 연유로 얻게 된 이름일까? 어쩌면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는 구인사주변 산릉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막상 정상표지석에는 향로봉(香爐峰)이라 적혀있다. 연유를 알 수 있거나, 추정이라도 해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닌 생뚱맞은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다 

 

 

 

하산은 북동릉을 따라 내려서면서 시작된다. 20m쯤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돌탑을 지나고, 참나무 숲길로 들어서면 능선이 두 가닥으로 나뉜다. 무덤이 있는 이곳에서는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된다. 영춘면과 가곡면의 경계를 이루는 왼편 능선을 따를 경우에는 남한강소수력발전소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이다. 급경사(急傾斜)를 이루는 북동릉을 타고 얼마쯤 내려왔을까 반듯한 무덤이 있는 곳에서 길이 헷갈린다. 능선은 왼편으로 향하고 있는데 철망(鐵網)이 능선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철망 건너편에서 먼저 간 등산객들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차피 철망의 끄트머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와야 하니 그냥 통과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철망의 아래에 보이는 틈새를 통과하면 산길은 거의 임도 수준으로 변한다.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은 순하기 이를 데가 없다. 산길의 주변이 온통 소나무나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들로 꽉 차있어서 솔가리가 수북하게 쌓인 산길이 너무나 폭신폭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능선에는 유난히도 잘 가꾸어진 무덤들이 많다. 구인사 스님들의 무덤이라고 들었는데, 화장을 좋아하지 않는 구인사스님들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맨 마지막무덤인 광산 김씨무덤을 지나면 그 아래에 능선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보인다. 정상에서 45분 정도 지난 지점이다. 성재라 불리는 이도로는 1973년 보발재가 새로 나기 이전에 군간나루에서 구인사방면 최가동으로 주민들이 넘나들었던 고갯마루이다. 성재는 어디로갈까로 등산객들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지점이다. 이곳에서는 절개지(切開地)를 기어오른 후에 능선을 따라 걸을 수도 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능선의 오른편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걸어도 잠시 후에는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굳이 능선으로 올라선다. 임도는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능선을 따라 5분쯤 걸으면 갈림길 하나가 나타난다. 갈림길에 이르면 거창한 이정표(온달산성 1.0Km/ 정자 60m/ 방터 900m)와 마주치게 된다. 나무기둥 네 개를 4(四角)으로 세워놓고, 상부의 기둥 사이에다 가로로 나무막대기(木棒)을 끼워 넣은 다음 목봉에다 나무판자(木板) 이정표를 매달아 놓았다. 보기만 해도 꽤나 돈이 많이 들어갔을 것 같다. 그러나 아까 지나온 겸암산 정상에서 보았듯이 충청도에서 제켜놓은 산치고는 너무 고급스런 이정표가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 50m 정도만 더 걸으면 전망대를 겸한 정자(亭子)가 나타난다. 그러나 조망(眺望)은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남한강 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나타날 따름이다.

 

 

 

 

전망대에서 조금만 더 가면 또 하나의 갈림길(이정표 : 온달산성900m/ 온달성 800m/ 최가동 2km/ 팔각정자 200m)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직전하면 온달성(이정표 : 800m), 그리고 다른 온달산성(이정표 : 900m)은 왼편으로 가도록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산에는 온달성()과 온달산성(山城)이라는 두 개의 성()이 있단 말인가? 처음 본 사람들은 헷갈리겠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온달성까지의 거리가 긴 것은 우회로(迂廻路)이고 가까운 것은 능선길이기 때문이다. 두 길은 얼마 안 있어 다시 만나게 된다. 여기서 단양군청에게 바라고 싶은 것 하나, 이정표에다 괄호를 하고 그 안에다 능선길과, 우회로를 표기해 주면 어떨까 싶다. 이왕에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이정표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 13, 그러니까 임도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드디어 **)온달산성이 나타난다. 온달산성의 성벽(城壁)을 보면, 우리가 늘 보아오던 여타 다른 산성들과 다른 점이 보인다. 대부분의 산성들은 커다란 직사각형의 돌들을 정형적으로 쌓아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곳 온달산성은 구들장 같이 납작한 돌들을 일정한 형식이 없이 그저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꼭 시골마을의 담벼락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온달산성(溫達山城 : 사적 제264), 남한강변에 위치한 해발 427m의 성산에 축성(築城)된 길이 972m, 높이 3m의 반월형 석성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들을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며, ··3()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傳說)이 전해지고 있으며, 성내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土器)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참고로 온달산성이 소재한 이곳은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땅이 비옥(肥沃)한 한강 유역을 누가 지배하느냐가 패권(覇權)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變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온달산성이 처음으로 선을 뵈는 곳은 산성(山城)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때문에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터진다. 왼편의 성벽(城壁) 아래로는 남한강 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산줄기들이 첩첩이 펼쳐진다. 소백산의 산릉(山稜)들이 하늘에 마루 금을 그리고, 국망봉에 내려온 산줄기는 부챗살을 펼치듯 구봉팔문(九峰八門)을 빚어놓고 있다. 네 번째 봉우리인 뒤시랭이문봉 아래에는 아까 다녀온 구인사가 숨어있을 것이다.

 

 

 

구문팔봉의 조망(眺望)을 즐기고 난 후에는 성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북문(?)을 지나자마자 또 다시 통쾌한 조망이 펼쳐진다. 먼저 말굽형으로 축조된 산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에는 남한강과 영춘면 시가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그리고 영월의 태화산은 강 너머에 우뚝하다. 옛날에 지휘대(指揮臺)가 있었다면 아마 이곳이었을 것이다. ‘올 테면 와봐라!’ 쩌렁쩌렁 울리는 온달 장군의 기개 넘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온달산성은 작기 때문에 조망을 즐기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구경은 금방 끝이 난다. 남문을 빠져나와 조금만 더 내려가면 산비탈에 걸터앉은 정자(亭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정자에 올라서면 금방 고개가 끄떡거려진다. 정자가 자리 잡기에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남한강(南漢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수태극(水太極)을 그리며 휘돌아가는 자태(姿態)가 참 아름답다. 강 주변의 산들은 그 강물에 몸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고 있다.

 

 

 

 

 

산행날머리는 온달관광지주차장

정자에서의 하산길은 나무계단으로 이어진다. 오늘 산행은 계단과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아까 산행을 시작할 때부터 끝없이 계단을 오르게 만들더니, 마치 산행을 마치는 것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이 또 다시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중간에 온달관광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조망대를 지나면 성황당(城隍堂)에 닿는다. 성황당 바로 아래가 **)온달관광지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해서 연개소문 촬영세트장이다. 그러나 관광지로 들어가려면 입장료(入場料 : 5천원)를 내야만 한다. 입장료를 내면 촬영세트장과 온달동굴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산행마감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관람을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내려다보이는 촬영세트장의 규모(規模)는 예상외로 크다. 하긴 그동안 이곳에서 SBS드라마 <연개소문>MBC드라마 <태왕사신기>, 최근 KBS<바람의 나라>  <천추태후>까지 드라마 대작들이 연이어 촬영(撮影)되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당시의 고구려가 과연 저만한 위용(威容)의 건축물들을 축조(築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의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당시 고구려의 인구수(人口數)는 약 800만호(: 고구려인 약 100~135+ 말갈인 600~700)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나라였고, 국력(國力)은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에 비견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세트장은 한때 일본인 아낙내들이 진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태왕사신기>에 출연하고 있는 배용준을 구경하기 위한 행렬이었다. 당시 일본열도(日本列島)를 뒤흔들었던 욘사마의 위력을 감안해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온달관광지를 왼편에 끼고 돌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관광지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산행이 종료된다. 성곽을 둘러본 시간까지 합해도 30분뿐이 채 안 걸렸다.

(**)온달관광지는 고구려의 명장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테마로 한 온달전시관을 비롯해 온달산성, 온달동굴, 그리고 드라마세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등산(人登山, 666.5m)-두알봉(445.5m)

 

산행일 : ‘13. 12. 29()

소재지 : 충북 충주시 동량면과 산척면의 경계

산행코스 : 탑평교삼각점봉(271.4)두알봉(445.5)임도로 7부 능선까지 이동인등산임도 복귀음양지마을(산행시간 : 4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 인등산은 부근의 천등산(天登山), 지등산(地登山)과 함께 삼등산으로 산꾼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막상 오르고 보면 실망부터 하게 된다. 밋밋한 흙산으로 이루어진 탓에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거기다가 등산로도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월악산 등 유명한 산들이 유난히도 많은 충주시에 위치한 탓이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산꾼들이 아니라면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는 산이다. 특히 두알봉은 도시락을 싸들고라도 오르는 것을 말리고 싶을 정도이다. 가시넝쿨과 잡목(雜木)에 찔리고, 긁히며 거기다가 싸대기까지 맞아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볼거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탑평교 근처의 남한강 횟집’(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764-12)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 태백방면으로 달리다가 산척사거리(산척면 송강리)에서 우회전하여 531번 지방도를 타고 충주호 방면으로 달리면 동량면소재지인 조동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조동리에 있는 탑평삼거리에서 532번 지방도로 우회전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게 탑평교()이다.

 

 

 

탑평교를 건너면 왼편에 남한강 횟집이 보인다. 30년 동안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있는 음식점으로 보양어죽도리뱅뱅이가 이집의 주요메뉴라고 한다. 횟집의 주차장에서 다시 탑평교 방향으로 되돌아 나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탑평교 바로 앞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뚝방길로 방향을 틀어 100m쯤 들어가다가 민가(民家)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편 밭둑으로 들어서면 금방 산자락 아래에 이르게 된다. 길의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 산자락으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자락에 들어서던 선두그룹이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들머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후 자연스럽게 두 그룹으로 나뉘더니 따로따로 산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밭두렁과 산자락이 만나는 지점의 오른편에서 들머리를 찾아보는 게 맞다. 오른편은 희미하게나마 길의 흔적이 나타나지만 왼편은 아예 흔적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왼편으로 접어 든 나는 손수 길을 만들어가면서 능선을 향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생을 사서한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5분 정도만 고생하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된다.

 

 

 

능선으로 일단 올라서면 길의 흔적은 또렷하다. 그러나 그 흔적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탓에 잡목(雜木)들이 온통 산길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길을 만들어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다. 원래의 등산로를 따라 가다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우회(迂廻)를 해야만 진행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만드는 길도 사납기는 매한가지이다. 능선은 한마디로 매력(魅力)이 없다. 바위 하나 없는 흙산이라서 볼거리도 없을뿐더러 조망(眺望) 또한 꽉 막혀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주변 상황들은 아예 걷는 것까지도 방해를 하고 있다. 위에는 가시나무가 심심찮게 섞여있는 잡목(雜木)들이 가로막고, 아래도 온통 가시넝쿨 천지다. 가시나무에 찔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다보면, 이번에는 잡목들의 공략이다. 사정없이 싸대기를 때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찔리고, 할퀴고, 얻어맞는 산행이 계속된다. 왜 이런 산을 찾았을까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늦어버린 걸 어떻게 하랴

 

 

 

이런 악조건인데도 능선에는 꽤나 많은 무덤들이 보인다. 여기 까지 올라왔을 후손들은 과연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혹시 이런 곳에다 선산(先山)을 만든 조상들을 원망하지나 않았을까? 선입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라비틀어진 잡초(雜草)들을 뒤집어쓰고 있는 무덤()들은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이렇게 무덤이 많은 이유는 인근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傳說)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인등산에는 조선시대에 살았다는 황규라는 지관(地官)에 얽힌 전설(傳說) 하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 그가 꿈속에서 신선(神仙)과 만나 알게 된 명당(明堂)의 위치를 지도에 그려 놓았으나 세상에 알리기도 전에 죽어버린 탓에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그려 놓았다는 명당자리는 인등산에 있다는 용비등천혈(龍飛登天穴), 그리고 천등산 밑의 갈마음수혈(渴馬飮水穴)과 지등산 밑의 옥녀직금혈(玉女織錦穴)이다. 그 덕분에 난리가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여기 인등산 자락에다 위태한 명줄을 의지했다고 한다.

 

 

 

작은 봉우리를 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왼편으로 우회(迂廻)를 하면서 진행하다보면 제법 높다란 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봉우리 위로 오르니 박건석선생이 주변을 살피고 있다. 전국의 오지(奧地)산에 다니다보면 봉우리 이름 아래에 서래야 박건석이라고 쓰여 있는 정상표시 코팅(coating)지를 자주 볼 수 있다. 바로 그 장본인인데, 오늘 산행은 그와 함께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두알봉 정상에 표시지를 부착하려고 오셨다고 한다. 70을 훌쩍 넘긴 고령(高齡)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산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선생의 열정(熱情)이 부럽다. 아니 그분의 열정을 나도 닮고 싶다. 이곳이 두알봉이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삼각점은 보이지만 두알봉 같지는 않단다. 선두가 두알봉에 표시를 해놓고 가기로 했는데 아무런 표시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조금 후에 다시 만났을 때는 삼각점봉의 높이(271m)까지 일러주시며 두알봉이 아니었다고 알려주신다. 아무튼 산행을 시작한지 50분이 조금 못되었다.

 

 

 

삼각점봉에서 가파르게 잠깐 내려서면 과수원(果樹園)이 나온다. 산등성이에 들어앉은 과수원치고는 엄청나게 넓다. 나무들은 잘해봐야 심은 지 2~3년이나 되었을 듯, 상품용 수확으로는 아직 때가 이른 모양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말라비틀어져가는 사과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과수원을 지나는 길에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오른편에 덩치 큰 산들이 늘어서 있다. 아마 계명산과 지등산일 것이다.

 

 

 

 

 

 

과수원을 지나면 또 다시 능선으로 들어붙어야 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온통 가시덩굴로 뒤덮여있어 한걸음 옮기기조차 어려울 정도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투박한 바지를 입고 왔다는 점이다. 혹시 새 옷이라도 입고 왔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싶다. 보푸라기가 인 옷들은 졸지에 헌옷으로 변해버릴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신안군 자은면에 있는 두봉산에 올랐다가 이런 가시넝쿨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난 입고 갔던 바지를 얼마 입어보지도 못하고 버리고 말았다.

 

 

 

과수원을 지나서도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여럿 만들어 낸다. 그리고 봉우리에 올라설 때마다 혹시 두알봉이 아닐까라는 기대가 뒤따른다. 그러나 막상 올라보면 진행방향에 이보다 조금 더 높은 봉우리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렇게 실망을 계속하다보면 왼편이 날카로운 벼랑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위에 올라서게 된다. 맞은편 봉우리 위에 앞서가던 일행 몇 명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드디어 두알봉에 이른 것이다.

 

 

 

 

 

두알봉에는 조금 전에 나를 앞질렀던 박건석선생이 준비해온 정상표시지를 매달고 있다. 그 아래에 또 다른 정상표시지가 매달려 있고, 다른 나뭇가지에도 이곳이 두알봉임을 알리는 리본들이 여럿 보인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만일 저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곳이 두알봉 정상인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만큼 두알봉 정상은 이곳이 정상이라고 느낄만한 특징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조망(眺望) 또한 꽉 막혀있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20, 그리고 삼각점봉에서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두알봉에서 인등산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은 엄청나게 가파르다. 자칫 구를 수도 있으니 주의가 요구된다. 특히 오늘 같이 눈이 쌓여있는 날에는 더욱 안전에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10분 정도를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다시 5분 남짓 걸으면 임도(林道)가 나온다. 어쩌면 요 아래 대모천마을(동량면 조동리)에서 시작되어 인등산의 7부 능선을 거쳐 장재로 연결되는 임도일 것이다.

 

 

 

첫 번째 임도에서 다시 15분 정도를 더 걸으면 두 번째 임도를 만나게 된다. 임도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산이 인등산이다. 응당 맞은편 능선으로 올라서야할 텐데도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는 임도를 따르라 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곳 관할관청(管轄官廳)인 동량면사무소에서 매달아놓은 등산로 안내리본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20분 정도를 의미 없이 더 걸어야만 했고, 거기다가 등산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해프닝도 겪어야만 했다. 등산객들은 대부분 올라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일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정상으로 올라갔던 코스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임도를 따라 7부 능선까지 오르는 데는 25분 정도가 걸린다.

 

 

 

 

7부 능선쯤에 있는 고갯마루에 이르면 왼편 산자락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리본 하나가 보인다. 동량면사무소에서 붙여 놓은 등산로 안내 리본이다. 능선으로 올라서서 가시넝쿨들과 싸우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선두그룹이 내려오고 있다. 임도로 들어서지 않고 곧장 인등산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이다. 길을 잘못 들었었음을 알게 된 우리 일행들 모두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다. 길이라도 좋았더라면 그나마 위안이라도 삼았으련만 가시넝쿨로 포위된 능선은 한 발짝 옮기는 것도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등산로도 정비해 놓지 않은 채로 등산객들을 인도한 동량면사무소의 행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가시넝쿨을 지나서도 산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희미한 산길의 흔적을 찾아 20분 정도 오르면 널따란 헬기장이 나타나고, 또 다시 5분쯤 더 오르면 드디어 인등산 정상이다.

 

 

 

 

헬기장 역할까지도 수행하고 있는 정상에는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든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장재 1.8Km), 그리고 삼각점이 있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 세워진 또 다른 정상표지판에는 인재의 숲, 인등산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그 정상판의 상단에 ‘SK’의 로고(logo)가 또렷하다. 이 산이 SK의 개인소유라고 들었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인등산은 북쪽에 천등산(807m)이 있고 남쪽에 지등산(535m)이 있어 차례로 천((()3(三才)를 나타낸다. 세 산의 흐름이 태극무늬와 같다고 해서, 천지인사상에 입각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이 세 산을 한데 묶어 삼등산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때부터 삼등산 아래에 피난하면 안전하다는 말이 돌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근에 정착마을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훌륭한 편이다. 북으로 마주보는 천등산이 제법 웅장하고, 천등산 오른쪽 뒤로는 구학산, 주론산이 보인다. 동으로는 충주호 건너편의 마미산과 면위산이 보이고, 남으로는 지등산 뒤로 충주 계명산이 멀리 월악산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정상을 둘러보고 다시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로 되돌아 나온다. 올라가는 데는 25분 정도가 걸렸는데, 내려오는 데는 15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고갯마루에서는 장재, 그러니까 아까 올라왔던 방향과는 반대로 진행하면 된다. 임도를 따라 100m쯤 내려가다가 임도가 왼편으로 급하게 휘는 지점에서 오른편에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본격적인 하산이 시작된다. 날머리를 음양지마을로 정했기 때문이다.

 

 

 

능선으로 올라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바위봉우리이다. 산길은 바위봉우리를 넘어가도록 되어 있지만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 봉우리가 높지도 않을뿐더러 만나는 바위마다 넘지를 않고 우회(迂廻)를 하도록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바위봉을 지나면 산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이 밋밋하게 이어진다. 능선의 나무들은 대부분 참나무들, 가끔 노송(老松)군락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산길은 급경사(急傾斜)가 거의 없는 내리막길, 가끔 올라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리막길이 길게 계속된다. 임도를 출발하고 30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개짓는 소리가 들린다. 나뭇잎 하나 없는 빈가지 사이로 희미하게나마 아래가 내려다보이지만 민가(民家)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민가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곳 삼등산이 난()을 피할 수 있는 길지(吉地)라고 들었는데 사실인 모양이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임도를 출발하고 40분 가까이 되면 임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산자락의 끝이 벼랑으로 되어있어서 내려갈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선두대장의 진행방향 표시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내려섰지만 벼랑이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되돌아 올라가기가 싫어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다가 끝내는 나뒹굴고야 말았다. 다행이 흙 벼랑이라서 다치지는 않았다. 잠시 쉬면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나 같은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산행날머리는 음양지마을의 충주호관광농원(동량면 손동리 551)

임도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내려오면 음양지마을이 나오고 곧이어 532번 지방도에 이르게 된다. 피곤했던 산행이 종료되는 것이다. 도로변에 문순공 수암 권상하선생 묘(文純公 遂菴 權尙夏先生 墓)’라는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는 보인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로 알려진 권상하(1641~1721)의 묘가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다. 이이, 송시열의 기호학파를 계승한 그의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난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송시열과 그가 맹목적으로 숭배했던 명나라에 대한 사모(思慕) 때문이다. 그 증거는 괴산에 있는 화양동(華陽洞)에 가면 찾아볼 수 있다.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향(祭享)하는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이 그 증거이다

 

 

 

면위산(免危山, 780m)

 

산행일 : ‘13. 12. 21()

소재지 : 충북 충주시 동량면

산행코스 : 하곡마을(탑비마을)작은절골1옥녀봉(668m)2옥녀봉(709m)면위산(부산:婦山)412325532번 지방도(산행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 면위산이나 부산(婦山 : 며느리산), 어느 이름을 들더라도 귀에 익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는 오지(奧地)의 산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찾는 사람들이 제법 늘어나는지 최근에는 등산로까지 정비해 놓았다. 그러나 이정표는 아직까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정상표지석도 엉뚱한 봉우리 위에다 세워놓았다. 크게 눈길을 끌만한 풍경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한번쯤은 올라볼만한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하곡마을(탑비마을 : 법경대사자등탑비)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 태백방면으로 달리다가 산척사거리(산척면 송강리)에서 우회전하여 531번 지방도를 타고 충주호 방면으로 달리면 동량면소재지인 조동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 조동리에 있는 탑평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532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충주호의 상류인 제천천이 나온다. 제천천을 건너자마자 만나게 되는 충주호리조트에서 제천시 금성, 청풍 방면으로 500m 쯤 더 들어가면 하곡마을에 이르게 된다. 하곡마을 앞에는 제법 규모를 갖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하곡마을 주차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많은 솟대들이다. 솟대는 옛날 삼한시대(三韓時代) 때부터 마을의 안녕이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세워졌다. 185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솟대를 볼 수 있었으나 개화기(開化期) 때 사라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정토사 흥법국사실상탑 (淨土寺 弘法國師實相塔)’도 보이는데 아쉽게도 모형이라고 한다. 원래의 탑(: 국보 제102)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흥법국사실상탑뒤편 모퉁이에 커다란 빗돌 하나가 보인다. 지붕까지 씌워진 것을 보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한 비()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바로 하곡마을이 탑비(塔碑)마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만든 장본인인 법경대사 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이다. 법경대사자등탑비는 고려 태조 26(943)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천안마을 일대에는 통일신라 말()에 창건된 정토사(淨土寺)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 정토사는 개천사(開天寺)라고도 불리며 조선전기까지 사적(史籍)들을 보관하던 충주사고(史庫)가 있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보관하고 있던 서적들은 소실됨에 따라 사찰(寺刹)도 폐사(廢寺)되었다고 한다. 현 자등탑비가 있는 곳은 원래 정토사지(淨土寺址) 터가 아니다. 정토사지의 원래 위치는 보다 아래 쪽, 지금은 충주호에 수몰(水沒)된 곳이다.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사지(寺址) 위쪽  가까운 언덕으로 옮겨진 것이다. 참고로 정토사지에 있던 문화재(文化財)법경대사 자등탑비외에도 1918년 일제에 의해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홍법국사 실상탑(국보 102)’홍법국사 탑비(보물359)’가 있다. 그리고 자등탑비와 관련된 법경대사 자등탑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하는데 그 정확한 소재는 아직 알려지지 않는다고 한다. 탑비의 주인인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로서 906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도건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924년에 귀국하였다. 경애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대우하여 정토사의 주지로 임명하였고, 고려 태조 24(941)63세로 입적(入寂)하자 태조는 '법경(法鏡)'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탑 이름을 '자등(慈燈)'이라 명명(命名)하였다. 태조 26(943)에 그의 공덕을 기려 이 비()를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당시의 문장가 최언위(崔彦撝)가 지었으며, 유명한 서예가였던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실상탑이 있는 공원에서 도로 건너 맞은편에 보이는 농로(農路)를 따라 하곡마을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들머리에 산행안내도가 세워졌으니 참조하면 된다. 그러나 산행코스는 안내도보다는 가지고 간 지도(地圖)를 참조하는 것이 좋다. 안내도를 실제 산행에 활용하기에는 어설프기 때문이다. 등산안내도 왼쪽으로 나 있는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하천가든이 나오고, 왼편 길가에는 사과과수원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과수원이 끝나면 왼편 산자락을 들어서는 오솔길 하나가 또렷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본래의 길을 따라야 한다. 오솔길은 금방 끊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억지로 산비탈을 치고 올라 봐도 마주치게 되는 것은 과수원(果樹園), 사과가 매달려 있을 가을철에는 사과 서리로 오해받기 딱 좋겠다. 과수원 주인집으로 보이는 농가를 지나고, 이어서 양봉(養蜂) 농가를 통과하면 원래의 등산로와 다시 만나게 된다. 본래의 길을 따르면 편하게 왔을 길을 엉뚱하게 돌아오느라 고생한 것이다.

 

 

 

본래의 길과 다시 만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그러니까 산행을 시작해서 15~16분쯤이 지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난 길이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있는데 비해, 왼편 길은 오솔길 수준이다. 비록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오른편 길은 제1옥녀봉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 아닐까 싶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물기 하나 없는 마른 계곡으로 들어서면, 하늘 찌를 듯이 위로 솟구친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그러나 낙엽송 숲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고 이어지는 산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평년보다 훨씬 춥다는 일기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거의 여름 수준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힘들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그보다는 날씨가 풀린 탓이었다.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리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온화했던 것이다 

 

 

 

 

오르막길은 가파르기만 한 게 아니다. 길은 흔적도 희미할뿐더러 바닥에는 참나무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여간 미끄럽기까지 하다. 하나 다행인 것은 이러한 오르막이 그다지 오래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15분 정도이면 능선 안부에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올라선 능선에서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지도(地圖)와 실제상황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지도를 보면 이곳은 충주호리조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따라서 옥녀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산악회에서 깔아 놓은 방향표시지는 왼편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올라온 길이 지도와는 다르게 올라왔단 말인가? 그 의문은 후기(後記)를 쓰고 있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면위산의 지도를 있는 데로 다 검색해 봐도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을 만한 코스를 결코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능선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또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길가에 로프를 매어 놓았다는 것이다. 등산로가 잘 정비(整備)되어 있는 것을 보니 문득 아까 계곡입구에서 오른편으로 나있던 등산로가 생각난다. 어쩌면 그쪽 길이 옳은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능선의 끝자락으로 올라선 후 능선을 탄다면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다보면 갑자기 커다란 암벽(巖壁) 하나가 나타나면서 길을 가로막는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다. 옥녀봉으로 가려면 바위 위로 올라서야만 하는데, 그 바위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오르기가 만만찮은 것이다. 다행이도 바위에는 밧줄 두 줄이 매여져 있다. 그러나 밧줄도 크게 도움은 주지 못한다. 밧줄이 느슨하게 매여져 있는 탓에 까딱 잘못하면 몸이 중심을 잃고 뒤집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어 번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집사람은 아래에서 받혀주고 위에서 당겨주고 나서야 올라설 수 있었다.

 

 

 

위험구간을 지나서도 산길은 가파르게 이어진다. 그러나 아까에 비하면 그 난이도는 훨씬 양호해진 편이다. 서두르지 않고 로프에 의지해서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어느덧 제1옥녀봉이다. 능선안부에서 30분 정도 걸렸다. 정상에 올라서기 바로 직전 왼편에 요상하게 생긴 바위하나가 보인다. 이 바위가 혹시 짜게바위라고 불린다는 전망바위가 아닌지 모르겠다. 짜게바위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선생과 인연이 있는 바위라고 한다. 토정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경치가 좋다고 탄복했던 바위라는 것이다. 토정선생은 요 아래에 있는 하천리에 은거했다. 풍수학적(風水學的)으로 화()를 피할 수 있는 피난지(避難地)로 알려진 곳이다. 그의 이름에 걸맞는 곳을 선택한 샘이다. 참고로 이곳에는 `하천팔경 또는 개천팔경(開天八景)' 이라는 8개의 명소(名所)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제1경이 옥녀봉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을 일컫는 옥녀만하(玉女晩霞)이다. 

 

 

옥녀봉 정상은 약간 경사(傾斜)진 분지(盆地)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에 듬성듬성 바위 몇 개가 널려있는 분지의 한가운데에 예쁘장한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옥녀봉 정상은 충주호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展望臺)이다. 연무(燃霧) 때문에 비록 시계(視界)가 막혀있지만 흐릿하게나마 충주호()와 충주호리조트(Chungju Lake Resort), 그리고 구비구비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가 거침없이 펼쳐진다. 조망(眺望)을 즐긴 후에 제2옥녀봉으로 산행을 이어가야 하는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보고 싶은 무언가를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다. 정상 근처에 있다는 옥녀샘이다. 수북이 쌓인 눈 때문에 내려가는 길의 흔적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물맛 좋은 것으로 알려진 옥녀샘은 옛날 선녀(仙女)들이 내려와 물맛과 이 곳의 경치를 즐기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傳說)을 갖고 있다. 약수는 중탕과 상탕 하탕, 3곳이 있다. 그중에 선녀들이 마셨다는 상탕(옥녀샘)은 가뭄에도 고갈되지 않는다고 한다. 부정한 사람이 마시려고 할 경우에는 물이 흐려진다고 해서, 내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보려고 했는데, 놓쳐버린 것이다.

 

 

 

1옥녀봉 정상에서 제2옥녀봉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삼거리(이정표 : 옥녀봉 300m/ 한국코타/ 000) 하나가 나타난다. 한국코타는 한국코타레저타운의 줄임말로 현재의 충주호리조트를 말한다. 그러니까 지도(地圖)에 나와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왔을 경우에는 이곳으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지났던 사과과수원에서 왼편 길로 진행했어야 한다. 이정표 방향표시 중에 아무런 글씨도 적혀있지 않은 방향은 물론 하곡마을이다.

 

 

1옥녀봉 정상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짧게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능선길을 길게 치고 오르면 제2옥녀봉 정상이다. 걸리는 시간은 10분이 조금 넘는다. 이 구간에서 처음으로 아이젠(Eisen)을 착용한다. 내리막길에 쌓인 눈이 무릎에까지 차오르기 때문이다. 10평 정도 되는 분지로 이루어진 정상에는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충청북도 특유의 정상표지석(부산 780m)이 놓여있고, 그 뒤편에는 누군가가 매직펜(magic pen)으로 부산 정상이라고 써놓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물론 방향표시판에도 하곡마을/ 하곡마을 어귀라고 써 놓았다. 그렇지만 이곳이 부산 정상이 아니고 제2옥녀봉 정상이라는 것은 웬만한 등산객들은 다 안다. 실제 부산(면위산) 정상은 이곳에서도 한 시간 가까이 더 가야만 한다. 2옥녀봉 정상에서는 삼탄유원지 방면의 야산(野山)과 마미산(601m)의 조망(眺望)이 터진다고 하지만 숲에 가려 별로다. 거기다가 연무(燃霧)까지 시야(視野)를 가로막고 있다.

 

 

 

 

앞장서서 길을 걷던 집사람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런데 그 표정에 난감해하는 빛이 가득하다. 어른의 키로 한 길을 훌쩍 넘기는 높이의 바위에서 내려서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바위 위의 소나무에 가느다란 밧줄이 매달려 있지만 밧줄이 움직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잡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거기다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바위는 미끄럽기까지 하니 쉽게 내려서지를 못하고 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집사람만 힘든 것은 아닌 모양이다. 뒤에 따라오는 남성분들도 바위 위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남감한 길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비록 난이도(難易度)는 조금 떨어지지만 벼랑으로 이루어진 산비탈의 중간을 뚫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끔 나타나는 암벽(巖壁) 앞에서는 망설이기도 해야 한다. 다행이 바윗길은 암벽을 피해 우회(迂廻)를 시키고는 있지만 눈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통과해야할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길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아름답다. 바윗길 특유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면위산으로 향하는 길은 작고 큰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거기다가 제법 가파르기까지 하다. 만만찮게 힘든 산길인 것이다. 그러나 그 오르내림에 바위길이 섞여있어서 심심하지는 않다. 그런데 면위산의 전위봉에 가까워졌을 즈음 앞서가던 집사람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있는 것이 보인다.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 정도로 눈부신 상고대(rime , 霧氷)가 그녀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2옥녀봉을 출발해서 50분 남짓 걸으면 전위봉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 삼각점이 있다고 해서 삼각점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이곳을 면위산 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곳에서 오른편은 헬기장과 412봉을 거쳐 국실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면산은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곡마을로 내려가려면 면위산 정상을 올라본 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내려서야 하는 것이다.

 

 

삼각점봉에서 면위산 정상은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면위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한겨울의 풍경은 점점 더 짙어진다. 그러다가 정상에 도착하면 천지는 온통 설국(雪國)으로 변해버린다. 보이는 것 마다 설화(雪花)와 상고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면위산 정상은 거친 암릉이다. 정상은 정상표지석 대신에 덜 자란 소나무 한그루가 지키고 있다. 정상은 한마디로 좁다. 정상에서 조망(眺望)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면 차례로 줄을 서야할 정도로 비좁은 것이다. 정상에는 이곳이 정상임을 알려주는 아무런 표시도 없다. 만일 선답자(先踏者)들의 산행후기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이곳을 정상으로 알았다면, 차라리 그 사람이 더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면위산은 옥녀봉으로 불리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부산(婦山)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그렇게 불리는 이유가 실소(失笑)를 자아내게 만든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지명(地名)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동네사람들이 면위산(免危山)이라고 하는 발음을 며느리산으로 잘못 알아듣고 며느리 부()자를 써서 부산(婦山)으로 잘못 쓰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면위산은 하천팔경(荷川八景)이라는 8개의 명소들을 산자락에 거느리고 있다.

 

 

면위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허나 오늘은 연무(燃霧)로 인해 아쉽게도 멀리 보이지는 않는다. 서쪽 발아래에는 충주호가 내려다보이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방금 지나온 옥녀봉이 가깝다. 그러나 충주호 건너에 있을 인등산과 천등산, 그리고 북쪽에 있을 십자봉과 백운산 등은 뿌연 연무에 가려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다시 삼각점봉으로 되돌아와 오른편으로 내려서면서 하산이 시작된다. 하산을 시작하자 만나게 되는 바위봉우리를 넘고 나면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가끔 가파른 내리막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내려설 수 있다. 능선을 따라 난 산길도 비교적 또렷한 편이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번갈아 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낮추어 간다. 산길은 편한 대신에 구경거리는 없다. 짙은 숲에 가려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따름이다. 삼각점봉에서 30분 조금 넘게 내려서면 임도가 보이고, 곧이어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에서 다시 산행을 이어가다보면 아까 와는 사뭇 다른 풍경(風景)이 펼쳐진다. 우선 참나무 일색이던 길가에 소나무의 숫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큰 봉우리 하나 없이 작은 오르내림만 계속되던 능선에는 커다란 봉우리 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면서 피로에 지친 다리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바로 412봉과 325봉이다. 헬기장에서 13분 정도 내려가면 412봉이 나오고, 조금 더 내려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은 국실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편은 325봉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곳에서는 오른편 길을 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왼편의 길은 사람들의 통행이 뜸한 탓에 사람들의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잡목(雜木)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532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충주호반

412봉에서 다시 20분 남짓 걸으면 325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표고(標高)에 비해 유별나게 높아 보이는 것은 눈길을 걷느라 많이 지쳐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325봉에서 다시 10분 조금 넘게 걸으면 봉분(封墳)이 거의 사라져버린 묘()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어느 방향으로 내려가더라도 532번 지방도로 내려가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기왕이면 오른편의 능선길을 따르라고 권하고 싶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에 펼쳐지는 충주호의 풍경이 제법 고즈넉하기 때문이다. 삼거리에서 10분 조금 못되게 내려오면 충추호반(湖畔)을 따라 이어지는 532번 지방도(행정구역 : 동량면 지동리)이다. 물론 민가(民家)는 보이지 않고, 민가가 있는 금잠마을로 가려면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왼편으로 얼마간 더 걸어야 한다.

 

 

 

 

 

 

국사봉(國師峰 632.3m)-마미산(馬尾山 600.8m)-대덕산(大德山 580m)

 

산행일 : ‘13. 12. 8()

소재지 : 충북 제천시 봉양읍, 금성면, 청풍면과 충주시 산척면의 경계

산행코스 : 응골고개국사봉마미산 정상삼거리마미산 정상 왕복대덕산 정상 삼거리대덕산 정상 왕복굴탄교(강촌상회)(산행시간 : 빠른 걸음으로 3시간10)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전형적인 흙산인지라 자랑할 만한 산세(山勢)를 갖고 있지 못하다. 거기다가 국사봉을 제외하고는 조망(眺望)도 트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얘기이다. 어쩌면 지맥종주를 하는 사람들 외에는 찾는 사람들이 드문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일반 등산객들이 찾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은 산이다.

 

산행들머리는 응골고개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I.C에서 내려와 82번 지방도를 타고 금성면소재지인 구룡리까지 온다. 이어서 금성보건지소(구룡리) 앞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32번 지방도(국사봉로)를 따라 봉양읍 방향으로 들어가면 산자락을 돌아 오른 도로는 봉양읍과 금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인 응골고개에 이르게 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내려와 38번 국도를 타고 태백방향으로 달리다가 하영교차로(交叉路 :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에서 빠져나와 산척사거리(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서 우회전 531번 지방도를 따라 잠깐 달리다가 덕해삼거리(충주시 산척면 영덕리)에서 좌회전하여 영덕천 왼편으로 나란히 나있는 군도(軍道 : 인등로)를 이용해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참고로 이번 우리를 안내한 산악회 버스는 후자의 방법을 이용했다. 응골고개에서 청풍면 방향으로 50m 이동하면 도로변에 설치된 가드레일(guardrail) 너머에 세워진 국사봉 등산안내도(案內圖)가 보인다. 안내도 뒤편에 등산로임을 알려주는 산악회 표시지가 몇 개 바람에 날리고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참고로 이곳 응골고개에서 국사봉과 마미산을 거쳐 가는 **)갑산지맥 종주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갯마루 어림에서 국사봉 쪽으로 난 임도(林道)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이럴 경우 의미 없는 능선을 타지 않아도 될뿐더러 10분 남짓한 시간까지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갑산지맥(甲山枝脈), 영월지맥의 가창산(歌唱山.819.5m) 동남쪽 0.9km 지점인 602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分岐)하여 갑산(甲山.747m), 호명산(虎鳴山.479m). 성산(城山.425.6m), 국사봉(國師峰,632.3m), 마미산(馬尾山.600.8m)을 거쳐 충주시 동량면 남한강과 제천천() 두물머리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6.2km  산줄기로 제천천의 우측  분수령(分水嶺) 된다.

 

 

 

 

가드레일을 넘으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로 겨우 등산로임을 알 수 있었던 산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렷해진다. 능선을 가득 메운 참나무들 사이로 외줄기 길이 가지런히 나있다. 산길은 순하다. 부드러운 흙길에는 낙엽(落葉)이 포근하고, 거기다가 경사(傾斜)까지 완만(緩慢)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불편한 것은 길이 미끄럽다는 것이다. 능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참나무들의 낙엽이 두텁게 쌓인 탓이다. 이렇게 미끄러운 참나무 낙엽들과의 싸움은 산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다지 높지 않은 능선을 하나 넘으면 산길은 왼편에 보이는 임도로 내려서게 된다. 아까 고갯마루에서 보았던 임도이다. 건너편, 그러니까 국사봉의 아랫자락에 공사현장이 보이고, 그 뒤편의 산자락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몇이 보인다. 아까 임도로 들어섰던 우리 일행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선두대장은 임도로 내려서자마자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붙는다. 아마 길가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산악회 시그널을 본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 올랐던 코스의 상황이 먼저 국사봉을 다녀간 사람들이 쓴 후기(後記)의 상황과 다른 것을 보면 어쩌면 공사현장의 뒤편으로 난 코스가 옳을지도 모르겠다. 후기에서 보았던 샘터나, 임도, 그리고 광산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른편 산자락으로 들어서면 산길이 의외로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잡목(雜木)들이 갈 길 바쁜 나그네들의 발걸음을 붙잡기는 하지만 경사(傾斜)가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길은 언제 순했냐는 듯이 갑자기 가팔라져 버린다. 난 가끔 땅 냄새가 난다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코로 땅 냄새가 스며들어 온다는 의미이다. 즉 경사가 하도 심해서 엎드리고 오르다보면 자동적으로 코가 땅에 가까워지게 되고, 그로 인해 땅 냄새가 자연스레 코끝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지금 국사봉으로 오르고 있는 구간도 이러한 표현을 쓰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거기다가 참나무 낙엽(落葉)까지 수북하게 쌓여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니 한 발짝 내딛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가히 죽음의 코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과 20분 정도를 정신없이 씨름하다 보면 능선 위에 올라서게 되고, 곧이어 오른편으로 산길 하나가 갈려나가는 것이 보인다. 마미산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정상까지는 5분 남짓의 거리, 배낭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이곳에다 배낭을 벗어놓고 다녀오면 된다. ‘마미산 갈림길에서 4분 남짓 치고 오르면 무인산불감시탑이 보이고 정상은 바로 그 위이다. 서너 평도 채 되지 않는 좁다란 정상에는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없이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제천26/1980재설)만이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다. 국사봉은 비운(悲運)의 임금인 단종(端宗)에 얽힌 사연이 전해져온다. 조선 세조때 단종이 영월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그의 신하였던 '유안예'라는 사람이 이 부근에 있는 활산리 살미에 '능골'(당시 안살미)이라는 곳으로 낙향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 살면서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만 되면 나라를 위해 국궁사배(鞠躬四拜)를 올렸다고 한다. 그가 절을 올리던 방향에 있던 봉우리라고 해서 국사봉(國師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연 때문인지 오늘 오르는 세 개의 산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다. 산의 이름이 산()도 아닌 봉()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국사봉 정상은 조망(眺望)이 잘 터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남쪽의 면위산(부산)과 동남쪽의 수름산, 대덕산은 물론이고 청풍호반과 더불어 월악산의 연봉(連峰), 그리고 대미산과 소백산이 들어앉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만들어내는 하늘금이 거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이다. 자욱한 연무(煙霧)로 인해 바로 코앞에 있는 산봉우리조차도 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상으로 올라왔던 방향의 맞은편에 바위 능선이 보인다.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몰라도 한번쯤 오르내려보고는 싶지만 꾹 참고 발걸음을 돌린다. 모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선두그룹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이다.

 

 

 

좁다란 공터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곧바로 마미산으로 향한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기 싫어서이다. 이런 때는 차라리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 것이 위안을 주기도 한다. 일망무제의 조망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옮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까 지나왔던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마미산으로 향한다.

 

 

 

삼거리를 출발한 산길은 초반에 한번 가파르게 떨어졌다가 다시 가파르게 올라선 후, 이번에는 바윗길을 만들어낸다. 국사봉에서 17분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이 바윗길이 참 묘하다. 오른쪽 위에서 왼편의 아래로 대각선(對角線)을 이룬 바위 면()을 어디로 지나가야할지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바위가 거대(巨大)하지도,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으니 마음 내키는 곳을 밟고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7~8분 정도의 바윗길이 끝나면 이내 무명봉(어쩌면 614m)에 올라서게 되고, 이어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오른편 급사면(急斜面)으로 희미하게나마 길이 하나 열려있는 것이 보인다. 산악회 시그널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오르내리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아마 상구곡으로 내려가는 길인 모양이다.

 

 

 

갈림길을 지나 15분쯤 더 가면 이번에는 제멋대로 휜 가지들을 늘어뜨리고 있는 아름드리 노송(老松)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곳 말고도 소나무들의 군락(群落)을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되지만 아마 이 구간이 가장 뛰어날 것이다. 노송구간을 지나면 또 다시 바위가 많은 구간이 나타난다. 구태여 이 구간을 바윗길로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바위를 넘지 않고도 그냥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던 능선은 제법 높은 봉우리 두 개를 넘게 만든다. 그러나 고맙게도 두 봉우리 모두 왼편 산허리로 우회(迂廻)를 시켜준다. 두 번째 봉우리를 우회하면 곧바로 오른편으로 산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바로 대덕산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 삼거리에다 배낭을 벗어놓고 마미산을 다녀와도 될 것이다.

 

 

 

 

 

마미산 갈림길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약간 가파른 능선을 다시 치고 오르면 8~9분후에는 마미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마이산 정상은 아까 지나왔던 대덕산 정상보다도 더 좁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그 흔한 이정표는 물론이고 정상표지석 조차도 없다. 나뭇가지에 철판으로 만든 정상표지판 하나가 매달려 있고, 바닥에 삼각점(제천461/2004복구) 하나가 설치되어 있을 따름이다. 정상은 조망(眺望)도 일절 트이지 않는다. 잡목(雜木)들이 정상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마미산(馬尾山)의 마미는 ()의 꼬리()’라는 뜻이다. 이는 봉양에서 바라보았을 말 한 마리가 한양(漢陽) 땅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形象)으로 나타나는데, 그때 말의 머리가 마두산, 허리는 대덕산, 그리고 마미산이 꼬리부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대덕산 갈림길에서 이번에는 왼편으로 들어서서 대덕산으로 향한다. 능선은 초반에 한번 깊게 떨어지고 나서는 고저(高低)가 크지 않게 이어진다. 능선의 나무들은 대부분 참나무들, 가끔 소나무들이 무리를 지어서 사이사이를 메꾸고 있을 따름이다. 마미산을 출발해서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능선의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조금 열린다. 그러나 조망(眺望)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니다. 벌목(伐木)이 오래전에 이루어진 탓인지 새로 조림(稠林)한 나무들이 시계(視界)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벌목지대를 지나서도 산길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이어진다. 능선은 고저(高低)가 크지 않은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고, 소나무가 간간히 섞인 참나무 숲 일색의 능선 풍경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벌목지대에서 다시 2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굴탄리로 내려가는 하산길과 나뉘는 삼거리이다. 굴탄리로 하산을 하려면 대덕산 정상을 밟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굴탄리 갈림길에서 5분 정도를 더 오르면 대덕산 정상이다. 대덕산 정상도 이정표와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기는 마미산 정상과 별반 다른 점이 없다. 굳이 다른 점을 들라면 마미산에서 보았던 삼각점은 눈에 띄지 않고, 대신에 등산객들이 서투르게 쌓아놓은 돌탑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까 마미산에서 보았던 철판(鐵板)으로 만든 정상표지판은 나뭇가지 대신에 돌탑에 얹혀있다. 정상이 좁다는 것과 잡목(雜木)으로 인해 조망(眺望)이 트이지 않는 다는 것은 같다.

 

 

 

 

굴탄리 갈림길로 되돌아와 하산을 시작해도 산길의 풍경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능선은 작은 오르내림을 계속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떨어뜨린다. 비록 길의 흔적이 희미하지만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고, 평탄하면서도 호젓할 산길은 사색을 즐기며 걸어도 충분할 것 같다.

 

 

 

 

대덕산 정상을 출발한지 30분 정도 되면 산길은 능선을 벗어나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갈림길 입구의 나뭇가지에서 팔랑이고 있는 시그널들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정도로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거기다 비탈진 사면(斜面)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급경사(急傾斜)를 이루고 있다. 이런 길을 정규등산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 이상할 것이다. 곧바로 진행할 경우에는 장재덕리 제천천으로 내려서게 되니 주의가 요구된다.

 

 

 

가만히 서있어도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니 스틱(stick)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주변의 나뭇가지들에 의지해서 내려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당연히 등산로를 찾기보다는 그냥 눈에 띄는 나뭇가지를 따라 길을 헤쳐 나간다. 하긴 그런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등산로를 눈으로 찾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급사면을 10분 정도 내려서면 울창하게 자란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숲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아직도 파란 이끼가 잔뜩 낀 원시(原始)의 숲을 지나면 널따란 밭으로 내려서게 된다.

 

 

 

 

산행날머리는 굴탄교()

밭의 오른편으로 난 시멘트포장 농로(農路)를 따라 잠깐 내려가면 굴탄리이고, 동네를 통과하면 만나게 되는 도로를 따라 왼편으로 100m정도 더 걸으면 굴탄교(), 굴탄교 옆에 있는 가옥(家屋)강촌수퍼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폐업(廢業)한 모양으로 담벼락 대용으로 걸쳐져 있는 강촌수퍼라고 쓰인 간판이 아니라면 이집이 옛날 강촌수퍼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굴탄교 아래는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행을 끝마치고 둘러앉아 쉬기에 딱 좋다. 물론 흘린 땀을 씻고서 말이다.

 

 

 

 

 

백화산(白華山. 933.4m)

 

산행일 : ‘13. 9. 15()

소재지 : 충북 영동군 황간면과 경북 상주시 모동면, 모서면의 경계

산행코스 : 반야교비지정등산로주행봉(舟行峰)암릉지대755부들재한성봉(漢城峰 : 백화산 정상)헬기장편백숲반야교주차장(순수 산행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안전산악회

 

: 백화산은 이곳 외에도 충남 태안읍(284.1m)과 전북 장수군(850.9m) 등 여러 곳에 있다. 그러나 이곳만큼 뛰어난 풍광(風光)을 보여주는 곳은 없다. 살이 떨릴 정도로 아슬아슬한 암릉 길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널려있고, 암릉 위를 오르내리는 중에 터지는 조망(眺望)도 최상급이다. 다만 암릉 위를 걷는데 따르는 위험성이 문제가 되겠지만, 조금만 주의한다면 별 탈 없이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이고, 그 어려움의 대가로 오랫동안 기억될만한 멋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산행들머리는 반야교(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경부고속도로 황간 I.C에서 내려와 4번 국도를 타고 김천·황간방면으로 달리면 황간면소재지(面所在地)에서 황간삼거리와 마주치게 된다. 삼거리에서 좌회전(상주방면)하여 황간교()를 건너면 49번 지방도로 올라서게 된다. 지방도를 따라 상주방면으로 10분 쯤 달리면 만나게 되는 우매삼거리에서 좌회전(반야사 이정표 참조)한 후, 석천을 왼편에 끼고 4분쯤 더 들어가면 천년고찰(千年古刹) 반야사 인근의 반야교()에 이르게 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이다.

 

 

 

반야교() 건너 등산 안내도 앞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더라도 주행봉으로 갈 수는 있으나, 855봉을 경유해서 주행봉으로 갈 계획이라면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만 한다. 시멘트포장도로를 5분쯤 걸으면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접어든다. ‘산책로이정표만 믿고 무작정 들어서면서 고난(苦難)의 행군(行軍)이 시작된다. 855봉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조금 더 진행한 후에 능선으로 올라서야 하는데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이곳으로 들어설 경우에는 855봉을 빼먹을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거칠고 위험한 산길에서 모험을 해야만 한다. 비지정등산로인지라 길도 희미할뿐더러 바윗길임에도 불구하고 안전시설(安全施設)이 전무한 것이다. 초보 등산객들은 결코 들어서서는 안 되는 코스이다.

 

 

 

산책로로 접어들면 이정표가 말하듯이 길은 임도(林道) 수준으로 잘 닦여 있다. 경사(傾斜)는 보통 수준, 조금이라도 가파르다싶으면 왔다갔다 갈지()자를 만들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산책로답게 곳곳에다 장의자(長椅子)를 설치해 놓아 걷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다. ‘오늘은 별 어려움 없이 정상에 오를 수 있겠구나.’ 안도의 한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임도는 끝을 맺고 만다. 반야교를 출발한지 20, 편했던 산행도 임도와 함께 끝을 고하고 만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의 부근에서 오른편에 제법 널따란 길이 보인다. 길을 로프로 막아 놓았지만 진행하고 본다. 비록 막혀있지만 길의 흔적은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더 들어가면 산악회의 시그널(signal)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닐만하다는 것은 아니다. 등산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윗길로 변하는데다 길의 흔적까지 희미해져버리기 때문에 산행에 이력이 붙은 사람들이 아니고는 길을 찾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끔 슬랩(slab)이 나타나지만 안전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위험하기까지 하다. 등산 초보자들이 들어서서는 안 되는 코스인 것이다.

 

 

 

 

잘 보이지 않는 산길을 찾아 바위를 오르거나, 우회(迂廻)하면서 진행하다보면 갑자기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트인다. 능선의 왼편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덕분에 모처럼 조망(眺望)이 터지면서 석천()과 석천을 가로지르는 반야교()가 또렷하게 나타난다. 하나 아쉬운 것은 짙은 안개로 인해 원거리(遠距離)의 조망은 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도를 벗어난 지 25분 정도가 지났다.

 

 

 

전망대를 지나서도 바윗길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 거리는 길지 않다. 10분 후에는 지능선으로 올라서면서 본래의 등산로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나는 지점에 고맙게도 이정표(주행봉/ 석천암(입구))가 세워져 있으나, 아쉽게도 산행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거리표시가 없는 탓에 현재의 위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행봉은 이곳에서도 35분을 더 올라가야만 한다.

 

 

 

본래의 등산로를 만나면서 길은 흙길로 바뀌고, 흔적 또한 또렷해진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또 다시 거친 바윗길로 돌아가 버린다. 그 바윗길은 아까 길을 잘못 들은 덕분에 고생했던 바윗길보다도 더 거대하고, 경사(傾斜)가 또한 더 가파르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험하다 싶으면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고, 거기에다 행여나 방심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봐 위험, 추락주의라는 경고판까지 세워두었다. 옆으로 몸을 틀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홈통바위를 지나고, 로프에 의지하지 않고는 오르기 힘든 직벽(直壁)의 바위를 지난다. 그러나 주행봉은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만 한다. 가파른 오르막 코스에서 두어 번을 더 고생을 해야만 주행봉에 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정상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올라가는데 위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드디어 주행봉(舟行峰)에 이른 것이다. 너른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의 한쪽 귀퉁이(반야사 방향) 바위무더기 위에 조그만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대단한 자손(子孫)이네요어느 등산객의 감탄이 이해가 간다. 이렇게 높은 주행봉의 정상에 무덤 하나가 들어 앉아 있는 것이다. 언제 무덤을 썼는지는 몰라도 옛날에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오랜 가뭄이라도 들 경우에는 산봉우리 하나를 잡아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되는데, 이때 산봉우리에서 무덤이 발견된 경우에는 가뭄의 원인이라고 여겨 파헤쳤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주행봉은 추풍령에서 황간으로 내려가며 올려다볼 때에 마치 수십 개의 돛을 활짝 편 거대한 범선(帆船)이 하늘을 떠다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행봉은 조망(眺望)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늘은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탓에 바로 옆에 있는 855봉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발아래 석천은 물론이고 멀리 황악산, 민주지산, 덕유산까지 눈에 들어올 텐데 말이다. 반야교에서 주행봉까지는 1시간30분이 걸렸다.

 

 

 

주행봉에서 백화산의 정상인 한성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까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야 한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이정표(주행봉/ 주차장)에서 아까 올라왔던 길이 아닌 왼편 길로 진행하면 된다. 이정표에 한상봉으로 가는 방향표시는 없지만 산길이 또렷하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성봉으로 향하는 주능선을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지고 만다. 날카로운 겹겹의 기암괴봉(奇巖怪峰)들이 안개가 만들어낸 파도 위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동양화 개인전에서 본적이 있는 풍경화(風景畵)가 연상될 정도로 장관(壯觀)이 펼쳐지고 있다.

 

 

 

암릉으로 올라서면 오금부터 저려온다. 칼날처럼 허리를 곧추세운 바위들이 마치 공룡의 등허리처럼 일렬로 서있는 것이다. 그 위를 걷게 되는데 어찌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곳을 지날 때에는 최대한 자세(姿勢)를 낮추어야 한다. 그리고 발을 디딜 곳, 손으로 잡을 만한 바위 틈새를 먼저 확인해보고 난 후에 진행해야 한다. 누가 주의를 준 것도 아닌데도 모두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다. 하긴 왼쪽이 수백 길의 깎아지른 낭떠러지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한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마중 나온다. 비록 겁은 나고 힘은 들지만, 스릴(thrill)만은 만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선물은 탁 트인 조망(眺望)이다. 공룡의 등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리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보면 시계(視界)는 거침없이 열린다. 오른편에는 산자락 사이를 구불구불 흐르는 석천이 S자로 크게 휘돌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석천 가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마 반야사일 것이다. 그리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전형적인 산촌(山村)의 풍경이 펼쳐진다. 산자락 사이에 낀 손바닥만한 들판에선 노랗게 벼들이 영글어가고 있고, 그 옆에는 뉴스프링빌CC의 코스들이 아름다운 곡선(曲線)들을 그려내고 있다.

 

 

 

 

 

암릉은 755봉까지 1.5Km이상이 계속된다. 비록 양쪽, 아니 특히 북쪽 사면(斜面)이 까마득한 벼랑이지만 다행이도 암릉 자체의 기복(起伏)은 그다지 심하지 않은 편이므로, 실족만 주의한다면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암릉은 755봉에 가까워질수록 바위 대신에 잡목(雜木)의 밀도(密度)가 높아지다가 755봉에서 드디어 암릉은 끝을 맺는다. 주행봉에서 755봉까지는 55분이 걸렸다. 755봉을 지난 산길은 언제 바윗길이었냐는 듯이 흙길로 변하면서 급경사(急傾斜)로 내리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내리막길은 길게 이어진다. 주행봉 정상을 오르느라 고도(高度)871.3m까지 높여놓았는데, 이렇게 길고 가파르게 내려선다면 절반 이상을 까먹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755봉에서 15분 정도 내려서면 안부사거리(이정표 : 한성봉 정상/ 주행봉/ 반야사/ 모서)인 부들재에 이르게 된다. 왼편은 정산저수지(상주시 모서면 정산1)로 내려가는 길이고,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에는 반야사에 이르게 된다. 백화산(한성봉) 정상은 앞으로도 한 시간 이상을 더 올라가야만 하니, 체력이 약한 사람들이라면 이곳에서 하산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ndif]--> 

 

 

 

 

부들재에서 한성봉정상까지의 구간은 경사(傾斜)가 가파른 바윗길이 길게 이어지는데, 그 바윗길은 거칠기까지 하다. ()의 구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힘든 구간이다. 거친 정도로야 아까 주행봉을 오를 때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이미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또 다시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 바윗길과 한판 씨름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중간에 두 번이나 휴식을 취한 다음에야 정상에 올라설 수가 있었다.

 

 

부들재를 나선지 15분쯤 될 즈음이면 다시 암릉이 시작된다. 이어지는 바윗길은 그다지 볼품은 없다. 기암괴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바위들은 보이지 않고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巖塊(암괴)들이 연이어서 나타날 따름이다. 주행봉에서 755봉까지의 구간에 비해 스릴이나 볼거리가 한참 뒤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망(眺望)은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경상도와 충청도의 산하(山河)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거기에다 고개를 돌려보면 주행봉이 우뚝하다.  

 

 

 

 

부들재에서 숨찬 오르막길을 1시간5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한성봉(백화산) 정상이다. 오르는 길에 가끔 우회로(迂廻路)가 보였지만, 이를 이용하지 않고 곧장 바윗길과 씨름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널따란 분지(盆地)로 이루어진 정상에 올라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정상표지석이다. 그러나 정상석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외에도 두 개나 더 세워져있는 것이다. 백화산의 경계(境界)를 이루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가 서로 경쟁하듯이 세워놓은 결과라고 한다. 그리고 정상석에 표기된 이름도 각기 다르다. 먼저 상주시에서 세운 거대한 빗돌에는 백화산 한성봉’, 그리고 영동군에서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든 자그마한 빗돌에는 포성봉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자그마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것에는 봉우리 이름이 없이 그냥 백화산이라고만 적혀있을 따름이다. 한성봉에서 동쪽으로 1쯤 더 가면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激戰地)이자, 고려 때 몽골 침입군을 격파한 '금돌산성'이 있다. 큰 성이 있던 곳이라 하여 예부터 한성봉(漢城峰)으로 불리던 것을, 일제가 우리 국운(國運)을 꺾을 목적으로 포성봉(捕城峯)으로 고쳐 불렸다고 한다. 포성봉은 금돌성을 포획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성봉은 2007년에야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상주시에서 세운 정상석 뒷면을 참조).

 

 

반야교 방면으로 하산을 서두른다. 길목에 산악회의 시그널들이 마치 무당집처럼 거창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아까 주행봉을 거쳐 이곳 한성봉으로 올 때 간혹 보이던 것하고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반야사/ 봉화터 2.7Km, 1시간20/ 한성봉정상)로 나뉜다. 오늘 처음으로 이정표에서 거리표시를 본다. 비록 봉화터 방향만 거리표시를 해 놓았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 동안 만났던 이정표들은 하나같이 거리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조금 더 내려가면 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은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편은 능선길을 타고 편백숲으로 가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가든지 반야교에 이르게 되므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산 길은 봉화터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급경사 내리막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산길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려가는 곳곳에서 제법 그럴싸하게 생긴 바위군락(群落)들이 눈요기를 시켜준다는 것이다. 한성봉을 출발해서 40분쯤 내려서면 헬기장에 이르게 되고, 헬기장을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바윗길로 변한다. 이곳에서 잣나무 숲이 나올 때까지는 왼편이 날카로운 바위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별로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산길이 바위벼랑에서 2~3m쯤 떨어져 나있기도 하지만, 바위벼랑임에도 불구하고 참나무숲이 짙게 우겨져 있기 때문이다.

 

 

 

헬기장에서 15분쯤 내려오면 갑자기 왼편으로 시야(視野)가 열리면서 멋진 바위전망대(展望臺)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눈앞에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엎드려 있고, 백화산과 이 봉우리들 사이를 흐르는 여덟 굽이 석천이 아름다운 풍경화(風景畵)를 그려낸다. 구불구불 흐르는 석천이 S자로 크게 휘돌면서 만들어낸 자그마한 땅에는 **반야사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눈요기를 실컷 즐기고 발걸음을 옮기면 5분쯤 후에 또 하나의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조금 전에 만났던 전망대에서 즐겼던 조망(眺望)과 같은 느낌이지만, 반야사의 전경(全景)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반야사(般若寺), 신라 성덕왕 19(720)에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 스님이 창건했다. 일설에는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백화산 일대는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찰에 문수보살을 의미하는 '반야'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절집으로는 주불전인 대웅전과 극락전, 지장전, 산신각, 종루, 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보물 13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망대를 나서서 5분을 더 내려서면 잣나무 숲이 나오고, 이어서 산길이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서(이정표 : 편백숲 0.1Km, 반야교 0.7Km/ 한성봉 3.0Km) 능선을 벗어나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편백나무 숲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나무들 또한 굵지가 않다. 그러나 벤치 등 편의시설은 제법 잘 갖추어진 편이다. 아직은 덜 알려져 있지만, 머지않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요즘 유행인 힐링(healing) 장소로 편백나무 숲에 대한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산행날머리는 반야교 앞의 주차장(원점회귀)

편백나무 숲을 지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정자(亭子)에 이르면 오른편에 길 하나가 보인다(이정표 : 부들재 2.1Km, 한성봉 3.2Km/ 편백숲 0.1Km). 아까 정상 근처에서 헤어졌던 계곡길(이정표에는 주차장으로 표시)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정자를 나서면 곧이어 계곡이다. 계곡에 이르자마자 물속으로 뛰어들고 본다. 물론 옷을 입은 채로다. 주저앉으면 물이 목에 차오를 정도로 멋진 소()를 그냥 지나치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정자에서부터 도로 수준으로 넓진 산길은 계곡을 두어 번 가로지른 후에 석천을 만나게 되고, 이어서 반야교를 건너면 조금 후에는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한성봉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대략 1시간20분 정도가 걸렸다. 물론 목욕시간을 뺀 시간이다. 이곳 영동군은 포도의 고장,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에 이르니 동네주민들이 재배한 포도를 팔고 있다. 두말 할 것 없이 10Kg을 사들고 버스에 오른다.

 

 

 

 

 

 

아가봉(雅佳峰, 541m) - 옥녀봉((玉女峰, 59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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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 : ‘13. 9. 8()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칠성면의 경계

산행코스 : 행운민박배티골매바위아가봉사기막재옥녀봉갈은재갈론계곡탐방안내소행운민박(산행시간 : 4시간20)

함께한 산악회 : 청지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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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아가봉과 옥녀봉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산이 많기로 소문난 괴산 땅에 있다 보니 다른 이름난 산들의 유명세(有名稅)에 밀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12이라는 TV프로에 갈은구곡이 소개되었고, 갈은구곡을 찾아 온 사람들이 아가봉과 옥녀봉을 끼워서 일정을 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은구곡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찾아볼만한 산이다. 특히 아가봉의 암릉에 널린 갖가지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은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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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들머리는 행운민박(民泊) 주차장

중부내륙고속국도 괴산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 괴산방향으로 달리다가 감물면소재지에 있는 광전사거리(감물면 광전리)에서 516번 지방도로 옮겨 칠성면소재지(面所在地 : 칠성면 도정리)까지 온다. 이곳(칠성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괴산댐(괴산수력발전소 : 칠성면 외사리)을 향해 들어가면, 댐을 지나면서 1차선으로 변해버린 좁디좁은 도로는 괴산호()의 호안(湖岸)을 따라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산행이 시작되는 갈론계곡 입구(칠성면 사은리)에다 내려놓는다. 과연 저런 도로를 버스가 지나다닐 수 있을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자동차끼리 서로 비켜나갈 정도의 공간이 가끔 눈에 띄기 때문이다.

 

 

 

행운민박 주차장(유료 : 갈론마을의 개인 주차장들은 하나 같이 유료로 운영하고 있다)의 계곡방향 귀퉁이에 있는 컨테이너(container) 뒤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컨테이너 바로 뒤에 있는 갈론계곡을 건너면 20평 남짓한 공터가 나온다. 이곳에 이정표(아가봉 2.6Km/ 갈론 0.4Km)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게 좋다. ‘갈론이란 방향표시는 갈론마을을 향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라는 지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하나 있다. 이곳에서 옥녀봉으로 곧장 오를 수 있는 북서릉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비지정 탐방로(非指定 探訪路)로 지정된 탓에 이정표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왼쪽 능선을 따라 오르면 옥녀봉 정상에 이르게 된다.

 

 

 

 

공터에서 아가봉으로 진행하려면 또 하나의 계곡을 건너야 한다. 바로 배티골이다. 배티골은 지형이 배()의 밑바닥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산길은 배티골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햇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짙게 우거진 숲은 원시(原始)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산길이 또렷한 것을 보면 아가봉을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하늘이 잠깐 열리는가 싶더니만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위를 향해 쭉쭉 뻗어 오른 낙엽송(落葉松 : 일본이깔나무) 숲이 길손을 맞이한다.

 

 

 

 

 

계곡을 두어 번 가로지르다보면 산길이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다. 계곡을 따라 난 길에 탐방로 아님이란 팻말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이 코스도 역시 비지정 탐방로로 묶여있는 모양이다. 이정표(아가봉 1.8Km/ 갈론 1.2Km)를 보면 벌써 30분 가까이 걸은 모양인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산길의 경사(傾斜)가 그만큼 완만(緩慢)했기 때문일 것이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완만하게 시작되지만 5분이 조금 지나면서 점점 가팔라지더니 나중에는 갈지()자로 길을 만들고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여갈 정도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다행이도 짧게 끝난다. 20분이 채 안되었는데도 산길은 벌써 왼편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이다. 방향을 트는 지점에서 보면, 봉우리 위로 곧장 오르는 길이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구태여 고집할 필요는 없다. 왼편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산길이 워낙 또렷하기 때문이다. 지도(地圖)에는 안부로 곧장 오르게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8부 지점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안부로 내려서게 된다. 안부로 떨어진 산길을 이후부터는 주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능선은 온통 소나무들이 독차지하고 있는데, 그 생김새는 모두가 제각각이다. 굽거나 뒤틀린 형상이 전형적인 토종(土鐘) 소나무이다. 어쩌면 저런 소나무들이 보다 질 좋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배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토종의 식물에서 배출되는 것이니 당연히 우리 몸에 더 나은 효능이 있을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endif]-->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눈이 호사(豪奢)를 누리게 된다. 바윗길의 특징대로 뛰어난 조망(眺望)을 보여주는 것이다. 왼편에는 비학산이 코앞이고, 그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산은 아마 군자산일 것이다. 오른편에도 이름 모를 산들이 첩첩이 쌓이며 하늘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진행방향에 보이는 아가봉 앞에 뽈록하니 솟아 나온 바위는 아마 매바위일 것이다.

 

 

 

안부(이정표 : 아가봉 1.1Km/ 갈론 1.9Km)에서 다시 맞은편 봉우리로 올라가면서 바윗길이 시작된다. 길가에 보이는 바위들은 거대하다거나 분포의 범위가 넓지는 않다. 그러나 그 생김새는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 물개를 닮은 것이 있는가 하면 달팽이를 닮은 것 등, 각양각색(各樣各色)의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능선에 가득한 노송(老松)들이 기암괴석들과 잘 어울리며 잘 그린 동양화 한 폭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암(奇巖)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다보면 다른 이정표(아가봉 0.5Km/ 갈론 2.5Km) 하나가 또 나오고, 곧이어 매바위에 이르게 된다. 매바위는 커다란 암석(巖石) 위에 기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올라 앉아있는 형상이다. 그 생김새가 매의 부리를 닮았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그게 문제다. 아까 맞은편 암릉에서 보았을 때 나타나던 매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며 위안을 삼아본다. 배티골을 벗어날 때부터 50, 능선에 올라서서는 25분 가까이 걸렸다.

 

 

 

 

매바위에서 경사가 거의 없는 길을 따라 15분 정도 더 걸으면 이내 아가봉에 올라서게 된다. 아가봉은 제법 너른 분지(盆地)이다.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바위 위에다 자그마한 정상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지도(地圖)를 검색하다 보면 아가봉보다는 성제봉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것이 의외로 자주 눈에 띈다. 원래는 이름이 없는 봉우리였고, 일부 사람들에게만 성제봉으로 불렸었는데, 언젠가 아가산악회에서 아가봉이라는 정상석을 세운 뒤로부터 아가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가봉 정상에서는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그러나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트인다고 해봤자 아까 암릉을 지나오면서 실컷 즐겼던 조망과 다를 게 하나도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공깃돌 모양으로 생긴 기암(奇巖) 등 주변 경관을 즐기다가 이내 옥녀봉으로 향한다. 아가봉 정상을 출발하자마자 밧줄 구간이 나타난다. 제법 긴 밧줄이 매여 있지만 조금만 주의하면 어렵지 않게 내려설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느 정도 산행에 이력이 붙은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바윗길이 서툰 여성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밧줄에 매달려 엉거주춤, 내려갈 줄을 모른 채로 기성(奇聲)들만 질러대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는 줄은 도대체 줄어들 줄을 모르고 있다.

 

 

 

 

 

 

밧줄에 매달려 안부로 내려선 다음에는 또 다시 맞은편 봉우리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작은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 산길은 급하게 왼편으로 방향을 틀면서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길을 만들어 낸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끝나고도 사그막재는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작은 오르내림을 두어 번 반복하고 난 다음에야 사그막재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다. 아가봉을 출발한지 40분 가까이 지났다.

 

 

 

 

사그막재는 옥녀봉 아래에 있는 안부사거리(이정표 : 옥녀봉 0.5Km/ 아가봉 1.2Km/ 탐방로 아님/ 탐방로 아님)이다. 왼편은 배티골로 내려서는 길이고, 오른편으로 내려갈 경우 사기막리 상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비지정 탐방로로 묶고, 밧줄을 쳐서 길을 막아버렸다. ‘생태계 보호’ ‘위험 지역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로 무작정 묶어놓고 보는 공단의 처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기막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진다. 높여야 할 고도(高度)200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0.5Km 구간에서 한꺼번에 높여야 하기 때문에 별 수 없었을 것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치고 오르다가 갈 길을 막는 거대한 바위들을 피해 우회(迂廻)하다보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옥녀봉 0.1Km/ 아가봉 1.6Km/ 탐방로 아님)로 나뉜다. 왼편에 보이는 또렷한 길로 진행할 경우 산행을 시작했던 행운민박 옆 공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곳도 역시 비지정 탐방로로 묶어버렸다 <!--[endif]--> 

 

 

 

 

갈림길에서 옥녀봉 정상은 금방이다. 옥녀봉 정상도 아가봉과 마찬가지로 제법 너른 분지(盆地)이다. 하지만 정상을 지키고 있는 표지석은 다르게 생겼다. 민간 산악회에서 세운 아가봉과는 달리 이곳의 정상석은 이곳 지자체인 괴산군에서 세워 놓은 것이다. 그 덕분에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정상석은 비록 작지만 귀엽게 생겼다. 옥녀봉의 정상도 역시 조망(眺望)은 별로이다. 정상이 숲으로 둘러싸인 탓에 시야(視野)가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사그막재에서 정상까지는 25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에서 갈은구곡으로 진행하려면 먼저 갈은재로 내려서야만 한다. 갈은재로 내려서는 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가파른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아주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제멋대로 자란 아름드리 노송(老松)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제법 눈요기를 시켜주기 때문이다. 옥녀봉을 출발해서 15분 정도가 지나면 갈은재에 닿게 된다.

 

 

 

갈은재도 안부사거리(이정표 #1 : 갈론 3.4Km/ 옥녀봉 0.3Km. 이정표 #2 : 갈은구곡 2.2Km/ 사기막리 1.0Km)이다. 오른편은 사기막리의 상촌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곧장 진행할 경우에는 남군자산에 이르게 되나 국림공원 관리공단에서 길을 막아 놓았다. 하산코스인 갈론계곡은 물론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갈론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도 역시 원시(原始)의 숲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는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이정도의 숲을 아직까지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그만큼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부분의 등산로들을 아무 이유도 없이 막아버리는 것은 불쾌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이런 숲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아쉬움은 참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원시의 숲을 어느 정도 빠져나오면 계곡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물기 한 점 없는 건천(乾川)이라서 아무런 걸림 없이 계곡을 오가며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갈은재에서 25분 정도를 내려서면 합수지점에 이르게 되면서 커다란 너럭바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선국암(仙局嵒)이라고 하는데, 바위 위로 올라보면 왜 선국암이라고 불리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다. 바위 위에 바둑판이 그려져 있고, 바둑판의 양옆에 있는 조그만 웅덩이에는 바둑알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 지역 분들이 바둑알을 넣어 놓은 모양인데, 전통의 바둑알(조개껍질과 조약돌로 만든)이 아니라 요즘에 사용되는 바둑알인 것이 눈에 거슬린다. 선국암에 얽힌 설화(說話)에 걸맞게 바둑알도 옛것을 넣어 놓으면 어떨까 싶다.

 

 

 

선국암에서부터 갈은구곡(葛隱九曲)이 시작된다. 9곡인 선국암을 시작으로 칠학동천((七鶴洞天 : 8)’, ‘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 : 7)’, 그리고 거북을 닮았다는 구암((龜岩 : 6)’, ‘금병((錦屛 : 5)’, ‘옥류벽((玉溜壁 : 4)’이 연이어서 나온다. 갈은구곡은 옥류벽을 마지막으로 일단 끝을 맺는다. 계곡을 벗어나 본래의 등산로로 올라서야함은 물론이다. 옥류벽을 뒤로하고 비학산을 마주보며 10분 정도 걸어나오면 다래골과 만나는 합수점에 닿는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주차장 0.9Km/ 옥녀봉 2.8Km/ 탐방로 아님)로 나뉘지만 오른편 길은 무시하면 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비지정 탐방로로 묶어 통행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은구곡을 모두 둘러보고 싶다면 공단의 주의를 무시하고 비지정 탐방로로 들어서야 한다. 3곡인 강선대(降仙臺)’는 통행금지지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선국암에서 갈림길까지는 20분 정도가 걸린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지 않고 갈론계곡을 따라 100m 정도 내려가면 2곡인 갈천정(葛天亭)’을 만날 수 있고, 시멘트도로를 따라 주차장으로 방향을 잡으면 왼편에 보이는 커다란 암벽(巖壁)이 제1곡인 갈은동문’(葛隱洞門)’이다. 갈은동문을 끝으로 갈은구곡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볼거리도 따라서 사라져버린다. 들녘에서 가을 뙤약볕에 무르익어가는 수수와 조(기장)을 구경하면서 느긋이 걷다보면 이내 속리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가 나오고, 이어서 다리를 건너면 갈은구곡표지석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갈림길에서 탐방안내소까지는 넉넉잡아 20분이면 충분하다.

 

 

 

 

 

 

산행날머리는 행운민박주차장(원점회귀)

탐방안내소에서 다리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마을이 갈론이다. 갈론마을을 보고 누가 산골마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보이는 집마다 훤칠한 것이 어디다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잘 지어진 것들뿐이다. 또한 길가에는 음식점과 민박집 간판들이 즐비한 것을 보면 주민들의 생업은 이미 농사가 아닌 듯하다. 농사를 짓던 시절 모습은 지금은 향수로나마 남아 있다면 다행일 것 같다. 산행이 종료되는 행운민박은 이곳 갈론마을에서도 10분 이상을 더 걸어 내려가야 한다. 아스팔트 도로 가에 핀 코스모스 꽃이 아니었더라면 지루했을 성 싶은 도로를 따라 걸으며 고향역한 곡조 구성지게 읊다보면 이내 행운민박에 도착하게 된다. <!--[endif]--> 

 

 

환산(環山 : 고리산, 581.4m)

 

산행일 : ‘13. 2 17(일)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산행코스 : 황골→제1보루→옥녀봉→제3보루(봉수대)→제4보루(감로봉)→환산 정상→동봉→황룡사↔부소담악(산행시간 : 3시간10분 + 부소담악 왕복 50분)

 

함께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징 : 본래의 이름은 고리산이었다. 아주 먼 옛날 대홍수 때 이 산 꼭대기에 배를 매는 고리가 있었다고 해서 그리 불렀다고 한다. 산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고리 환(環)’자를 써서 환산(環山)으로 변했다. 전형적인 흙산(肉山)이지만, 제4보루와 동봉 등 의외로 대청호(湖) 조망(眺望)이 뛰어난 봉우리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환산 자체보다는 추소리에 있는 부소담악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산이다.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산악회들이 부소담악에다 환산을 덤으로 넣어서 산행을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산행들머리는 이백리 황골입구

경부고속도로 옥천 I.C에서 빠져나와 옥천시내를 통과한 후, 4번 국도를 타고 대전방향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북면소재지(面所在地)인 이백리에 이르게 된다. 4번 국도(國道)의 이백삼거리(군북면 이백리)에서 내려와 경부선 철길(鐵道)과 고속도로 아래 굴다리를 차례로 빠져나가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오른편 추소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방 황골입구에 이르게 된다.

 

 

 

 

산행은 황골입구의 도로변에서 시작된다(정상까지는 4.85Km). 들머리에 산행안내도와 이정표, 그리고 환산의 내력을 적어 놓은 안내석이 세워져 있으니 참조하면 된다. 산행이 시작되면 처음에 잠깐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얼마 안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파르게 변해버린다. 곧바로 위로 치고 오르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之)자를 만들어 내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파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3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오르면 능선안부(이정표 : 정상 3.95Km/ 이백리 황골말 900m)에 올라서게 된다. 제1보루(堡壘 : 360.4m)는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우리로 오르기 직전에 보이는 표지석을 지나 꼭대기에 오르면 먼저 삼각점이 눈에 띈다. 전면에 이백리 분지(盆地)와 고속도로 등이 보이나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로 인해 썩 뛰어난 편은 아니다.

 

 

 

 

 

 

안부로 되돌아와 다시 왼편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 위로 올라서게 된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봉우리 위는 작은 공원(公園)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다. 공들여 쌓은 돌탑이 몇 기, 그리고 산행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담아두어도 좋을 성 싶은 문구(文句)까지도 돌탑에 적어 놓았다. 어느 개인이 정성들여 가꾼 모양인데, 이 자리를 빌어 그분께 감사를 드려본다. 산불감시초소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이백리 분지(盆地)를 지나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그리고 국도가 잘 조망된다. 고속도로 너머로는 달이산과 대성산, 서대산, 그리고 마성산과 식장산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산불감시초소에서 잠깐 내려섰던 산길은 금방 평탄(平坦)해진다.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면 좌측에 하산로(정상 3.55Km/ 이백리 황골말 1.7Km)가 보이고, 다시 6~7분쯤 더 걸으면 봉우리 앞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정상 3.15Km/ 이백리 황골말 1Km)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진행하면 환산 정상으로 곧장 가게 되고, 왼편에 보이는 능선(이정표의 황골말 방향)은 옥녀봉으로 오르는 길이지만,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옥녀봉으로 오를 경우 주의해야 할 지점이 있다. 옥녀봉을 향해 오르던 산길이 중간쯤에서 왼편으로 산의 사면(斜面)을 째면서 올려놓는 반대편 능선 안부가 바로 그곳이다. 능선안부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이때 왼편으로 진행해서는 안 된다.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 제2보루(堡壘)를 거쳐 증약소류지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이다. 능선 안부에서 옥녀봉 정상까지는 채 2분이 안 걸린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밋밋한 봉우리일 따름인 옥녀봉 정상은 개념도에도 봉우리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그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옥녀봉’이라고 적힌 코팅지만이 이곳이 옥녀봉임을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1보루에서 옥녀봉까지 오는 데는 30분 가까이 소요된다.

 

 

 

‘보험처리 해 놓으세요.’ 같이 산행을 하던 일행이 불쑥 한마디를 건넨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편 나뭇가지 사이로 뭔가가 나타나고 있다. 슬그머니 내다보니 한반도(韓半島)를 닮았다. 비록 잘생기지는 못했지만 대청호반(湖畔)이 한반도의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옥녀봉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아까 옥녀봉을 우회(迂廻)했던 환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이정표 : 옥녀봉 0.6Km/ 이백리 황골말 1.6Km). 이어서 고저(高低)의 차가 별로 없는 능선을 따라 20분 정도 더 진행하면 제3보루(堡壘)에 이르게 된다(이정표 정상 2.05Km/ 이백리 황골말 2.8Km). 제3보루는 조선시대에 **봉수대(烽燧臺) 역할을 겸했다고 한다. 옛날 석축(石築)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봉수대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봉수대는 남쪽으로 50리쯤 떨어진 ‘월이산 봉수’를 받아 북쪽 3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회덕의 계족산 봉수’에 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봉수대에는 봉수별장 1인, 감관 10인, 봉군 1백인이 근무했다고 한다. 옥녀봉에서 이곳 3보루까지는 대략 20분 정도가 걸린다.

**) 봉수대(烽燧臺)는 봉화대(烽火臺)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봉수대(烽燧臺)이다. 본래 낮에 올리는 불을 수(燧)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는 낭연(狼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리의 똥을 태워서 연기를 피워 올렸기 때문이다. 이리의 똥을 태워 만든 연기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이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연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밤에 피우는 것을 봉화라 불렀다. 봉화대 위에 길고(桔橰)라고 하는 틀을 세우고, 그 위에 쇠로 만든 둥우리 같은 것을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땔감을 가득 넣어두고 있다가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러면 하늘 높이 커다란 불꽃이 솟았고, 이 불꽃을 이용해 위급상황을 도성(都城)에 알렸던 것이다.

 

 

 

 

제3보루(堡壘)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10분 정도를 바위가 즐비한 능선을 치고 오르면 바위봉 위에 올라서게 된다. 봉우리 올라서면 식장산 방향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바위 봉우리를 내려서서 얼마간 더 진행하면 추소리 안양골로 내려가는 길과 나뉜다(이정표 : 추소리 안양골 1.5Km/ 환산 정상). 안양골 갈림길을 지나면 556봉인 제4보루(堡壘)이다. 4보루는 감로봉이라고도 불리는데 오늘 산행 중에 가장 조망(眺望)이 뛰어난 곳이다. 북으로는 환산의 정상과 동봉이 잘 조망되고, 발아래로는 추소리의 비경(秘境)지대인 부소담악과 부근의 대청호가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그 뒤로는 속리산과 백화산 포성봉이 하늘금을 그려낸다. 3보루에서 4보루까지는 20분이 조금 못 걸렸다.

 

 

 

 

 

 

 

 

감로봉에서 내려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감로마을 갈림길(이정표 : 감로마을 1.6Km)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부터 거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봉우리 꼭대기에 거의 다다를 즈음에 왼편으로 비야리 갈림길(이정표 : 비야리 마을회관 1.59Km)이 다시 나뉘고, 2분쯤 후에는 삼각봉 위로 올라서게 된다.

 

 

 

 

 

삼각봉에서 능선을 따라 걷다가 가파른 능선을 한 번 더 치고 오르면 드디어 환산 정상이다. 옛날에 제5보루(堡壘)가 있었던 환산정상은 널따란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데, 사방이 숲으로 가려 있어 조망(眺望)은 트이지 않는다. 정상에는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정상표지석과 이정표(이평리 갈마당 1코스 2.7Km/ 비야리 2.5Km, 황곡리 2.9Km, 이평리 갈마당 3코스 임도 2.9Km/ 봉수대 2.8Km, 이백리 황골말 4.85Km)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정상표지석에 산의 이름이 세 개나 적혀있다. 고리산, 환산(環山), 그리고 고시산(古尸山)이다. 만일 지자체(地自體)에서 이 정상석을 세웠다면, 산의 이름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이름에 대한 사연은 뒷면에 표기(表記)해도 될 테니까 말이다. 감로봉에서 정상까지는 30분, 산행을 시작한지는 2시간10분이 조금 더 지났다.

 

 

 

 

 

 

환산 정상에서 동봉은 금방이다. 그러나 진행하는 데는 힘이 많이 드는 구간이다. 꽤나 많이 고도(高度)를 낮추었다가 다시 가파르게 치고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5분쯤 내려오면 능선 안부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 안부에서 갈마당 3코스가 왼편으로 열린다(이정표 : 정상 0.2Km/ 이평리 갈마당 2코스 2.6Km/ 이평리 갈마당 1코스 2.5Km). 안부에서 동봉까지는 다시 10분 조금 못되게 치고 올라야 한다. 동봉의 정상도 조망(眺望)이 시원스럽게 트이는 곳이다. 지나온 방향에는 환산이 서있고, 환산을 사이에 두고 양 옆에 대청호의 풍광(風光)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있다.

 

 

 

 

 

동봉에서 바라본 환산

 

 

동봉 정상에서 3분 정도 내려오면 갈마당 2코스로 내려가는 길과 추소리 서낭당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이정표 : 서낭당 1.6Km/ 물아래길 2.0Km/ 정상 0.47Km). 이곳에서는 오른편의 서낭당(추소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서낭당 방향으로 들어서면 바위지대까지 낀 가파른 길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등산로는 잠시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파르게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서낭당 방향으로 들어서면 바위지대까지 낀 가파른 길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등산로는 잠시 완만(緩慢)하게 이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파르게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금만 가파르다 싶으면 어김없이 안전로프를 매달아 놓았기 때문이다.

 

 

 

로프에 의지하여 하산을 서두르다 보면, 고도(高度)가 낮아짐에 따라 대청호의 푸른 물빛이 점차 눈앞으로 다가온다. 추소리와 대청호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인데,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도 잡목(雜木) 몇 그루가 앞을 가로막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이 지역을 명품(名品) 관광지로 만든 부소담악은 대청호를 향해 길게 파고드는 형상이다. 한마디로 멋진 풍광(風光)이다.

 

 

 

산행날머리는 추소리 황룡사 정문

대청호에 푸른 물빛에 취해 걷다보면 오른편에 황룡사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어서 산자락 끄트머리에 있는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서면 오늘의 산행은 끝을 맺는다. 날머리에 서 있는 산행안내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정상에서 이곳까지는 2.2Km, 대략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추소리에 내려서면 곧바로 세심원(洗心阮=황룡사) 정문 앞이다. 유불선(濡佛仙)을 아우른다는 세심원은 ‘세계인류세심운동본부’라는 큰 글자 밑에 ‘남북통일’과 ‘인류평화’가 쓰여 있다.

 

 

구태여 세심원을 둘러볼만한 의미를 찾을 수 없어 도로 건너편에 있는 부소담악(芙沼潭岳)으로 향한다. 도로를 건너 200m쯤 걸으면 대청호가 선을 보인다. 구부구비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호반(湖畔)의 풍경이 참 아름답다. 마을 끄트머리에서부터 부소담악의 들머리인 정자(亭子)까지는 나무테크로 깔끔하게 길을 조성해 놓았다.

 

 

 

 

 

 

부소담악(芙沼潭岳)이란 지명(地名)은 추소리의 자연마을인 추동, 부소무니, 절골 중 부소무니 앞 물위에 떠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소담악은 갈수기(渴水期)와 만수위(滿水位) 때 높이가 달라지는 700여m의 절벽(絶壁)이 물줄기를 따라 병풍처럼 길게 이어진다. 생김새가 산맥에 가까워서, 오늘 같이 갈수기인 때에는 높은 산을 산행하듯 암벽(巖壁)을 오르내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특히 부소담악(芙沼潭岳)은 물에 잠기기 전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일찍이 우암 송시열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고 ‘**소금강(小金剛)’이라고 이름 지어 노래했을 정도이니 그 빼어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중 '가장 아름다운 6대 하천'에 오를 만큼 절경이다.

**) 소금강(小金剛)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청학산기(靑鶴山記)」에서 유래한 것으로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는 의미이다. 전국적으로 소금강이라 불리는 명승지(名勝地)가 많은 이유는, 소금강이라는 단어(單語)를 아름다운 절경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식어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부소담악을 감싸며 돌아드는 물길은 큰 호수(湖水)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그 폭이 넓고 깊다. 앞산자락을 적시고 흐르는 모습이 절경(絶景)이어서 옥천군에서 정한 ‘추소 8경’의 하나로 꼽혀 있다. 유구한 세월 속에 추소팔경은 빛바랜 지 오래지만 부소담악은 대청호가 들어서면서 오히려 그 자태(姿態)가 더욱 도드라졌다. 예전의 선경(仙境)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부소담악은 생긴 모양새로 보면 산이라기보다 산맥(山脈)에 가깝다. 40~90m 높이의 절벽이 강줄기를 따라 병풍처럼 이어졌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머리에 얹은 절벽(絶壁)은 예로부터 병풍이라고 불려왔으니, 물에 잠긴 지금은 '숨은 병풍'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