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21구간(산동-주천)

 

여행일 : ‘22. 7. 2(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산동면과 남원시 주천면 일원

여행코스 : 산동면사무소(1.9km)→현천마을(1.8km)→계척마을(5.2km)→밤재(2.7km)→지리산유스호스텔(4.3km)→지리산둘레길 주천센터(거리 및 시간 : 15.9km/ 실제는 ‘지리산유스호스텔’까지 13.14km를 4시간 1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21구간(산동-주천)을 걷는다. 6개 코스(68km, 목아재-당재구간은 폐쇄됐다)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마지막 구간이자, 지리산둘레길 걷기 대장정이 끝나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높이가 490m나 되는 ‘밤재’를 오롯이 넘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리산의 영봉인 노고단을 바라보며 걷는 즐거움도 있다. 거기다 현천마을과 계척마을에서는 구례의 자랑거리인 산수유를 실컷 눈에 담는 재미도 있다. 봄철에 걸어야 제격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에 무더운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 들머리는 산동면사무소(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완주-순천고속도로 북남원 TG를 빠져나와 동남원로를 타고 남원교차로까지, 17번 국도(오수방면)로 방자교차로(남원시 광치도). 이어서 산업로(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면으로 24km쯤 내려오다 원촌교차로(구례군 산동면 계천리)에서 내려오면 곧이어 산동면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내비게이션에 ‘산동면사무소’를 입력하고 찾아와도 된다. 참고로 이곳 산동면 일대는 ‘다른 날의 생일’이 ‘같은 날의 제사’로 환치되는 슬픔의 현장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기도 했고, 또는 어느 쪽도 아니었던 사람들이 목숨줄을 놓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해야 했단다. 사람들은 면사무소 뒤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노고단 골짜기에서 개별로 죽고 집단으로 죽어갔다.

▼ 구례군 산동면사무소와 주천면(남원시)의 지리산둘레길안내센터를 잇는 15.9km 길이의 둘레길로 난이도는 ‘중(주천에서 출발할 때는 ’상‘)’으로 분류된다. 370m나 고도를 높여야한다는 어려움은 있지만 오르막구간의 길이가 길어(8,9km)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감안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난 ‘상’으로 꼽고 싶다. 높이 490m의 ‘밤재’말고도 ‘꼭두마루재(해발 338m)’라는 또 하나의 재를 오롯이 넘어야만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처럼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여름날에는 ‘상’으로도 부족해 ‘상상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건각을 자랑하는 도반들도 6시간이 다 되어서야 트레킹을 마칠 수 있었다.

▼ ‘원촌길(북쪽 방향)’을 따라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출발해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면사무소 앞 담벼락에 우리네 어버이들의 삶이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은 물론이고, 그 두부를 안주삼아 구례막걸리를 마시는 어르신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행복으로 넘치고 있었다. ‘어즈버 태평세월이런가...’

▼ 그림과는 달리 마을은 텅 비었다. 사람들이 모두 벽화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라도 한 걸까? 두부를 만들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먹고 마시며 정담을 나누던 어르신들까지도 일절 눈에 띄지 않는다. 인구가 나날이 줄어가는 시골 마을의 전형적인 풍경이 아닐까 싶다.

▼ 대한뉴스 제725호에는 ‘어린이는 ’나라의 새싹‘으로 등장한다. 그런 소중함을 대접이라도 하려는 듯 ’원촌초등학교‘ 앞 담벼락은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꾸며놓았다. 말뚝박기·구슬치기·딱지치기·고무줄놀이 등 추억 속에서 소환된 어린이들로 한 가득이다. 놀다보면 하루가 너무도 짧다나?

▼ 마을을 빠져나오자 ‘19번 국도’ 진출입로, 몇 걸음 더 걷자 또 다른 갈림길(벅수 : 주천 15.3㎞/ 산동 0.8㎞)이 나온다. 오른편은 벽화로 입소문을 탄 삼성마을. 그것도 19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한번쯤 들어가 볼만도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이 계척마을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찌 한눈을 팔 수 있겠는가.

▼ 개울 건너 ‘삼성마을’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저 마을은 벽화로 꽤 유명세를 탔다. 담벼락에다 마을 유래와 연관된 그림을 그려 넣었다. 뿐만 아니라 벽화와 어우러지는 미니 정원까지 만들어 찾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마을에 거주하는 화백의 재능기부로 벽화의 유지관리는 물론이고 벽화거리 확장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란다.

▼ 둘레길은 ‘19번 국도(산업로)’의 우측 아래로 난 옛 도로를 따른다. 모내기를 끝낸 논이 오른편에서 함께 걷는다.

▼ 고개를 들자 산동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 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산동’의 특징으로, 이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산동애가’의 탄생 배경이 된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한 채로/ 까마귀 우는 골에 병든 다리 절며절며 달비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이하 생략>. ‘산동애가’는 오빠 대신 처형장으로 끌려간 백부전(본명은 ‘白順禮’이나 노리개처럼 예쁘다고 하여 부전이라 불렀단다)이 지어 불렀다고 전해지는 애달픈 노래다. 큰오빠가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죽고, 둘째 오빠는 여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됐다. 셋째 오빠(여순사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마저 끌려갈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녀는 가문을 잇도록 하기 위해 대신 죽음을 자청하고 나선다.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의혹만으로 양민을 총살시키던 암흑의 시절, 산수유 꽃처럼 아리따운 열아홉 살 처녀가 형장에 끌려가면서 불렀던 가슴 저린 ‘산동애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6분, ‘계천교’ 앞 버스정류장(현천마을)에 이르자 벅수(주천 14.7㎞/ 산동 1.2㎞)가 방향을 틀라며 왼쪽을 가리킨다. 19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인데, ‘현천마을’의 커다란 표지석이 초입에 세워져 있었다.

▼ MBN의 예능 프로그램 ‘자연스럽게’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자연스럽게’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세컨드 하우스를 분양받은 셀럽들이 전원생활에 적응해 가며 도시인들의 로망인 휘게 라이프(Hygge Life)를 찾는 ‘소확행’ 힐링 예능 프로그램(2019.8.3.-2020.5.30 방영)이다. 그 베이스캠프가 현천마을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현천마을로 들어가는 길가는 산수유나무 천지다. ‘산수유 마을’이라는 입소문을 증명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과나 복숭아처럼 구획된 단지를 이루지는 않는다. 맞다. 산동네인 산동면은 논과 밭이 적어 생계유지에 필요한 작물을 재배할 땅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족한 경작지를 피해 집 주변·돌담·개울 등에 산수유를 심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에 융화되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그걸 보려는 사람들은 또 전국각지에서 몰려오고...

▼ 굴다리를 지나 10분쯤 걷자 노고단과 시각적 눈높이를 마주하는 현천(玄川)’ 마을에 이른다. 대표적인 산수유마을이다. 봄에는 노란 산수유꽃이 핀 돌담과 저수지에 비친 노란 산수유꽃 반영이, 겨울에는 흰 눈이 덮인 빨간 산수유 열매가 아름답다는 마을이다. 참고로 ‘현천’이란 지명은 견두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현(玄)자를 닮았다는 데서 시작된다. 마을 앞으로는 내(川)가 흘러내린다. 그 내에서 옥녀가 매일같이 빨래하는가 하면, 늙은 선비는 고기를 낚는(魚翁水釣)단다. 순 한글로는 ‘개머내’라나?

▼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는 정자(玄溪亭)가 들어앉았다. 340년이나 묵다보니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중심축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 공동체가 공동체다움을 향유하게 만드는 구심체 역할이라고나 할까?

▼ 광장 한켠에는 노란 산수유꽃으로 뒤덮인 현천마을 종합안내도와 함께 ‘산수유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봄이면 산수유의 화려함과 향이 길을 가득 메운다는 13.8km 길이의 둘레길이다. 얼굴마담인 꽃담길·꽃길을 위시해 산수유 군락지와 소박한 마을이 있는 사랑길, 산동면의 조망과 생활 속 산수유농업을 엿볼 수 있는 풍경길, 천년 역사의 할아버지 나무를 볼 수 있는 천년길, 그리고 산수유와 지리산 둘레길이 만나는 둘레길로 구성되어 있다.

▼ 벅수(구례 163)는 현계정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라 이른다. 하지만 이를 간과한 우리 일행은 곧장 마을로 들어섰다. 이때 ‘현천저수지’가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수면에 비친 노란 산수유꽃 반영이 무척 아름답다고 알려지는 호수다.

▼ ‘자연스럽게’는 도시에서의 지친 생활에서 벗어나 시골의 빈집을 수리해 자연과 함께 힐링의 시간을 보낸다는 콘셉트로 진행됐다. 방송의 효과일까? 방송 이후 현천저수지 위쪽에 마을에서 운영하는 ‘카페 자연스럽게’와 특산물 판매장이 오픈됐다.

▼ 카페에서라도 호숫가로 내려가야 했건만 우리는 계속에서 마을안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번에는 ‘산수유길 5코스’ 이정표에 적힌 ‘둘레길’이란 문구에 홀렸다. 아무튼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도 모르고 올라가다 느티나무 쉼터를 만났다. 풍속화로 치장된 축대를 쌓고, 위에는 벤치에 식수대까지 마련해놓았다.

▼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잘못 들어섰는지를 알게 된다. 느닷없이 ‘견두산 등산로’ 이정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맨 후미에서 둘레길 도반들을 따라가는 입장으로 바뀌어버렸다.

▼ 카페로 되돌아와 호숫가로 내려서자 ‘전인화네 집’이 잠시 들렀다가란다. 셀럽으로 참여한 전인화가 촬영기간 동안 머무르던 주택이다. 이곳 말고도 김종민이 머물던 ‘비엔비하우스’와 허재의 ‘코재하우스’도 있다는데 위치를 몰라 찾아보지는 못했다. 참고로 ‘자연스럽게’는 셀럽들의 시골 마을 정착기를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은 이 마을에 머물며 자연의 시계에 따라 움직이는 ‘내추럴리즘 힐링라이프’에서 행복을 찾아간다.

▼ ‘카페 자연스럽게’는 호숫가에서 올려다봐야 제멋이다. 러브마크까지 단 저곳에 앉아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겨보면 어떨까? 현천저수지 너머 지리산 능선의 아름다운 풍경이 가미될 테니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쉽지만 차를 파는 이가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 저수지 끝,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명당자리에는 정자를 들어앉혔다.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호숫가 풍광을 가슴에 담아가라는 배려이지 싶다.

▼ 현천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아스팔트를 벗어난다. 그리고는 논과 밭 사이의 논두렁·밭두렁을 걷는다. 이때 ‘농작물에 손을 대지 말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농부들이 애써 가꾼 작물에 손을 대는 짓궂은 나그네들이 있나 보다.

▼ 오늘도 다양한 야생화를 만날 수 있었다. ‘개망초’도 그중 하나. 뽑고 뽑아도 또 다시 자라나는데 질린 농부가 ‘에이 망할 놈의 풀’이라고 외친 게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서글픈 식물이다. 망초 중에서도 가장 못났다고 해서 ‘개망초’라나? 하지만 무리지어 피어나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보라! 저 꽃밭을 보고 어느 누가 못생겼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들꽃들에 눈 맞추며 5분쯤 걸었을까 신목(연관마을의)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느티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거대한 등치를 자랑하는 나무는 만들어내는 그늘도 그에 못지않게 풍성했다. 둘레길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놓은 이유일 것이다.

▼ 벅수(주천 13.6㎞/ 산동 2.3㎞)는 연관마을로 들어가지는 말고 스치듯 지나가란다. 대신 ‘마을 유래비’를 세워 미안한 마음을 전해준다. 조선 중엽 고씨가 남원으로 가던 중 산 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길조라 여기고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나? ‘연관’이란 지명은 설촌 당시 산 밑에서 연기가 피어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마을의 수문장 노릇을 했음직한 동구 밖 첫 농가는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곳 구례도 귀농·귀촌이 낯설지 않은 요즘이다. 사연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지리산 기슭에서 자연의 속살을 누비기 위해 찾아온다. 그들은 세척된 채소를 문 앞에서 받는 편리함 대신, 가축 분뇨 섞인 흙에서 살아있는 먹거리를 마련하려고 밤낮으로 힘을 쏟는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이 싫어 도회지로 떠나는 이들의 숫자도 만만찮은 게 요즘의 현실이다.

▼ 마을 근처라선지 길이 시멘트포장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노고단에서 만복재를 거쳐 정령치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룻금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비포장으로 바뀐다.

▼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산속으로 들어서는가 싶던 둘레길은 작은 고갯마루(벅수 : 주천 12.9㎞/ 산동 3.1㎞)를 넘는다. 266m에 불과한 높이지만 무더운 날씨 탓인지 땀을 한바가지나 쏟고 나서야 겨우 오를 수 있었다.

▼ 고개를 내려와 모퉁이를 돌아서자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정자 하나가 오롯이 나타난다. 저렇듯 산수유 마을들은 자리가 좋아 보이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정자를 세워놓았다. ‘손님’을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라고나 할까?

▼ 정자 앞에는 지리산둘레길(산동-주천) 안내판을 배치했다. 구간의 특징을 들먹인 다음, 산수유 시목과 편백나무 숲, 원촌마을 오일장 등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다.

▼ 며칠 전 내린 비로 물이 찰랑거리는 저수지를 지나 ‘계척마을’로 들어선다. 구례군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수유의 시목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집집마다 돌담 너머로 산수유나무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참고로 계척마을의 원래 이름은 ‘계천(溪川)’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계수나무(桂樹)를 닮은 개울의 생김새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베틀바위 안에서 베를 짜서 자(尺)로 쟀다는 설화에서 한 자씩을 따서 계척(桂尺)이 되었단다.

▼ 계척마을을 지켜주는 거대한 느티나무는 390년이나 묵었다. 그러니 어찌 신령스럽지 않겠는가. 밑동에 제단을 꾸렸다. 계척마을의 지킴이 신, 즉 신목(神木)으로 삼은 것이다.

▼ 어르신들 쉼터를 지나자 이번에는 ‘산수유 시목(始木)’이 반긴다. 이 나무는 중국 산둥(山東)성의 한 처녀가 구례로 시집을 오면서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는 전설과 함께 1,000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이후 산수유나무는 마을 전역으로 퍼졌고 가난한 산촌의 생계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산수유를 팔아 자녀를 대학에 보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참고로 새댁이 심었던 묘목은 ‘할머니 나무’로 불리며 전남 중요농업유산 제1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지금도 봄이 되면 노란 꽃을 활짝 피우는데, 매년 3월 하순에 열리는 ‘구례 산수유축제’는 이 할머니 나무에 풍년을 비는 ‘시목제’를 올리면서 시작된다.

▼ 시목지 앞은 테마파크로 조성해 놓았다. 성을 쌓아올렸는가 하면, 폭포와 분수까지 만들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해서 ‘이순신 성’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참고로 정유재란 중이던 1597년, 이순신은 구례로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난다. 온갖 고문으로 피폐해진 몸과 모친을 잃은 찢어지는 마음에도 임금의 명으로 백의종군 길에 나섰다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순천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 이곳은 ‘백의종군로, 남도 이순신길’의 출발점이다. 그래선지 축대에 이순신의 어록인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를 주제로 장군이 걸었던 ‘백의종군’의 발자취를 설명과 함께 그려 넣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어지니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저 결의는 결국 ‘명랑해전’이라는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첩을 이루어낸다.

▼ 성벽 앞은 홍보의 장으로 활용했다. 구례군의 관광안내도를 중심으로 ‘구례의 길’과 ‘남도이순신길’의 안내도를 배치했다.

▼ 시목지에서 100m쯤 내려오는 곳에서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벅수(주천 11.8㎞/ 산동 4.1㎞)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남도이순신길’의 이정표는 곧장 직진해 산동면사무소로 가란다. 두 길이 이곳에서 헤어진다는 얘기다.

▼ 둘레길은 이제 ‘밤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산동면의 논과 밭 사이로 난 길이 정겨운 구간이다.

▼ 5일 후면 소서(小暑).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로, 온갖 과일과 소채가 풍성해진다. 저 사과처럼...

▼ 시목지에서 17분쯤 걸었을까 잘 꾸며진 체육공원이 나왔다. 다양한 종목의 경기장에다 깔끔한 화장실까지 갖췄다. 계척마을 주민들을 위해 조성해놓은 모양이데,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시설은 방치되어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운동장에는 사람 대신 잡초만 가득하고 입구의 이정표는 썩을 대로 썩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 체육공원을 지나자마자 임도를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선다. 길가 벅수(주천 10.8㎞/ 산동 5.1㎞)가 방향을 일러주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참! 이곳에서 집사람과 합류했다. 산수유 시목지에서 출발했으니 한참이나 더 갈 수 있었으련만, 서방님이 길이라도 헷갈릴까봐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 집사람을 앞세우고 산자락을 파고든다. 이쯤에서 팁 하나. 산속으로 들어서기 전 기상(氣象) 상태부터 확인해 볼 일이다. 두어 번이나 개울을 건너야만 하는 이 구간은 폭우가 내릴 경우 통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입구에 ‘우회로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니 일기가 불순할 경우 참조하면 되겠다.

▼ 이제부터는 본격 산길이다.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놓았으니 속도를 조금만 떨어뜨리면 그만이다.

▼ 산속으로 들어선지 20분. 편백나무 숲속으로 들어선다. 70년대 민둥산 가꾸기 일환으로 구례군에서 조성했다는데, 수령 40년 이상의 편백나무 수만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보아오던 다른 편백나무 숲들과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다른 곳들이 예쁘게 화장한 숲이라면 이곳의 숲은 맨얼굴이다. 가꾼 듯 가꾸지 않은 듯, 몇 개의 산책로와 벤치, 평상, 화장실 등 힐링을 얻으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갖추었다.

▼ 편백나무 숲은 한 점 햇살까지도 쉽게 통과시키지 않는다. 울창한 숲은 한낮인데도 해를 삼켜버렸다. 그건 그렇고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다. 숲길을 걸으며 머리가 맑아진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좋은 길을 열어준 주민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조붓한 길을 따라 살짝 오르내리며 편백나무 숲을 벗어나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벅수(주천 9.7㎞/ 산동 6.2㎞)는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란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곧장 가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곳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길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우린 아래로 내려섰다. 지레짐작만으로 방향을 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얕은 계곡과 만났다. 우린 너나없이 흐르는 물에 세수부터 하고 본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는가 하면, 심지어는 여자가 곁에 있는데도 웃통까지 벗어젖히고 땀을 씻는다. ‘더위야 물러가라!’에 예의까지도 묻혀갔다 보다.

▼ 또 하나의 개울을 건넌 둘레길이 이번에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바닥을 드러내던 2주 전과는 영 딴판이다. 넘치지는 않지만 졸졸 물소리까지 내면서 잘도 흘러간다.

▼ 길가에 널브러진 고사목이 눈길을 끌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은 저 나무에도 해당되는 걸까? 굵디굵은 게 천년은 족이 살았음 직한데, 삭을 대로 삭은 게 이 또한 천년에 가까울 것 같다.

▼ 그렇게 15분 정도를 올라가던 길은 또 다시 개울을 건넌다. 그리고는 시멘트포장 임도(벅수 : 주천 9.1㎞/ 산동 6.8㎞)로 올라선다. 아까 개울로 내려가면서 헤어졌던 임도로 여겨지는데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 봄꽃이 다 졌다고는 하지만 무공해 산골에 벌통 하나 없겠는가. 그런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올 봄이던가? 언론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꿀벌 연쇄 실종사건’의 연장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4년 밖에 없을 것이라 경고하지 않았던가.

▼ 임도로 올라선지 10분. 숲속 길을 빠져나오자 외딴집(벅수 : 주천 8.8km/ 산동 7.1km)이 보이고, 밤재로 향하는 길이 시작된다는 팻말이 서 있다. 지금은 차량들이 터널을 이용해 오가지만, 옛 사람들은 남원으로 가기 위해서 저 길을 걸어서 넘어야만 했다.

▼ 이정표(밤재↑ 1.9㎞/ 밤재터널→ 0.2㎞)는 요 아래에 ‘밤재터널’이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저 터널을 이용해 남원으로 갈 생각은 말자. 사람의 통행이 금지되는 자동차 전용도로이니 말이다(하지만 더위에 지친 일행 몇은 터널을 이용하기도 했다). 참! 이곳은 ‘구례의 길(지리산둘레길+남도이순신길+섬진강둑방길)’의 중요 포스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00km쯤 되는 전 구간을 완주하면 인증서와 기념메달, 기념품 등을 주는데, 그 첫 번째 스탬프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 밤재로 오르는 오르막 옛길은 걷기 좋은 흙길과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반복되는 구간이다. 숲이 주는 싱그러움과 시골 풍경이 주는 소박함이 어우러지며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든다는 입소문까지 탔다. 하지만 오늘처럼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여름날에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밖에 없다. 무더위에 시달린 몸이 장마철 낙수처럼 땀을 흘려내는데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 있겠는가.

▼ 산자락을 몇 번이나 돌아 드디어 ‘밤재’에 올랐다. 밤재는 주천면 ‘배덕리’와 산동면 ‘원달리’를 잇는 고개이다. 남원시와 구례군을 나누는 경계이자 전남과 전북의 도계(道界)이기도 하다. 또한 백두대간의 ‘만복대’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견두산을 거쳐 천마산으로 뻗어나가는 산릉의 한 지점도 된다. 그래선지 어지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시설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견두산(犬頭山)까지의 거리 및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위시해, 구례와 해남을 잇는 ‘남도 오백리 역사숲길’ 안내도, 생명평화경이란 부제까지 단 ‘지리산둘레길’ 안내도 등 종류도 다양하다.

▼ 한자로는 ‘율치(栗峙)’가 된다. 밤나무가 얼마나 많았으면 이름으로까지 굳어졌을까. 하지만 고갯마루 근처에는 밤나무가 없었다. 아니 고개를 올라올 때나, 내려가는 도중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밤나무 없는 밤재’라고나 할까?

▼ 밤재(벅수 : 주천 7.0㎞/ 산동 8.9㎞)는 지리산둘레길 순례자들에게는 중요한 포스트이기도 하다. 21구간(산동-주천)의 완주를 증명해주는 스탬프가 고갯마루에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의 스탬프보관함도 매달려 있었다.

▼ 도법스님이 만든 생명평화경은 기독교의 성서, 불교의 불경, 천도교 교리, 현대 과학 이론 등 인류 역사에서 창조된 위대한 사상과 정신들을 모아 경전처럼 연기송으로 만든 것이다.

▼ 해발 490m의 ‘밤재’는 지리산의 서북능선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노고단을 시작으로 고리봉, 묘봉치, 세걸산 등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장점을 살리려했는지 조망이 툭 터지는 곳에 벤치까지 놓아두었다. 오늘처럼 뙤약볕이 쏟아지는 여름날에는 무용지물이었지만...

▼ 과거에는 19번 국도가 이 고개를 넘어갔다. 1988년 밤재터널이 뚫리면서 옛길이 되어버렸지만. 그 길을 따라 걷는데 ‘왜적 침략길 불망비’가 자신도 좀 읽어주고 가란다. 밤재는 정유재란, 동학 농민혁명, 일제 식민시대 등 뼛속에 새겨야 할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개다. 이 고개를 넘은 왜적이 남원성을 포위·공격 1만여 명의 민관을 도륙했으며, 갑오년(1894)에는 동학농민군의 토벌군이 되어 토끼몰이를 하면서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공식적인 반성이나 사과는 고사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겨가며 우리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비문이 ‘극일(克日)과 평화의 새로운 다짐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 눈앞에 펼쳐지는 남원시 산하를 바라보다 다시 길을 나선다. 그런데 오른쪽으로도 길이 나뉘는 게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21구간(산동-주천)은 왼편이다. 하지만 안내도는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지리산둘레길(앞밤재-주천) 순환코스를 이용해도 됨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정식코스도 아닌데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또 다른 안내판도 숙성치 방향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뒷짐 진 채 걸어도 돌부리에 채이지 않을 만큼 임도는 넓고, 넓은 산길은 무심했다. 마음을 짓누르는 버력더미를 하나씩 내려놓고 걷기에 제격이라 하겠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내려놓기가 과했던 나는 모자까지 내려놓는 우를 범해버렸다. 뒤따라오던 일행이 고맙게도 주워다 주었지만...

▼ 밤재에서 내려오는 길은 지루한 편이다. 올라오던 길만큼이나 긴데다 가슴에 담아둘만한 볼거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숲 사이로 간혹 나타나는 남원의 산하가 그나마 볼거리라면 몰라도 말이다.

▼ 밤재를 출발한지 20분 만에 임도(벅수 : 주천 6.4㎞/ 산동 9,5㎞)에 내려섰다. 그러자 길은 더 편안해진다.

▼ 하지만 따가운 햇볕에 노출된다는 단점도 있다. ‘밤재를 오르내릴 때는 햇볕을 가려줄 모자와 무심을 채울 화두 하나쯤은 꼭 챙겨두어야 한다’던 누군가의 귀띔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 내려오는 도중 버려진 자동차가 눈에 띈다. 도둑의 짓거리로 보이는데, 칡넝쿨로 뒤덮인 게 오래전에 버려진 모양이다. 그나저나 훔친 놈은 그게 귀찮아져 버렸겠지만 그걸 잃은 주인은 얼마나 애를 태웠을꼬.

▼ 25분쯤 더 걷자 이번에는 널찍한 도로(벅수 : 주천 4.5㎞/ 산동 11.4㎞)를 만난다. 둘레길을 겸한 임도는 밤재 터널로 연결되는 19번 국도의 옆구리에 매달려 따라간다.

▼ 5분 후, 이번에는 19번 국도의 아래로 난 굴다리를 통과한다.

▼ 굴다리를 빠져나오자 ‘박물관주유소’가 반긴다. 옛 국도(19호선)에 들어선 주유소는 극히 한갓진 풍경이다. 하긴 차량 통행이 끊기다시피 한 옛길의 주유소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 도로를 따라 50m쯤 내려갔을까 지리산유스호스텔이 보이는가 싶더니 벅수(주천 4.1㎞/ 산동 11.8㎞)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란다. 하지만 집사람은 택시부터 부르라며 성화다. 이 무더운 날씨에 더 이상의 진행은 불가능하다면서. 345m나 되는 꼭두마루재를 어떻게 오르겠냐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남필종부(男必從婦)로 생색을 내고 있는 내 삶이니 택시를 부를 수밖에...

▼ 생략한 구간의 중요 포인트는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사진을 빌려왔다. 첫 번째 풍경은 ‘꼭두마루재(해발 338m)’이다. 지리산유스호스텔에서 시작되는 오르막 산길이 저렇게나 가파른데 어찌 집사람이 겁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두 번째는 꼭두마루재를 넘으면 만나게 되는‘감모재(感慕齋)’다. ‘서산류씨’의 제실로 뜨락에서 자라는 300년 수령의 배롱나무가 얼굴마담이다. 아니 조선 성종 때의 효자 류익경(柳益逕)의 ‘정려비각’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단지를 하거나 자신의 허벅지 살을 삶아 드리는 게 보통인 다른 효자들과 달리. 류익경은 어머니의 똥 맛을 보고 사생(死生) 여부를 가늠했단다. 존속 폭행으로도 모자라 살인까지 저지르는 등 불효의 뉴스가 판치는 요즘이기에 더욱 귀감이 되는 효행이라 하겠다.

▼ 마지막 풍경은 ‘용궁마을’이다. 아니 내·외로 나뉘는 마을 중 ‘내용궁’이다. 용궁마을은 해발 1,050m의 영제봉에서 보는 풍경이 마치 바다 속 용궁과 같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위에서 내려다 볼 수는 없지만 마을을 지나면서 물길을 따라 자라는 산수유 군락지를 만날 수 있단다. 색이 진하고 꽃이 크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용궁 산수유축제’까지 열리고 있단다.

▼ 날머리는 지리산둘레길 주천안내센터(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21구간(산동-주천)의 날머리이자 21개 구간으로 이루어진 지리산둘레길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주천안내센터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목이라도 축일까 해서 들어간 안내센터에는 먼저 도착한 이들이 ‘완주증’을 발급받고 있었다. 아니 정식 명칭은 ‘지리산둘레길 순례증’이다. 산길과 들길을 이으며, 생명과 마을을 만나고, 나를 찾아 떠났던 순례 여행, 한걸음 한걸음 깃든 생명평화의 숨결이 완주를 한 사람의 삶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나?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1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3.14km. 500m에 가까운 밤재를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더딘 속도다. 폭염경보까지 내려진 무더운 날씨 탓에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게 원인이다.

▼ 이곳 주천안내센터는 기나긴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곳이다. 출발점에 다시 서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기나긴 여정의 추억들을 소환해가며 지리산둘레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참!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이들도 소환해볼까 한다. 기행산문집 ‘지리산둘레길’의 저자 조영석씨와 네이버 블로그 ‘sheenbee의 느린 걸음 이야기’의 운영자인데 그들의 경험이 내 여행기를 적어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