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8구간(오미-방광)

 

여행일 : ‘22. 5. 21(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과 마산면, 광의면 일원

여행코스 : 오미마을(1.1km)→용두갈림길(1.6km)→상사마을(5km)→지리산탐방안내소(3.2km)→수한마을(1.4km)→방광마을(거리 및 시간 : 12.3km/ 실제는 12.84km를 3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8구간(오미-방광)을 걷는다. 7개 코스(68km)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세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2.3km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만 한다. 지리산 서남쪽 자락의 볕 바른 농촌마을 7곳을 꼬박꼬박 들어갔다가 나와야만하기 때문이다. 운조루와 곡전재, 쌍전재 등 천하 명당에 들어앉은 고택들이 즐비한데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들머리는 오미마을 앞 정자쉼터(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34)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용두갈림길교차(토지면 용두리)를 지나자마자 ‘지리산구례명차가공공장’을 왼편에 끼고 돌아 들어가면 잠시 후 오미마을에 이른다. 마을 앞 정자쉼터가 18구간의 출발점이다.

▼ 12.3km 길이의 18구간은 전통마을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구간으로 알려진다. 출발지 부근의 운조루와 곡전재는 물론이고, 둘레길에서 약간 비켜나있는 상사마을에라도 들어가면 ‘구례 3대 고택’ 가운데 하나인 ‘쌍산재’도 만날 수 있다. 난이도는 ‘중’. 숲길이 대부분이지만 고저가 심하지 않아 평지나 다름없다는 점이 감안되지 않았나 싶다.

▼ 구간의 경계임을 알리는 벅수는 버스정류장(운조루)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거리표시(방광 12.3㎞←오미→송정 10.4㎞)와는 달리 진행방향(붉은색 화살표)이 둘이다. 오늘 걷게 될 18구간(오미-방광)말고도 2주 후로 예정된 19구간(오미-난동)도 이곳에서 출발하게 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구례 방향(서쪽 ‘五美亭’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른편으로 한옥 체험마을이 보인다면 제대로 길을 들어선 셈이다.

▼ 오미마을은 40여 채의 한옥이 있는데 민박을 할 수 있는 집들이 많다. 가족단위로 묵을 수 있는 고급 한옥스테이가 있는가 하면, 시골 할머니집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도 여럿 있다. 특히 개인 단위로 잠시 쉴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산에사네)와 식당(들녘밥상)까지 들어서있어 둘레길 순례자들에겐 성지로 꼽힌다.

▼ 3분쯤 걸었을까 둘레길은 도로(벅수 : 방광 12.0㎞/ 오미 0.3㎞)를 벗어나 ‘오미저수지’의 둑길로 올라선다. 계속해서 도로를 따라도 되지만, 지리산둘레길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보려는 의도일 것이다.

▼ 제방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렇듯 지리산 둘레길은 좋은 길을 놓아두고도 고난(苦難)한 숲길을 고집한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자락의 네 남자, 그러니까 실상사의 도법·수경스님, 박남준·이원규 시인이 45일 동안 지리산 둘레를 걸어서 한 바퀴 돈 생명평화탁발순례가 발단이 됐다. 그래선지 이 길에는 순례를 나서는 탁발승의 마음이 곳곳에 깔려있다. 제주도의 올레길보다 훨씬 고생스러운 이유이다.

▼ 나무계단을 올라서자 길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산비탈에 낸 길이지만 폭은 제법 넓다. 잠시 후 벅수(방광 11.5㎞/ 오미 0.8㎞)를 만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침목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 저수지에서 숲길로 들어선지 5분 남짓, ‘GS칼텍스 토지주유소’ 앞 19번 국도로 내려선다. 날머리에는 ‘삼밭재등산로’의 안내판과 이정표(삼밭재 3.2km)가 세워져 있었다. 조금 전 내려온 능선을 탈 경우 천황재·삼밭재·월령봉·형제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용두리 갈림길(벅수 : 방광 11.2㎞/ 오미 1.1㎞)’을 만났다.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은 이곳을 ‘배틀재’라 부르고 있었다. 고개라 여겨지지 않겠지만 지리산(노고단)에서 분기해 구례의 토지면과 마산면을 나누며 남서쪽으로 내려오던 능선이 형제봉·월령봉·삼밭재·바람재를 일군 다음 섬진강에서 그 숨을 다하는데, 19번 도로와 만나는 이곳이 마지막 고개라는 것이다. ‘삼인행 필요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 셋이 걸어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모르는 게 없다.

▼ ‘당몰샘로’를 따라 하사마을로 향한다. 잠시 후 면경계지(마산면/토지면)를 지난다. 이어서 단풍나무 가로수가 고운 길을 조금 더 걷자 하사마을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하사저수지를 품은 채 넓은 들녘을 바라보고 있는 마을 정경이 무척 아름답다. 그 역사가 신라 흥덕왕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마을인데,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그 규모도 크다.

▼ 안내판은 하사마을을 ‘모래그림 마을’로 풀었다. 맞다. 상사마을과 하사마을로 나뉘어있는 ‘사도리(沙圖里)’의 역사는 모래그림으로부터 시작된다. 도선국사(827~898)가 오산(鰲山)의 사성암(四聖庵)에서 수행을 하던 중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 그는 풍수지리에 대한 이치를 얘기하고 홀연히 사라지더니, 훗날 마을 앞 강변에 다시 나타나 모래(沙)로 산천을 그리(圖)고 다시 사라졌다 한다. 도선이 그 그림의 산천지세(山川地勢)를 보고 풍수의 원리를 깨달았다 하여 이 마을을 사도리라 하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 마을(벅수 : 방광 10.4㎞/ 오미 1.9㎞) 초입에는 작은 샘이 있었다. ‘작은등샘’이라는데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는 감로수라 할 수 있겠다. 물이 흘러넘치니 청정할 것은 당연, 이물질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지붕까지 씌웠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한 모금 마셔볼 일이다. 마침맞게 음용에 적합하다는 관청의 수질검사 성적표까지 붙어있다.

▼ 길가로 나온 경로당은 ‘여성 전용’이란다. 노소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는 ‘성추행’. 바람직하지 못한 세태이건만 이런 시골마을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나보다.

▼ 길가 홍살문(紅─門)이 무심코 걷던 발길을 붙든다. 홍살문이라는 게 본디 충신·열녀·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에 세우던 게 아니겠는가. 서원이나 향교 그리고 능과 묘에도 설치했었다. 그러니 저 안에 뭔가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50m쯤 들어갔을까 ‘효헌사(孝憲祠,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1호)’가 얼굴을 내민다. 조선 정조대왕의 12번째 왕자인 도평군과 두 부인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왕인 정종이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자 ‘제가 하늘에서 천도복숭아를 따다가 아버님께 바치고 싶습니다.’라는 시를 남겼다고 해서 ‘복숭아 도(桃)’자를 넣은 ‘도평군(桃平君)’이란 시호를 받았다. 1901년 고종은 이런 도평군의 일화에 감탄하여 다시 ‘효헌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또 하나의 효행을 만난다. 이번에는 ‘이규익지려(李圭翊之閭, 구례군 향토문화유산 제21로)’다. 그는 부친의 병 치료를 위해 자신의 살을 베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병든 부친을 3일간 더 살게 하였고, 6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하여 그 효성이 하늘에 닿아 꿩이 묘막에 들어오고 호랑이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에 고종이 동몽교관(童蒙敎官,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 안내판은 마을 앞 당산의 정자를 ‘유산각’이라 적고 있었다. ‘모정(茅亭)’이나 ‘시정(市亭)’이라 부는 게 보통인데, 이 마을은 유산각을 고집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하사마을은 정자까지도 남녀를 구분하고 있었다. 유리문이 달린 단정한 정자가 ‘어머님 것’, 벽 없는 맨몸 정자는 아버님 것이란다.

▼ 둘레길은 이제 상사마을을 향해 간다. 이때 왼편으로 사도 들녘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그 너머에서는 구례읍 시가지의 고층건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 하사마을은 드넓은 들판이 인상적이다. 섬진강이 만들어낸 들판은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맞다. 오늘은 소만(小滿). 모내기가 시작되는 절기이다. 소만이란 게 본디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면서 식물이 성장하는 시기이니 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하고 35분 만에 상사마을 앞 삼거리(벅수 : 방광 9.6㎞/ 오미 2.7㎞)에 도착했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하지만 우린 왼편, 그러니까 쌍산재가 있는 상사마을로 들어간다.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지만 또 다른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쌍산재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상사마을에도 효자가 있었다. 이 동네에 살던 ‘오형진’의 효행은 하늘도 감동했던 모양이다. 병이 든 아버지의 약을 지어오던 길에 큰 비를 만났으나 상류에서 떠내려 오던 나무뭉치를 붙들고 건널 수 있었고, 아버지의 시묘 살이 때 일어난 산사태에도 화를 피했단다. 이를 가상히 여긴 나라에서 고종 30년(1893년)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의 벼슬과 정려를 내렸다.

▼ 상사마을에 이르자 널따란 주차장과 함께 이곳이 ‘한국제일장수촌’임을 알리는 빗돌이 길손을 맞는다. 맞다. 이곳 상사마을은 20년쯤 전 한국 제일의 장수마을로 이름이 높았었다. 평균 수명이 91세, 그것도 무병장수로 살고 계신단다. 그게 모두 영험한 효력의 ‘당몰샘’ 덕분이라니, 지리산 약초 뿌리가 녹은 물이 흘러나온다는 속설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 그 유명한 ‘당몰샘’은 쌍산재의 대문 앞에 있었다. 당몰샘은 약천(藥泉)으로 유명하다. 지리산의 온갖 약초에서 흘러나온 물이라서 신비한 효능을 지녔다는 것이다. 2004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 10대 약수터 중 하나로 지정했을 정도란다. 그래선지 지존지미(支存至味)라는 편액과 함께, ‘천년고리 감로영천(千年古里 甘露靈泉)’이라고 새긴 석판이 담장에 붙어있었다. ‘최고의 맛을 지닌 물’이며, ‘천년 마을에 이슬처럼 달콤하고 신령한 샘’이란 뜻이다. 때문에 멀리서 찾아와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이 많단다. 당초 집안에 있던 우물을 담장을 새로 쌓으면서까지 대중에 개방한 이유이다. 그러니 모든 걸 제쳐두고 물맛부터 볼 일이다.

▼ 우물 뒤는 ‘구례 3대 고택(古宅)’ 중 하나인 ‘쌍산재(雙山齋)’다. 현 ‘해주오씨(海州吳氏, 문양공 진사공파)’ 주인장의 6대조 할아버지가 처음 터를 잡은 뒤 200년 넘게 살고 있는 고택이다. 고조부 때 서당채인 쌍산재(고조부의 아호인 雙山에 ‘집 齋’를 더했다)가 세워진 이후 현재 이름이 됐다. 1만6500㎡(약 5000평) 남짓한 터에 살림채와 별채, 서당채 등의 부속 건물, 대숲, 잔디밭 등이 들어서 있다. 100여종의 각종 수목초본이 어우러져 계절별로 색채를 달리하는 전통 정원도 쌍산재의 자랑거리다. 현재 한옥 민박을 운영 중인데 가격은 꽤 비싼편이다.

▼ 쌍산재는 오감으로 구경하는 오래된 집이다. 옛 집의 정취, 대숲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그러다보면 외갓집 할머님의 온기가 전해진다.

▼ 담장 사이 소박한 대문을 들어서면 관리동이 나온다. 입장료(1만원)를 내면 커피나 음료를 주는데, 쌍산재를 둘러보다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마시면 된다. 건네받은 커피를 들고 투어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곳은 살림집 공간. 마당을 두고 안채와 사당, 건너채, 사랑채가 있다. tvN의 ‘윤스테이’에서 봤던 익숙한 풍경이다. ‘윤스테이’에서 관리동은 손님맞이방과 주방, 안채와 사랑채 등은 식당으로 사용됐다. 그나저나 대나무 숲을 배경 삼은 안채(아래 사진)는 중후하다. 주인마님의 절대적 권위가 배인 장독대는 안채 곁을 지키고, 돌확과 소쿠리·키·다듬돌·쟁기 등 전통 생활도구들도 손만 뻗으면 쉽게 닿는 자리에 놓였다. 생활도구였겠지만 지금은 고택의 운치를 살려주는 소품 역할을 하고 있다.

▼ 안채 마루에는 다과상과 함께 방석을 놓아두었다. 마당에는 카메라용 삼각대도 세워놓았다. 여기서 팁 하나. 안채 대청에서 햇살을 받으며 차를 마시는 장면을 연출할 경우 인생샷을 건질 수도 있다니 기억해두자. 참! 안채의 오른쪽 끝에서 독특한 세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춘궁기에 곡식을 채워두고 어려운 이웃에게 빌려주던 ‘나눔의 뒤주’란다. 운조루의 ‘타인능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가산이 넉넉지 않던 쌍산재의 사정을 감안하면 더불어 살며 베풀고자 한 주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 이제 비밀의 공간으로 떠날 차례이다. 주거 공간 너머로 울창한 대숲이 펼쳐지는데, 그 사이로 서당으로 이어주는 ‘죽노차밭길’이 나있다. 대숲 초입에 누각을 연상시키는 별채(거서당)가 있고 돌계단이 이어진다. 울창한 대숲에 야생 차나무가 어우러지고 대숲을 비집고 햇살이 들어오는가 하면, 불어오는 바람에 대숲이 일렁이며 운치있게 사각거린다. 다른 공간으로 인도하는 대숲 길은 쌍산재 최고의 비경으로 알려진다.

▼ 최근에 지어진 듯한 호서정(壺西亭)을 지난다. 굵은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는가 싶더니 양쪽으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파아란 하늘이 온전히 드러난다. 좁다란 돌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서당채로 향하는 ‘가정문(嘉貞門)’이 등장한다. 길과 문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고 서로 어긋난 게 특징이다.

▼ 가정문 안에는 서당채인 ‘쌍산재(雙山齋)’가 들어앉았다. 문지방을 넘으면 동백나무 터널, 스승을 대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쌍산재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들보와 서까래, 회칠한 흰 벽이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선비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집안의 자제들이 학문을 배우던 곳이라는 선입감 때문일까?

▼ 쌍산재는 집안의 자재들이 학문을 나누던 곳이다. 쌍산재 외에 사락당(四樂堂), 염수실(念修室), 서소헌(舒嘯軒) 등의 현판이 곳곳에 걸려있다. 사락(四樂)은 당시 주인에게 사형제가 있었는데 이 형제들이 모두 우애하면서 행복하게 함께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염수(念修)는 조상의 음덕을 잊지 말고 덕을 잘 닦으라는 뜻이다. ‘서소(舒嘯)’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마지막 부분인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물가에 다가서 시를 짓노라(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에서 따왔단다.

▼ 쌍산재 옆에는 경암당(絅菴堂)이 있다. 쌍산재의 9채 한옥 중 하나로 서당을 운영하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란다. 참! 사람들은 이 일대, 그러니까 대숲 이후의 공간을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별서정원이란 사람들이 머물지만, 최대한 자연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성한 공간을 뜻한다.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던 곳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이곳은 2018년 ‘전남도 민간정원(제5호)’으로 등재돼 전국 31개 민간정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 쌍산재와 경암당 사이에는 ‘청원당(淸遠塘)’이라는 연못이 있다. 네모 형태의 연못 안에 둥근 섬이 있는 구조인데 네모는 땅(음)을 원은 하늘(양)을 의미한단다. 편액을 대신하는 비석에는 ‘獨行不愧影(독행불괴영), 獨寢不愧衾(독침불괴금)’이란 글자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혼자 걸어 다녀도 내 그림자에게 부끄럽지 않고, 혼자 잠을 자도 이불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라는데 중국 남송시대 채원정(蔡元定)의 글에서 따왔단다.

▼ 쌍산재 서쪽으로 오솔길이 나있다. 그 끝에 이르면 자그만 문 하나를 만난다. 짙푸른 벽색(碧色)을 비춘다는 뜻의 ‘영벽문(映碧門)’이다. 문밖은 ‘사도저수지’다. 대문의 이름처럼 저수지는 물 안에 벽색을 담고 있었다.

▼ ‘종골(화엄사 종소리가 계곡을 타고 들려온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에 쌓아올린 이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인근 들녘의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쌍산재의 운치를 더해주는 뒷마당 큰 호수 역할을 한다. 저수지는 이른 아침이나 해질녘이 제격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물안개 피어오르는 풍경이나 금빛처럼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며 호젓하게 걸어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 쌍산재를 둘러본 뒤 원점회귀 대신 마을안길을 따라 진행했다. ‘상사마을’은 1524년에 해주오씨가 남원으로부터 입촌하여 터를 잡고, 그 후 1780년 무렵 순천에서 영천이씨가 들어와 살게 되면서 두 성씨의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요즘엔 지리산 자락으로 귀농한 외지인이 이 마을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들은 오래 된 돌담도 함께 고쳐 쌓으며 터줏대감들과 어울려 구순히 살아간단다.

▼ 마을회관 한쪽에는 마을카페 ‘단새미’도 있었다. 주인 없는 무인카페로 운영된다는데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리사무소와 남·녀 경로당은 물론이고, 게스트하우스와 제빵체험실에 탁구장까지 들어섰다. 녹색농촌체험마을,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마을’로도 모자라, ‘행복마을’로까지 지정되어 있다더니, 그에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 지방선거가 이제 두 주도 채 남지 않았다. 뚜렷한 강자가 없어선지 이 지역은 출마자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누가 당선되던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먼저 챙기는 선량한 공직자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 잠시 마을안길을 걷는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돌담이 옛 멋을 퐁퐁 풍기는 멋진 골목길이다. 이어서 아까 동구 밖에서 헤어졌던 둘레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 마을을 빠져나온 둘레길이 이번에는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이곳에 ‘상사마을’의 이름표를 단 벅수(방광 8.8㎞/ 오미 3.5㎞)가 세워져 있었다. 천황치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나뉘는 지점임을 알리는 이정표(천황치 1.3㎞/ 상사마을 0.3㎞)도 보인다. 천황치와 삼밭치, 월령봉, 형제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연결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오솔길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산죽터널을 지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산자락을 헤집기도 한다. 지리산을 등에 업고 섬진강을 앞에 둔 상사마을은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았었다고 한다.

▼ 숲길로 들어선지 8분. 몇 동의 펜션(벅수 : 방광 8.2㎞/ 오미 4.1㎞)을 만나는가 싶더니 잠시지만 시멘트포장 임도를 따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종골삼거리(이정표 : 상사마을 뒷길 260m/ 상사마을 갈림길 417m)’에서 길은 또 다시 산자락으로 파고든다. 들머리에 벅수(구례 76-1)를 세워 진행방향을 알려주고 있으나 거리표시는 없었다.

▼ 이 구간에서는 작은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이때 낯선 풍경과 마주쳤다. 플라스틱 바가지가 매달려있지만 막상 물을 떠먹을 샘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봄 가뭄이 옹달샘까지 감춰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임(林)자 사랑해’. 산림청의 올바른 산림 이용문화 확산 캠페인이란다. 산을 사랑하는 모든 국민이 산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나무와 풀을 함부로 꺾지 않고, 정해진 숲길과 등산로 이외의 아무 곳이나 다니지 않고, 허용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취사나 야영을 하지 않고, 산림 내 불법행위를 목격할 시 이를 말리거나 신고하자는 실천운동이라나?

▼ 그렇게 15분쯤 진행하자 길은 또 다시 임도(벅수 : 방광 7.7㎞/ 오미 4.6㎞)로 내려선다. 이후부터는 시멘트포장 임도가 계속되는데, 숲을 벗어나 있어 오뉴월 뙤약볕에는 지옥의 구간이 될 수도 있겠다.

▼ 대신 좋은 점도 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구례고원의 풍경을 실컷 눈에 담아가며 걸을 수 있다.

▼ 임도로 내려선지 5분. 나지막한 언덕에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우리 역시 막걸리와 과일로 요기를 때울 수 있었다.

▼ 팔각정 근처에서 빼어난 풍광을 만날 수 있었다. 길가는 매실나무 과수원, 그 위는 야생 차밭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편백나무 숲이 감싸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으로다.

▼ 하동과 멀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비교적 규모가 큰 차밭이었다. 하지만 차밭은 텅 비어있었다. 지난 달 16구간(가탄-송정)을 걸을 때만해도 찻잎을 따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말이다. 어쩌면 때 이른 무더위가 6월까지라는 ‘녹차의 계절’까지 앞당겨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임도를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둘레길은 또 다시 숲길을 고집한다. 마산면소재지를 저만큼에 내려다보는 지점(벅수 : 방광 6.8㎞/ 오미 5.5㎞)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이어서 뭔가로 분주한 공사현장을 지난다. 전원주택단지라도 만들려는 모양인데, 선답자들은 이곳에 ‘섬곡농장(蟾谷農場)’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고 적었었다.

▼ 공사현장을 빠져나가니 나무다리가 타나나고, 둘레길은 다리 너머 산속으로 파고든다. 이어서 나지막한 안부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려간다.

▼ 산자락을 빠져나오자 ‘청내골 둠벙’이 반긴다. 둠벙(생태연못에 가깝게 보여 ‘둠벙’이란 표현을 썼다)은 물 반에 갈대가 반이다. 제비꽃 무리 흐드러진 제방을 걷는데, 저수지 뒤에서 ‘형제봉’의 서쪽 능선이 자신도 좀 봐달란다.

▼ 저수지에서 내려오면 화엄사의 아랫동네인 ‘황전(黃田)’ 마을이다. 하지만 쉽게 들어갈 수는 없다. 화엄사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는 ‘마산천’을 건너야만하기 때문이다. 개울에 제법 모양새를 갖춘 징검다리가 놓여있지만, 장마철에 물이라도 불어날 경우 우회노선(안내판이 세워져 있다)을 이용해야만 한다.

▼ 징검다리를 건넌 둘레길은 이제 마산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차량을 피하고 싶었던지 천변에 데크로드를 별도로 내놓았다. 그건 그렇고 봄 가뭄에 시달린 ‘마산천’은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여름철이면 저곳은 피서객들로 넘쳐날 것이 분명하다.

▼ 개울가 돌담 아래 터를 잡은 ‘돌나물(또는 돗나물, 돈나물)’이 소담스럽게 꽃을 피웠다. 냉이·달래와 함께 봄나물 3총사로 꼽히는데, 특히 돌나물 나박김치는 봄의 미각을 돋우는 ‘엄지 척’의 별미다. 그동안 집사람이 담아주는 나박김치의 재료로만 알아왔는데 저렇게 예쁜 꽃을 피워낸다는 게 무척 신기롭다.

▼ 잠시 후 도로(벅수 : 방광 5.0㎞/ 오미 7.3㎞)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지리산국립공원 남부사무소’ 앞에서 화엄사 방향으로 올라간다.

▼ 지리산풍경펜션 앞(벅수 : 방광 4.7㎞/오미 7.6㎞)에 이른 둘레길이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지리산 탐방안내소’의 마당으로 올라선다. 지리산은 ‘반달곰 방사’ 프로젝트로 유명한 산이다. 지금은 그게 70~80마리까지 늘어났단다. 안내소 마당 한복판에 반달곰 조형물을 커다랗게 세워놓은 이유일 것이다.

▼ 둘레길은 토박이식당과 지리각식당 사이 도로로 이어진다. 다른 식당도 몇 보이니 끼니때라도 되었다면 요기를 해결하고 길을 나서도 될 일이다. 하지만 시간에 쫒긴 우리 부부는 캔맥주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챙겨들고 남은 길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러니 언제 지리산역사문화관을 들러보고, 또 언제 종복원센터로 가서 반달곰까지 만나볼 수 있겠는가. 아쉬운 일이다.

▼ 100m쯤 더 걸으면 ‘월등파크호텔’.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둘레길이 호텔을 오른편으로 끼고 돌기 때문이다. 이어서 오르막 콘크리트길을 지나 산자락(벅수 : 방광 4.3㎞/ 오미 8.0㎞)으로 파고든다.

▼ 솔숲을 헤집으며 난 오솔길은 상당히 가파르게 시작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경사가 무뎌지더니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거기다 코끝을 스쳐가는 향긋한 솔내음.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 그렇게 25분쯤 걷자 산자락을 벗어나는 지점에 벅수(벅수 : 방광 3.2㎞/ 오미 9.1㎞)가 세워져 있었다. ‘당촌(唐村)’ 마을이라는 이름표까지 달았다. 하지만 둘레길에서 벗어나있는 마을을 겉모습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둘레길과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KT수련관’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20분쯤 계속되는 이 길은 봇도랑(水路)과 함께한다. 구례는 물 부족을 고민하는 지역으로 분류된다. 지난 구간에서도 얘기했듯이 노고단에 있는 큰 바위의 방향을 조절해 전북 남원으로 갈 물을 구례로 이동시켰다가 지역간 '물싸움'이 벌어졌을 정도다. 그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선지 구례의 길은 대부분 봇도랑과 함께하고 있었다.

▼ 임도를 따르던 길이 수한마을을 200m쯤 남겨놓은 지점(벅수 : 방광 1.8㎞/ 오미 10.5㎞)에서 다시 산자락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속으로 파고든다. 오후의 나른한 햇빛에 반사된 대나무 이파리가 바다에 빛나는 잔물결 같아 보인다. 감동의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릴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 그렇게 5분 남짓 내려왔을까 숲이 열리면서 ‘수한마을’이 반긴다. 수한마을은 길이 지나는 7개 마을 중에서 가장 예쁜 마을이다. 여행자를 위해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설치한 정성도 고맙지만, 낮은 돌담을 가득 덮은 덩굴만 바라봐도 걸음이 가벼워진다. 참고로 ‘수한(水寒)’이란 지명은 물이 차갑다는 뜻의 ‘물한이’에서 유래했다. 깊은 산중에서 내려오는 물과 암반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이 이 마을을 장수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 마을로 내려서자 이름표까지 단 벅수(방광 1.6㎞/ 오미 10.7㎞)가 반긴다. 여정에 지친 순례꾼들을 환영하려는 듯 또 다른 표지목도 세웠다. ‘솔밭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 서두르지 말고 은근히 읊조려보자. 가슴시리는 뭔가가 치고 올라오지 않는가.

▼ 마을의 초입. 깨알 같은 글씨들로 가득한 커다란 보드가 벽면을 대신하고 있다. 이 길을 지나간 순례꾼들이 남긴 흔적들일 게다. 누군가를 위해 매달아놓은 매직펜을 챙겨들었다가 슬며시 내려놓는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인생인데 삶의 찌꺼기 남겨서 뭐하겠는가.

▼ 마을의 이름처럼 차가운 샘물로 목을 축이고 나니 멋진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송죽정(松竹亭), 내려오는 도중 울창한 솔숲에 이어 대나무 터널까지 지나왔으니 둘레길 풍경에 딱 맞는 이름이라 하겠다. 응접세트와 작은 소품들로 치장된 정자 내부의 꾸밈새도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다리품을 풀 수 있었다.

▼ 정자의 아랫도리는 아예 문학관으로 꾸며놓았다. 서두는 수한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전한다. 이왕에 오셨으니 아름다운 추억 만들어 온 가슴에 듬뿍 담아가시란다. 언제 어느 때고 아무렇게나 오라면서... 글을 읽어가다 그네들의 마음에 동화되어가는 나 자신을 느낀다.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둘레길은 수한마을의 고샅길을 따라 이어진다. 마을회관에서 방향을 틀어 540년이나 묵었다는 당산나무 아래를 지나자 산골마을 답지 않게 너른 들녘이 펼쳐진다.

▼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누렇게 익은 밀밭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수입 밀에 비해 가격이 4배나 비싼 귀하신 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곡물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지만 아직도 2배나 비싸다. 하지만 ‘우리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단다. 그만큼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 잠시 후 수한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방광리교차로(벅수 : 방광 0.9㎞/ 오미 11.4㎞)’에 이른다. 왼편은 구례읍 방향. 오른편은 통행료로 물의를 빚던 ‘천은사’를 거쳐 성삼재로 연결된다. 둘레길은 물론 직진이다. 여기서 팁 하나. 구례방향으로 600m만 들어가면 ‘매천사(梅泉祠)’를 만날 수 있다. 한일합병 소식에 국치를 원통해 하며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을 모시는 사당이다.

▼ 100m쯤 더 걷자 이번에는 ‘용전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엇갈린 사거리인 이곳에서 방광마을은 오른편으로 향한다. 벅수(방광 0.7㎞/ 오미 11,6㎞)는 물론이고 마을 표지석까지 세워놓았으니 길이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다.

▼ 농경지 사이로 난 들길을 따라 5분 조금 못되게 걷자 18구간이 종료되는 ‘방광(放光)’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방광마을은 남원에서 구례로 들어오는 들머리다. 때문에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주막이 성시를 이루고 국가의 농지인 둔전을 두었을 정도로 번화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은 돌담이 멋스런 골목길에서 옛날의 영화를 더듬어 볼 따름이다. 옛 멋을 퐁퐁 풍기는 녹슨 양철지붕의 정미소는 덤이고...

▼ 방광마을 어귀에서 540년 수령의 느티나무 3그루가 길손을 맞는다. 당산나무 그늘에는 ‘종석정(種石亭)’이라는 정자가 들어앉았다. 그 기둥에 매달린 주련(柱聯)에서 마을 이름이 ‘방광’인 이유를 찾아냈다. ‘지리정기수방광(智異精氣受放光)’.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빛을 내뿜는다나?

▼ 날머리는 참새미계곡 입구(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481-2)

마을안길이 끝날 즈음 ‘참새미마을 계곡쉼터’가 나오면서 18구간(오미-방광)이 끝을 맺는다. 천은사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한 쉼터로 야외수영장은 물론이고 계곡에서도 물놀이가 가능한 곳이다.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산동 13.0㎞←방광→오미 12.3㎞)는 쉼터로 내려가는 초입에 세워놓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3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에 찍힌 거리는 12.84km. 큰 고개가 없었다고는 하나 숲길이 많았던 점을 감안하면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날머리 근처에는 방광마을이 자랑하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인 ‘소원바위’가 있었다. 지리산 산신이 참새미마을 계곡에 반해 놀러왔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의 간절한 소망에 감복하여 노고단 정상에서 가져다주었다는 바위다. 아낙네가 이 바위를 품고 소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나머지 둘은 소원바위에 빌어 아들을 얻은 아낙네가 감사의 표시로 심었다는 ‘100년 묵은 감나무’와 마을 중앙에 있는 540년 묵은 두 그루의 ‘당산나무(느티나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