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19구간(오미-난동)

 

여행일 : ‘22. 6. 4(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마산면·구례읍·용방면·광의면 일원

여행코스 : 오미마을(0.9m)→원내마을(0.8km)→수달보호구역(1.5km)→용호정(2.9km)→서시교(0.9km)→지리산둘레길 구례센터(6.0km)→연파마을(2.1km)→구만마을(3.8km)→난동마을(거리 및 시간 : 18.9km/ 실제는 ‘옥지교’부터 16.94km를 4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19구간(오미-난동)을 걷는다. 6개 코스(68km, 목아재-당재구간은 폐쇄됐다)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네 번째 구간으로 거리가 18.9km나 된다. 그런데도 난이도는 ‘하’란다. 농로나 둑방길 등 평지를 걷는다는 특징 때문이겠지만, 나는 ‘중’과 ‘상’의 중간쯤으로 꼽고 싶다. 무더운 여름철에 18.9km를 걷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걷는 내내 갈대로 뒤덮인 섬진강(서시천 포함)의 아름다운 풍경과 꽃길, 그리고 지리산의 주능선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랄까?

 

▼ 들머리는 오미마을 앞 정자쉼터(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34)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IC에서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면으로 내려온다. 용두갈림길교차(토지면 용두리)를 지나자마자 ‘지리산구례명차가공공장’을 왼편에 끼고 돌아 들어가면 잠시 후 오미마을에 이른다. 마을 앞 정자쉼터가 19구간(및 18구간)의 출발점이다.

▼ 18.9km 길이의 구간으로 거의 대부분 서시천 및 섬진강과 함께한다. 덕분에 갈대로 치장된 아름다운 풍광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다. 갈대숲에서 노니는 수달과의 만남은 덤이다. 특히 서시천에서는 꽃길을 걷는 행운도 누리게 된다. 벚꽃과 코스모스, 원추리, 꽃(개)양귀비 등이 철따라 곱게 피어난다.

▼ 하지만 난 19번 국도의 ‘옥지교(마산면 사도리)’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구례읍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서다. 무릎이 불편한 집사람과 처음부터 보조를 맞출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갈대로 가득한 섬진강·서시천 풍경과 경술국치의 애환을 품은 ‘용호정’을 생략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 마산천((馬山川, 섬진강 방향)을 따라 내려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사성암(四聖庵, 명승 111호)을 품은 오산(鼇山, 530.8m)이 우뚝 솟아올랐다면 길을 제대로 들어선 셈이다. 참고로 사성암은 글자 그대로 4명의 고승(원효·의상·도선·진각대사)이 수도한 곳이다. 절벽에 기둥을 받쳐 세워놓은 암자가 볼만한데, 이를 두고 사성암을 ‘구름 위의 암자’라고도 부른다.

▼ 3분쯤 걸어 마산천이 섬진강과 만나는 두물머리(구례군 환경사업소의 모퉁이이기도 하다)에 이르자 냇가로 내려가는 목책길(벅수 : 난동 15.3㎞/ 오미 3.7㎞)이 나타난다. 오미에서 출발한 둘레길은 저 목책길을 거쳐 이곳으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둑방길을 따라 구례읍으로 향한다.

▼ ‘이야기가 있는 구례 문화생태탐방로’란 안내판이 눈에 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역사·문화자원이 뛰어난 길 중, 특히 도보 여행객들이 가볼만한 곳을 지정해 지원하는 사업인데, 섬진강의 구례구간(섬진강천문대-토지면사무소)이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종점인 난동은 이곳에서 오른편 둑길을 따른다. 하지만 난 ‘용호정’을 먼저 둘러보기 위해 목책길로 내려섰다. 강변에는 갈대가 한가득이다. 이곳은 ‘수달서식지 생태·경관 보존지역’. 이 정도는 되어야 수달(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및 천연기념물 제330호)이 서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수달을 눈에 담을 수 있을까 해서 기웃거리다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에게 집사람은 수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니까.

▼ 용호정으로 이어주는 대숲에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마을로 들어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대숲이 만들어놓은 터널을 지나자 ‘용두(龍頭)’ 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둘레길은 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 ‘용호정’ 이름표를 단 벅수(난동 17.3㎞/ 오미 1.7㎞) 앞에서 방향을 트니 ‘용호정(龍湖亭, 구례향토문화유산 3호)’이 반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1분 만이다. 용호정은 망국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경술국치에 자결한 ‘매천 황현’선생의 제자 및 유림인사들이 매천을 추모하고 항일 울분을 달래기 위해 시계(詩契)를 조직하면서 세운 정자다. 1917년 일본이 구례읍성(봉성)을 허물자 북을 걸어 두던 고각루(鼓角樓)라는 누각 건물을 옮겨와 증·개축했단다.

▼ 용호정은 황현의 문하에서 한시를 배운 제자들의 모임인 ‘용호정 시계(龍湖亭 詩契)’가 중심이 되어 건립했다. 그들은 시를 읊으며 항일정신을 고취했고, 나라 뺏긴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우국충정의 선현을 추모하고, 후진에 대한 계도도 병행했음은 물론이다. 처마에 매달린 수많은 저 시판들은 그들이 남긴 울분의 시가 아닐까 싶다.

▼ 마산천으로 되돌아오니 제방으로 올라가는 목책길이 아까 내려올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다. 그 왼편에는 전망대가 걸터앉았다. 뭔가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 전망대에 서자 섬진강이 그 속살까지 내보여준다. 강은 군데군데 풀등을 만들어 쉬어가고, 우거진 갈대숲은 한여름 뙤약볕 햇살에 지친 몸을 그 강물에 의탁한다.

▼ 둘레길은 이제 섬진강 둑길을 따라 구례읍으로 간다. 함께 가는 섬진강의 저 갈대밭은 새들이 놀이터라고 한다. 물 위에 내려앉아 평화롭게 먹이를 찾는 풍경이 일품이라는데 오늘은 눈에 띄지 않는다.

▼ 걷다보면 ‘남도 이순신길’에서 만들어놓은 각종 시설물(이정표 및 쉼터)을 만나게 된다. ‘남도 이순신길’의 7코스인 ‘석주관 가는 길(구례공설운동장-석주관)’과도 겹치기 때문이다. 이정표는 ‘섬진강길’도 겸한다고 적고 있다. 이렇듯 구례지역 섬진강은 여러 둘레길이 오간다. ‘조선수군 재건로’도 그중 하나다. 정유재란이 있었던 1597년, 당시 관직에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군사·무기·군량·병선을 모아 명량대첩지로 이동한 구국의 길을 ‘조선수군 재건로’로 명명하여 역사스토리 테마길로 조성했다.

▼ 둑길로 올라선지 13분. 또 다른 조망처를 만났다. 이번에는 취수문(取水門)의 상부를 개조해 전망대로 만들었다. 섬진강과 서시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취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 전망대에 올라서자 섬진강이 치마폭처럼 펼쳐진다. 서시천(西施川)의 물줄기를 보태면서 등치를 한껏 부풀리는 것이다. 그 너른 강에 맑은 하늘이 담겼다. 그래서 강물은 더욱 푸르러졌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냉천 수문’에서도 조망이 가능하다. 하지만 특별히 눈에 담을 것은 없다.

▼ 이 구간의 특징은 지리산의 주능선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는 점이다. 마산천을 지나자 월령봉·형제봉 능선에 가려있던 노고단이 우람한 몸집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 구례읍은 섬진강과 서시천을 양쪽에 끼고 있다. 때문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꽤 많이 놓여있다. 트레킹 도중 이 다리들을 두루두루 만나게 됨은 물론이다. 그중 첫 만남은 ‘서시1교’다. 이 다리는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인도가 없다. 다리 아래를 그냥 통과해버리는 이유이다.

▼ 두 번째 다리는 ‘서시교(벅수 : 난동 13.8㎞/ 오미 5.2㎞)’. 둘레길은 이 다리를 이용해 ‘서시천’을 건넌다(반대편은 광의면과 마산면으로 이어진다). 건넌 다음에는 다리 아래를 통과해 둑길로 올라선다. 서시천의 오른쪽 둑길을 따르다가 서시교를 건넌 다음 왼쪽 둑길을 따라 서시천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 서시교를 건넌 둘레길은 시내로 들어선다. 그리곤 잠시지만 서시천 옆 도로변을 따른다. 이때 시간이 허락된다면 근처 오일장(3·8일)도 둘러볼만 하다. 지리산에서 나는 약재와 산나물이 지천이기 때문이다. 원산지가 훤히 내다보이는 할머니들로부터 한바구니 듬뿍 사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 도로변 작은 공원에는 이 지역이 배출한 애국지사 ‘왕재일(王在一, 1904-1961)’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인 1926년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 조직했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및 1932년 전남농민협의회 농민항일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되어 그때마다 옥고를 치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잠시 후 도로변을 벗어나 ‘서시천 체육공원’으로 들어섰다. 벚나무가 가득한 서시천변에 산책삼아 걷기에 딱 좋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에 걸맞게 농구장과 게이트볼장이 들어서있는가 하면, 정자(西施亭)를 세우고 돌탑을 쌓아 미적인 감각까지 더했다. 그중에서도 어린이 놀이시설인 ‘자연아이 꿈 놀이터’가 가장 잘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다.

▼ 공원을 지나는 도중 ‘연하교(煙霞橋)’라는 아름다운 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서시천을 건너는 보행자 전용의 다리인데, ‘연하’란 이름은 지리산이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하반(煙霞伴, 등산모임)’에서 따왔다고 한다. 참! 사장교의 주탑을 반달곰 형상으로 만들었다니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괜찮겠다.

▼ 실내체육관 뒤편에는 ‘물놀이장’이 들어섰다. 바닥분수와 워터 폴이 시설의 전부라서 어설픈 듯 했지만, 놀이터의 크기만은 장난이 아니다. 까짓 부족한 시설이야 서서히 채워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 물놀이장의 그네는 예뻐도 너무 예뻤다. 이를 본 집사람이 어찌 동심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카메라 앞에 나타난 그녀는 아직도 열여섯의 꽃다운 방심(芳心)이 분명했다.

▼ 서시교를 건넌지 17분 만에 구례종합운동장 옆에 위치한 ‘지리산둘레길 구례센터’에 도착했다. 센터로 연결되는 다리(봉북2교)에는 사자가 수십 마리나 된다. 하필이면 왜 사자였을까? 지리산에 반달곰을 방사한지도 어언 18년. 증손주까지 본 놈도 있다니 이젠 지리산의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저 사자는 반달곰으로 바꿔주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 마당으로 들어서자 지리산둘레길 구례구간의 안내도가 반긴다. 가탄(하동군 화개면)에서 구례를 거쳐 주천(남원시 주천면)까지 81.1km를 총 6개 코스로 나누었다. 이중 오늘 걷고 있는 19구간(오미-난동)은 순환코스이다. 참! 운영을 중단한 지선(목아재-당재)이 빠져있는 걸 보니 최근에 업데이트시켰나 보다.

▼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의 안내판도 보인다. ‘백의종군로’란 이순신이 간신배의 모함에 의해 투옥(1597년)되었다가 출옥한 후, 의금부를 출발하여 경기·충청·전북·전남을 거쳐 율곡면(합천군)에서 권율 도원수를 만날 때까지의 행로(670km)를 말한다. 전라남도에서는 구례와 순천 구간(76.5km)을 총 7개 코스로 나누고 ‘남도 이순신길’이란 이름으로 재포장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로 조성했다.

▼ 센터를 지나면서부터는 서시천의 고수부지를 따르기로 했다. 천변에 지리산 종주코스를 모티브로 한 공원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주능선을 입체적으로 만든 후, 천황봉을 주봉으로 하는 주요 봉우리들의 상징 표지석과 함께 자생 수종(樹種)의 안내판을 세웠다. 지리산을 축소시켜 놓은 미니어쳐라고나 할까?

▼ 이 공원은 1967년에 만들어졌다. 지리산의 국립공원(제1호) 지정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서시천 생태하천 복원사업과 병행해 조성했다.

▼ 지리산의 주능선은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25.5km 구간을 말한다. 이 여정은 노고단에서 시작해 반야봉·삼도봉·토끼봉·형제봉·칠선봉·영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을 거친 다음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생태공원을 걸으며 간접적으로나마 지리산 종주의 기분을 만끽해보자.

▼ 생태공원의 중간쯤에서 만나는 ‘정장교’의 교각은 트릭아트 포토존으로 꾸몄다. 실물 대체효과로 그만이니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장쯤 꼭 남기고 갈 일이다.

▼ 공원에는 서시천의 유래를 적은 빗돌도 세워놓았다. 2200년 전 중국의 진시황이 동방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지리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서불(서복이라고도 불림)에게 명하자, 서불(徐市)이 동남동녀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 하천을 건너 지리산에 올랐다 하여 ‘서불천’이라 불리다가 불(市)과 시(市)의 한자가 같아 ‘서시천(徐市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여인들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중국의 4대 미인 중 서시(西施)를 닮은 여인들이 많다'하여 서시천(西施川)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온단다.

▼ 천왕봉 표지석을 마지막으로 ‘생태공원’에서의 지리산 종주는 끝을 맺는다. 이에 둘레길 역시 둑길로 다시 올라선다. 이어서 아름드리 벚나무를 벗 삼아 트레킹을 이어간다. ‘서시천 벚꽃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광의대교(벅수 : 난동 11.4㎞/ 오미 7.6㎞)’도 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서시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19구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도로 횡단이라는 ‘편의’보다는 다리 아래로 돌아가는 ‘안전’을 고집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 고수부지에는 ‘꽃(개)양귀비’가 만발해 있었다. 이곳은 서시천(西施川). ‘강물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도 잊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을 만큼 아름다웠다’는, 그리하여 ‘침어(沈魚)’라고도 불리는 서시(西施)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그런 서시천에 당나라의 양귀비가 꽃으로 변해 들어앉았다니... 아서라! 아름다운 곳에 아름다운 꽃 좀 심었기로서니 무에 문제가 되겠는가.

▼ 아쉽게도 서시천이 자랑하는 ‘원추리꽃’은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구례군이 노고단에서 자생하는 노랑원추리를 서시천변에 심었고, 이게 자라 3월의 ‘산수유꽃’과 5월의 ‘벚꽃’에 이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때를 맞추지 못한 내 나들이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원추리 꽃말은 ‘기다리는 마음’. 꽃말처럼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 광의교(벅수 : 난동 10.6㎞/ 오미 8.4㎞) 아래를 통과하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했을 유채꽃밭이 이제 시든 장다리만 남았다. 아니 다음에 피어날 꽃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줄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 일대는 ‘생활환경 숲’이란다. 벚나무가 도열해있는 길로도 모자라 고수부지에 꽃양귀비와 노랑원추리, 코스모스를 심었단다. 그러니 철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 게 분명하다.

▼ 이 부근은 tvN 1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지리산(극본 김은희·연출 이응복)’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수해(이때 구영의 연인 양선이 죽는다)가 끝나고 일해(조한철)와 구영(오정세)이 이곳으로 캠핑을 왔었다.

▼ 건너편 둑길은 메타세쿼이아로 장식되어 있다. 색동옷으로 갈아입는 가을철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할 게 분명하다. 그건 그렇고 메타세쿼이아 너머 지리산 주능선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온 굵은 산줄기는 만복대와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으로 치솟는다.

▼ 산성봉(362m) 앞 ‘사림(四林)’마을의 들녘에는 우리밀이 누렇게 익어간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우리밀은 수입 밀에 비해 가격이 4배나 비싼 귀하신 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곡물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지만 아직도 2배나 비싸다. 하지만 ‘우리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다. 채산성이 떨어져서겠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서는 ‘안보 식량’이라는 개념도 한번쯤 챙겨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 광의교를 지나 30분 남짓. 자동차 전용도로인 ‘서시2교(벅수 : 난동 7.9㎞/ 오미 11.1㎞)’는 어쩔 수 없이 다리 아래를 통과한다. 그 전에 만나게 되는 죽정천은 아치형 목교로 건넌다. 물이 불어나는 장마철에는 통행이 불가능할 것 같다.

▼ 죽정천(사진)과 두물머리 일대의 드넓은 갈대숲을 바라보다 문득 수달은 떠올린다. 수달은 ‘수(水)환경 건강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표종으로 수달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은 섬진강의 물이 그만큼 물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나저나 서시천 둑방길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 구간이 끝나기 전 귀하신 수달을 곁눈질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 벚나무 숲길은 이후로도 꽤 오래 지속된다. 가는 길 내내 오른쪽으로는 서시천 너머에서 노고단 능선이 뻗어 내려오고, 왼쪽에서는 널따란 들녘을 지나 순천-완주 고속도로가 견두산 줄기의 허리쯤에서 숨 가쁘게 달린다.

▼ 둑길 양쪽에는 꽤 많은 매실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누렇게 익은 모양새가 ‘살구’로만 알았는데, 집사람이 주워주는 낙과는 분명 살구 맛이 아니다. 캔맥주라도 살까 해서 들른 연파마을 슈퍼에서 물어보니 ‘황매실’이란다. 우리에게 익숙한 ‘청매실’이 익으면 저렇게 변한다나?

▼ 좌우로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20분쯤 걸었을까 ‘선월마을(벅수 : 난동 7.9㎞/ 오미 13.1㎞)’이다. 1820년경 ‘안동권씨’가 정착하면서 생겨난 마을인데, 갱변가라 하여 ‘갱변뜸’ 즉 강변촌(江邊村)이라 부르다가 1930년대에 마을 지형이 ‘배(船)’처럼 생겼다고 해서 ‘선월(船月)’로 바꾸었다고 한다.

▼ 용방면의 ‘선월마을’과 광의면의 ‘연파마을’은 사시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모양새이다. 둘레길은 사시천에 가로놓인 ‘광용교’를 건너 연파마을로 들어선다.

▼ 늦은 감은 있지만 ‘서시천(西施川)’에 대해서도 한번쯤 살펴보자. 지리산의 만복대에서 발원하여 섬진강으로 스며드는 구례분지의 젖줄로 산동면·광의면·마산면 일대의 들녘을 적셔준다. 대두천·수락천·천은천·마산천 등 여러 소하천을 중간 중간에서 합류시키며 몸집을 부풀려나가는데, 유역에 발달된 너른 갈대숲은 청둥오리·흰뺨 검둥오리·왜가리·백로 등 수많은 철새와 텃새의 낙원이 되어준다.

▼ 나들가게(대형마트에 대항하기 위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지원하는 동네슈퍼) 앞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천변을 따르다가 이번에는 ‘장정교(천은천에 놓인 다리)’를 건넌다. 그 사이에서 우린 광의면소재지인 ‘연파(煙波)’마을을 만나게 된다. 연화도수(蓮花倒水)와 같은 서시천이 흐르는가 하면, 물 흐름의 파도가 연기(波土盤龍)처럼 흐른다고 해서 연파(蓮波)로 불리었으나 언제부턴가 연꽃이 연기로 바뀌었단다.

▼ 다리를 건너면 광의면사무소(벅수 : 난동 5.7㎞/ 오미 13.3㎞). 면의 중심지답게 대형 현수막게시대가 세워져 있는가 하면, 퍼걸러가 주민들의 쉼터노릇을 한다. 안내판도 여럿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지리산둘레길 안내도’. ‘남도 이순신길(백의종군로)’의 안내판과 이정표도 ‘2구간(서시천 꽃길따라 뚝방마실길)’의 안내도와 함께 길손을 맞는다.

▼ 490년이나 묵었다는 느티나무(보호수) 아래서 잠시 머물다 다시 길을 나선다. 둘레길은 아직도 서시천을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다만 오른편 옆구리에 끼던 것을 이번에는 왼편 옆구리에 옮겨달았을 따름이다.

▼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서시천은 구례분지의 젖줄이다.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 심심찮게 수중보(水中洑)를 만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저 보에서 모인 물은 산동면·광의면·마산면 일대의 너른 들녘을 적셔준다.

▼ 광의면사무소에서 25분 거리에 있는 구만마을 입구(벅수 : 난동 4.4㎞/ 오미14.6㎞). 백의종군로에서 세워놓은 아주 특별한 이정표(산수유시목지 9.9㎞/ 광의면사무소 1.9㎞)를 만났다. 구만마을 방향에 ‘산수유시목지’가 있다는 것이다. 산동면 계척마을에 있다는 산수유나무를 이르는 모양이다. 산수유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의 산동반도로 알려진다. 약 1000년 전 산동성 여인이 지리산 자락으로 시집을 오면서 산수유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진다.

▼ ‘구만(九灣)’마을은 1580년대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일군 마을로 5대에 걸쳐 5현(五賢)을 배출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도승의 저주로 패망한 슬픈 얘기와 함께이다. 그건 그렇고 마을에는 엄청나게 큰 사일로가 들어서 있다. 전남·북과 경남지역에서 생산되는 우리밀의 대부분(연간 2천800t, 7만 가마)을 수매·가공하여 전국에 유통시키는 ‘우리밀 가공공장’이란다. ‘안보식량’이라는 개념이 대두되는 요즘 특히 주목을 받는 제조시설이다.

▼ 3분 후 만나게 되는 ‘구만교’ 앞에서 잠시지만 고민에 빠져들었다. 선두대장이 깔아놓은 방향표시지가 다리를 건너라는 벅수(난동 4.1㎞/ 오미 14.9㎞)의 방향표시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개울가 숲속에서 빼꼼이 내다보는 뭔가가 있는 데야 어찌 들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리를 건넌 다음 개천가를 따라 올라가니 수풀에 가려있던 정자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 세심정(洗心亭)은 남원 출신으로 1589년에 증광시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임란 때 권율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최상중(崔尙重, 1554-1604)이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정자다. 선생이 시서를 읽고 향풍교화의 장소로 삼은이래,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을 비롯해 최연(崔葕)·최온(崔蘊)·최시옹(崔是翁) 등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했단다. ‘세심’이란 역경(易經) 계사상전에 ‘성인은 마음을 씻고 은밀한 곳에 물러나 은거한다(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에서 따왔단다.

▼ 길은 세심정의 앞을 통과한다. 이어서 19구간 유일의 산길을 지나 구만저수지로 향한다. 둑 아래서는 지리산호수공원 오토캠핑장 가는 길과 헤어져 오른편으로 간다.

▼ 구만저수지 아래에 이른 둘레길이 이번에는 수로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저수지의 부대시설이라는 ‘소수력발전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주업인 영농급수를 하는 와중에 전기까지 생산한다는 효자시설이라는데 말이다.

▼ 구만저수지는 스치듯 지나간다. 1973년 축조된 저수지로 전국적으로 보면 중급 정도의 규모지만 구례지역 저수지 가운데서는 유역면적(광의면·용방면·구례읍 들녘에 농업용수 공급)이 가장 넓다. 이런 여건을 지자체에서 내버려둘 리가 없다. 저수지에 ‘호수공원’을 비롯한 레저단지를 떡하니 들어앉혔다.

▼ 잠시 후 ‘농업체험교육관’에 이른다. 우연히 만난 직원의 말로는 숙박시설이라는데 대문을 겸한 빗돌은 우리밀의 홍보문구를 적고 있었다. 맞다. 이곳은 우리밀 영농으로 유명한 구만마을이 아니겠는가. ‘우리밀’은 쌀에 이어 우리나라 제2의 식량으로 불린다. 지금은 값싼 수입밀에 밀려 외면 받는 신세가 됐지만, 구만리의 우리밀 농가는 꿋꿋이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어 밀을 생산하고 있다. 참고로 1983년 정부가 수매를 폐지하면서 우리밀은 생산기반이 파괴됐다. 하지만 우리밀을 되살리려는 이들이 행동에 나서 1989년 어렵게 우리밀 종자 한 가마를 구입했다. 그걸 전남도와 전북도, 경남도에서 14㎏씩 나눠 제배를 시작했고, 그게 우리밀 살리기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 둘레길은 교육관 앞마당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반대편은 구만저수지의 호반을 따라 이평리(산동면)로 연결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다녔던 ‘방산서원(方山書院)’이 있는 곳이다. 방산서원은 조선전기 문신인 추계(楸溪) 윤효손(尹孝孫)을 기리기 위해 숙종 28년인 1702년 건립됐다. 추계는 박원형(朴元亨, 예종 때 영의정)에게 쓴 시로 유명한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이시다. <정승님 해 높도록 단잠 자는데 / 문 앞에 명함은 만지고 만져 털이 났소 / 만일 꿈속에 주공을 뵙거든 / 밥을 토하고 머리 쥔 채 손님 만나던 일 어떻든가 물으소서> 12살 소년은 이 시가 인연이 되어 훗날 박원형의 사위가 된다. 하나 더, 서원 옆 할아버지의 묘에는 크고 하얀 신도비가 서있다. 보물 제584호다. 사대부 묘역의 신도비 중에서 유일한 국가문화재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는 왼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우리밀체험로’를 따라 날머리인 난동마을로 향한다. 이때 만나게 되는 물 빠진 ‘온동저수지’는 허옇게 배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둑을 새로 쌓는 모양이다.

▼ 세연정에서 35분. 매화나무와 대봉감나무가 나열해 있는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온동(溫洞)’마을(벅수 : 난동 1.6㎞/ 오미 17.4㎞)이다. 마을은 1500년경 전주이씨가 들어와 살면서 형성됐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100여 호의 큰 마을로 발전했단다. 하지만 여순사건과 6.25난을 겪으며 마을은 피폐되었고 주민들은 떠나갔다. 극단적인 이념대결이 만든 서글픈 단면이라고나 할까? 온동이란 지명은 이 마을 뒤쪽 '골롱계(谷籠溪)'라는 골짜기에서 온수가 솟아 나온 데서 유래했단다.

▼ 100m쯤 더 올라가자 팔각정 옆에 마을의 유래를 적은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온천수가 피부병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의 피부병(나병) 환자들이 몰려들었던 모양이다. 이에 혐오감을 느낀 주민들이 솥뚜껑으로 샘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온천수의 근원까지 막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온천은 현재 산 하나를 넘어 산동에서 솟는다. 온동의 매정한 전설이 온천을 산동으로 쫓아버렸다고나 할까?

▼ 난동마을까지는 아직도 10분쯤 더 걸어야 한다.

▼ 이때 18구간을 걷는 내내 함께 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시천을 따라 구례분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이번 구간과는 달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례분지를 말이다.

▼ 그렇게 도착한 ‘난동(蘭洞)’ 마을(벅수 : 난동 0.8㎞/ 오미 18.2㎞)은 1500년 경 마을 뒤에 있던 고려 고찰인 난야사(蘭若寺)라는 절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형성됐다고 한다. 마을 근처에 난초가 많아 ‘난초골’, ‘난죽골’로 불리다가 한자어로 고치면서 난동으로 변했단다.

▼ 이제 둘레길은 마을안길을 통과한다. 이때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두 번이나 만나게 된다. 두 나무 모두 아래에 유리문을 두른 정자를 두었다. 이렇듯 구례의 정자들은 들일하던 농부들이 폭염이나 폭우를 피해 잠시 쉴 수 있도록 유리문이나 대나무발을 두른 것이 특징. 선풍기와 차를 끓여먹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정자도 있다. 구례의 정자가 마을의 커뮤니티 공간은 물론 둘레꾼들을 위한 쉼터로 각광 받는 이유다.

▼ 난동마을에는 ‘둘레길안내소’가 들어서 있었다. 현재 지리산둘레길에는 지자체별로 5개 안내센터와 3개 안내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 느티나무 아래 터를 잡은 ‘난동마을 갤러리’는 ‘심정서각 연구실’이란 부제를 달았다. 하지만 이 또한 문이 굳게 닫혀있어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랄까? 옆 건물의 벽화로 그 아쉬움을 달래본다. ‘박용래’라는 분이 지은 시로 배경을 깔았다. <모과차/ 앞산에 가을 비/ 뒷산에 가을 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를 마시면/ 가을 빗소리>

▼ 날머리는 난동마을 뒤 도로변(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328-3)

마을회관을 지나 7분쯤 더 걸으면 2차선 도로인 ‘난동길’에 올라선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19구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나저나 오늘은 4시간 20분을 걸었다. 앱이 16.94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둘레길 엠블럼과 벅수(산동 8.8㎞/ 방광 4.2㎞)는 19구간(오미-난동)과 20구간(방광-산동)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곳이 19구간의 종점이지만, 동시에 20구간의 중간 지점이기도 하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