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자금성(紫禁城)


특징 :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명과 청 왕조의 궁궐(宮闕)'자금(紫禁)'이라는 이름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사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궁궐로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인데, 192510월 고궁 박물원(故宫博物院)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하였는데, 전국에서 건축 재료를 모아 오는 데만도 12년이 걸렸고, 3년에 걸쳐 약 50만 명의 인부가 공을 들였다고 한다. 동서로 750미터, 남북으로 960미터 길이에 총면적이 72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또한 10미터 높이의 성곽과 깊이 6미터, 너비 52미터의 해자가 있어 성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자금성에는 무려 9,999(원래는 8,886개인데 좀 더 그럴싸한 숫자인 9999개로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의 방이 있다고 한다. 갓 태어난 황제의 아들이 매일 방을 바꾸어 가며 잔다고 해도 한 바퀴 돌아 태어난 방에 이르면 27세가 되고, 두 바퀴를 돌고 나면 54세로 죽음을 준비할 때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가 놀라울 따름이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금성으로 가는 길에 천안문(天安門)이 보인다. 천안문의 뒤편에 자금성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안문을 자금성의 정문(正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천안문은 황성(皇城) 내성(內城)의 남문(南門)일 따름이고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午門)이다.



 


가는 길에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을 지나게 된다.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청 시대에 황실의 신주를 모신 조묘(祖廟)로 사용된 곳으로, () 나라 때인 1420(영락 18)에 창건되었다. 1788(건륭 53) 전전(前殿)9칸에서 11칸으로, 후전(後殿)5칸에서 9칸으로 증축하고 담장과 문루(門樓) 및 그 밖의 부대시설도 확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1924년 허핑공원(和平公園)으로 조성되었다가 1931년에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관할로 귀속되었다. 195051일 노동인민문화궁(勞動人民文化宮)으로 명칭을 바꾸고 농구장과 극장 등을 증축한 뒤로 시민들의 휴식 및 오락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전국 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어 있다.

 

 


잠시 후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에 이른다. 중국어로 우먼이라고 하는데 궁궐 문으로서는 세계 최대의 크기라고 한다. 문의 가운데 누각에 황제의 옥좌(玉座)가 마련되어 있는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황제는 이 누각에 올라 포로를 받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마다 이 곳에서 새 역법을 알리고, 군대의 사열식을 지켜보기도 했단다.

 


오문(午門)''자 모양으로 생긴 점이 특이한데, 오문의 좌우측이 성벽으로 연결된 모습을 하고 있다. 문은 세 개가 있는데, 그중 가운데 문은 황제만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도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단다. 참고로 오문의 오()는 남쪽 방향을 뜻하는데,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방위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널따란 광장과 함께 태화문(太和門)이 나타난다. 자금성 외조(外朝) 궁전의 정문으로 고궁(古宮) 내에서 가장 큰 궁궐문이다. 명 영락년(明永乐)에 건축되어 봉천문(奉天門))이라 불리었으며 가경조(嘉靖朝)에 황극문(皇极門))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청의 순치(順治)가 베이징에 들어온 이후 태화문이라 명했다.

 


태화문 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금수교(金水橋)를 건너야 한다. 금수교는 활 모양으로 생겼는데, 중앙으로 이동하는 황제를 화살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한다. 금수교 아래에 흐르는 물은 금수하(金水河)라고 한다.



태화문 앞 계단 중앙 대리석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과 구름, 산 등 다양한 상징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로보아 태화문은 황제가 지나가는 통로이고, 신하들과 외국의 사신들은 좌우측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화문(太和門)에서 바라본 오문(午門)의 뒷모습


 

태화문을 지나면 시야가 넓어지면서 태화전(太和殿)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자금성 관람의 하이라이트이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자금성은 질서 정연한 대칭 구조로 되어 있고, 기능에 따라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庭)으로 나뉜다. 외조는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다. 자금성의 중심 출입문인 남쪽 오문에서 보면 앞쪽에 외조가, 뒤쪽에 해당하는 북쪽에 내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낮에 일하고 밤에 휴식을 취한다는 전형적인 중국 궁궐 건축 양식의 맥을 이은 것이란다. 외조(外朝)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太和殿),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中和殿), 그리고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保和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태화전이 자금성의 상징으로, 궁궐의 중심 건물이다. 황제의 즉위식이 이 곳에서 거행되었으며, 생일잔치나 중요한 명령 발표, 외국 사신과의 만남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대가 전쟁터에 나갈 때 행사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12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태화전은 그 자체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길이 64m에 폭이 37m, 그리고 높이가 27m에 이르는 중국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로,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3단의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될 수 있었단다. 또한 황제만 다녔던 길을 따라 폭 3m, 길이 16m에 이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도 용과 봉황, 사자, 기린, , 물고기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지붕의 기와는 물론 내부까지도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하여 화려하기 짝이 없다. 천하제일이란 표현에 어울리는 외형이 아닐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곳은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앉았던 옥좌(의자)이다. 금박으로 장식된 7폭짜리 병풍과 의자, 향을 피우던 도자기와 기둥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태화전 안의 옥좌(玉座) 위에는 편액(扁額)이 하나 걸려있다. ‘건극수유(建極綏猷)’, 황제는 법도를 세우고 백성이 이를 편안히 여기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보화전에 걸린 황건유극(皇建有極)’과 서경(書經)의 탕고(湯誥)편에 나오는 극수궐유(克綏厥猷)’를 합해서 만든 용어로 보인다. 극수궐유가 나오는 대목은 위대한 상제(上帝)가 아래 백성들에게 치우침 없는 덕을 내려주어 그 떳떳한 성품을 따르게 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르도록 안정되게 이끌어야만 임금의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 若有恒性 克綏厥猷 惟后)’이다.

 


태화전 앞에 서면 자금성(紫禁城)을 이루는 많은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금성은 명·청 시대에 거대한 나라 중국의 중심지였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에는 수많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는데, 건축물 하나하나 마다 중국의 사상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과거 중국 왕조가 얼마나 눈부신 문화를 이루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금성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백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이라는 얘기이다. 궁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고작 황제와 황후, 고위 관리와 궁녀, 내시, 시종, 외국 사절단 정도가 전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자그마치 5세기가 넘게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황제의 공간은 이제 박물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태화전 아래에는 문무대신(文武大臣)들이 도열하는 널따란 광장이 위치한다. 황제의 즉위식, 황태자의 탄생 축하, 조서의 반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이 태화전(太和殿)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溥儀)'의 즉위식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목조(木造) 건물의 최대 약점은 화재에 약하다는 것이다. 이를 대비해서 궁궐 안에는 금수하(金水河)’라는 인공 하천(호수)을 만들어 물을 저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래 사진과 같은 방화용 물을 저장해두는 그릇도 곳곳에다 마련해 두었다. 그 크기가 조금 작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복궁이나 덕수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그릇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드무또는 두무(頭無)’라고 부른다. 세간(世間)에서 뚜껑 없는 가마솥을 보고 두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자금성의 그릇은 아래에다 부뚜막을 만들어 놓았다. 겨울철에 물이 얼었을 때를 대비한 시설이란다. 또한 이 그릇들에는 칼로 긁힌 자국들이 나있다. 황금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본 침략들이 진짜 금()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긁어본 자국들이란다.

 


태화전의 좌측에 있는 중우문(中右門 : 남쪽을 바라보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우측이다)을 통과하면 오른편으로 2개의 건물이 보인다.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보화전(保和殿)이고, 우측에 보이는 건물은 중화전(中和殿)이다. 태화전을 비롯해 중화전과 보화전은 황제의 공식적 집무공간으로, 자금성의 중심 건물들이다. ‘삼대전(三大殿)’으로도 불린다. 이 삼대전의 이름은 청나라 때 붙인 것으로, 편액 이름에 화목할 ()’자를 넣어 통치철학을 담고 있다. 또한 전각 안에도 각기 국정이념을 담은 편액을 하나씩 걸어놓고 있다.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에서 치러지는 국가 주요 행사에 참가하기 전,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고 한다. 중화전에도 역시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있다. 진실로 중심을 잡으라는 의미이고, 서경에 나오는 용어다. 중용에도 나온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한 말 하늘이 내린 차례가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중심을 잡도록 하라에서 유래한다. 훗날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는, 이 윤집궐중 앞에 말을 더 보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사람의 마음(욕정에서 나온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의리에서 나온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정신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그 중정(中正)을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좌측에 보이는 보화전(保和殿)은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라고 한다. 보좌 위쪽에는 '황건유극(皇建有极)'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청의 건륭제가 친히 썼다고 한다. '황제가 천하를 다스릴 최고의 법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로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이는 오직 황제라야 법도나 표준을 정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오로지 크고 작은 전각들뿐이다. 자금성의 건물들은 목조(木造)가 지배적으로 쓰였다. 지붕은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전통적인 왕의 색깔이란다. 궁궐(宮闕)은 다섯 채의 커다란 전당(殿堂)과 열일곱 채의 궁전(宮殿)이 있다. 그 궁전들은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남쪽 구역, '전조'(前朝)는 황제가 매일의 정무를 보는 곳이고,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곳은 북쪽 구역, '내정'(內廷)이다. ·청대에 걸친 500여 년간 자금성에서는 24명의 황제가 살았다. 가장 단명했던 황제는 즉위 29일 만에 사망한 명 광종 태창제이고,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는 청 성조 강희제로 61년 동안 황제의 직을 수행하였다. 궁궐은 국사가 결정되는 중요한 공간이자 그들의 집이기도 했다. 그리고 궁궐에는 이들 황제 일가에 봉사하는 수천 명의 궁녀와 내시들이 살았다.




자금성을 둘러보는 길에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후원(後園)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을까봐 애초부터 심지 않은 것이란다. 그뿐만이 아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도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는 40여 장이나 되는 벽돌들을 겹쳐 쌓았다고 한다. 궁궐의 나무 바닥을 걸을라치면 경쾌한 발소리가 난다고 했는데, 이 또한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보화전 뒤편으로 보이는 난간이 포토존(Photo Zone)이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첩첩이 쌓여있는 전각(殿閣)들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모양이다. 천자(天子)인 황제가 머물렀던 자금성(紫禁城)의 공간들에는 하나같이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우선 자금성이란 이름은 중국의 천문학(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극성(北極星)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진한 자주색으로 알고 있던 중국의 권력자와 천문학자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금성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화려한 물품들이 가득해, 황제들의 생활 모습과 옛 중국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수많은 보석, 서예, 미술품, 공예품은 물론이고 궁궐의 벽과 바닥을 장식한 돌조각 하나까지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란다.

 


보화전의 뒤편에는 용이 여의주를 쫓아 구름 사이로 승천하는 모양을 정교하게 새긴 길이 16.57m 3.7m 무게 250t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 있다. 보화전에서 가장 뛰어난 볼거리라는 위롱다스댜오(雲龍大石雕 : 운룡대석조)이다. 이 바위는 50밖의 채석장에서 캐온 것으로, 한겨울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얼린 다음 수많은 인부와 말을 동원해 옮겼다고 한다.

 

 

 


보화전의 정 중앙 뒤편으로는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 중앙 아래에 보이는 문이 건청궁으로 들어가는 건청문(乾淸門)이다. 건청문은 황제가 정무를 보던 외조(外朝)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내정(內廷)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다. 건청문을 지나면 황제가 정무 이외에 황후나 궁녀들과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는 내정이다. 내정의 주요 건축물로는 중축선상에 위치한 3(後三宮)’ 즉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명나라 가청 연간에 준공), 곤녕궁(坤寧宮)이 있다. 3궁의 좌우로는 비빈들이 거처하는 동6궁과 서6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36이다. 내정의 중심 건물은 건청궁이다. 명나라에 이어 청나라 초기까지 황제의 침실이자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건청궁은 청나라 옹정 황제가 양심전이란 곳에 새로운 침실을 마련하고 태화전에 이어 보조 직무실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오직 황제와 황후만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옹정 황제 이후부터 건청궁은 황제의 서재이자 고위 관리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고, 때론 외국 왕실의 손님을 맞는 곳이자 연회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부의 모습은 태화전과 비슷한데, 역시 금박 병풍과 옥좌를 비롯하여 천장과 기둥, 여러 가지 물건들이 모두 화려하다. 건청궁 옥좌 뒤에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다. 이 액자는 초기 청나라 황제였던 순치 황제가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건청궁 뒤쪽에는 교태전(交泰殿)이 있다. 명나라 초기에 황후가 살던 곳이자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였다. 교태전 역시 무척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옥좌 뒤에는 건륭 황제가 강희 황제를 공경하여 직접 썼다는 무위(無爲)’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하지만 사진촬영은 하지 않았다. 여자들의 한()과 암투(暗鬪)로 절어있는 장소라서 자칫 잘못하다간 귀신이 옮겨 붙을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겁박에 넘어간 때문이다. 아무튼 교태전을 둘러본 후에는 어화원으로 향한다. 황제의 비빈(妃嬪)들이 살았다는 전각들도 그냥 지나쳤음은 물론이다.

 


잠시 후 역대 황제들의 후원이었던 어화원(御花园)이 나온다. 자금성 내부로 오는 동안 나무와 풀, 그늘을 볼 수 없었는데 갑자기 멋진 정원이 나타나니 신기하기만 하다. 어화원은 황제와 황후가 쉬면서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만든 정원으로 대자연의 다양한 경치를 압축시켜 놓은 곳이다. 자금성의 번영과 멸망을 지켜본 거목과 기괴한 모양의 바위, 둥근 지붕이 인상적인 정자, 사계절의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만춘정(萬春亭)이다. 아래는 아() 모양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원형이다. 반대편에는 똑 같이 생긴 천추정(千秋亭)이라는 정자도 있다.

 

 


산처럼 쌓인 기암괴석은 퇴수산(堆秀山)이라고 하는데, 거대한 돌들을 가져다가 서로 붙여서 만든 거라고 한다. 퇴수산 위쪽에 있는 정자는 어경정(御景亭)이다. 이곳에서 황제와 황후가 궁 밖 풍경을 바라보기도 했단다. 자금성에서 유일하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자금성에 사는 여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곳이라고 한다. 참고로 퇴수산은 매년 음력 99일에 황제가 죽은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고 한다.

 

 


어화원(御花园)을 둘러보고 나면 신무문(神武門)이 나온다. 정문인 오문(午門)과 동문인 동화문(東華門), 그리고 서쪽 문인 서화문(西華門)과 더불어 자금성의 4대문 중 하나이다. 신무문의 원래 이름은 현무문(玄武門)이었다. 풍수지리상의 사상학(四象學)에서 말하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에 따르면 현무가 북쪽 방위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후 청나라 강희 연간에 이르러 강희제의 이름인 현엽(玄燁)을 피휘(避諱·임금의 이름과 글자가 겹치지 않도록 함)하기 위해 신무문(神武門)’이라고 개칭했으며 그 설계는 오문에 비해 한 단계 낮은 수준이었다. 신무문은 궁궐에서 일상적인 출입 용도로 사용되었다.

 


신무문을 빠져 나오면 황실의 정원으로 사용되었던 경산공원(景山公園)의 정자와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경산공원은 자금성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고 어떤 구조와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정상에 지어진 정자 앞에 서면 완벽한 대칭 구조의 자금성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뒤돌아본 신무문(神武門), 본래의 현판보다도 훨씬 더 커다랗게 만들어 붙인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란 간판이 눈에 거슬린다. 주객(主客)이 전도되었다는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 밖으로 나오면 자금성은 또 다른 모습으로 관광객들 앞에 나타난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성벽(城壁)이 해자(垓字)에 둘러싸여 있는 풍경이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로 펼쳐지는 것이다. 저 해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다리를 놓아 자금성의 출입구 역할을 하게 했단다. 참고로 궁궐 주위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는 10m에 이른다. 그리고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다.

 

 


자금성은 도시(都市) 속에 지어진 또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면적만 보면 마을 정도의 규모이지만 동서남북으로 설치된 해자와 10m 높이의 성벽을 보면, 완벽한 하나의 도시임이 분명하다. 그 도시는 영락제가 즉위한 지 4년이 지난 1406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만리장성 이후의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이 공사에는 총 15년간 백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현존하는 궁궐 중 세계 최대인 이 자금성은 정전인 태화전을 중심으로 남북을 축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으며 남문의 이름이 천안문이다. 영락제는 자금성이 완성된 1421년 북평으로 천도하여 북경으로 고쳐 부르고, 자금성에 머물기 시작했다. 800여 개의 건물과 10m의 높은 성벽, 52m 너비의 거대한 해자로 구성된 거대한 궁궐 자금성에는 1억만 개의 벽돌, 2억만 개의 기왓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200톤에 이르는 돌이 수십 킬로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되었으며 사천지방에서 자란 나무가 기둥으로 쓰이기 위해 4년에 걸쳐 운반되기도 하였다.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천안문 광장(天安門 廣場)과 국가박물관


특징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광장은 청()나라 황성(皇城)의 정문인 천안문(天安門) 앞에 만들어진 널따란 광장이다. 천안문(天安門)은 명나라 때인 1417(영락 15)에 착공되어 1420(영락 18)에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지붕에 황색기와를 얹고 처마 귀퉁이가 하늘로 치켜든 패루(牌樓)였으며 이름도 승천문(承天門)이었다. 1457년에 화재로 훼손된 것을 1465년에 재건하면서 정면 폭이 9칸인 문루식(門樓式) 패루로 만들었다. 이 문루식 패루는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끈 농민봉기군이 베이징을 공격할 때 소실되었으며, 1651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조 패루에서 성루(城樓)로 증축하고 승천문을 톈안먼(天安門)이라고 변경하였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광장의 동쪽에는 중국 역사박물관이, 서쪽에는 인민대회당(한국 국회의사당과 같은 기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에는 모택동 주석 기념당, 그리고 광장 중심에는 인민영웅기념비(모택동이 비() 위에 인민영웅영구불후라고 썼다)가 우뚝 서 있다. 그동안 국가적 대행사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이 사용되어 왔다. 1919년의 5·4운동 이래 중국인들의 시위집회에 많이 이용되었고, 1949년의 중국정권 수립식도 여기서 행하여졌으며, 매년 51일 노동절을 비롯한 국경일의 의식도 이곳에서 행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문 중앙에 마오쩌둥(毛澤東)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고, 양옆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华人民共和国万岁)''세계인민대단결만세(世界人民大团结万岁)'라고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관광버스는 우리를 천안문광장의 건너편에다 내려놓는다. 광장에는 주차장을 따로 만들어 두지 않은 모양이다. 건너편 광장까지는 지하도를 통해 연결된다. 씽씽 달리는 자동차와 자전거 사이로 보이는 광장은 한마디로 넓다. 과연 세계 최대의 도심광장(都心廣場)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겠다.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 : 티엔안먼꽝창)은 베이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1651년에 설계된 광장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면서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전체 면적이 44으로 동시에 백만 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 중의 하나로 꼽힌다. 광장의 동쪽에는 중국 역사박물관이, 서쪽에는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과 같은 기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에는 모택동 주석 기념당, 그리고 광장 중심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천안문(天安門)은 명나라 때인 1417(영락 15)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문을 만들기 사직한지 올해로 꼭 600년이 되는 셈이다. 꽤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천안문의 진정한 의미는 현재에 있다고 봐야 한다. 중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은 모두 이 문 앞에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의 54일에는 중국의 학생, 지식인이 중심이 된 ‘5.4 운동이 일어나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했던 곳이다. 또한 1960년대 중국 전역을 전염병처럼 휩쓸고 지나간 문화 대혁명의 출발지 역시 이곳이다. 1989년 이곳에서 또 한 번의 역사적 의미가 만들어진다. 415일 호요방의 죽음은 그동안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던 학생, 지식인층에 민주화 요구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많은 학생들과 인민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거센 민주화의 요구와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64일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의 유혈진압으로 천안문의 민주화는 좌절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은 중국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인민의 자유와 평등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무참히 무너졌고 지금의 중국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도 뒤지지 않는 빈부의 극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흥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엘리트 집단은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는 반면 길거리에는 손을 벌리는 꾀죄죄한 빈민들의 모습과 공원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이용 앵벌이를 행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광장의 중심부에는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 Monument to the People's Heroes)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총 높이 37.94 m의 기념비는 2층으로 나뉘어 있다. 아래쪽 층계는 동서 너비 50.44m, 남북 길이 61.54m이며, 위층 대좌에는 2개의 불상 받침이 있다. 아래쪽 사면(四面)에는 호문소연(虎門銷煙: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하다), 금전봉기(金田起義), 우창봉기(武昌起義), 5·4운동, 5·30사건, 난창봉기(南昌起義), 항일유격전쟁, 승리의 양쯔강 도하 등 1840년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의 역사를 표현한 8개의 부조(浮彫)가 있다. 그리고 승리의 양쯔강 도하 부조 양쪽에는 중국혁명에 공헌한 인물 170명이 조각되어 있다. 비석 정면에는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이 직접 쓴 인민영웅영수불후>(人民英雄永垂不朽, 인민 영웅은 영원불멸이다)’ 8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뒤에는 저우언라이(周恩来, 주은래)가 쓴 비문이 있다. 17,000천 개의 화강암과 한백옥으로 1958년에 만들어졌다. 비의 뒤편에 보이는 건물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격인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이다.

 


동쪽에 있는 국가박물관이다. 2003228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959년에 세워진 중국 역사박물관과 1961년에 세워진 중국 혁명박물관이 합쳐져 만들어졌으며, 건물높이 33미터, 길이 313미터, 너비 100미터의 웅장한 기세를 가졌다.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중국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기념식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문 앞에다 넓디넓은 광장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중국 현대사의 산실이었다. 그래선지 몰라도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 광장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의미들을 갖는다. 일상에선 삼삼오오 모여 태극권을 하는 장소이지만, 때론 역사의 흐름을 뒤바뀌게 했던 사건의 현장이었다. 광장은 수많은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엄격한 통제가 따른다. 하지만 천안문 앞에 직접 선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베이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천안문은 과거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관문 중 하나였다. 성의 정문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와 함께 하였기에 대표적인 성문이자 광장이 되었다. ·청나라 때에는 큰 법률이나 황제의 명령을 공표할 때 이 문을 거쳐야만 했고,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을 황제가 살피며 격려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도 중국 인민군의 열병식을 국가 주석의 지휘 아래 이곳에서 치른다. 현대에 들어서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이 여기서 시작되곤 했다.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이곳에서 선포했다. 그로부터 40년 후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서 개방과 개혁이 이루어지자 간부들의 부패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되었으며, 경제난과 실업률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천안문에서 큰 시위를 일으켰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펼쳐진 자유의 함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광장은 거의 절반을 꽃밭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름다우면서도 정교한 것이 여간 신경을 쏟아 부은 것 같지가 않다. 무슨 기념행사라도 있는가 보다.

 

 


광장의 남쪽에는 모택동 주석 기념당이 있다. 높이 33.6m에 가로 세로가 105m인 정방형의 건물로 19779월에 지어졌다. 대추색의 화강암으로 지어진 기념당은 북청과 첨앙청(또는 배례실, 拜禮室), 남청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방부(防腐) 처리된 모택동의 시신은 첨앙청 내에 있는 수정관에 뉘어져 있는데, 주위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귀한 꽃들이 관을 두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북청 상층에는 모택동, 주은래 등의 개국원로의 혁명업적이 나열되어 있단다. 기념당의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수정관 안에서 잠자고 있을 호치민과 인사를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사상을 한번이라도 더 되새겨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이다.

 


이젠 중국국가박물관(中国国家博物馆)을 둘러볼 차례이다. 천안문 광장 동쪽에 위치하는 종합박물관이다. 동일한 건물에 중국 역사박물관(中国歴史博物館)’중국 혁명박물관(中国革命博物)’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박물관으로 나뉘어 있던 것을 2003년에 합병해 국가박물관(国家博物館)’으로 개편하였다. 국가박물관은 4층 건물로 높이는 40m, 폭은 149m이다. 총면적은 65,000로 양 익(兩翼)의 사이에 있는 중앙 부분에는 12개의 거대한 방주(方柱)가 둘러싼 회랑(回廊)이 설치되었다. 회랑을 사이에 둔 양익은 남북대칭으로 설계되었다. 2010년 확장공사가 끝나면서 국가박물관은 총면적이 25가 되었고, 20114월부터는 더욱 완숙해진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란다. 하지만 보안검색대를 통과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것도 꽤나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진다. 안에 전시되고 있는 유물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로비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 1층에 고대중국 기본진열이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장 내려가는 우()는 범하지 말자. 로비 중앙에 있는 안내데스크에서 팜플릿(pamphlet)을 꼭 챙겨가라는 얘기이다. 비록 1위안을 지불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관람을 위한 동선(動線)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이를 지키지 못했던 난 역() 방향으로 관람을 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앞뒤의 맥()이 자꾸만 끊기게 되면서 새로 받아들이는 앎에 큰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48개의 전시실과 106만 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은 중국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시대별로 포괄적인 전시를 하고 있다. 전시는 크게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로 나뉘어져 있고, 상설전시구역은 고대중국 기본진열부흥지로 기본진열로 구분된다. 지하 1층에 위치한 고대중국 기본진열의 전시는 북경원인을 만나면서 관람을 시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상고시기(远古时期)-,,서주시기(夏商西周时期)-춘추전국시기(春秋战国时期)-,한시기(秦汉时期)-삼국,양진,남북조시기(三国两晋南北朝时期)-,,오대시기(隋唐五代时期)-,,,,원시기(辽宋夏金元时期)-,청시기(明清时期)로 구분되어 있다. 2층에 위치한 부흥지로 기본진열에 가면 1840년 아편전쟁 이후 현대까지의 중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전시물들은 상고시기를 제외하고는 시기별로 전시코너를 정치, 사회경제, 문화, 과학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화 해 외교, 의학, 생활 등등 교과서적으로 나누어 놨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진한시기 이후로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로서의 중국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고구려나 발해뿐만 아니라 서하, 티벳 등 모든 민족들을 가능한 아우르려고 하고 있으며 특히 당은 다민족국가의 통일을 엄청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대중화가족론,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대놓고 선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시기도 황제들이 달라이 라마에게 주었던 책봉자료들을 엄청 많이 전시하고 있다.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여행 첫날 : 베이징 여행 종합


특징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은 전국시대 연() 나라의 수도였으며, 초기에는 '()'라고도 불렸다. 후에 요((((() 나라 등을 거쳐 중화민국 초기의 수도에 이르기까지 8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1928년 시()로 정하면서 이름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명칭을 다시 '베이징'으로 고치고 수도로 정해졌다. 중국에서는 3,000년의 역사를 보려면 시안(西安)으로 가고, 800년의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에 가고, 100년의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를 가라는 말이 있다. 시안, 뤄양 등 많은 고도(古都)가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갖지만 베이징의 역사가 생생한 것은 여전히 역사를 써가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은 문화의 도시로도 불린다. 중국문화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바로미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은 여행의 도시이기도 하다. 역사의 향취 속에서 세계의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볼 때, 베이징은 대륙 진출의 전초기지가 된다. 이미 20만 명 가까운 한국인이 거주하는 왕징(望京)과 옌샤(燕莎), 10만 명의 유학생이 거주하는 우다코우(五道口)는 발에 차이는 것이 한국 사람이다. 기업들에게도 중국은 이미 낯익은 텃밭이 되었다. 먼저 온 삼성, LG, 대우 같은 기업도 있고, 좀 늦게 온 현대자동차, CJ 같은 기업도 있다. 이들은 먼저 오든 늦게 오든 중국에 대해 충분히 연구했고 성공적인 시작을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의 처참했던 진출사는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아무튼 우리에게 베이징은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 그리고 우리나라가 세계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하는 도시임이 분명하다.


 

이번 여행은 톈진빈하이국제공항(Tianjin Binhai International Airport, 天津滨海國際空港)’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유는 모른다. 어쩌면 여행경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여행사의 고민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북경 직항노선보다는 경유노선의 가격이 더 저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곳에서 북경까지는 버스로 이동한다. 썩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중국에 대한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을 듣다보면 도착은 금방이다. 





숙소인 북경 RAMADA HOTEL’, ‘RAMADA’는 세계적인 체인(chain) ()을 갖고 있는 유명호텔이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선지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아니 5성급답다고 해도 되겠다. 넉넉한 크기의 트윈 룸(twin room)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고, 화장실과 샤워부스 또한 널찍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욕조(浴槽)까지 갖추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생수 2병과 놓여 있는 티백들은 모두 무료이고 매일 새 물병이 제공된다. ’호텔 어메니티(amenity)‘는 라마다의 다른 호텔들과 같은 구성으로 준비되어 있으므로, 샤워용품을 가져오지 않았을 경우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호텔은 무료로 와이파이를 제공하고 있다. 호텔 안 어느 곳에서나 인터넷 연결이 자유로움은 물론이다.

 


중국 현지식과 서양식이 함께 제공되는 아침식사도 어느 호텔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고 맛깔스러운 편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바로 데워주는 만두의 종류가 제법 된다는 점이다. 하나씩 번갈아가며 시식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는 김치가 제공된다. 만일 고추장을 가져갔다면 밥을 조금 덜어다 놓고 김치와 계란프라이를 함께 넣은 다음 쓱쓱 비벼 먹으면 그만일 것 같다. 여기서 또 하나의 보너스, 저녁에 쉬다가 야참이라도 그리워질 경우에는 로비에 있는 매점을 찾으면 된다. 과자나 소주 등의 한국 식품들을 팔고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직원이 한국말을 못해 다소 불편할 수도 있지만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가능함을 참조한다.

 


시내의 도로는 일단 널찍하다. 도시구획이 정방형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베이징이 계획적으로 개발되어온 도시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2008년에 열렸던 북경올림픽이 가져다 준 결과일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도로는 시원시원 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다만 포장상태가 안 좋은 구간이 많아서 승차감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기왕에 베이징에 왔다면 가장 먼저 둘러봐야할 곳은 '후퉁(胡同)'이 아닐까 싶다. 예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현재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서 여행자들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는 조그만 골목길을 보통 '후퉁(胡同)'이라고 부른다. 후퉁 가운데서도 가장 볼거리가 많다고 알려진 곳은 '스차하이(什刹海)'이다. 낭만적인 레스토랑과 카페가 늘어서 있는 스차하이에 들러 물씬 풍기는 이국적인 분위기에 흠뻑 빠져볼 일이다.

 

 


후퉁 여행의 묘미 가운데 인력거를 빼놓을 수 없다. 골목의 구석구석마다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인력거가 많으니, 하나 골라잡아 타고서 후퉁을 누비는 재미를 꼭 누려보도록 하자.

 

 


뒷골목을 둘러봤다면 이젠 번화가도 한번쯤 둘러보자. 아시아 최대의 규모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스카이버젼으로 유명한 더플레이스(The Place)’나 북경 최대의 쇼핑몰인 쏠라나거리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 우리가 들렀던 곳은 쏠라나(solana)거리이다. 쏠라나는 조양구에 위치한 명품 패션 쇼핑몰로 젊은 패션니스트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는 명소이다. 주변에 토다이, 스타벅스를 비롯하여 세계유명체인의 레스토랑 들이 즐비하며, 또한 강 주변에 지오빠지에(酒吧街)가 있어 야외 테라스를 이용한 시원한 맥주 한잔의 여유도 즐길 수 있다.

 

 


한 나라의 수도에 왔다면 그 나라의 문화도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798 예술의 거리로 가볼 일이다. ‘다산쯔 798 예술구는 중국을 대표하는 최초의 예술특화지구이다. 베이징의 다산쯔(大山子)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원래 이곳에 있던 공장의 일련번호가 798이었던 데서 '다산쯔 798 예술구'라는 명칭이 탄생했다고 한다. 2001년 중앙미술학원이 인근으로 이전해 온 것을 시작으로 젊은 예술인들이 하나둘 작업실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예술 특구로 변모했다. 지금은 황루이, 구디페이, 위판, 천링양 등 유망한 작가들의 작업실과 화랑, 카페와 서양식 술집이 들어서서 중국을 대표하는 미술 공간으로 성장했다.

 

 


이번에는 중국 전통의 맛을 찾아 떠나보자. ‘왕부정(王府井, 왕푸징)거리이다. 베이징에서 가장 번화한 왕부정거리는 1.5km에 이르는 보행자 전용 거리로 중국 느낌이 물씬 풍긴다.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기념품점, 음식점, 카페가 양편으로 늘어서있으며 특히 한쪽에 위치한 먹자골목은 다양한 중국의 음식 문화를 접해볼 수 있는 곳이다. 좁다란 길의 양쪽에는 꼬맹이 음식점들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그리고 온갖 음식들을 팔고 있다. 설탕에 버무린 형형색색의 과일꼬치 등 예쁜 음식들도 보이지만, 전갈꼬치와 메뚜기꼬치 등 조금은 거북스런 음식들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길거리 음식이 싫은 사람이라면 규모 반듯한 음식점을 찾으면 된다. 베이징의 음식은 일명 징차이(京菜)’라고 한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산뚱성, 서쪽으로 타이위안까지의 음식이 포함된다. 베이징은 오랫동안 중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궁중요리를 비롯하여 고급요리가 발달하여 가장 사치스러운 요리문화를 이룩한 곳이다. 베이징은 지리적으로 한랭한 북방에 위치하여 높은 칼로리가 요구되기 때문에 육류를 중심으로 강한 화력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에 조리하는 튀김요리와 볶음 요리가 특징이다. 오리통구이인 카오야쯔를 대표적인 요리로 들 수 있는데, 별칭 뻬이징야쯔인 이 요리의 먹는 법이나 독특한 맛은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칭기즈칸 구이인 카오양로우 등, 양고기를 쓰는 것도 북경요리의 한 특징이다. 참고로 이 징차이에다 촨차이(쓰촨 요리)’루차이(산둥 요리)’, ‘웨차이(광둥 요리)’를 합쳐 중국의 4대 요리로 꼽는다. 루차이 대신 상하이 요리(장쑤 요리)’를 포함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청나라 말엔 저장·푸젠·후난·안후이가 () 4대 요리의 고향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 둘을 합쳐 중국 8대 요리라고 부르기도 한다니 기억해둘 일이다.

 

 

 



배부르게 먹었다면 이젠 볼거리를 찾아 떠나보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천단공원(天壇公園)이다. 베이징의 황성(皇城) 내에는 네 개의 제단(祭壇)이 있다. 남쪽의 천단(天壇)과 북쪽의 지단(地壇), 동쪽의 일단(日壇) 그리고 서쪽의 월단(月壇)이 바로 그것인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제사를 드리는 대상이 각각 다르다. 이중 천단(天壇)은 가장 중요시되던 제단으로, ·청시대에 황제가 매년 이곳에서 천신에게 제()를 올렸다. 이곳의 넓이는 무려 자금성의 네 배. 고대규모로는 가장 큰 제단이라 할만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 최대의 제단이기도 하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1420년에 세운 이 제단은 1961년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공원에 들어서면 역사적인 건축물들 말고도 이곳 베이징 사람들의 삶도 느껴볼 수 있다. 아무 곳에서나 즐길 수 있는 그들만의 여유를 말이다. 

 

 


다음은 베이징 중앙에 위치한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하나인 광장에 들어서면 엄청난 크기에 먼저 놀라게 된다. 사진에서 보아오던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쯤으로 여겼다면 얼른 생각을 바꿀 일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일행들로부터 멀어져 버릴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천안문광장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금성(紫禁城)은 자주색이 입혀진 금지된 성이란 뜻을 가지고 있단다. 옛날부터 중국의 중심에 있던 황성(皇城)으로 지금은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하지만 하도 넓은데다, 구조까지 복잡해서 한꺼번에 모두를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역사공부를 하러 오지 않았다면 중요한 포인트만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둘러보면 되겠다.

 


이화원 역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로 중국 최대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서태후의 별궁이었던 이화원은 곤명호, 서호, 남호 3개의 인공 호수와 만수산으로 290나 되는 어마어마한 부지에 조성되어 있다. 750년간 황제의 정원으로 사랑받았지만 전쟁 중 불타 없어진 것을 서태후가 재건한 것이다. 정문인 동궁문과 인수문을 통과하면 어진 사람이 장수한다는 뜻의 전각, 인수전이 나온다. 인수전 앞에는 용과 사자상이 당시 서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듯 용맹하게 버티고 서 있다. 시와 문예를 겨루던 곳이었지만 서태후에 의해 극장으로 전면 개조된 덕화원, 낙수당은 이화원에서 가장 화려하게 보인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라는 만리장성(萬里長城)도 빼 먹을 수 없다. 만리장성은 북경에서 몽골로 향하는 길을 따라 2시간 정도 북쪽에 있다. 우리나라의 여행객들은 주로 거용관(居庸關)을 통하여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코스를 택하는 편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4~5분 정도 오르다보면 성벽(城壁)이 나온다. 하지만 성벽 자체 보다 산줄기를 타고 거대한 성벽이 점차 선으로 변하여 사라져가는 장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옛날 중국인들은 어떻게 이 성을 지었을까. 아직도 미스터리(mystery)란다. 아무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에 경이로움까지 느껴진다.

 


명십삼릉(明十三陵)은 창핑구의 천수산에 위치하고 있는 역대 명나라 황제와 황후의 능묘군(陵墓群)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를 비롯하여 숭정제까지 총 16명의 황제 중, 영락제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한 이후의 13황제 능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통칭되고 있다. 홍무제는 난징에 있는 효릉(孝陵)에 묻혔고, 2대 건문제는 정난의 변으로 생사가 불가능한 채로 실종되었고 7대 경태제는 탈문의 변으로 퇴위하여 사후 베이징 서교 금산에 묻혔지만 명십삼릉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3명의 황제를 제외한 13명의 황제와 각각의 황후들이 묻혀있다. 이 중 만력제가 묻힌 정릉은 내부 지하 궁전도 공개되고 있다. 난징의 명효릉과 함께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먹을거리가 많은 베이징에는 볼거리도 많다. 관광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실내에서 만날 수 있는 볼거리, 즉 쇼(show)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의 3대 쇼라 하면 보통 심천의 민속 쇼와 상해의 송성가무쇼그리고 북경의 금면왕조(金面王朝, Golden Mask Dynasty)’를 꼽는다. 그러니 이왕에 베이징에 온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한번은 봐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북경 내 가장 큰 테마파크인 환란곡(해피베리 테마파크)에서 펼쳐지는 금면왕조는 중국 고전과 현대 예술의 만남이라 칭송받고 있는 가무 쇼로 더욱 유명하다. 북경 올림픽 개막식을 총감독했던 장이모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중국 내 최정상급 감독, 편극, 무대미술, 조명, 음악제작자, 의상제작사 및 200여명의 우수한 배우들이 모두 모여 심혈을 기울인 예술 작품이다. 극의 내용은 금빛 가면을 쓴 여왕이 다스리는 여자들만이 사는 금면왕국에 남자들만 사는 남면왕국이 쳐들어와 싸움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북경서커스(雜技)도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 중 하나이다. ‘동성구제일도서관(Dongcheng District Library)’ 건물에서 공연을 하는데, 중국어를 몰라도 서커스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관객의 대부분이 외국인들이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건물 외관과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무대 사진을 올려본다. 아무튼 서커스는 곡예와 다양한 기술이 집대성된 중국 고유의 전통예능이며 접시돌리기, 한발자전거타기, 공중 줄타기 등 전형적인 서커스의 종목은 물론 그림자의 공연, 성대모사, 휘파람 묘기등 기발한 재주를 볼 수 있다.

 



하루의 일정이 끝났다면 이젠 돌아다니느라 지쳤던 다리의 근육을 풀어주어야 할 차례이다. 베이징에서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호사(豪奢)’가 발마사지다. 따뜻한 물에 충분히 담갔다가 전문 마사지사의 손길까지 더해지면 발은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딱딱한 신발 안에 다시 구겨 넣는 게 싫을 정도이다. 베이징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사지샵들이 있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하나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몸을 내맡긴 채로 푹 쉬었다 가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베이징은 쇼핑의 천국이다. 아니 패키지여행을 따라 같다면 그와는 반대가 될 수도 있겠다. 패키지여행 상품과 쇼핑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얘기이다. 다만 쇼핑 횟수가 적거가 많은 것만 다를 뿐이다. 아무튼 여행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쇼핑이 아닐까 싶다. 쇼핑에 맞춘 일정에 따르느라 정작 둘러봐야 할 곳을 거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쇼핑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고역도 그런 고역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어차피 쇼핑이 필수라면 즐겨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마침 둘러봐야 할 쇼핑 품목들이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것들이니 말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라텍스(latex) 매장이다. 라텍스란 파라고무나무와 같은 꽃피는 식물의 세포에서 발견되는 백색 유액(乳液)이나 고무,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수성 유탁액(乳濁液)을 말한다. 그 액을 이용해 각종 제품들이 만들어지는데, 오늘 들른 곳은 침구류를 위주로 판매하는 매장이다 



두 번째는 옥() 매장이다. 예로부터 옥은 잘 다듬어 보석이나 장신구, 소형 조각품, 실용적인 물건으로 사용되어 왔다. 특히 중국은 오랜 세월에 걸쳐 옥을 가공하는 기술이 이어져 온 나라이다. 고품질의 옥으로 사람이나 동물, 식물, , 항아리, 꽃병, 그 밖의 그릇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액세서리를 조각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엄청난 값에 팔려나갔다. 중국인들에게 옥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귀하게 대접받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느 것 하나 진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두가 다 예술품에 가깝다. 값이 비싸니 구태여 살 필요까지는 없다. 그렇다고 눈요기까지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관람세를 내는 것도 아니니 실컷 눈에 담아볼 일이다. 

 

 

 


다음은 북경동인당(北京同仁堂)’으로 베이징에 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르지 않고 꼭 들르는 한약방이다. 우황청심환(牛黃淸心丸)은 동인당의 대표적인 약품 중 하나다. 한때 중국 여행 시 구입하는 필수품이 중국산 우황청심환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사랑받은 가정상비약이었다. 참고로 동인당은 1669(청 강희 8) 러셴양(乐显扬)에 의해 동인당약실로 설립되었다. 1723(청 옹정 원년) 청 황실용 약을 제조 납품하는 유일한 관방약방이 되었으며 8대 황제 188년 동안 황실에 납품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인 1954년 동인당은 솔선하여 공사합영(公私合营) 기업이 되었다. 이후 19927중국북경동인당집단공사로 개편되었다. 1997년 국무원이 기업현대화 시범기업으로 120개 대형 기업집단을 선정할 당시 동인당은 중의약 기업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차() 매장이다. 중국은 차의 종주국(宗主國)이다. 중국인들에게 차는 하나의 삶이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차가 생산되고 지역마다 특색 있는 차들이 발달했다. 녹차와 우롱차를 많이 만들지만 발효시킨 개성 강한 차도 꽤 많다. 또 찻잎을 손으로 빚어 만든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양의 수예차도 차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 있다. 이 매장에서는 그런 중국의 전통 차들을 전시 및 판매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보급이라는 보이차가 눈길을 끌었다.

 

 


여행지 : 계림(中國)

 

여행일 : ‘14. 11. 27() - 12.1()

일 정 :

11.28() : 천문산트레킹(선착장-전망대-천등-일선천-약초밭-산장, 2시간), 팔각채드레킹(주차장-용등-전망대-천교-일선천-팔각채 정상-주차장, 3시간30)

11.29() : 어강 선상유람(죽강양삭, 4시간), 서가재래시장, 은자암동굴, ‘인삼유삼저관람

11.20() : 요산, 천산, 양강사호(주간 : 삼호, 야간 : 용호), ‘이강몽환쇼관람

 

셋째 날 : 산과 물, 동굴이 함께 어우러진 도심 공원, 천산(穿山)

 

특징 : 천산공원은 계림시에서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공원중의 하나다. 공원에는 천산(穿山)과 탑산(塔山)이 있으며, 이강의 지류인 소동강이 그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 지나간다. 공원을 사이에 두고 천산과 탑산이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두 산은 공원의 가운데로 흐르고 있는 소동강에 놓인 자그만 다리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참고로 천산공원은 산을 등반할 수도 있고 동굴을 구경할 수도 있으며 강에서 뱃놀이를 할 수도 있다. 더불어 농촌의 전원풍경을 구경할 수도 있다. 한곳에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인 것이다.

 

천산 트레킹은 가장 왼편에 보이는 봉우리로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천산은 계림 시내에서 3.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224m의 산이다. 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생김새가 흡사 수탉을 닮았다고 한다. 서쪽의 바위봉우리가 닭의 머리, 남북쪽은 양 날개, 그리고 중간의 봉우리가 등에 해당된단다. 월암(月巖), 즉 바위봉우리에 뻥 뚫린 이 굴은 닭의 눈이란다.

 

 

 

들머리는 혹시 흙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이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곳곳에 바위벼랑이 보이고, 산길은 돌계단을 따라 연결되지만 말이다. 아마 풍화작용으로 흘러내린 토사(土砂)가 산의 아랫도리에 쌓여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 안은 바위일 것이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더 오르면 주변은 온통 바위로 변한다. 그리고 바윗길의 특징대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수많은 바위봉우리들에 포위되어 있는 계림시가지가 널따랗게 펼쳐진다. 산자락 바로 아래에 있는 운동장이 텅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도 역시 체육시설을 놀리고 있기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길가엔 기괴하게 생긴 바위들을 늘어서 있다. 계림의 특징인 카르스트지형(Karst topography)일 것이다. 지각변동으로 인해 해저(海底)가 지형적으로 돌출하여 지금과 같은 기암괴석이 특이하게 만들어졌다. 때문에 이곳 계림의 봉우리들은 그 생김새가 모두 기기묘묘하게 생겼다.

 

 

 

조망을 즐기면서 오르다보면 금방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바위봉우리인 정상에는 정자(亭子)가 지어져 있다. 계림에는 예부터 봉우리를 이용한 군사적 요충지들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그 봉우리들은 유효적절하게 활용되고 있다. 기기묘묘하게 생긴 봉우리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망대를 만들거나 또는 봉우리 자체를 아예 공원(公園)으로 꾸며놓았다. 이곳 천산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계림시내가 그야말로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풍경을 천천히 쉬어가며 즐기라고 정상에다 정자(亭子)를 지어 놓은 것이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나다. 우선 천산공원(穿山公園)이 발아래에 펼쳐진다. 잘 가꾸어진 공원은 걸어 다니는 사람들까지 보일 정도로 가깝다. 공원은 이강의 지류인 소동강을 가운데에 두고 조성되어 있다. 그 건너편은 머리에 7층짜리 탑을 이고 있는 탑산(塔山)이다.

 

 

 

탑산의 뒤쪽은 계림 시가지이다. 시가지의 외곽은 계림 특유의 수많은 바위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바위봉우리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의 마이산을 빼다 닮았다. 그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산들은 심지어 시내로까지 들어섰다. 돌산이 숲이나 주택 등과 함께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목가적(牧歌的)인 도시로 말이다.

 

 

 

 

주봉을 올랐으면 이번에는 월암이 있는 서쪽 봉우리로 가볼 차례이다. 아까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다가 얼추 바닥에 떨어졌다 싶으면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잠시 후 민락궁(民樂宮)’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출입문이 나타난다. 매표소 느낌의 건물까지 지어져 있기에 돈을 받지 않나 싶었는데 의외로 공짜란다. 어쩌면 이곳 천산공원은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원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계단을 따라 잠시 오르면 한원비림(翰苑碑林)을 만나게 된다. 비림(碑林)이란 수많은 비석(碑石)들이 숲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다른 지역에 있는 비림들을 예로보아 이곳의 비석들도 중국의 명필이나 문장가들의 글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이 잠겨있어서 이를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비림 보다 조금 위에 있는 월암까지 오르는 길 또한 조망이 뛰어나다. 우선 소동강변의 아름다운 경관들이 시야(視野)를 가득 채운다. 거기다 널따랗게 펼쳐지는 계림시가지는 덤이다. 물론 시내 곳곳에 들어앉은 바위봉우리들도 빼놓을 수 없다.

 

 

 

조망을 즐기다보면 잠시 후 커다란 동굴이 눈앞에 나타난다. ‘월암(月巖)’이라는 동굴이다. 아래 부분이 평평하니 달치고는 반달이다. 천산(穿山)의 천(穿)뚫을 천자이다. 따라서 천산이란 구멍이 뚫린 산을 말한다. 지금 들어서고 있는 동굴, 그러니까 바위봉우리를 양쪽으로 관통시키고 있는 커다란 굴이 있는 산이라는 얘기이다. 이 굴은 또한 복파장군이 쏜 화살이 뚫고 지나간 자리라는 전설도 갖고 있단다.

 

 

월암(月巖)의 길이는 매우 짧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닥은 생각보다 널따랗다. 그만큼 굴이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은 탁자와 의자를 갖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 먹기에 딱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찻잔이나 술잔을 돌리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고 말이다.

 

 

굴의 반대편으로 나아가면 또 다시 조망(眺望)이 터진다. 계림 시가지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있다. 따라서 카르스트 지형으로 이루어졌다는 바위봉우리들도 훨씬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다. 계림의 산들은 대부분 돌산이다. 그리고 그 돌산 틈바구니에서 나무가 자란다. 그게 함께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계림만의 지닐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다. 계림에서 계수나무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바로 둥글고 뾰쪽하게 생긴 바위봉우리들이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제각각 기이한 형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봉우리 수가 무려 36,300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 풍광이 중국 다른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고, 산들의 모양이 워낙 예뻤기에 계수나무 씨를 뿌려 더 좋은 풍경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계림(桂林)은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많은 곳이다. 이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은 석회암이 빗물이나 지하수의 용식 작용으로 형성된 카르스트 지형이 지각변동으로 인해 지형적으로 돌출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런 기기묘묘함은 영화의 세트장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된바 있는 이연걸 주연의 소림사(少林寺)’도 계림을 무대로 촬영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곳의 경관이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일 것이고 말이다.

 

 

반대편으로 굴을 빠져나가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오르면 벽돌을 쌓아 만든 월동문이 나타난다. ‘월궁(月宮)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다. 아마 이 안을 궁궐과 같은 멋진 공간으로 꾸며놓은 모양이다.

 

 

 

 

월동문을 지나면 동굴이 나온다. 비록 그 길이는 짧지만 또 하나의 동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계림에는 동굴(洞窟)들이 무척 많다. 어제 다녀온 은자암동굴 외에도 관암동굴 등 이미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동굴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이 동굴도 그런 동굴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규모나 생김새가 한참이나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곳에는 총길이가 1,531m에 달하는 천산암(穿山岩)이란 용암동굴이 있다고 한다. 동굴 안에는 아름답고 찬란하면서도 기묘한 종유석, 돌죽순, 돌기둥, 돌커텐, 돌방패 등이 있으며 보기 드문 돌나무가지도 있다고 하지만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동굴을 지나다 보면 부처님을 모신 공간을 만난다. 이곳에서의 조망 또한 일품이다. 강 건너 탑산(塔山, 194m)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탑산의 정상에 우뚝 서있는 탑은 명나라 때 쌓은 수불탑(壽佛塔)으로 8각으로 된 7층탑이며, 그 높이는 13.3m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탑산이 들판에 따로 떨어져 있지만 100만 년 전만 해도 천산과 같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인해 지금과 같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조망을 즐기면서 내려서면 수불전(壽佛殿)’이란 암자(庵子)도 만난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을 것 같기에 암자로 들어가 보는 것을 사양하고 아래로 내려서면 또 다시 월암(月巖)이다.

 

 

동굴의 바위벽에 새겨진 월암(月巖)’이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가정임오(嘉定壬午)년에 호백원(胡伯圓)이란 사람이 썼단다. 가정(嘉定)이란 남송(南宋)4대 황제인 영종이 사용했던 연호이다. 대략 800년쯤 전에 석각(石刻)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개의 글들이 새겨져 있으나 다 읽어보지는 못했다.

 

 

 

아까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가면서 천산의 트레킹은 끝을 맺는다. 트레킹은 넉넉잡아도 2시간이면 족하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볼거리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볼거리가 유독 많은 계림에서도 손꼽아도 좋을 만큼 괜찮은 관광지인 것이다.

여행지 : 계림(中國)

 

여행일 : ‘14. 11. 27() - 12.1()

일 정 :

11.28() : 천문산트레킹(선착장-전망대-천등-일선천-약초밭-산장, 2시간), 팔각채드레킹(주차장-용등-전망대-천교-일선천-팔각채 정상-주차장, 3시간30)

11.29() : 어강 선상유람(죽강양삭, 4시간), 서가재래시장, 은자암동굴, ‘인삼유삼저관람

11.20() : 요산, 천산, 양강사호(주간 : 삼호, 야간 : 용호), ‘이강몽환쇼관람

 

둘째 날 오후 : 서가 재래시장(西街 在來市場)과 인상유삼저(印像劉三姐)

 

특징 :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계림의 산과 물이 가장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러나 계림 현지에서는 양삭산수갑계림(阳朔山水甲桂林)’이란 말이 거리낌 없이 나돈다고 한다. 양삭의 산수 풍광이 얼마나 빼어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삭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빼어난 산수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빼어난 볼거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중국 서민들의 실생활을 근접거리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서가(西街) 재래시장이요, 또 다른 하나는 수상(水上) 야외(野外) 오페라(opera)인상유삼저(印像 劉三姐)’이다. 이 두 가지의 볼거리가 양삭을 배낭여행의 메카(Mecca)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람선선착장에서 내리면 이층에 누각(樓閣)을 틀어 올린 멋진 성문(城門)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누각은 남훈정(南熏亭)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내가 알기론 같은 이름의 정자(亭子)가 계림시내에 있는 우산공원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곳에다 저런 현판을 내걸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루()라는 이름이 들어가야 마땅한 건물에 말이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재래시장인 서가(西街)로 연결된다. 배낭여행자들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이태원이나 인사동 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시장은 800m쯤 되는 큰 골목을 중심으로 사이사이로 작은 골목들이 형성되어 있다.

 

 

조각조각 맞춘 석판의 거리가 S자형으로 구불구불하며, 거리 양편으로 관광객들을 위한 각종 기념품들이 가득하다.

 

 

시장에는 먹을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요소가 혼재되어 있어 계림여행의 또 다른 추억이 된다. 시장은 우리나라의 전통 시장과 비슷한데 중국인들의 생필품들이 이국적(異國的)으로 보여 관광객들에게 큰 흥미를 준다.

 

 

 

이곳은 외국인(外國人)이 운영하는 가게가 무려 20개나 된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의 숫자가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지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일 정도니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외국인들은 대부분 가장 오래된 중국문화를 찾기 위해서 이곳을 찾는단다. 반면에 중국 사람들은 외국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서 찾아온다니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거리 곳곳에 들어서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대부분 서양식(西洋式)이다. 아니 정확히는 중식과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리고 귀에 들려오는 언어 역시 중국어보다는 영어가 더 익숙하다. 물론 간판도 영어와 중국어가 병기(倂記)되어 있다. 거기다 비록 간판까지는 아니지만 한글 안내판도 보이는 걸 보면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비중도 만만찮다는 증거일 것이다. 물론 서양 여행객들은 예외로 치고 말이다. 이곳은 물가(物價)가 싸다고 알려져 있다. 그 물가에 숙박비와 식비 등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때문에 보다 저렴하게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젊은 배낭족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배낭족들의 메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노천카페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유럽에서 보던 그대로이다. 손님들 취향에 맞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느긋이 앉아서 맥주나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서양인이 대부분이다. 사진은 오전에 이곳을 지나가면서 찍었던 사진이라서 테이블이 텅텅 비었지만 늦은 오후에 다시 찾아왔을 때는 빈 테이블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곳에서 파는 강정과 만두호떡은 별미 중 별미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줄을 서야만 살 수 있을 정도로 항상 붐비는 강정은 한번쯤은 꼭 맛보아야 할 먹을거리 중 하나다.

 

 

 

 

 

배를 짜고 있는 처자들의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안에 진열된 상품들은 수공예 기념품, 진열된 기념품들이 이런 제조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목적이 아닐까 싶다.

 

 

 

 

 

서가(西街) 재래시장은 14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고풍스런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시장은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들은 물론이고 숙박시설과 크고 작은 카페나 레스토랑들도 많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여행객들로 인해 밤낮 할 것 없이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시장은 꽤 크고 파는 물건도 다양하다. 흔히 우리가 짝퉁이라 부르는 물건들도 많이 팔고 있다. 시험이라도 해보고 싶다면 한국어로 짝퉁하고 외쳐볼 일이다. 틀림없이 루이비통가방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진기한 물건들을 살 수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재수가 좋았을 경우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런 물건을 사러 일부러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엄마 빼고는 다 가짜다'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짝퉁이 널려있기 때문이란다.

 

 

 

서가 구경을 끝냈다면 이젠 배부터 채워두어야 한다. 저녁일정인 인상유삼저를 관람하고 나서 계림까지 돌아가다 보면 식사시간을 따로 만들기가 너무 빠듯하기 때문이다. 이곳 양삭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과 예쁜 색깔로 유명한 토란으로 만든 요리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리푸(荔浦)토란은 모양이 크고 품질이 좋은데 청나라 때부터 광시(广西)자치구의 특산물이었단다. 다른 음식들이야 계림 시내와 다를 것이 없으니 알아서 주문하면 될 일이고 말이다. 오늘도 반주(飯酒)는 향기롭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삼화주(三花酒)를 챙겨보면 어떨까. 마실 때는 달콤하고 마시고 나서도 입안에 향이 가득 풍길 것이다.

 

 

서가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후 근처에 있는 인상 유삼저(印像 劉三姐, Impression Sanjie Liu) 공연장으로 이동한다. 계림에 가면 꼭 봐야할 공연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인상 유삼저(印像 劉三姐, Impression Sanjie Liu)와 몽환이강(夢幻漓江, Moonlight circus & Ballet)이다. 그 첫 번째인 인상유삼저를 관람하려는 것이다. ‘인상유삼저를 보기 위해 일부러 계림까지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다고 하는데, 우리라고 해서 어찌 거를 수 있겠는가. 우리야 비록 관광을 위해 계림을 찾아왔지만 말이다.

 

 

 

 

 

인상 유삼저는 5년 반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탄생한 대형 수상(水上) 야외(野外) 오페라로 투란도트(Turandot)’를 연출한 바 있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장예모(張藝謀)가 직접 연출하였다. 계림의 진경산수(眞景山水)로 꼽히는 이강(2km)과 주변 산천지(12개 봉우리)를 그 무대와 배경으로 삼아 광대한 규모는 물론 뛰어난 예술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상 유삼저'인상적인 유씨 집안의 셋째 딸'이라는 뜻으로 민간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유삼저(劉三姐)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꾀꼬리의 환생인 영민한 유씨네 셋째딸이 악독한 지주와 맞서 싸우고 결혼하는 과정을 엮어 장족(壯族) 묘족(苗族) 등 이 지역 소수민족의 노래와 춤을 추는 등 약 1시간30분 정도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 공연은 야간에 진행되며 약 6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출연진과 더불어 화려한 갖가지 조명들이 산을 비추며 꿈의 전경을 연출해 관객을 압도한다. 광서 소수민족 문화에서 중국 전통예술분야 전반까지 아우르는 큰 스케일의 공연으로 중국 공연문화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유삼저 설화는 60년대에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그 스케일과 화려함은 상상 이상이다. 은은하고 화려한 조명이 산봉우리를 비춰 최고의 무대를 선사한다. 양숴에서 매일 밤마다 펼쳐지며 좌석은 지정석으로 3000여 명 정도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는 보통 3만원대에서부터 10만원대 중반까지 좌석에 따라 다양하다. 추운 겨울에는 공연을 하지 않는 때도 있어 미리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다. 미리 줄거리를 파악하고 간다면 더욱 재미있게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지 : 계림(中國)

 

여행일 : ‘14. 11. 27() - 12.1()

일 정 :

11.28() : 천문산트레킹(선착장-전망대-천등-일선천-약초밭-산장, 2시간), 팔각채드레킹(주차장-용등-전망대-천교-일선천-팔각채 정상-주차장, 3시간30)

11.29() : 어강 선상유람(죽강양삭, 4시간), 서가재래시장, 은자암동굴, ‘인삼유삼저관람

11.20() : 요산, 천산, 양강사호(주간 : 삼호, 야간 : 용호), ‘이강몽환쇼관람

 

둘째 날 오후 : 은자암(銀子岩) 동굴 투어

 

특징 : 계림시 이포현에 위치하고 있는 종유석 동굴로 계림시에서 85Km, 양삭에서 3Km 거리에 있다. 은자암풍경구는 자연과 인문경관이 뛰어난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동굴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아름다운 소청산과 조채산이 우뚝 솟아있다. 은자암은 다층식(多層式) 종유동에 속하며, 이미 관광구역으로 개발한 2Km구간은 크게 하동(下洞), 대청(大厅), 상동(上洞) 3부분으로 나뉘어져 각기 다른 지질 년대에 발육 생장한 다양한 유형의 종유석이 수십 개의 특색 있는 경치를 자아낸다.

 

양삭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은자암 동굴로 향한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지만 차창 밖으로 비치는 이색적인 풍경을 접하게 된다. 도로가 바위봉우리들 사이로 나있기 때문에 가까이서 계림 특유의 봉우리들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양삭(陽朔)의 산수(山水)는 계림에 맞먹는다.’라는 말이 전해온다고 한다. 그만큼 양삭의 경관이 볼만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풍경중의 하나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을 테고 말이다.

 

 

 

계림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으나 지역을 대표하는 동굴로 계림의 관암동굴과 이곳 양삭의 은자암동굴, 그리고 이프에 있는 풍어암동굴을 3대 동굴로 친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셋 중에서 유독 은자암동굴을 선호(選好)한다고 한다. 이 동굴을 다녀가면 돈이 마르지 않는다는 옛이야기 때문이란다. ‘은자암동굴()’이 바로 금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동굴 입구의 조형물이 동전을 닮은 것도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은자암은 주위가 산에 둘러싸여 있고, 또한 천애절벽(天涯絶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암벽등반(巖壁登攀) 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동굴 앞의 저 봉우리들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아무튼 은자암 근처는 복숭아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사계절 내내 풍성한 열매가 맺는다고 한다.

 

 

동굴 입구 안내판에 한글을 병기하고 있다. 이곳 역시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동굴 안은 경사(傾斜)가 거의 없다. 힘들게 오르내리지 않아도 될 만큼 평탄(平坦)하다는 얘기이다. 동굴은 낮은 지역, 평평한 지역, 위쪽지역 등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각각 하동(下洞), 대청(大厅), 상동(上洞)이라고 불린다.

 

 

 

동굴에 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탄성부터 지르고 본다. 그리고 그칠 줄을 모른다. 오색 조명을 받고 있는 종유석들이 신비롭기 그지없는 것이다.

 

 

 

은자암 동굴에는 볼거리들로 넘쳐난다. 보는 것마다 빼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그중에서도 삼절(三绝)과 삼보(三寶)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로 알려져 있다. 삼절(三绝)이란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종유석과 광한심궁(广寒深宫), 설산비폭(雪山飞瀑)이라는 명칭의 종유석을 일컫는 말이며, 수십 개의 불상(佛像)들을 모아놓은 듯한 종유석과, 가느다란 종유석이 천장을 바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진주우산이라 불리는 종유석은 삼보(三寶)라 칭해지고 있다.

 

 

 

 

 

 

위에서 뻗어 내린 종유석, 땅에서 올라오는 석순, 이들이 맞닿은 석주 등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화려한 꽃을 닮기도 하고, 커튼을 쏙 빼다 닮은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성에가 가득한 냉동고를 닮기도 했다. 그런 빼어난 자태에다 화려한 조명(照明)까지 받으니 그 아름다움은 극치를 이룬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지나치게 조명이 화려하다보니 본래의 모습을 왜곡(歪曲)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지점에는 이름표를 붙여두었다.

 

 

동굴은 12개의 산봉우리를 관통하고 있는데, 관광객들에게는 그중 일부분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라고 해서 실망부터 할 필요는 없다. 비록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 길이가 무려 2Km에 이르기 때문이다. 웬만한 볼거리는 다 볼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지질전문가들은 은자암동굴을 두고 카르스트 동굴의 표본이라고 한단다. 수만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들도 있다고 하니 종유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싶다. 오랜 인고(忍苦)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 졌을 작품들을 두고 어찌 단순한 종유석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겠는가. 지구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이자 땅의 역사가 새긴 연대표(年代表)인 것이다.

 

 

 

은자암 동굴은 여성동굴로 분류된다고 한다.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생김새가 그 원인이겠지만, 어쩌면 오색의 조명(照明)도 한 몫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조명에 온몸을 드러내고 있는 종유석들의 아름다움은 환상 그 자체이다.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몸매에다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화장까지 마치고 나면 그 아름다움은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여성스런 동굴로 분류할 만하다.

 

 

 

은자암과 같은 동굴을 흔히 종유동굴또는 석회암동굴이라 부른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반(地盤)이 지표수에 의해 녹아내리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투어를 하다보면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맞을 때가 있다. 피한다고 피할 수도 없겠지만, 짜증내지 말고 그냥 맞아보라, 유황냄새가 날 것이다. 이는 물방울이 석회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석회암동굴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석회암 동굴은 세계 도처에서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영월의 고씨굴과 정성의 환선굴, 단양의 고수동굴 등 대부분의 동굴들이 이에 속한다.

 

 

 

 

 

고개를 들면 각양각색의 종유석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어느 것 하나 범상치 않은 거라곤 없다. 그런데 저 종유석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자라고 있단다. 당연히 그 모양도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타날까 궁금해진다.

 

 

 

 

투어가 끝날 즈음이면 쇼핑구역에 이른다. 물론 동굴의 안이다. 기념품과 귀금속을 위주로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종유석 관련 기념품들이다. 이곳 은자암이 종유동굴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투어를 마치면서 짚고 넘어갈게 하나 있다. 사진의 질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소형 카메라로 촬영을 하다 보니 조작이 서툴렀던 모양이다. 덕분에 동굴의 아름다움을 다 담질 못했다. 사진 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여행지 : 계림(中國)

 

여행일 : ‘14. 11. 27() - 12.1()

일 정 :

11.28() : 천문산트레킹(선착장-전망대-천등-일선천-약초밭-산장, 2시간), 팔각채드레킹(주차장-용등-전망대-천교-일선천-팔각채 정상-주차장, 3시간30)

11.29() : 어강 선상유람(죽강양삭, 4시간), 서가재래시장, 은자암동굴, ‘인삼유삼저관람

11.20() : 요산, 천산, 양강사호(주간 : 삼호, 야간 : 용호), ‘이강몽환쇼관람

 

둘째 날 오전 : 이강(漓江) 유람선 투어(tour)

 

특징 : 계림으로 관광을 온 사람들이 빼먹지 않고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이강(漓江)이다. 이강은 화남제일봉이라고 불리는 묘아산에서 발원하는 총 길이가 437km에 이르는 큰 물줄기로서 유람선(遊覽船)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강이 지역 특유의 기암괴석(奇巖怪石) 사이를 흐르며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계림에서 양삭까지 83km 구간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유람선을 탈 경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 사람들은 배가 양삭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 줄 모른다. 배를 타고가다 보면 계림 특유의 산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바위봉우리들은 어느 것 하나도 같은 모양새를 가진 것들이 없다. 눈길을 허투루 돌릴 수 없는 이유이다.

 

유람선은 이강경구(漓江景區)죽강(竹江) 유람선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면서 시작된다. 선착장에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유람선들이 즐비하다. 리강을 속속들이 즐겨보려는 사람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유람선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 유람선은 양제(揚堤)와 흥평진(興坪鎭)을 거쳐 양삭까지 가는데, 시간은 대략 5시간 정도가 걸린다.

 

 

 

 

유람선 탑승객들은 두 무리로 나뉜다. 일반석이 있는 1층과 식사가 제공되는 2층이다. 2층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음식값으로 한 사람당 ‘1백 위안()’씩을 추가로 더 내야만 한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2층에 자리 잡는다. 조금 더 잘 보이는 곳에서 호젓하게 눈요기를 즐겨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런 꿈은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들어오면서 단박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안상을 차린 그들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선실 전체를 아수라장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강물은 잔잔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맑고 고요하다 말하는 모양이다. 이강의 물은 가을철에 가장 맑다고 한다. 하지만 7월 장마철이 아니고서는 항상 맑아 강물 밑에 조약돌이 보일 정도란다. 우리가 찾은 시기가 11월 말이니, 가장 좋은 시기에 찾아왔다고 볼 수 있다.

 

 

 

배를 타면 이윽고 산수화(山水畵)속으로 들어간다. 3억 년 전에는 깊은 바다였다는 이곳은 그 오랜 세월 속에 서서히 솟아올랐단다. 그리고 빗물이 석회암층을 녹이면서 지금과 같은 절경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기이(奇異)하게 생긴 바위봉우리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하나 둘, ...’ 헤아리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하긴 저렇게 많은 봉우리들을 헤아리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즐기는 일만 남았다. 좌우로 펼쳐지는 바위봉우리들의 향연, 이런 게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겠는가. 눈의 호사(豪奢)가 시작된다.

 

 

 

자꾸만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혹시라도 고기를 낚고 있는 어부라도 만날까 해서이다. 삿갓을 쓴 강상족(江上族, 항상 배를 타고 사는 사람들) 노인이 혼자서 낚시질하는 풍경이 한 수의 시(), 그림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봄의 햇살이 내비치는 연한 자색의 안개를 배경으로 삼는 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아니어도 좋다. 그저 낚시를 드리운 강상족 노인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강을 오가는 작은 배만 몇 척 보였을 뿐 낚시를 드리운 풍경은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은 예술작품처럼 뛰어난 자연경관이 많기로 유명하다. 계림은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곳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보석’, ‘계림 산수가 천하제일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예로부터 그 아름다움을 인정 받아왔다. 그러한 절경(絶境)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이강이다. 마주하면 그림이라 착각할 만큼 빼어난 풍경이 펼쳐진다. 만일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다면 바로 이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가 눈앞에 펼쳐진다.

 

 

 

 

 

 

 

 

 

 

 

수면(水面) 위를 날듯이 달리고 있는 수많은 배들이 보인다. 하나같이 자그마한 배들이다. 이강의 또 하나의 명물인 뗏목투어(tour)’를 즐기는 사람들이란다. 배들은 하나 같이 대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고 그 위에다 의자를 놓았다. 의자의 숫자는 배의 크기에 따라 다양하다. 뗏목이라고 해서 우습게 볼 일은 아니다. 어엿한 동력선(動力船)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배의 뒤편으로 길게 물보라가 만들어지고 있는 이유이다.

 

 

 

 

 

 

 

 

 

 

보기 드문 유형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강의 주변을 감싸고 있어 마치 신선(神仙)이 살고 있는 도원(桃園)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저런 절경이기에 현세(現世) 속 선경(仙境)`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세월이 빚어낸 카르스트(karst) 지형의 기묘한 장관이 압권(壓卷)이며, 강가에 자리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은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특히 강이 산 깊숙한 곳까지 돌아 흐르기 때문에 풍경이 더욱 환상적이다. 강을 따라 가다 보면 안타까운 부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망부석(望夫石), 선명한 색실로 자수를 놓은 것 같은 수산, ()의 머리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용두산 등 다채로운 기암절벽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4시간여를 달려온 유람선은 아담한 선착장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작은 계림이라고 불리는 양삭(陽朔, 양수오)이다. 오는 길에 행여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지만 끝내 눈에 띄지 않았다. 이 또한 이색적인 볼거리였을 텐데 말이다.

 

여행지 : 계림(中國)

 

여행일 : ‘14. 11. 27() - 12.1()

일 정 :

11.28() : 천문산트레킹(선착장-전망대-천등-일선천-약초밭-산장, 2시간), 팔각채드레킹(주차장-용등-전망대-천교-일선천-팔각채 정상-주차장, 3시간30)

11.29() : 어강 선상유람(죽강양삭, 4시간), 서가재래시장, 은자암동굴, ‘인삼유삼저관람

11.20() : 요산, 천산, 양강사호(주간 : 삼호, 야간 : 용호), ‘이강몽환쇼관람

 

첫날 오후 : 단하지형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경관, 팔각채(八角寨)

 

특징 : 랑산은 붉은색 사암이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을 겪으면서 절벽과 협곡이 형성된 단하 지형으로, 기이한 형상의 봉우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계림산수는 천하 으뜸이고, 랑산산수는 계림을 초월한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이다. 랑산은 면적 108에 자하동, 부이강, 랄초봉, 천일항, 천생교, 팔각채 등의 경구로 이루어졌다. 그 중 팔각채(八角寨818m)가 가장 뛰어나다고 보면 된다. 하늘 위에서 보면 정상의 모양이 팔각형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팔각채는 천문산에서 40여분 거리로 자원현(資源縣 즈왠)에서 북동쪽으로 약 45km 떨어져있다. 천문산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돌 색깔이 붉은 색을 띄고 산모양이 달팽이 모양이다. 이런 모양의 산은 좀처럼 보기 힘든 특이한 모습인데 이런 봉우리가 수도 셀 수 없이 솟아있다. 입구에서 보면 까맣게 올려다 보이는 능선 등이 고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압적이지만 막상 올라가보면 양쪽에 난간과 돌계단이 잘 설치되어 있어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다. 편한 마음으로 트레킹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이다.

 

들머리에 세외도원 팔각채(世外桃園 八角寨)’라는 간판과 함께 군라관천(群螺觀天)이라고 적힌 다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만큼 이곳이 이상향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곳의 봉우리들은 그 생김새가 소라가 하늘을 바라보는 형상이란다. 얼마나 기이하겠는가. 인간세상에서는 가히 보기 힘든 경관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세외도원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트레킹은 흙길로 시작된다. 눈을 두는 곳마다 온통 바위뿐인데 흙길이라니 의외이다. 그러나 그게 무에 대수이겠는가. 트레킹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중국의 40번째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단하(丹霞)지형의 색다른 풍경들이 펼쳐지는데 말이다. 수많은 봉우리들이 마치 소라가 거꾸로 서있는 것처럼 솟아 있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안내판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색다른 풍경에 푹 빠져 걷다보면 용척능선의 오른편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고, 이어서 울창한 대나무 숲을 통과하면 산길은 ‘U을 하듯 돌아 절벽아래를 지난다. 드디어 바윗길이 시작된 것이다. 바윗길은 돌계단으로 시작된다. 길을 아예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일일이 정으로 쪼아가며 길을 내었을 그들의 노력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산에 오를 때마다 느낀 점이지만 아무튼 그들이 산에 쏟아 붓는 정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돌계단을 잠시 오르면 조망하기 좋은 장소가 나타난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군라관경대(群螺观景台)란다. 소라의 무리를 구경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제대로 된 소라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대신 하늘로 치솟는 형상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광(風光)들은 실컷 조망(眺望)할 수 있다.

 

 

군라경관대를 지나면 이번에는 용척능선(龙脊 Dragon rigde)이다. 용척(龙脊)이란 용()의 등뼈를 말한다. 용의 등처럼 양쪽이 절벽을 이룬 육중한 바위능선이다. 그 능선의 한가운데에 홈을 파서 계단을 만들었다. 멀리서보면 살이 떨릴 정도로 무섭게 보이지만 막상 올라보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 계단이 제법 너른데다 또한 길 양쪽에 난간까지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긴 길에서는 양쪽의 벼랑이 보이지도 않는다. 무서움을 느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능선은 중간에 정자(亭子)까지 지어놓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방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발걸음을 서두를 이유는 없다. 잠깐이나마 망중한을 즐겨본다. 물론 눈은 호사(豪奢)를 누리게 된다. 아까 들머리의 안내판에서 보았던 군라관천(群螺观天), 즉 소라가 하늘을 보는 형상의 수많은 암봉들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이는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닌 모양이다. 다들 탄성을 지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수백만 년 전 랑산 지역은 내륙(內陸)의 호수(湖水)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각변동(地殼變動)으로 인해 호수의 밑바닥이 돌기하여 붉은색 모래암석 봉우리가 우후죽순 지상으로 올라오며 지금과 같은 단하지모(丹霞地貌)의 풍경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단하'란 붉은 노을을 뜻하고 '지모'는 땅의 모양새를 일컫는다. 공인된 학술용어가 아닌 중국인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부르는 명칭이란다. 그나저나 단하지모의 경치는 보는 사람들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그런 경치에 반한 어느 시인은 '계림 산수는 천하 으뜸이고, 랑산 산수는 계림을 초월하더라.'는 시구(詩句)를 남겼고 말이다.

 

 

용척능선을 지나면 낡은 건물이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진행방향은 이곳에서 오른편이다. 그렇다고 왼편으로 들어가 보는 일을 걸러서는 안 된다. 그곳에 또 하나의 멋진 전망대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둘러보고 난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만 더 들어가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팔각채관경대(八角寨观景台)란다. 난간에 서면 다시 한 번 군라관천이 펼쳐진다. 왼편의 용척 뒤로 나타나는 것은 아마 팔각채 정상일 것이다. 뭔가를 찾아 눈을 치켜 떠본다. 이곳에서 루안석(泪眼石 Tearful-eye stone)의 조망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어서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찾을 수는 없었다. 연무(煙霧) 때문에 가시거리가 길지 못한 탓일 것이다. 바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형상이라는 루안석(泪眼石)을 볼 기회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런 기회가 다시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토끼의 귀 같은 계림의 산봉우리와는 달리 이곳 팔각채의 바위 봉우리들은 흙이 있는 곳에만 나무가 자란다. 마치 낙타의 등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저런 형상을 보고 어떤 이들은 등에 자기 집을 얹고 사는 달팽이를 닮았다고도 한다. 달팽이 무리가 하늘을 우러르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긴 머리 부분을 제외하면 풀 한포기 나지 않은 바위 봉우리의 무늬결이 빙빙 돌아 올라가는 달팽이집을 빼다 닮았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이어간다. 거대한 암봉 아래를 지나면 산길은 암봉의 옆구리를 따라 이어진다. 강용잔도(降龙棧道, Dragon-subduing Roadway)라고 불리는 구간이다. 길은 절벽의 생김새를 기반으로 절묘하게 연결된다. 기존의 굴()이나 반반한 지반(地盤) 등에다 새로운 굴이나 길을 보완해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험산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물론 왼편은 밑바닥이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협곡(峽谷),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런 걸 두고 천애절벽(天涯絶壁)이라고 부를 것이다.

 

 

 

길은 가다가 다리를 만들기도 한다. 천교(天橋)라 불리는 나무다리이다. 다리의 아래는 수천 길의 협곡이 펼쳐진다. 생사곡(生死谷 Hadean Valley)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볼 엄두를 낼수 없을 정도로 깊으니 가히 그런 이름을 얻을 만도 하겠다. 그런데 이 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나갈 경우에는 위험할 수도 있는 모양이다. 다행히 지금은 우리 부부뿐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위로는 둥근 천장이 하늘을 가리고 있고 아래는 밑굽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다. 용잡이 잔도의 험요함과 위태로움은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는 안내문과 같이 가슴 떨리는 걸음걸음이 계속된다.

 

 

 

붉은 빛이 감도는 거대한 바위 벼랑의 허리춤에 좁은 길이 수평으로 나 있다. 길 아래 계곡은 바닥이 깊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바위 벼랑 곳곳에는 얕고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이들 구멍에는 옛날 부근에 살던 묘족(苗族)들이 시신(屍身)을 놓아두기도 했다고 한다.

 

 

 

가슴 졸이며 강용잔도를 지나면 이번에는 대나무 숲이 짧게 이어지고 이어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고 적혀있는 허름한 건물이 나타난다. 강용암(降龙庵)이라는 사찰(寺刹)인데 외형만으로 볼 때에는 절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여염집의 느낌이 더 강하다. 우리가 늘 보아오던 절집의 풍경과 다른 모습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관음전 옆에 매점이 있으나 비수기인지 문을 열고 있지 않았다. 옛날에는 매화네 쉼터라는 어엿한 한글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강용암에서 왼편으로 가면 팔각채(八角寨)’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대문이 나온다. 대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암봉 두 개가 서로 맞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길은 그 사이로 나있다. 이곳이 하늘을 향해 쳐다보면 자 형으로 나타난다는 인자일선천(人字一線天)’이란다. 그러나 소문과는 달리 그 풍광은 썩 뛰어난 편은 아니다. 암벽(巖壁)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협곡(峽谷)은 자칫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거기다 길을 내느라 별 수 없었겠지만 자연경관이 파괴된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인자일선천을 빠져나간다. 계단을 따라 지능선 위로 올라선 뒤 숲속으로 잠시 내려가면 정자(亭子)와 매점(이곳도 역시 문을 열지 않았다)이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은 팔각채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가는 길이다. 물론 왼편 팔각채 정상으로 향한다. 그러나 집사람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냥 하산을 서두른다. 비가 오기 직전이라서 조망(眺望)을 기대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하긴 20~30m 앞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저 위에 있다는 관경대(观景台)는 있으나 마나일 것이다.

 

 

 

팔각채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계단으로 시작된다. 그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고 또한 생각보다 가파른 편이다. 5분쯤 오르면 육각정자(六角亭子)가 나타나나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짙게 낀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기에 멈추어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삼거리에서 곧바로 하산을 하고 있는 다른 일행들과 보조를 맞추어보려는 마음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정자를 지나서 얼마쯤 더 오르니 허름한 매점이 나오면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이곳에서 오른편은 호남성 신녕현 랑산풍경구(湖南省 新寧縣 崀山風景區)로 이어지는 길이다. 호남성에서는 팔각채를 랑산(崀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가이드가 절대 내려가지 말라는 길이다. ()이 다르기 때문에 또 다른 통행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간 이곳 갈림길 부근은 조망이 끝내준다고 알려져 있다.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운대사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형상이 마치 바위벼랑에 지은 제비집을 닮았단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시계(視界)가 제로다. 짙게 낀 구름 때문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다는 얘기이다.

 

 

 

삼거리에서 몇 걸음만 더 걸으며 바위문(石門)이 나온다. 팔각채고채문(八角寨古寨门)이다. 팔각채의 옛 문으로 길이(곁에 벽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아 벽의 길이를 말하는 것일 게다)5미터 높이에 두께가 8미터에 달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안내판에 ‘1명이 지킬 경우 능히 1천명을 막아낼 수 있다고 적혀있으니 믿어도 좋을 듯 싶다.

 

 

석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잠시 오르면 또 다시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에서 왼쪽은 천궁사를 거쳐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운대사를 거쳐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어느 길로 가던지 정상으로 가게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될 일이다.

 

 

 

왼편 전궁사로 향한다. 잠시 후에 허름한 절집을 만난다. 간판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아마 천궁사인 모양이다. 안에 모셔진 불상이 아니라면 여염집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외형이다. 아니 붉은색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것이 무당집에 더 가깝다. 절간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절간 주변의 지저분함에 질려 곧장 지나쳐버린다. 물론 오른편 방향이다. 가는 길도 어수선하기는 매일반이다. 숲속엔 무너져가는 건물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고, 길가 또한 쓰레기가 많이 널려있다. 주위 풍경에 혀를 차며 걷다보면 잠시 후에는 팔각채 정상에 이르게 된다.

 

 

정상에는 주관경대(主观景台)라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안내판에는 경어료해, 단하봉총봉림(鲸鱼闹海, 丹霞峰丛峰林)’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설명한 내용일 것이다. 그 뜻은 단하봉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바다에 고래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몰려있는 형상일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몇 미터 앞도 안보일 정도로 구름이 짙다. 그렇게나 멋지다는 경관을 볼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안내판의 그림으로 위안을 삼으며 발길을 돌린다. 이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는 선인하기(仙人下棋) 전망대를 둘러보는 것을 포기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운대사(雲臺寺)를 만난다. 절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하산을 서두른다. 안으로 들어가 봐야 그게 그거일 것 같아서이지만, 그보다는 지금 삼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을 생각해서이다. 위험한 곳에 남편을 혼자 보내놓고 혼자서 가슴을 졸이고 있을 집사람의 모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하산을 서두른다. 이후부터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 무료해질 수도 있는 구간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거리가 짧다는 것이다. 완만한 경사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민가가 보이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주차장에 이르게 되면서 팔각채의 트레킹이 종료된다. 참고로 붉은색 사력암(砂礫岩) 경승지인 중국의 단하(丹霞) 지형은 2010, 중국에서 40번째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단하(丹霞)란 중국 광동성 단하산(廣東省 丹霞山)을 포함해 귀주성 적수(贵州省 赤水), 복건성 태녕(福建省 泰宁), 호남성 랑산(湖南省 崀山), 강서성 용호산(江西省 龙虎山-龟峰 포함), 절강성(浙江省 江郞山) 등으로 중생대 쥐라기부터 신생대 제3기까지 형성된 붉은색 사력암(砂礫岩)으로 이뤄진 단하지형을 일컫는다. 그중의 하나가 오늘 보았던 호남성 랑산(湖南省 崀山), 즉 광서장족자치구의 팔각채인 것이다.

 

여행지 : 계림(中國)

 

여행일 : ‘14. 11. 27() - 12.1()

일 정 :

11.28() : 천문산트레킹(선착장-전망대-천등-일선천-약초밭-산장, 2시간), 팔각채드레킹(주차장-용등-전망대-천교-일선천-팔각채 정상-주차장, 3시간30)

11.29() : 어강 선상유람(죽강양삭, 4시간), 서가재래시장, 은자암동굴, ‘인삼유삼저관람

11.20() : 요산, 천산, 양강사호(주간 : 삼호, 야간 : 용호), ‘이강몽환쇼관람

 

첫날 오전 : 하늘을 받치고 있는 뼈대, 천문산(天門山. 630m)

 

특징 : 계림에서 98km 떨어져있는 자원현(資源縣)에 위치한 천문산은 국내는 물론 중국 현지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산이다. 지형이 단하(丹霞)지역이라서 보통의 산들과는 다른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마이산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하긴 오후에 가게 될 팔각채가 이곳보다 더 마이산을 닮았지만 말이다. 약초가 많기로 소문난 이 산은 산 자체가 지닌 아름다운 풍경 외에도 자강(資江. 즈짱)이라는 또 다른 볼거리를 품고 있다. 강의 길이는 비록 22.5km밖에 안되지만 31개의 물굽이와 45개의 여울이 있어 배를 타고 내려가면서 보는 경치는 마치 산수화를 보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주차장에 내리면 양편으로 거대한 바위벼랑이 펼쳐진다. 오른편에 보이는 것은 신선채(神仙寨)이다. 산 하나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것이 경이로울 지경이다. ‘신선들이 머물다 가는 곳라는 이름에 걸맞는 풍광이 아닐 수 없다. 그 서슬 시퍼런 바위벼랑에 홈이 파여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홈은 완만하게 위로 향하고 있다. 신선채로 오르는 길이라는데 가이드의 말로는 지금은 통행을 막고 있다고 한다. 열려있다고 해도 그 길을 걸을만한 담력(膽力)이 내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차후의 문제에 불과하다. 신선채 위에 있다는 관경대(觀景台)를 보고 싶은 욕심이 커질 경우에는 위험을 무릅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신선채에 난 저런 길을 보통 잔도(棧道)라고 부른다. 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 낸 저런 길이 중국에는 유난히도 많다. 저런 길을 내느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 나갔을 것이다. 그런 아픔의 길을 우리는 희희낙락(喜喜樂樂) 걷고 있을 테고 말이다.

 

 

천문산 트레킹은 주차장에서 자강(資江)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산이 끼어있어 당연히 올라가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의외이다. 강가까지 차량이 내려갈 수 없도록 생긴 지형(地形)이 원인인 모양이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왼편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천문사(天門寺)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들어서고 본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절간을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막상 들어가 본 천문사는 기대에 못 미쳤다. ‘사적보호지역이라는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절의 규모나 외관(外觀)이 우리나라에서 보아오던 절들보다 한참이나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절 주변에 어수선하게 매달려있는 빨간 리본들은 절간이라는 느낌보다는 무당집의 냄새를 더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기원(祈願)을 할 때 매단다는 빨간 리본들이 나에겐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물론 문화의 차이가 그 원인일 게다.

 

 

 

절을 빠져나가는데 왼편의 울창한 숲속에 집들이 몇 채 보인다. 자그마한 것들이 얼핏 보면 영화 세트장을 닮았다. 이런 건물들은 천문산으로 오르는 길 산자락에서도 만나게 된다. 옛날 이곳에서 살던 원주민(原住民)들의 가옥(家屋)이란다. 지금은 사람이 다 떠나고 그저 관광객들의 눈요깃감으로 유지되고 있단다.

 

 

20분 정도의 숲길을 빠져나오면 자강(資江)이다. 그리고 그 건너에 있는 유난히도 뾰쪽하게 솟아오른 바위봉우리가 압도적이다. ‘도화도(桃花島)’ 복숭아꽃섬이란다. 강가에 내려서자 의외의 풍경과 맞닥뜨린다. 강물이 온통 흙탕물인 것이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어울리지 않은 낯선 풍경이다. 그래서 강의 이름이 자강일까? 강의 이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지만 결론은 아니었다. 그러려면 검붉은 색이라는 뜻의 자()를 써야하는데 재물이라는 뜻의 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가에서 오른편으로 향한다. 천문산은 물론 왼편에 있다. 산을 오르기 전에 먼저 유람선을 타보기 위해서이다. 유람선(遊覽船)은 자강(資江)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코스로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양안(兩岸)이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인 자강을 따라가며 수시로 바뀌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유람선(遊覽船)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뗏목 모양으로 생겼다. 네모로 된 갑판에 10여 개의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천막을 씌워 놓았다. 비록 동력선이지만 원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다른 하나는 흔히 볼 수 있는 현대식 유람선으로 특이할 게 없다.

 

 

 

유람선은 중간에 잠깐 멈춰주기도 한다. 천문진강(天門鎭江)이라는 곳이다. 이곳에서 보면 산이 마치 손바닥을 폈을 때의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오지산(五指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다섯 개의 손가락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강가의 능선이 그렇게 생겼다는데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고서는 알아 챌 수 없으니 구태여 명물로까지는 꼽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아까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던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한다. 길가에 건물들이 몇 채 보인다. 그 앞에 물건을 팔 수 있는 좌판(坐板)까지 놓여있는 것을 보면 관광지 안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모양이다.

 

 

강가에서 보면 왼편 천문산 자락, 그러니까 거대한 바위벼랑을 위에서 아래로 길게 연결시키고 있는 뭔가가 보인다. 위로 오르는 것 자체가 힘겨운 사람들을 위해 만든 케이블카이다. 중국의 산들이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가 다녀본 중국의 산들은 하나같이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반대에 밀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문처럼 생긴 아치(arch)형 문을 지나면 잠시 후에는 아까 천문사 근처에서 보았던 가옥들이 또 다시 나타난다. 아니 아까보다 그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 규모다 아까의 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 울창한 숲속 이곳저곳에 들어앉은 집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그림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는 얘기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협영화를 찍기에 딱 좋은 장소로 보인다.

 

 

 

얼마나 걸었을까.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가는 길은 이미 갈려나간 뒤이다. 백약곡(百葯谷)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는 아주 옛스런 문이 하나 나타난다. 백약곡에 들어선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무작정 걷지만 말고 주위를 살펴보는 것을 잊지 말자. 혹시라도 귀한 약초 한 뿌리 캘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백약곡 문을 지났다싶으면 조금 후에는 약왕(箹王) 손사막(孫思邈)의 동상(銅像)이 나타난다. 이곳은 약초가 많기로 소문난 백약곡, 그래서 만들어 놓은 동상도 약왕인가 보다. 손사막은 당나라 때 사람으로 의약학에 조예가 깊은 도사이다. 그리고 중국 의약학 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대접을 받는 천금요방천금익방등을 남겼다. 후세 사람들이 손사막을 약상진인(藥上眞人)’이라 일컬으며 약왕묘(藥王廟)에 모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인연이 이곳에까지 미친 모양이다.

 

 

 

협곡 사이로 난 아름다운 바윗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또 다른 동상이 나타난다. 이번 것은 약왕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그 크기부터가 거대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향로까지 갖추어져 있다. 그만큼 존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농(神農)씨의 상()이란다. 신농씨는 신화(神話) 시대의 황제다. 그가 신농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은 최초로 나무를 깎아서 호미를 만들었고, 나뭇가지를 구부려서 호미자루를 만든 농기구의 발명자이며, 그것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각지의 모든 약초를 모아 임상시험을 거친 후에 마침내 365종류의 약을 발명하여 신농본초(神農本草)’라는 책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약황제(藥皇帝)로 섬기어져도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다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상() 앞에다 향로까지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신농상을 지나면 이번에는 명의(名醫) 편작(編鵲)이다. 괵나라(BC 655년 멸망) 태자의 급환을 고쳐 죽음에서 되살렸다는 편작은 흔히 인도의 기파(者婆)와 함께 명의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당연히 백약곡에 들어앉아 마땅한 인물인 것이다. 이 외에도 백약곡에는 두어 개의 동상들이 더 보였으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협곡(峽谷)으로 난 길은 곳곳에서 천연의 굴을 통과하기도 한다. 밝고 어둠이 수시로 교차되는 실로 멋진 길이다. 길의 상황은 아래사진을 뒤집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올라갈 때 촬영했던 사진이 별로라서 내려올 때 촬영한 것들로 대신했기 때문이다.

 

 

 

 

 

동굴 지역을 지나서 조금 더 오르면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다원·일선천/ 返程路)로 나뉜다. 양쪽 모두 정상 조금 못미처에서 다시 만나게 되므로 어디로 가더라도 매한가지이나 이곳에서는 이정표에 적힌 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 험한 바윗길은 올라가면서 바라봐야 그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선천으로 가는 길도 협곡으로 나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길은 넓어졌다가 좁아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어디를 봐도 바위뿐 다른 것은 없다. 그 바위벼랑의 생김새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면서 각기 다른 풍경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게 협곡산행의 참맛인가 보다.

 

 

 

천문산(天门山)은 마치 문을 열고 하늘을 보는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선채(神仙寨)와 천문산 최고의 전망대라는 천척(天脊), 천척으로 가는 계곡인 백약곡(百葯谷), 그리고 자강이 휘돌아가는 곳에 있는 바위산 도화도(桃花島) 등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잘 보존된 자연생태계와 바위산이 지닌 힘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산길은 언제부턴가 암봉 사이의 좁은 틈으로 난 계단을 오르게 된다. 양쪽 절벽의 높이가 60m에 이르고 폭이 0.5~5m, 그리고 길이가 170m에 이르는 좁은 바위 통로이다. 그 이름은 일선천(一線天), 아마 하늘이 일직선으로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천문산에는 일선천이 두 곳에 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동일선천(東一线天)으로 불린다. 다른 하나는 신선채에 있다는 서일선천(西一线天)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선채 탐방로는 막혀있다. 서일선천도 가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일선천을 통과하고 나면 능선 안부에 올라서게 된다. 산길은 이곳에서 오른편 능선을 따른다. 능선으로 놓인 긴 나무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전망대가 있는 천척(天脊, stone ridge)으로 가는 길이다. 천척으로 가다보면 왼편으로 난 길이 하나 보인다. 그쪽 방향에서 오는 젊은이들이 보이기에 물어보니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는 길이란다. 다행이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었기에 알아보는 게 가능했다.

 

 

천척에 이르는 능선은 등뼈동물의 등허리처럼 길다. 하긴 천척(天脊, stone ridge)이라는 단어의 뜻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등마루(척추)'라니 그리 생겼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능선의 양면(兩面)은 천 길의 단애(斷崖)로 이루어져 있어 내려다보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내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는 것이다. 그 중간에다 전망대를 겸한 이층의 누각(樓閣)을 배치했고, 조금 더 나아간 능선의 끄트머리에는 또 다른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참고로 천척(天脊.天梁 stone ridge)은 폭2~5m에 길이가 300m 정도 되는 바위 능선이다. 능선은 삼면(三面)이 깍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높이가 무려 600m에 이른다. 비록 안전시설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소름끼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은 엄청나다. 주변의 단하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풍광이 경이로울 정도로 절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끄트머리 전망대까지 가기는 쉽지 않다. 서슬 시퍼런 벼랑 위를 통과하는 것이 무섭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끄트머리에 있는 전망대가 더 아슬아슬하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서 한참을 더 나아간 허공에다 만든 것만 해도 위태롭기 짝이 없는데,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바닥에다 강화유리를 깔아 놓았다. 때문에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이다. 그 높이가 수천 길이나 되다보니 벼랑의 허리 어림을 지나고 있는 구름까지도 내다보일 지경이다. 신선들이 하늘에서 바라보는 인간세상의 풍경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망대에서는 천문산을 이루고 있는 웅장한 돌봉우리들과 그 사이를 채운 빽빽한 산림(山林), 그리고 계림 지방 특유의 둥글고 뾰족한 산봉우리들을 시원하게 둘러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행운이 없나보다. 주위가 온통 구름으로 둘러싸여 시야(視野)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S'자를 그리면서 산자락 사이를 흐르는 자강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아본다. 하늘과 땅 사이를 받치고 있는 척추 위에서 바라보는 자강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테니까 말이다.

 

 

 

내려올 때는 아까 올라왔던 일선천이 아닌 다른 코스를 이용한다. 내려가는 계단 역시 경사(傾斜)가 가파르고 험하지만 아까 올라올 때보다는 한결 낫다. 그리고 그 거리 또한 짧다. 이 길은 아까 올라올 때 지나갔던 갈림길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는 올라왔던 길을 다시 되밟아 내려가는 여정이 된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아까 올라갈 때 보았던 좌판(坐板)에 뭔가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대나무를 잘라 만든 통에다 찹쌀을 넣고 지은 죽통밥이란다. 그 맛이 궁금하지만 참기로 한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점심요리를 제대로 맛보려면 출출한 채로 속을 비워두는 게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요리는 유람선 선착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 차려져 있다. 한 끼 때우기에 충분한 식당이 강가에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트레킹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다만 시골이라는 여건을 감안한다면 손님이 많을 경우에는 미리 주문해 놓는 센스를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맛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썩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뒤떨어지지도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술값을 흥정하는 내 비위까지 맞추어 줄 정도로 주인장의 서비스 또한 괜찮았음은 물론이다. 참고로 식당의 이름은 산지항(山之港), 어쩌면 유람선 선착장의 이름이 아닐까 싶다. 천문산안내도에는 이외에도 천지항(天之港)이라는 지명도 보였다. 이것 역시 어디를 나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식사를 하면서 창밖으로 나타나는 도화도를 바라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여행지 : 계림(中國)

 

여행일 : ‘14. 11. 27() - 12.1()

일 정 :

11.28() : 천문산트레킹(선착장-전망대-천등-일선천-약초밭-산장, 2시간), 팔각채드레킹(주차장-용등-전망대-천교-일선천-팔각채 정상-주차장, 3시간30)

11.29() : 어강 선상유람(죽강양삭, 4시간), 서가재래시장, 은자암동굴, ‘인삼유삼재관람

11.20() : 요산, 천산, 양강사호(주간 : 삼호, 야간 : 용호), ‘이강몽환쇼관람

 

계림 종합 : 요산(堯山)과 양강사호 등 시내관광

 

특징 : 중국 남쪽,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인구 천 5백만 정도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는 장족, 한족, 묘족, 모한족 등 다양한 민족으로 형성되어 있다. ·청 때에는 광서성으로 불리다가 1958년에 자치구로 성립되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주도(主都)인 난닝(南寧)을 비롯 계림, 베트남과의 국경에서 가까운 화산풍경구(花山風景區)가 있다. 이중 광서장족자치구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계림(桂林 : 꾸이린)은 계수나무가 많아 계수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빼어난 풍치로 예로부터 시인과 화가들의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어오던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계림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라는 명성이 있을 정도로 계림은 중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지중의 하나로 각광을 받아 왔다. 참고로 계림의 기후는 아열대 기후에 속하며 연평균기온이 18.8에 있을 정도로 따뜻한 곳이다. 여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은 10월에서 4월까지, 이 기간 중에는 쾌적하고 맑은 날이 많기 때문에 계림의 풍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찾아오는 길 ; 인천공항에서 계림시까지 직항노선이 다니고 있어 환승 등의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쉽게 찾아올 수 있다. 

 

 

 

숙소인 계산화성반점(桂山華星酒店 : Grand Link Hotel)

인천공항을 늦게 출발한 탓에 계림에는 저녁에야 도착, 사위는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다. 계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내에 있는 호텔로 이동, 공항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한 계산화성호텔이다. 저녁이라서 그저 시설이 좋은 호텔인가 보구나 하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생각보다 큰 규모의 호텔이었다. 5성급 호텔이란다. 건물의 중간에 정원까지 만들어 놓을 정도로 공간배치가 잘 되어 있었고, 실내 공간 또한 널찍하면서도 깔끔했다. 물론 샤워 룸(shower room)도 깨끗했고 에머너티(면도기는 없으니 챙겨가야 한다) 또한 넉넉했다. 특히 호텔에서 제공되는 아침식사는 내 입에 딱 맞았다. 입에 맞지 않은 음식 때문에 중국나들이 자체가 힘겨웠던 적이 종종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한국 사람들 기호에 맞는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심심찮게 한국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소개할 곳은 요산(堯山, 909.3m), 사실은 맨 마지막 날인 셋째 날에 올랐으나 종합편에다 포함시키다보니 본의 아니게 가장 먼저 튀어나오게 되었다. 계림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요산은 자연풍경과 고대 능묘군(陵墓群)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명승구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탓인지 요산의 능선에는 무덤이 즐비하다고 한다. ()자리에도 귀천(貴賤)이 있는 듯 명당(明堂)으로 보이는 곳들은 어김없이 권력자들이 차지했다니 서민들이야 그들이 쓰고 남은 자리에다 묘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요산은 산봉우리가 남북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어 마치 소()와 같아 보인다고 해서 우산(牛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고 한다.

 

 

 

계림에서 가장 높은 산인 요산의 특징을 들라면 뭐니 뭐니 해도 계림에서 유일한 흙산이라는 점이다. 계림의 대부분 산들이 석산(石山)인 것과는 달리 요산만 오직 흙산인 것이다. 덕분에 산등성이의 기세가 드높음에도 불구하고 초목(草木)이 무성하며, 특히 매년 3월이면 두견화가 가득 산을 덮는다고 한다.

 

 

요산 트레킹은 삭도(索道)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삭도란 밧줄을 공중에 매달아 연결하여 양 끝단 사이를 이동하는 수단을 총칭(總稱)하는 낱말이니 리프트(lift)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겠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대략 20분 정도가 걸린다.

 

 

 

완만하게 오르던 리프트는 중간의 정류장을 지나면서 갑자기 가파르게 위로 향한다.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크다. 굽이굽이 늘어선 가양각색의 산봉우리와 안개가 감도는 계곡 등 계림의 아름다운 산수가 한눈에 안겨온다.

 

 

발아래에 어른의 키를 훌쩍 넘기는 억새밭이 펼쳐지고 있다. 하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광경이 마치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는 것 같다. 그 억새밭 사이로 난 오솔길이 나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리프트를 이용하지 않을 경우 저 길을 따라 올라야 한단다.

 

 

 

 

 

리프트에서 내리면 곧이어 전망대(展望臺). 전망대에 서면 산수화(山水畵)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도 바위봉우리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중국풍의 산수화이다. 난간 가까이에는 하트() 모양의 그네까지 매달아 놓아 관광객들의 흥을 돋우고 있다. 제법 굵어진 비 때문인지 주변엔 사람들도 없다. 마음 편히 그네에 앉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계림산수의 절경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정상에는 십이지(十二支), 즉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열두 가지 동물들을 상징하는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가끔 부처님들에게 빌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아마 자기가 태어난 띠의 앞일 것이다. 뭔가에 비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일 것이고 말이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요임금(帝堯)의 동상, 이곳 요산(堯山)의 이름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랬다. 산 위에 요임금을 섬기는 사당(祠堂)이 세워져 있다고 해서 요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상들의 옆을 지나면 또 다른 전망대에 서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이 호사(豪奢)를 누린다. 수많은 바위봉우리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하얀 구름들이 그 사이사이를 굽이쳐 흐르고 있다. 너무 인상적이기에 허투루 흘려버리지를 못하고 가슴에 차곡차곡 쌓는다.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누군가 계림의 풍경을 한눈에 담아보고 싶으면 요산(堯山)에 올라보라고 했다. 계림에서 가장 높다는 요산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 저런 풍광이 펼쳐지기에 그렇게 권했나 보다.

 

 

 

보물찾기? 아니 부처님 찾기이다. 아래 그림에서 부처님의 형상을 보았다면 불심(佛心)이 지긋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와불(臥佛)이란다. 미리 얘기를 들어서일까? 내 눈에도 누워있는 부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정상을 둘러본 뒤에는 또 다시 리프트를 타고 아래로 내려온다. 굵어진 비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시간을 단축해보려는 목적에서다. 그래야 하나라도 더 많은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 물론 중간 정류장을 지나서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하얀색으로 빛나는 뭔가가 보인다.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 몸통을 비틀면서 아래를 향하고 있다. 봅슬레이(bobsleigh)란다. 타고 내려갈 경우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고는 하지만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에는 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

 

 

모처럼 중국에 왔으니 어찌 발마사지를 거를 수가 있겠는가. 짧은 시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몸의 피로를 말끔히 잊을 수 있는데 말이다. 발마사지는 중국 남쪽지방 고유의 전통 지압이 상업화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중국의 발마사지 중에서도 이쪽의 마사지가 가장 유명한 곳으로 꼽힌단다. 우선 발을 깨끗이 씻어준 다음, 두 발을 수십 가지의 한약재로 만든 뜨거운 약물에 담가 가볍게 풀어 준다. 그리고 물기를 닦은 후 크림을 발라 한쪽 발은 수건에 감싸 두고 다른 한쪽 발을 마사지하기 시작한다. 시간은 대략 40분에서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양강사호(兩江四湖)’를 찾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양강사호의 양강(兩江)은 이강과 도화강을 의미하며 사호(四湖)는 목룡호(木龙湖), 계호(桂湖), 용호(榕湖), 삼호(杉湖)로 이루어진 인공호반을 뜻한다. 양강사호에는 특징이 하나 있다. 호수가 강보다 4m나 높은 것이다. 때문에 호수와 강 사이에 갑문(閘門)을 만들었다. 갑문의 물을 빼고 들이는 엘리베이터 방식으로 유람선을 드나들게 한다.

 

 

첫 번째로 찾은 호수는 삼호(杉湖)이다. 삼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호수 건너편에 서있는 2개의 거대한 탑()이다. 금탑과 은탑이란다. 외관(外觀)이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그러나 두 탑의 아름다움은 어두워진 다음에야 그 진가(眞價)를 발휘한다고 한다. 조명시설에 불이 들어올 때 그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는 것이다.

 

 

 

 

 

해가 저물고 난 후 계림 시내로 나가면 큰 도로 위에 차 대신 수많은 노점상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그 사이를 거닐며 군것질을 하거나 기념품 등을 사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작년에 들렀던 상하이의 야경(夜景)처럼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은 더하지 않나 싶다.

 

 

 

계림에 오면 꼭 보아두어야 할 공연 중 하나가 몽환이강(夢幻漓江) (Moonlight circus & Ballet)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 저녁식사 후에 시간을 빼어 공연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극장에 들어서니 공연 중에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영어 등 4개 국어로 나오는데 한국어도 있음은 물론이다. 극장 곳곳에 이를 감시하려고 배치한 인력들도 눈에 띈다. 사직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발견될 때는 레이저빔을 쏘아 경고를 하고 있다. 몽환이강(夢幻漓江) (Moonlight circus & Ballet)는 중국의 전통 서커스와 서양의 발레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 낸 쇼로서 오직 중국의 계림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이다. 주제는 중국 남녀의 태어날 때부터 죽음까지 이르는 삶의 여정을 다루는데, 관객들은 1시간20분 동안 역동적인 무대와 조명, 그리고 눈이 부실정도로 화려한 의상과 무엇보다 서커스의 고난도 기술과 발레의 예술을 완벽하게 소화한 댄서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공연을 볼 수 있다.

 

 

저녁에 다시 양강사호를 찾았다. 이번에는 용호(榕湖)이다. 조명(照明)을 밝힌 호수주변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호숫가를 걷다가 대용수(大榕樹)를 만났다. 용수나무는 아시아의 열대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로, 가지에서 기근(氣根)이 내려 지주근(支柱根)이 되는 식으로 뻗어나가는 독특한 나무이다. 열매는 무화과를 닮았다고 한다. 이 용수나무가 천년을 훌쩍 넘기게 자라나 하나의 작은 산처럼 보인다고 해서 대용수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밤이라서 전체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엄청나게 큰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튼 중국이란 나라는 큰 것을 엄청 좋아하나 보다.

 

 

 

밤의 양강사호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지극히 중국적인 건물들에 조명(照明)이 시작되면 소문이 자자한 사호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아름다움은 호수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밤의 물빛이 지극히 어둡기에 인공으로 만들어낸 조명이 더욱 돋보이지 않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

 

 

 

 

양강사호의 야경은 한마디로 화려함의 극치다. 작년에 다녀갔던 상하이의 비한다면 그 규모는 분명히 작다. 그러나 정교함을 감안한다면 상하이보다 한 수 위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싶다. 화려하다는 용어를 쓴 이유이다.

 

 

 

 

 

 

걷다보면 개선문이나 금문교 등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건축물들이 여러 개 눈에 들어온다. 그 건축물들을 축소해서 만들었다는데,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이 어찌 보면 원래의 건축물보다 더 아름답게 보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