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여행 둘째 날, 구채구(九寨溝)


특징 : 사천성 북부의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阿坝藏族羌族自治州)‘에 있는 자연보호구인 구채구(九寨溝, 주자이거우)는 석회질의 민산산맥 중, 해발 2000m에서 3400m에 이르는 100개 이상의 연못이 이어져 있는 천혜의 카르스트(karst) 담수(淡水) 호수지대이다. 산골짜기는 Y자 모양으로 분기되고 있고, 민산산맥에서 흘러나온 물이 폭포를 만들며 계단식 호수와 늪에 연결된다. 물은 투명하고, 산맥에서 흘러든 석회석 성분이 연못 아래 침전되어 낮에는 청색, 저녁에는 오렌지색 등의 다채롭고 독특한 색()들을 보여준다. 또한 계곡을 통해 운반된 부엽토에 식물이 자라는 독특한 경관을 보이기도 한다. 구채구에는 소수민족인 티베트족들이 살고 있다. 구채구(九寨溝)라는 이름도 티베트인의 마을 9개가 있는 산골짜기에서 유래한 것이란다. 720의 총면적 중 52%가 빽빽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숲속에서 100여 종의 식물과 희귀 동물이 공존한다. 특히 자이언트판다의 서식지로 유명하니 참조한다. 아무튼 수백 년 동안 침묵 속에 있던 선경(仙境)1970년대에 이르러 몇 명의 벌목공들에 의해 발견됐다. 이후 1978년 정부의 엄격한 보호를 받는 관광명소가 됐으며, 또한 1990년에는 중국 40대 주요 명소에 입성함과 동시에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까지 등록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교통사정이 좋아지고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 입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관광객들이 첫 손으로 꼽는 유명한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구채구의 신비한 운해(雲海)와 맑은 물, 폭포, 기이한 지형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마치 신화 속의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을 풍겨 여행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눈을 뜨자마자 구체구로 이동한다. 아침식사는 간단하게 때웠음은 물론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하도 많아 조금이라도 먼저 가서 줄을 서야만 한단다. 그래야만 줄에 서서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우리만의 생각이겠는가. 매표소로 가는 길은 이미 인산인해(人山人海)이다. 그중에는 눈동자가 시퍼런 외국인들도 상당수 보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도 이러는 것을 보면 구채구가 중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관광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참고로 구채구는 자연보호를 위해 개발이 제한되고 있다. 하루 입장객 수도 제한된다고 한다.




20분 정도 줄을 선 끝에 안으로 들어선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정도 갖고는 줄을 섰다고 명함도 못 내민단다. ’자신의 덕분이란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 단채로 우산을 빌려오는 것 하며 오늘은 가이드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나이다. 아무튼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줄을 서야한다. 구채구 안을 운행하고 있는 셔틀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구채구의 범위가 넓다는 증거일 것이다.



'Y'자 모양을 하고 있는 구채구는 크게 수정(樹正)과 일측(日則), 측사(則査) 3개의 골짜기로 구성된다. 그중 일측구(日則溝)를 먼저 찾아보기로 한다. 18km 거리에 보석 같은 볼거리들이 늘어서 있다고 알려진 곳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얼마쯤 올라갔을까 가이드가 내리란다. 버스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다. 이 위로도 볼거리들이 분포되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계곡 방향으로 잠시 내려서면 커다란 호수 하나가 나타난다. 오화해(五花海)란다. 오화해를 만난 첫 느낌은 어쩌면 이렇게도 물이 맑을 수가 있을까?‘이다. 저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모르게 만드는 풍경이 나타난 것이다. ’물의 나라 구채구‘. '구채구의 물을 보고 나면 다른 물은 보이지 않는다'라는 수식(修飾)들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에메랄드(emerald) 빛깔의 호수는 너무나 고왔다. 감격의 눈물 한 방울 똑 떨어지게 만들 정도로...



오화해(五花海)는 햇빛에 비치는 물빛이 공작의 깃털처럼 아름다운 색채로 빛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어 햇빛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의 물빛은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오화해(五花海)’라는 이름처럼 다섯 송이 꽃으로 나타난다는 호수의 색깔은 에메랄드빛의 단색만 보여준다. 그리고 호수의 수면(水面) 위로 비친다는 하늘과 산의 그림자도 기대할 수 없다. 하늘과 호수가 하나로 겹쳐지는 풍경이 나타난다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호수를 가로지르면 잠시 후 오화해(五花海)’라고 적힌 빗돌을 만난다. 그런데 호수를 나타내는 ()’자가 아닌 바다 해()’ 자를 적어 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생전 바다를 본 적이 없는 이곳 토착민인 장족(藏族)들이 이러한 호수를 일러 하이쯔(海子·바다의 아들)라고 부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속에 드러누워 있는 통나무들이 보인다. 오래 전 가라앉은 듯 뿌옇게 이끼가 끼어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벌채꾼들이 불법(不法)으로 베어낸 나무들이란다. 몰래 베다가 정부의 감시원들에게 적발되었는데, 그때 압수된 나무들을 통째로 호수 속에 가라앉혀 버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고목(枯木)들과 수초들이 석회질과 반응하면서 물 속 전시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구채구가 높은 인기를 끄는 것은 독특한 물의 색깔 때문이다. 이런 독특한 색상은 석회암 성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다. 구채구는 사천지방 해발 2140~4558m의 고지대(高地帶)에서 수천만 년 동안 석회암이 녹아 형성된 카르스트(karst) 지형이다.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 속의 이산화탄소는 눈() 녹은 물과 빗물 등에 반응하면 탄산수소칼슘으로 화한다. 이것이 용해되면서 빙하(氷河)나 지각변동(地殼變動)에 의해 생긴 보()에 물이 채워지면서 언색호(堰塞湖 : 골짜기에 흐르는 계류나 하천 등이 막혀서 생긴 호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도로로 되돌아 나와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탄다. 임측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경해(鏡海)로 가기 위해서이다. 경해는 작고 아담한 호수이다. 하지만 산과 하늘이 마치 거울처럼 수면에 아름답게 비친다는 호수의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기 짝이 없다. 구채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손꼽힌단다. 아무튼 여기서 사진을 찍는 연인들은 영원한 사랑을 얻는다는 속설(俗說) 때문에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맑디맑은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호수는 곱디곱다. 추적거리는 빗줄기 때문에 거울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건 여전하다. 또렷하지는 앉지만 호수 바닥도 내다보인다. 마침 찾아온 계절이 가을이다 보니 울긋불긋한 단풍이 주변 풍경 속에 녹아들며 기존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배가시키고 있다. 만일 수면(水面)에 투영되기 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사람들의 눈은 물론 영혼까지 매료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경호를 끝으로 일측구의 투어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일측구(日則溝)에는 오늘 둘러본 오화해(五花海)와 경해(鏡海) 외에도 천아해(天鵝海)와 방초해(芳草海), 전죽해(箭竹海), 웅묘해(熊貓海), 진주탄(珍珠灘) 등의 호수와 웅묘해 폭포(熊貓海瀑布), 진주탄폭포(珍珠灘瀑布), 낙일랑폭포(諾日朗瀑布), 원시삼림(原始森林), 공작하도(孔雀河道) 등의 볼거리가 수두룩하다.



달리던 버스가 삼거리에서 멈춰 선다. 수정구(樹正溝)와 측사와구(則査洼溝), 일측구(日則溝) 등 세 갈래의 협곡(峽谷)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입구인 매표소에서 14.5쯤 떨어진 지점, 즉 낙일랑(諾日朗)폭포 근처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곳에 만남의 광장이 만들어져 있다. 아니 수많은 기념품 상점과 음식점 등에 편의시설까지 두루 갖추었으니 종합상가라 해도 되겠다. 쉼터의 기능을 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삼거리 쉼터에서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이번에는 측사와구(則查窪寨)로 향한다. Y자 모양으로 나뉘는 두 개의 협곡(峽谷) 중에서 왼편의 것으로, 그 길이는 대략 18km에 달한다. 이곳 측사와구에는 구채구의 명물이라 불리는 두 개의 호수가 있다. 오색의 현란한 광채를 자랑하는 오채지(五彩池)’와 가장 높은 호수인 장해(長海)’가 바로 그것이다. 버스는 이들 중 먼저 장해에다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해발이 무려 3,100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 호수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주차장에서 바라보이는 산봉우리는 벌써부터 하얀 눈을 듬뿍 뒤집어쓰고 있다. 참고로 구채구의 입장료에는 셔틀버스 이용 요금이 포함되어 있다. 추가요금을 받지 않으니 망설이지 말고 이용하면 된다. 원하는 곳으로 가다가 중간 중간 아름다운 곳에서 내려 구경을 하고, 지나가는 아무 차나 잡아타고 다음 행선지로 가면 된다.



장해의 특징은 구채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호수의 길이가 길다는 특징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폭은 비록 600정도에 지나지 않으나 그 길이는 무려 17km에 이른단다. 수심(水深)도 가장 깊은 곳은 100나 된단다. 그래서 바다와 같은 호수라는 뜻으로 장해(長海)‘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데, 그 물줄기가 주변의 원시산림과 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산수화를 만들어 낸다. 그것도 빼어나게 잘 그린 그림이다.




호숫가에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게 멀리 보이는 설산(雪山)과 어우러지며 웅장한 경관을 연출해낸다. 장해가 독특한 점은 이곳의 물이 다른 협곡에서 따로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설산에서 녹아내린 눈이 호수에 고여 생성된다는 사실이다. 그 물이 엄청나게 깊다보니 푸른빛을 넘어서서 검은빛으로 향하고 있다. 참고로 이곳 장해는 폭우가 내려도 범람하지 않고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아도 절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담아도 넘치지 않고, 새어도 마르지 않는 신비의 호수'라고 부른단다.



오채지(五彩池)로 향한다. 1Km나 되는 먼 거리인데도 끝까지 데크를 깔아 놓았다. 인간의 발길로부터 자연을 보호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세계자연유산에 걸맞는 관리가 아닐까 싶다.



얼마 후 오채지(五彩池)에 이른다. 그 규모는 비록 작지만 물이 품고 있는 색깔까지 작지는 않은 호수이다. 아니 이곳 구채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오채지는 본래 짙푸른 색을 띤다고 한다. 하지만 바닥의 침전물이나 주변에 돋은 식물들의 색채에 따라 오색찬란하게 보이기도 한단다. ‘오채지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이곳 오채지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아름다운 여신(女神)이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여신을 사랑한 남신(南神)은 여신을 위하여 바다에 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세월이 흘러 남신이 다닌 길에 189개의 계단이 생겨났으며 여신이 씻어낸 연지는 아름다운 호수의 빛깔이 되었단다. 이후로 연인들이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고 다시 189개의 계단을 발고 올라가면 영원한 사랑을 이루게 된다고 전해진다.



오채지(五彩池)는 환상적인 빛깔이 으뜸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호수라고 믿기 힘들 만큼 에메랄드빛이 감돈다. 남태평양이나 인도양의 환상적인 바다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극찬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다. 아무튼 이 호수의 영어 명칭이 ‘Multicolor’로 소개될 만큼 다양한 색을 뿜어낸다. 그리고 아무리 기온이 떨어져도 물이 얼지 않는 이유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다는 신비로움까지 더해져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오채지를 마지막으로 측사와구의 투어는 끝난다. 이젠 데크길을 따라 셔틀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길이다. 구채구의 자랑은 비취색의 넓고 잔잔한 호수들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높게 뻗어있는 울창한 침엽수림이 주변 풍광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곳 구채구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 가장 뛰어난 곳은 일측구의 맨 위에 있는 원시삼림(原始森林)이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에 쫒긴 우린 가보질 못했다. 뭔가 미진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그 아쉬움을 지금 걷고 있는 숲길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 역시 울창한 숲이니까 말이다. 참고로 이곳 측사와구(則查窪溝)에는 조금 전에 둘러본 장해(長海)와 오채지(五彩池) 외에도 상계절해(上季節海), 중계절해(中季節海), 하계절해(下季節海), 측사와구(則查窪寨) 등이 있다고 한다. 셔틀버스의 창밖으로 내다보이던 자그만 호수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호수들은 하나같이 바닥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갈수기(渴水期)인 겨울에서 봄까지는 담수량(湛水量)이 적어 일부 호수들은 물이 말라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셔틀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아까 이곳으로 올라올 때 버스를 탔던 곳, 즉 세 개의 골자기가 만나는 곳에 만들어진 쉼터로 향한다. 그러나 버스는 쉼터에 다 가지를 않고 조금 못미처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장족의 민속마을을 둘러보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곳 구채구 사람들이 직접 채취했다는 토산품들을 사가라는 은근한 유혹도 숨어있음은 물론이다. 하긴 모처럼 나온 여행이니 필요한 것 한두 가지쯤 사가는 게 무에 문제가 되겠는가. 참고로 대부분의 장족들은 야크와 염소를 방목하는 목축이 주업이지만 삼림자원이 풍부하여 당삼·당귀(當歸패모(貝母사향·충초(蟲草) 등의 약재를 캐기도 한다. 그리고 옥수수··유채·잎담배 등의 농산물도 산출한다.



이곳 구채구는 당나라 때부터 중국의 소수민족인 장족(藏族)이 거주하던 곳이다. 마을 이름 또한 ’9개의 장족마을을 뜻한다. 사천성 아바티베트족창족자치주(阿坝藏族羌族自治州)‘ 북부 바이룽강(白龍江) 지류인 바이수이강(白水江) 유역에 자리 잡고 있다. 장족(藏族)들은 본래 티베트를 근거지로 살았으나 라마교 종파의 분리로 그중 일부가 험준한 이곳까지 쫓겨 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도 있다. 티베트를 최초로 통일한 송첸칸포(松贊干布) 왕이 송번에서 당나라 군대와 대치하다가, 화친을 맺어 티베트로 회군하던 중 일부 군사가 구채구의 아름다운 절경에 빠져 이곳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주변의 풍물은 티베트의 색채가 강하다. 우선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되는 불교 도구인 마니차(摩尼車)가 눈에 들어온다. 측면에 만트라(Mantram, 陀羅尼라고도 한다)가 새겨진 원통이다. 내부에는 경문(經文)이 새겨져 있단다. 그 옆의 석탑에서는 빨강 파랑 노랑 녹색 흰색 등 다섯 가지 색깔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저런 깃발에는 티베트 불교의 경전과 상징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 깃발들을 끈에 매달아 놓아 부는 바람결에 경전에 담긴 진리가 멀리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단다.



구채구를 대표하는 풍경들을 손가락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단풍으로 물든 산, 겨울 설산, 폭포, 호수, 그리고 티베트 거주지의 풍경, 이렇게 다섯 가지를 들며 오경(五景)이라 일컫는다. 이번에 들를 곳은 이 다섯 가지 중에서 티베트 거주지의 풍경이다. 즉 사람들의 접근이 없던 시절 골짜기에 모여 살며 자급자족으로 생활하던 장족의 문화를 둘러보게 되는 것이다. 마침 채주(寨主)의 집에다 작은 전시관을 만들어 놓았기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안으로 들면 그들이 타고 다니던 마구(馬具)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티베트 사람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불상(佛象)이나 금은세공품, 그리고 그릇들이 진열되어 있다. 진열되고 있는 유물의 종류나 보존 상태 등은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이마저도 없었더라면 이들의 문화는 느껴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고맙다는 얘기이다.





밖으로 나오면 이번에는 각종 먹거리들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야크의 본고장답게 야크고기를 이용한 각종 요리들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포장마차 앞에서 서성인다. 만두와 튀김 종류를 팔고 있는데 제법 맛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에도 야크고기가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모처럼 들른 관광객들을 놓칠 리가 없다. 가이드가 이 지역의 특산품을 팔고 있는 매장으로 안내한다. 들어갈까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를 선택할 여지를 두지 않는 반강제적인 안내이기 때문이다. ‘피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즐기라고 했다. 일단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가 보자. 이 지역 주민들이 직접 채취했다는 꿀인 목청(木淸)’석청(石淸)’이 있는가 하면 동충하초(冬蟲夏草)’도 진열되어 있다. 이곳 주민들의 생활풍습 등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에는 그들이 갖고 있는 토산품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설명보다는 꿀차()나 동충하초로 담은 술() , 제공되는 맛보기에 더 관심을 갖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충하초 술을 넉 잔이나 얻어 마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동충하초를 두 봉지나 사왔지만 말이다.



의무적인 쇼핑(옵션으로 걸려있는 쇼핑이었다)이 끝나면 점심식사가 기다린다. 식당가는 아까 측사와구로 가기위해 버스를 갈아탔던 삼거리 쉼터에 있는데, 이곳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나온다. 관광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식사의 질은 괜찮은 편이었다. 꽤나 많은 종류의 음식이 준비된 뷔페식당이었는데 우리 입맛에 적당히 맞춰져 있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에는 수정구(樹正溝)’의 탐방에 나선다. 그 첫 번째는 낙일랑(諾日朗) 폭포이다. ‘Y’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구채구의 한가운데, 그러니까 세 개의 협곡이 서로 만나는 곳에 위치한 폭포이다. ‘Y’ 자의 아랫부분인 수정구에는 구채구의 하이라이트라 불리는 명소가 많다. 19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주변의 원시림과 함께 여러 풍경을 만들어낸다.



낙일랑 폭포(諾日朗 瀑布)’20높이의 낙차로 떨어지는 폭포이다. 넓이는 270로 중국에서 가장 넓다고 한다. 티베트어로 '낙일랑'이란 '남신(男神)' 또는 '웅장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이곳 구채구에서 가장 큰 폭포라고 하니 이름에 걸맞는 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시사철 맑은 물줄기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단다. 아무튼 낙일랑폭포는 중국의 대표 고전소설 중 하나인 서유기를 드라마로 만들 때 배경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낙일랑 폭포에 이르면 그 웅장한 기세에 압도부터 되고 만다. 중국의 석회 폭포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실크처럼 부드럽게 떨어져 내리는 아름다운 물줄기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큰 몸매에도 불구하고 고운 모양새까지 지닌 것이다. 또한 이곳은 가끔 무지개를 볼 수도 있단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한 폭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이 하얗게 얼어붙는단다. 그 풍경이 여름과는 또 다른 매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낙일랑 폭포를 뒤로 한 채 아래로 향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호수들을 만난다. 그 첫 번째는 서우해(犀牛海)’이다. 서우(犀牛)란 물소를 의미하는 한자이니 이 호수가 물소를 닮았던지 아니면 물소의 뿔을 닮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잠시 후 아름다운 폭포 하나를 더 만난다. 구채구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수정폭포(樹正瀑布)’이다. 이 폭포는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멋을 보여준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는 그게 더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조금 전에 지나왔던 낙일랑 폭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후로도 폭포와 호수는 계속된다. 수정군해(树正群海)일 것이다. 20~30개의 작은 호수들이 모여 이루어진 수정군해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이제껏 보아왔던 것들에는 한참 뒤떨어지니 기대할 필요는 없다. 그저 높게 뻗은 봉우리와 골짜기, 그리고 석회암과 울창한 원시림이 어우러진 산과 물을 즐긴다 생각하고 걸어볼 일이다.




얼마간 걸었을까 나무로 지어진 건축물 몇 채가 나타난다. 지붕까지도 나무판자를 얹었으니 온통 나무만 사용해서 지은 셈이다. ‘수정마방(樹正磨房)’이라는데 물레방앗간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에도 마니차(摩尼車)가 매달려 있다. 일하면서도 불경을 돌리는 그네들의 독실한 신심(信心)의 발로(發露)가 아닐까 싶다.




수정마방 근처에서 도로로 올라선다. 그 아래로도 몇 개의 호수가 더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위에서 멋진 물빛을 본 관광객들의 눈은 이미 높아져 더 이상 보는 것이 시들해져 버렸다. 도로로 올라가게 되는 이유이다. 도로변에는 제법 커다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장족마을인 수정채가 아닐까 싶다. 전통 복장을 한 장족 사람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물건들을 만들어 판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 들러보지는 못했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황산귀래 불간산, 구채귀래 불간수(黃山歸來不看山, 九寨歸來不看水)’라는 말이 있다. ‘황산을 보고 나면 다른 산을 보지 않고, 구채구의 물을 보고 나면 다른 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물의 나라라 불리는 구채구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Y’자 모양으로 생긴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은 폭포를 만들어내고 다시 평지에 모여 계단식 호수와 늪지를 형성한다. 그 물빛과 물소리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양한 퍼포먼스를 연출해낸다. 특히 호수와 대소규모의 늪에서 발산하는 빛깔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가히 물의 나라라 불리는데 손색이 없고, 설사 선경(仙境)이라 해도 누구 하나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여행 첫째 날 오후, 송판고성(松潘古成)


특징 : ‘국가지정 역사문화명성(歷史文化名城)’인 송판고성(松潘古城)은 진()나라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가 감숙성과 청해성, 산서성 일대를 연결하며 통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나라 때 송판은 토번국과의 국경을 이루던 곳이다. 당시 번성했던 토번의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던 당나라는 태종의 양녀 문성공주를 토번왕에게 시집보낸다. 토번을 포용하려는 유화정책의 일환이다.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듯 성문 앞에 토번국왕과 문성공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아무튼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명() 왕조 홍무제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내에는 이슬람교 사찰 청진사(淸眞寺)와 고송교(古松橋), 영월교(映月橋), 7층루(7層樓) 등 문화적 의미가 풍부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꿈의 여행지라는 구채구(九寨沟)로 가는 길, 모질고 험한 협곡(峽谷)을 따라 왔다갔다 용틀임을 하며 고도(高度)를 높여가던 도로가 끝내 고원(高原)에 올라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송판(松潘)이라는 작은 도시 하나를 만난다. 지리적으로 평원(平原)과 고원의 접경지대에 놓여 있는 읍()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사천성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송판(松潘)은 구채구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관문과 같은 곳이다. 말 트레킹(horse tracking)의 천국이란 명성에 걸맞게 매년 트레킹 시즌이면 전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붐비는 제법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그저 구채구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 가는 중간 기착지(寄着地)에 불과한 작은 마을일 따름이다. 이번 여행일정도 역시 그렇게 짜져 있었던 모양이다. 차창 밖으로 성벽이나 구경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게 못마땅해 투덜거렸더니 가이드가 들었던 모양이다. 30분 정도의 시간을 줄 테니 성문 근처라도 한 바퀴 둘러보란다.


옛 시가지로 연결되는 성문(城門)의 맞은편은 신시가지이다. 우리나라의 읍() 정도 규모가 아닐까 싶다. 시가지 또한 산간오지(山間奧地) 답지 않게 상당히 번화한 편이다. 하긴 진나라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가 감숙성, 청해성, 산서성 일대를 연결하며 통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인데 어련할까 싶다.



성문으로 향하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성문은 '송주(松州)'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송판의 옛 이름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마을은 옛날부터 사천성의 변방을 지키던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천서의문' 사천 북쪽 문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짐칸을 매달은 자전거가 성문을 빠져나오는 것이 보인다. 걸어서 돌아다니는 게 힘겨운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라 할 수 있겠다. 구시가지에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택시 대용으로 운행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전거 택시인 셈이다.



성문 주변은 온통 울긋불긋한 치장들을 해 놓았다. 영구시설로 보이지 않는 것이 무슨 행사라도 준비하고 있나 보다.



성문 앞에는 송첸감포(松贊干布, Songtsen Gampo)과 문성공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7세기 초 노예제를 바탕으로 봉건영주들이 난무하던 티베트에 불세출의 민족영웅 송첸감포왕이 출현했다. 냉철하고 영민하며 비전(vision)을 지닌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티베트 전역을 정복, 티베트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당시 티베트와 인접한 당나라는 태종에 의해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면서 세계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송첸감포왕은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통치제도를 확립하려 했다.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 태종에게 정중히 구혼을 요청하지만 당의 지방관은 사신의 방문조차 인정치 않고 송주에 억류시켰다. 분노한 송첸감포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송주에 내려와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당 수도인 장안까지 위협했다. 이에 당 태종은 여러 차례 대군을 파견하지만 당군은 용맹한 티베트군에게 줄곧 대패를 당했다. 강대한 티베트의 역량에 놀란 당 태종은 회유책으로 애지중지하던 수양딸 문성공주를 시집보냈고, 송첸감포왕은 직접 캄(khams)지역 고원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이 세기(世紀)의 결혼을 통해서 티베트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라마불교가 창시되었고, 제지기술과 문자창달 등 티베트만의 독자적인 문화가 꽃피게 된다.




성문의 양쪽에 기마상(騎馬像)이 세워져 있다. 의젓한 것이 장군쯤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이 그만큼 치열했다는 증거일 테고 말이다. 아무튼 송판은 한족과 티베트인이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을 되풀이한 접경 지역이었다. 군사적 요충지였을 게 당연하다. 송판 곳곳에 남아있는 옛 성곽(城廓)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성 안에는 이덕유(李德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의 헌종(穆宗)과 문종(文宗) 때 재상을 지냈던 이덕유는 이종민(李宗闵우승유(牛僧孺)와 벌인 우이당쟁(牛李党争)’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당파 싸움에 이력이 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가 한때 상대 당파에 밀려 서천절도사(西川节度使)로 나와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때 벌어진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모양이다. 당시 이곳은 촉서(蜀西)의 문으로 공협(邛崃)의 산 입구이며 토번(吐蕃)과 당이 쟁탈전을 벌이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토번의 유주 수장 실달모(悉怛谋)가 당나라에 투항을 요청해왔다. 이덕유는 이에 더하여 토번에 대한 진공(進攻)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정적(政敵)이었던 우승유의 반대로 진공은커녕 토번에 유주성을 돌려주고 실달모 이하 토번의 항장과 항졸들까지 토번으로 돌려보내 죽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나중에 잘잘못이 가려져 재상(宰相)으로 복귀되었지만 당나라에서 볼 때에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동상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토번의 입장에서는 이덕유가 별로였을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하긴 교묘하고 치밀한 티베트 말살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하던 누군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정도는 애교의 수준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성안에는 소공원(小公園)을 만들어 놓았다. 전체적인 조경(造景)은 인근에서 출토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자연석을 이용했다. 가장 큰 바위에다 송주(松州)’라는 지명을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송주의 산하(山河)를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변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동상(銅像)들을 배치했다.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말()이다. 이곳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민족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를 나누는가 하면, 앉아서 담소(談笑)를 즐기고 있는 광경도 보인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이민족(異民族)들끼리의 화합과 공생(共生)을 나타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곳 송판에는 한족(汉族)과 장족(藏族), 회족(回族), 강족(羌族) 등 크게 네 개의 민족이 모여 살고 있다. 그들은 생김새가 서로 다른 것은 물론, 입는 옷도 다르며, 언어와 종교, 거기다 문화와 풍습까지도 다르다. 하지만 큰 분쟁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단다.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가운데 서로를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안에 있는 소공원은 이런 특징을 표현해 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 안의 구시가지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옛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성의 안팎을 오가는 것이 마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듯 시공간을 넘나드는 느낌이다. 제법 번창하던 밖과는 너무 대조적인 풍경으로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옛 건물들이라고 해서 상점이 없을 리가 없다. 특히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겠는가. 거리에는 여러 종류의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은방(銀房)이다. 이곳 송판이 금은세공(金銀細工)이 발달한 지방인지도 모르겠다.



간판에 모우육(牦牛肉)’이라는 한자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야크(yak)고기 등 야크와 연관이 있는 상품들을 판매하는 곳인가 보다. 천정에 걸려있는 것은 훈제(燻製)된 야크고기일 것이고 말이다.



송판의 구시가지는 높다란 성벽(城壁)으로 둘러싸여 있다. 당나라 때부터 쌓기 시작한 성벽이라고 한다. ’송판현지(松潘县志)’에 따르면 명나라(1397) 시기 주원장이 이곳에 군사를 파견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이곳을 지키던 장군이 성벽을 쌓을 방법을 고민하다가 하나의 묘안(妙案)을 생각해 내었단다.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찹쌀죽과 석회, 그리고 오동나무와 흙을 원료로 해서 벽돌을 구워 만들었는데 잘 부식되지 않고 아주 든든한 것이 특징이란다. 성벽을 둘러보다 보면 지금도 그때 만들었던 벽돌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 송판의 주변의 원주민들은 지금도 그 방법으로 벽돌을 굽는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그 효능을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보면 길옆의 벽돌 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단다.



송판으로 오는 길에 들렀던 접계해자(疊溪垓字). 기나긴 여행길에 쉬어가기 딱 좋은 곳에 위치한 탓에, 모든 관광버스들이 꼭 들렀다 가는 곳이다. 잠깐 쉬어갈 수 있도록 휴게소 또한 잘 만들어져 있다.



휴게소에서 도로를 건너면 호수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이르면 하얀색 야크(yak)가 가장 먼저 관광객을 맞이한다. 하얀색인데, 야크 중에서도 하얀색은 희귀종으로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아무튼 야크 주인에게 10위안을 주면 야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 무턱대고 셔터를 눌렀다간 자칫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지난 1993년 이곳은 대지진(大地震)이 지나갔다. 해발 2,000m인 이곳도 대지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다섯 개 마을 전체가 100m 이상 땅속으로 가라앉았는데, 그 위에 물이 고이면서 만들어진 것이 접계해자(疊溪垓字)라는 커다란 호수(湖水)이다. 당시에 많은 피해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세월은 그런 아픔까지도 묻어버리는 모양이다. 고요하고 광활한 호수와 웅장한 산세가 만들어내는 조화가 신비롭기만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구체구에서 이틀 밤을 머물렀던 구체구메모리호텔(Jiuzhai Memory Hot Spring Hotel)’, 5성급으로 4층 건물에 객실도 88개나 되는 등 규모도 꽤 큰 호텔이다. 객실 등의 시설 또한 깔끔했음은 물론이다. 세면도구에 헤어드라이기까지 갖추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료로 와이파이(WiFi)를 쓸 수 있었음에도 상태가 불안정해서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이곳뿐만이 아니라 성도(청두)에서도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었다.



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여행 첫째 날 오후, 모니구 풍경구(牟尼溝 風景區)


특징 : 송판현(松潘縣) 모니구(牟尼溝)항의 고산지대(高山地帶)에 위치하고 있으며, 풍경구 안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 해도 해발이 2,800m나 되고, 가장 높은 곳의 해발은 무려 4,070m나 된다. 면적은 160평방킬로미터이다. 모니구(牟尼沟)의 주요 풍경은 원시산림과 온천, 카르스트지형의 호수와 폭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경관의 아름다움과 카르스트 지형의 특수성을 인정받아 황룡구 풍경구와 함께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풍경구는 찰알폭포(扎嘎瀑布)와 이도해(二道海) 등 크게 두 지구로 나뉜다. 두 곳 모두 돌아보는 게 좋겠지만 지역이 넓은 관계로 찰알폭포만 들러보기로 한다. 가이드가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다른 일정 사이에다 살짝 끼워 넣었으니 시간이 부족했을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하긴 이도해가 있는 줄도 몰랐다. 갑자기 들이민 일정이었으니 알았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게다. 그러니 조금 덜 구경했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다.


 

다음 여행지인 구채구로 향한다. 이곳 성도(청두)에서 구채구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구채구에 구황공항이라는 비행장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천에서 곧바로 이곳까지 오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발이 3,500m나 되는 곳에 위치한 작은 공항이라서 아직까지는 국내선만 이용이 가능하단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비행기의 이용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차량(버스)을 이용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성도에서 문천까지 고속도로로 약 140km, 그리고 이어지는 290km의 국도를 이동해야 하는데 78시간을 버스 안에서 고생해야만 한다



구채구로 가는 길은 가면 갈수록 고도(高度)가 높아진다. 그리고 그 길은 벼랑에 가까운 산자락 사이로 나있다. 밭뙈기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비탈져 있다. 그리고 조그만 터라도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 눈길이 끄는 것은 강족마을이다. 돌을 이용해 만든 집들과 굴뚝처럼 높이 솟아 있는 탑()들이 모여 있는 것이 자못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도로가 지나가는 협곡(峽谷)에는 밭뙈기 하나 제대로 만들 수가 없다. 그나마 있다고 해도 자갈 때문에 농사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선지 밭에는 농작물을 심는 대신 야크(yak)의 놀이터로 만들어 놓았다. 아니 그렇지 않은 곳도 많이 보인다. 과일나무들이 심어진 곳 말이다. 그 결실들은 버스가 멈추어가는 휴게소에 만나게 된다. 휴게소마다 인근에서 채취한 과일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대추, 자두, 사과, 귤 등 종류도 다양한데다 가격도 생각보다는 저렴하다. 마침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한 것이라고 해서 몇 가지를 섞어서 사봤다. 집사람의 손길이 바빠지는 것은 생각보다 맛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것이다.




휴게소 주변에는 음식점들도 여럿 보인다. 그중 민강어라고 적힌 간판이 특히 눈길을 끈다. ‘민강어부두부어(岷江魚庇腐魚)’라고 적혀있는데 무얼 뜻하는지는 모르겠다. 유리창에 메기처럼 생긴 물고기가 그려진 걸로 보아 요 아래로 흐르는 민강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를 요리해 주는 식당이 아닐까 싶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민강어 요리가 맛있기로 소문났다고 하나, 귀국(歸國) 후에 검색을 해봐도 그에 관련되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은 좁디좁은 협곡(峽谷) 사이로 나있다. 농사를 지을만한 밭뙈기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친 계곡이다. 그 계곡에는 물의 량이 많은데다 유속(流速)까지 빠른 민강(Min River, 岷江)이 흐른다. 쉽게 말해 민강의 좌우 강안(江岸)을 따라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양쯔 강(長江, Yangtze River)‘의 지류인 민강은 사천성(四川省) 북부의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阿坝藏族羌族自治州)‘, 즉 사천성에 위치한 티베트족 자치주의 북부, ’간쑤성甘粛省)‘으로부터 사천성으로 뻗은 민산 산맥의 남쪽 기슭에서 출발한다. 쑹판현(松潘縣), 마오현(茂縣), 원촨현(汶川縣)의 깊은 산지를 흐른 다음 성도(청두)시에서 평원으로 나온다.



차창 밖에 낯선 풍경 하나가 나타난다. 바위절벽 중간으로 길이 나있는데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가이드가 차마고도(茶馬古道)’라고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차마고도가 이 계곡을 따라 나있었던 모양이다. 이 길은 도강언시에 인접한 문천, 무현에서 송반으로 가는 옛길로서 한족과 비한족 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역로였다. 한족의 생산물인 차와 유목민들의 말이 오고 갔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특히 티베트 지역에서 생산된 말과 사천 지방에서 생산된 차는 서로 간에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통 시대, 특히 송대 이후에 이 물자 교역은 양 지역에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족들은 이곳에서 들여온 말이 군마로서 우수하였기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었고, 반면 티베트인들은 차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교역은 절실하였다. 중국인들은 차마로를 실크 로드와 더불어 중국의 문물 교류를 말해 주는 대표적인 교역로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도 도강언의 옛 이름인 관현에는 티베트인들이 야크에다 양털과 모피, 가죽, 사향, 사슴뿔, 약재 등을 싣고 와서 차나 유기, , 목화 등과 교환한다고 썼다.



얼마쯤 달렸을까 버스가 멈추어 선다. 엄청나게 너른 주차장이다. 주차장의 한켠에 찰알폭포(扎嘎瀑布)’라고 적힌 거대한 빗돌(碑石)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모니구의 입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내리지 말고 차에서 기다리라는 가이드의 안내이다. 이곳에서는 그저 입장권을 구입하면 된다는 것이다. 투어는 이곳에서 5Km쯤 더 들어간 곳에서 시작된단다. 그곳까지는 타고 온 버스로 이동을 하면 되고 말이다.





얼마간 더 들어가면 또 다른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도 역시 만만찮게 넓다. 하지만 주차장은 텅 비어있다. 오로지 우리 일행들만이 구경을 온 것이다. 아직은 입소문을 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황룡이나 구채구에 밀려 이곳까지 찾아올 여력이 없었거나 말이다. 주차장에 지어진 공중화장실이 눈길을 끈다. 너무 멋지게 지어놓아 도무지 화장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데크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경사(傾斜)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지는 말자. 해발이 3000m를 훌쩍 넘기기 때문에 자칫 고산병(高山病)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 중에도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10분 남짓 걸었을까 길가에 안내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익수천(益壽泉)’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았다. 해발 3,159m의 낭떠러지 틈새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인데 광물질(鑛物質)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물맛이 달콤할 뿐만 아니라 미용과 장수(長壽)에도 좋단다.




아무튼 안내판의 옆에 물이 흐르고 있다. 샘물이라기보다는 폭포에 가까운 물줄기이다. 샘물이라 해서 한 모금 마셔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자칫 배탈이라도 날 경우엔 여행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이다.



잠시 후 또 다른 안내판을 만난다. 이번에는 불선폭(佛扇瀑)이라고 적혀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모양새가 부처님의 부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든 근심걱정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탁 트인다고 한다.




얼마간 더 걸으면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찰알폭포(扎嘎瀑布)’가 나온다. 이 폭포는 중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폭포로 알려져 있다. 해발 3,166~3,270m에 위치한 이 폭포는 35~40m의 넓이에 높이가 104m나 되는 거대한 폭포이다. 하지만 폭포는 억세거나 넘치지 않는다. 그저 얕고 잔잔하게 떨어질 따름이다. 여성스럽다는 느낌이 든다는 얘기이다. 안내판에는 액체폭포이면서도 고체 칼슘화 흐름 폭포도 된다고 적혀있다. 3급 칼슘화 댐에서 23m/초의 속도로 흘러내린다고 해서 세계 제1의 칼슘화 흐름폭포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또한 천우비폭으로 불리기도 한다니 참조한다.





찰알폭포(扎嘎瀑布)는 중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석회용화 폭포로서 다층으로 이루어진 게 특징인 폭포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두루 구경할 수 있도록 폭포를 한가운데에 놓고 빙 둘러 데크 탐방로를 만들어 놓았다. 폭포의 위까지 길이 나있음은 물론이다. 폭포의 높이가 100m를 훌쩍 넘기기 때문에 위까지 오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한 바퀴 돌아볼 것을 권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비경이 연이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탐방로는 왼편에서 시작해서 폭포의 위까지 오른 후, 오른편으로 돌아 내려오면 된다. 한 바퀴 도는 데는 넉넉잡아 20~30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고생은 조금 해야 할 것이다. 오르내리는 구간이 온통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해발이 3,000m를 훌쩍 넘기는 고지대(高地帶)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그리고 닫혀 질 줄을 모른다. 그만큼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는 얘기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와 아름다운 비경(祕境)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런 아름다움은 겨울철에 더욱 극에 달한다고 한다. 흰 눈과 부서지는 포말 그리고 얼음이 함께 어우러지며 최고의 장관을 연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단에서 내려다보면 폭포의 전모가 드러난다. 폭포는 석회석 암반(巖盤)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흘러내린 석회수가 굳어지면서 만들어낸 암반이다. 그게 억겁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렇게 웅장한 모양새를 띠게 된 모양이다.



얼마쯤 올랐을까 수렴동(水帘洞)이라 적힌 안내판을 만난다. 폭포의 2단계에 위치한 동굴인데, 높이 6m에 면적이 50쯤 된단다. 동굴 안에는 죽순(竹筍)과 보탑(寶塔), 비룡, 봉황 등을 닮은 천태만상의 종유석들이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단다. 하지만 동굴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내판에도 어떻게 찾아볼 것인 지는 적어놓지 않았다. 그저 폭포 아래의 대에서 이곳까지의 거리(52m)와 방향, 그리고 폭포 위까지의 거리(80m)와 방향만을 표시해 놓았을 따름이다. 어쩌면 동굴은 폭포의 물줄기 아래에 숨어 있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탐방로는 깔끔하게 지어진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다. 그것도 폭포의 상부(上部)에 거의 다 올라갔을 즈음에 만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인간의 배설물을 아무 곳에나 흘리지 말고 다니라는 의미인가 보다. 아무튼 세계자연유산에 걸맞는 관리라 할 수 있다. 건물 또한 나무로 만든 것이 친환경을 염두에 두었지 않나 싶다.



탐방로 중간에는 쉼터도 만들어 두었다. 그런데 그 쉼터의 지붕이 눈길을 끈다. 온통 녹색의 이끼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원시림(原始林)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폭포의 상부(上部)에 올라선다. 안내판에는 폭정(瀑頂)‘이라고 적어 놓았다. ’폭포의 꼭대기라는 뜻일 게다. 아무튼 이곳 상부의 높이는 3,270m란다. 꽤 높은 편이다. 그래선지 우리 일행 중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우리 형제 부부와 꽤 건장해 보이는 남성 한 명뿐이었다. 고산병을 염려했던 모양이다.



상부에 놓인 탐방로의 위에도 폭포가 보인다. 전형적인 와폭(臥瀑)들인데 그 넓이는 1,180쯤 된단다. 그리고 옥()처럼 하얀 물줄기가 칼슘화 낭떠러지에서 흘러나온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계단 모양으로 생긴 암반(巖盤)이 칼슘성분을 띠고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상부에서 내려다본 찰알폭포, 힘찬 물줄기 아래로 아까 올라올 때 지나왔던 마루형태의 관경대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인다.



상부의 폭포를 다 둘러봤다면 이젠 내려갈 차례이다. 올라왔던 방대방향으로 길게 놓여있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내려오는 길,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온통 폭포들이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폭포들이 겹을 이루면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온통 폭포뿐이라 할 수 있다. 그 폭포들이 원시(原始)의 숲과 어우러지면서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온통 하얗다. 누군가 폭포의 이름인 자갈(짜갈)‘이 장족 말로 '희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가 보다. 폭포가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이 셀 수없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내판에 적혀있는 찰알(扎嘎)‘이라는 단어는 자갈이라는 장족 말을 한자로 옮겨놓은 글자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된다. 아무런 뜻도 없는 무의미한 단어 말이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아까 폭포의 위로 오르기 전에 만났던 관경대(觀景台)‘로 내려선다. 안내판에는 상비담(象鼻潭)‘이라고 적혀있다. 폭포의 아래에 있는 못을 설명하고 있을 게다. 아무튼 넓이가 416쯤 되는 물웅덩이인데, 코끼리가 강변에서 물을 내뿜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여행지 : 중국 사천(四川省)

 

여행일 : ‘16. 9. 24() - 29()

일 정 :

9.25() : 도강언(都江堰), 접계해자(疊溪垓字), 송판고성(松潘古城), 모니구(牟尼溝)

9.26() : 구채구(九寨沟)

9.27() : 황룡(黃龍)

9.28() : 청성산(靑城山), 무후사(武侯祠), 금리거리(锦里古街), 천부촉운(天付蜀韻)

 

특징 : 사천(四川, 쓰촨)은 중국 내륙에 위치한 성()이다. '쓰촨(四川)'이란 이름은 장강을 비롯해서 큰 강이 네 개나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사천성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成都, 청두)로 와야 한다. 이때 국적기(國籍機)인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할 수 있으니 참조한다. 매운 음식으로 유명한 성도(成都, 청두)1억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하는 사천성(四川省, 쓰촨성)의 성도(省都)이다. 또한 성도는 쓰촨 분지 및 그 너머로 뻗어 있는 양쯔강과 그 지류들이 지나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이다. 진나라 때 청두현이 세워진 이래 한, , 당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가장 큰 상업도시의 하나가 되었고, 8세기말에는 제2의 수도가 되었다. 1952년 이후 충칭, 바오지, 쿤밍, 안캉, 샹판까지 가는 철도가 놓이자 남동부 전역에서 으뜸가는 철도중심지로 변했고, 1960년대 들어서는 알루미늄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비료·화공약품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업이 발전했다. 아무튼 이곳은 약 200만 년 전에 인류 활동이 시작되었고, 지금으로부터 25천 년 전에는 문명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삼성퇴 문명(三星堆文明)으로 대표되는 고도로 발달한 고촉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후 진() 왕조가 사천을 통치한 이래 점차 중원(中原) 문화에 유입되기 시작하여 중국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참고로 사천성에는 세 개의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 World Cultural Heritage)’이 있다. 아미산(峨眉山)과 구채구(九寨沟), 그리고 도강언(都江堰)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구체구와 도강언을 둘러보게 된다.


 

호텔 앞 시가지, 성도(청두)는 흔히 천부지국(天賦之國)’이라 불린다.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뜻이다. 당대의 시인 이백(李白)촉도난이란 시에서 아아, ()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은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라며 그 지형의 험난함을 읊기도 했던 성도(청두) 일대가 먹을 것이 풍족한 땅이 된 데에는 잠시 후에 들르게 될 도강언(都江堰. 두쟝옌)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도(청두)시는 디지털 기술을 육성하는 하이테크(hightech) 단지를 오래 전부터 조성해 우수한 인력과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다. 2200년 전에는 치수(治水)가 최고의 하이테크(hightech)였지만, 지금은 디지털(digital) 기술이 그에 해당된다며 말이다. 참고로 성도는 '천부의 자연풍경(天賦之國)' 외에도 '팬더의 고향', '이름난 역사문화의 도시'라는 또 다른 특징도 갖고 있다.






이번 여행의 첫날 머물렀던 성도(청두)의 글로리아호텔(Felton Gloria Grand), 5성급 호텔답게 객실은 깔끔했고 욕실 또한 널찍했다. 특히 세면도구는 물론이고, 드라이기까지 갖추어 놓았다. 또한 뷔페식인 아침식사는 외국 관광객들을 배려해서인지 중국 특유의 향이 일절 배제되어 있었다.






여행 첫째 날 오전, 도강언(都江堰)


특징 : 도강언(Tu Chiang Yen , 都江堰)은 중국 촉() 지방의 유명한 제방으로서 강()의 물줄기를 나누기 위해 강 중간에 건설된 어취(魚嘴)형의 제방(隄防)과 이에 딸린 여러 제방과 수로(水路)를 총칭한다. 사천(四川省) 민강(岷江) 중류의 관현(灌縣)에 위치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도안현에 있었기 때문에 도안대언이라 불리다가, 송대 이후 도강언이 되었다. 민강은 쓰촨 성 북부의 송판(松潘, 쑹판) 고원에서 발원하며, 집수면적은 2가 넘는다. 강의 하류로 오면서 빗물뿐만 아니라 빙설이 녹아내린 물까지 합쳐져, 관현 근방에 이르면 연평균 유수량(流水量)158에 달하게 된다. 민강은 관현을 지나 성도(成都, 청두) 평원으로 유입되는데, 지세(地勢)가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그로인해 강바닥의 평균 경사도가 매우 완만하여 흐름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져 토사가 쉽게 쌓이고 제방이 쉽게 무너져 대규모 수해의 원인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시대 촉의 재상 개명이 옥루산을 파내어 수해를 없앴다고 한다. () 소양왕 51(BC 256)에 진이 서주를 멸하고 이빙(李冰)을 촉의 태수로 임명했는데, 천문지리에 능통했던 이빙이 그의 아들 이이랑(李二郞)과 함께 수리사업인 도강언 건설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개수(改修)를 거치면서 차츰 완성되어갔다. 중심이 된 공사는 백장제·도강어취·금강제·비사언·인자제·보병구 공사였다.


성도(청두) 시내를 빠져나온 관광버스는 1시간 여 만에 도장언의 너른 주차장에 도착한다. 2000년 전 민강(岷江)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은 매년 홍수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관리 이빙이 조사를 하니, 근처의 산에서 겨우내 눈 녹은 물이 급류로 유입되어, 유량이 넘쳐 물살이 완만한 곳에 이르면 둑을 터뜨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댐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이빙은 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수로(水路)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산에서 유입되는 물길을 다른 곳으로 터주고, 강물의 유량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인공 관개 수로를 제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건조한 청두 평원에 물을 대는 관개수로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이 관개사업은 긴 대나무로 짠 소시지 모양의 바구니에 돌을 채워 넣고, 나무로 삼각대를 만들어 대나무 바구니를 지지할 구조물을 제작함으로서 건설을 시작하였다. 공사는 완성되기까지 4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후 강은 더 이상 범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태고의 관개수로는 연중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온화하고 다습한 사천성의 기후와 함께 사천성을 중국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농경지대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홍수의 방지는 물론이고, 성도의 주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해 주는 등 오늘날에도 본래의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도장언은 이러한 역사성과 과학적 기술을 인정받아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소문난 관광지가 되었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안으로 들면 관광안내도가 눈에 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안내도를 살펴보는 여유를 부려본다. 그래야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강언의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넓다. 때문에 전체를 다 둘러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우리 같이 시간에 제약을 받고 있는 패키지여행자들이라면 더욱 어려울 게 분명하다. 이럴 경우에 꼭 필요한 것이 안내도가 아닐까 싶다. 꼭 가봐야 할 곳을 미리 정해 놓고 동선(動線)을 미리 숙지해 놓는 것도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널찍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길가 나무들 사이로 금강제(金剛堤)가 내다보인다. 강기슭을 내강의 물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방(隄防)이다. 제방 위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걸로 보아 도강언 관광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잠시 후 알맞게 너른 광장에 이른다. 왼편 산자락에 누각(樓閣)이 세워져 있고, 그 뒤에는 더 큰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들어가 보는 것은 사양하기로 한다. 생김새가 영락없는 음식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음악제(Music Festival)’의 행사를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 성도(成都 , Chengdu)가 중국의 서부지역(Western China)이라서 서부음악제(西部音樂祭)’라는 이름이 붙었나 보다. ‘~ 왕조현이도 오는가 보네?’ 초청가수들의 사진과 이름이 실려 있는 것을 본 어떤 이가 부르짖는다. 음악제에 배우가 초청되는 것이 의아하기에 다가가보니 왕조람(王祖蓝)’이다. 배우 겸 가수인데 MC로 활약하는 친구이다. 배우인 왕조현(王祖賢)과 거의 비슷한 한자라서 혼동을 했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다. 아무리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렇지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 왕조현(王祖賢)에다 비교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오늘은 여행 첫날, 웃으면서 출발하자는 의미에서 거론해 봤다.



수리시설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야 한다. 안란삭교(安瀾索橋)라는 이름의 다리인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거리는 것이 여간 위태롭지가 않다. 다리의 생김새도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줄로 연결시켜놓았지만 강의 양안(兩岸)에 만들어진 지지대(支持臺)가 영 시원찮게 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도강언은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이빙 부자 등 도강언과 관련된 인물과 설화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이왕묘(李王廟) 지구이고, 다른 하나는 민강 위에 놓인 흔들다리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수리시설이다. 지금 건너려고 하는 안란삭교가 바로 그 흔들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수리시설지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건너기로 한다. 여자들도 희희낙락하며 건너고 있는데, 이 정도 갖고 겁은 낸다면 사내대장부의 체면을 구기지 않겠는가. 아무튼 다리는 의외로 건실했다. 위아래로 출렁거리기는 했지만 좌우로 흔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민강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안란삭교(安澜索橋)는 중국 5대 고교(古橋)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적교(弔橋, 흔들다리)는 아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속에서 수차 보수하면서 기존의 모습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이 적교가 있어서 사람들은 안전하게 민강을 오간다. 다리의 길이는 261m로 옛 이름이 주포교(珠浦橋)였으나 송나라 때 중건하면서 평사교(評事橋)라 했다. 이후 명나라 때 전쟁으로 불탔던 것을 청나라 가경 8년에 이곳 사람인 하선덕 부부가 다시 중건해 양안의 사람들이 거센 물결을 안전하게 건너라는 의미로 안란교(安澜橋)라 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 부부를 기려 부부교(夫婦橋)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부른다니 참조한다.



다리를 건너다보면 강줄기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민강(岷江)은 저 위에서 둘로 나뉜 뒤, 그중 한 줄기가 이 다리의 아래로 흐른다. 인력에 의해 만들어진 물줄기임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강한 물줄기이다. 하기는 이 정도는 되어야 경작지의 관개(灌漑)나 항운(航運)에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만리장성보다도 더 위대한 공사라는 칭호도 들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다리를 건너면 금강제(金剛堤)이다. 민강(岷江)의 물줄기를 둘로 나누고, 강기슭을 강물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방(隄防)이라고 보면 된다.



안란삭교는 금강제(金剛堤)에서 끝난다. 아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강안(江岸)까지도 연결시켜 놓았다. 다만 현재는 사용을 하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어쩌면 안전성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정표에 보병구(宝瓶口)와 도강언(飛沙蝘)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옥루산(玉壘山)과 이퇴(離堆) 사이의 수로(水路)인 보병구(宝瓶口)는 너비가 20m에 높이는 30m, 길이는 100m로 벽 양쪽에 수량계와 수위기록계를 설치하여 내강에 흘러 들어오는 수량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보병구는 성도평원의 천연관개(天然灌漑) 관문이 된다. 또한 비사언은 제방(隄防)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내강(內江)에 쌓아올린 약 300m 길이의 낮은 제방을 말한다. 내강으로 많은 물이 들어와도 이 낮은 제방을 넘쳐 외강(外江) 쪽으로 흘러가도록 설계 되었단다.



어취(魚嘴)로 향한다. 잠시 후 수많은 인파에 부대끼고 있는 너른 광장(廣場)에 이른다. 어취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展望臺)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한가운데에다 어취를 설명해 놓은 빗돌(碑石)을 세워 놓았다. 그런데 한글로 된 설명문이 눈길을 끈다. 한자와 한글, 일본어 등 세 개의 언어로 되어 있는데, 자기들 언어인 한자의 바로 아래에다 한글을 배치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관광객들이 많다는 얘기겠지만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일본어보다 위에 적혀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난간으로 다가가면 강물이 넘어갈 수 있도록 낮게 쌓아올린 제방이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돌을 넣은 대바구니로 만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시멘트로 바뀌었다. 아무튼 수리시설(水利施設)인 어취(魚嘴)는 물길을 둘로 나눈다고 해서 어취분수재(魚嘴分水堤)’라고도 불린다. 저 시설(魚嘴)이 강()의 중간에 건설됨으로써 민강(岷江)의 흐름은 내·2개의 강으로 나뉘게 된다. 사진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외강(外江)은 민강 본래의 강줄기로, 남쪽으로 흘러 이빈(宜賓) 부근에서 양자강과 합해진다. 그리고 오른편의 내강(內江)은 옥루산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만든 보병구를 통과하여 주마(走馬), 푸양(蒲陽), 백조하(柏條河) 등을 거쳐 성도평원으로 흘러 들어가 경작지의 관개(灌漑)와 항운(航運)에 유용하게 이용된다. 내강은 민강과 침강(沱江)으로 나뉘어 흘러 들어간다.



어취(魚嘴)를 다른 말로 분수어취(分水魚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 말은 민강이 흘러내려 오는 곳에 물을 예전 물길인 외강과 홍수 예방과 가뭄을 방지하기 위해 수리시설로 새로 물길을 낸 내강으로 물을 나누어 흘려보내기 위한 첫머리라는 말일 것이다. 어취는 물고기의 부리라는 뜻으로 뾰족한 모양이 물고기의 주둥이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혹자는 반달을 빼다 닮았다고도 하지만, 물고기 입 모양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인공으로 댐을 쌓아 물을 두 갈래로 가르는데 물의 양은 내강과 외강의 비율이 4:6이고 토사는 2:8의 배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물의 양은 비슷하게 나누었지만, 토사는 내강에 쌓이지 않게 대부분 외강으로 그냥 흘려보낸 것으로 어취의 방향과 위치가 만든 과학적인 배분이란다. 어취 위에 보이는 섬처럼 생긴 제방은 백장제(百丈堤)란 곳으로 사람이 직접 쌓은 인공(人工)의 섬이다. 제방 앞에서 물의 양과 토사의 양을 미리 나누려는 목적으로 쌓았다고 한다.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는 어취(魚嘴)를 쌓은 공법을 재현해 놓았다. 수십 미터 길이의 대나무를 김밥처럼 둥글게 엮고, 그 안에 호박돌을 채워 넣은 뒤에 강 가운데에 쌓아올리는 공법이다. 그 옆에는 목삼족가(木三足架)란 기구도 보인다. 나무를 세 가닥으로 묶어 물의 흐름에서도 지탱할 수 있도록 한 받침대이다. 제방이 터지면 임시로 이 시설을 이용해 물길을 돌리고 공사하거나 토사를 파낼 때도 사용하는 것으로 지금도 사용된다고 한다.




외강(外江)에는 다리가 놓여있다. 그리고 다리의 아래에다 갑문(閘門)을 만들어 외강으로 들어가는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갑문이 닫혀 있는 걸로 보아 현재 건기(乾期)라는 얘기일 것이다. 물이 적을 때는 경작지의 관개나 항운에 먼저 이용하는 게 경제적일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안란삭교(安瀾索橋)로 되돌아가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거대한 빗돌(碑石) 하나를 만난다. ‘도강언(都江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강택민(江澤民) 주석의 솜씨란다. 그나저나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길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심심찮게 그의 글씨를 만날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비석(碑石)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수리문화전청(水利文化展廳)’이 나온다. 도강언의 건설에 관한 역사를 전시해 놓은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시대 촉()의 재상 개명(開明)이 옥루산(玉壘山)을 파내 수해를 없앴다고 한다. 결국 도강언의 대대적인 공사는 이빙이 했지만, 이미 그전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홍수 방지를 위해 여러 번 손을 댄 것으로 이빙이 이곳에 태수로 오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에 태수로 부임한 이빙은 이곳 백성들이 한결 같이 홍수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듣고 조사를 시작해 끝내 도강언을 완성한 것이다. 물이란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너무 많을 경우에는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에 어울린다고나 할까?




도강언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그리고 보병구(寶甁口)이다. 어취란 말 그대로 물고기의 주둥이를 뜻하는데, 이것은 민강을 두 줄기로 가르는 분수제(分水堤) 역할을 한다. 이곳을 통과한 강물은 민강 본류인 외강(外江)과 인공 수로라 할 수 있는 내강(內江)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내강으로 들어온 수량을 자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제방으로써 비사언을 만들었다. 곧 내강쪽으로 흘러온 물이 넘칠 경우 이 제방을 통해 다시 민강 본류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비사언을 넘지 않은 물은 보병구쪽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는데, 보병구란 보배와 같은 병()의 주둥이라는 뜻으로써 곧 입수구(入水口)이다. 이것은 바위산을 파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곳을 지난 물은 넒이 약 10미터 정도의 인공 수로를 따라 빠르게 도강언시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보병구와 비사언 사이에는 이른바 이퇴(離堆)라는 곳이 있다. 이것은 비사언과 보병구의 기능을 보조하는 인공 유수지라고 할 수 있다. 보병구로 들어가기 전의 물은 잠시 동안이나마 회돌이 치면서 이곳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이퇴는 내강으로 흘러갈 퇴적물을 이곳에 쌓이게 한 다음 그것이 비사언으로 넘어가도록 만든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리적 특징과 물의 흐름, 그리고 고도의 기술이 결합된 정교한 시설이다.







되돌아 나오는 길, 건너편 옥루산(玉壘山) 자락에 지어진 진언루(秦堰樓)가 선연하게 나타난다. 도강언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모택동과 등소평, 강택민 등의 당과 국가 지도자들도 모두 저곳에서 도강언의 전경을 구경했다고 한다. 누각(樓閣)의 높이는 24.32m이며 5층의 구조로 되어 있다.



도강언을 빠져나와 구체구로 향한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수리시설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패키지여행의 특징 중 하나이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내 간절함이 뭔가를 이루어낸다. 아까 안란삭교를 건너면서 보았던 진언루(秦堰樓)를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가이드를 설득해 오른 진언루에서 도강언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왜 이곳에다 누각(樓閣)을 지었는지 금새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아래에 있는 어취분수재는 물론이고, 비사언과 이퇴(离堆), 옥루관(玉壘關), 안락삭교(安瀾索橋) 등도 한눈에 잘 들어온다. 그 뒤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어쩌면 청성산일 것이다.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쏠라나(solana)거리와 왕부정거리(王府井大街)

특징 : 북경의 유명 관광지로는 천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자금성과 만리장성, 이화원,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북경 올림픽을 기점으로 북경의 핫 플레이스가 바뀌었다는 게 정설이다. 유적지에서 더 플레이스(The Place)’쓰차하이(十刹海)’, ‘798 예술지구등 북경시민들의 삶을 가까이서 느껴볼 수 있는 시가지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신흥 쇼핑거리인 쏠라나(solana) 거리와 먹거리의 천국으로 알려진 왕부정거리는 명소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이다. ‘쏠라나(solana)거리는 북경에 숨겨진 유럽 마을로, 화려한 쇼핑몰과 유럽식 건축물을 한 번에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북경 여행이 지루해질 때쯤 화려한 거리를 빛내주는 조명의 향연을 구경하면서, 거리의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마셔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왕부정 거리는 북경의 명동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낮에는 쇼핑거리로 유명하고 밤에는 화려한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야시장으로 탄생한다. 특히 국내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기에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도 즐겨 방문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조양구로 이동한다. 아니 조양공원(朝阳公园, Beijing Chaoyang Park)과 이웃하고 있다고 하면 이해가 더 빠를 것이다. 아무튼 쏠라나(solana)’도 역시 대로변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대형버스의 출입이 제한되는 모양이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차단봉(遮斷棒)이 차량의 진입을 막고 있다. 안은 널찍한 주차장이다. 아마 쏠라나(solana) 지역 전체를 차량통행 제한 지역으로 묶어놓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쏠라나는 하나의 단위마을로 조성된 쇼핑센터인 셈이다. 참고로 쏠라나(solana)’햇빛의 태양이라는 뜻을 지닌 쏠라(Solar)’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주차장을 지나면 예쁘게 지어진 현대식 건물들이 나타난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모양이 없는 개성이 강한 건물들이다. 그리고 층수가 높은 건물들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마을로 조성했으니 고층빌딩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북경에 숨겨진 유럽 마을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쏠라나(solana)는 화려한 쇼핑몰과 유럽식 건축물을 한 번에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5년쯤 전에 오픈했다니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문을 연 것이 아닐까 싶다. 올림픽 특수(特需)를 노리고 말이다.

 

 


거리를 걷다보면 온통 눈에 익은 간판들이 뿐이다. 하긴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어디를 가나 같은 유형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아무튼 이곳 쏠라나(solana)는 호화 명품 패션 쇼핑몰(shopping mall)로 꾸며진 탓에, 젊은 패션니스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한다.

 

 



쏠라나(solana)’는 눈부신 태양과 한적한 호수, 우아한 건축물, 그리고 낭만적인 작은 길을 가진 쇼핑공간이다. 하지만 여행을 오래한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멋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명품을 사는 거야 어디서든지 가능한 세상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저 아이쇼핑(eye shopping)이나 즐긴다고 여기면 딱 좋지 않나 싶다 

 

 

 

 

 


저녁에는 왕부정거리(王府井大街)’로 이동한다. 천안문 근처에 위치한 왕부정은 원래 왕가의 우물이 있던 곳이란다.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청동 표식이 남아 있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베이징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라니 한국의 명동이나 압구정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이곳엔 각종 유명 상점과 대형 백화점들이 밀집해 있다. 동양 최대(最大)의 쇼핑몰인 동방신천지(東方新天地)를 비롯해 수많은 전문 판매점들이 밀집해 있어 중국에서 최신 유행하는 유명 패션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참고로 이곳 왕부정 거리는 왕부(王府) 즉 황족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그 왕부가 우물()과 연계를 갖고, 또 지명으로까지 된 데에는 전설(傳說)이 있다. 옛날 이곳에 있던 왕부에 물맛이 뛰어난 우물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우물의 가장자리가 아주 높고 우물의 입구는 큰 돌 가운데를 뚫어 만들었으며 우물위에는 조형이 정교로운 육각(六角)정자가 있었단다. 그러던 어느 해에 아주 심한 가뭄이 들었다. 도시 안의 크고 작은 우물들이 거의 다 말라 들고 다만 소수의 몇 개 우물에만 물이 있었다. 왕부정은 바로 이중의 하나였다. 왕부정은 물이 말라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물맛도 여전히 아주 좋았다. 그러자 주인인 왕은 집을 지키는 노인장더러 우물의 덮개를 닫아 외부의 사람들이 물을 긷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마음씨 고운 문지기 노인장은 물 걱정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매일 새벽과 저녁으로 주인이 자는 틈을 타서 몰래 우물의 물을 골목 밖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눈치 챈 왕이 노인장을 벌하려 하다가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목말라 죽고 나면 누가 왕을 위해 일을 해주겠느냐는 말을 듣고 노인장을 용서해 주었단다. 그러자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왕부정에 와서 물을 길어 가게 되었고, 이로부터 왕부정의 이름이 베이징성에 널리 전해지다가 점차 이곳의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1.5km에 이르는 거리에는 대형 백화점과 쇼핑센터, 기념품점, 음식점, 카페들이 줄줄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먹거리들이다. 이곳에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먹거리들로 넘쳐난다. 왜 중국을 음식천국이라 부르는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북경의 대표요리인 북경 오리구이 전문 요리점 뿐 아니라 각종 특색 있는 요릿집과 세계적인 패스트푸드(fast-food)점들의 간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곳은 왕부정 거리가 아닌 왕부정 소흘가(王府井小吃街)이다. 특히 야시장은 군것질을 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에서는 베이징의 명물인 꼬치음식을 맛볼 수 있다. 애벌레부터 전갈, 지네, , 불가사리까지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한 꼬치구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한번쯤 시식에 도전해 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일 것이다. 아무튼 () 달린 것이라면 의자 빼고는 뭐든지 다 먹고, 날개 달린 것 중에서는 비행기를 빼곤 못 먹는 게 없다는 중국의 속담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호기심에 조금 먹어볼까 하고 몇 종류의 튀김을 사봤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입에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간 손주들은 거침없이 입에 넣는다. 그것도 징그럽기 짝이 없는 전갈튀김을 말이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날씨임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인파가 아닐 수 없다. 하나 같이 먹거리를 찾아 나온 사람들일 게다. 그래선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행복한 표정들이다. ‘약보불여식보(藥補不如食補)’라고 했다. ‘약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보다는 음식으로 보호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약보다 나은 갖가지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곳 왕부정거리도 역시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심심찮게 보여주는 곳 중의 하나이다. 북경을 소개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라는 얘기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수많은 외국 관광객과 북경시민이 한데 어울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그 인파와 산해진미처럼 쌓여있는 음식들이 어우러지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낯선 음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나에게는 그림의 떡(畵中之餠)’일 따름이다. 특히 그 재료들의 대부분이 뱀이나 거미, 전갈 같은 혐오식품들이라니 더 말하면 뭣하겠는가. 그저 눈요기만 즐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음식은 인류가 갖는 다양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환경과 지리적 여건에 따라 기호식품(嗜好食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내가 혐오하는 식자재들이라고 해서 이곳 중국의 음식문화 자체를 거부하지는 말자. 나에겐 혐오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전갈 같은 곤충이나 파충류 튀김도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미를 제공하는 고단백 영양식품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나라 역시 를 식용으로 삼는 나라라고 일부 외국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 않는가.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만리장성(萬里長城)


특징 : 만리장성은 하북성 발해만이 있는 산해관(山海關)의 천하제일관에서 시작하여, 감숙성 고비사막이 있는 가욕관(嘉峪關)의 천하제일웅까지 장장 6,700km를 말한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제()나라가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을 쌓은 것이 장성의 효시이며, 그 후 각 제후국마다 나름대로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BC 221)한 후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각 제후국이 쌓아 놓은 장성을 연결하였다. 이후 흉노족 계열인 몽고가 원나라를 건국하면서 만리장성의 존재가치가 없어졌으나,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몽고족들이 다시 쳐들어올까 하는 생각에 장성을 튼튼하게 다시 쌓았다. 현존의 만리장성은 명나라시대에 최종 완성된 것으로 보면 된다. 북경에서 만리장성을 볼 만한 곳은 팔달령과 거용관, 수관 등 3곳인데, 그 중에서 사통팔달로 다닐 수 있는 팔달령이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다. 요즈음 서로 경쟁적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가장 비싼 팔달령보다 거용관이나 수관을 이용하기도 하나, 게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다는 프리미엄 때문에 팔달령이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편이다. 참고로 만리장성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이름이 높으나, 다른 한편으론 지역 주민들이 집의 재료나 관광객에게 판매하기 위해 장성의 벽돌을 가져간 탓에 파괴가 지속되었다. 또한 댐 공사로 인해 일부가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20064월에 열린 중국의 학술단체인 중국장성학회의 조사 결과보고서에 만리장성이 안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지역은 전체의 20% 이하이고, 일부만 존재하는 지역이 30%, 그리고 나머지 50%는 모습이 사라졌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얼마나 엄중한 상태인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국정부가 만리장성을 중요한 역사적 문화재로서 보호하면서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베이징 도심에서 1시간을 달려 팔달령(八達嶺)’의 발치에 이른다. 오늘의 일정이 베이징 북부의 팔달령(八達嶺)에 위치한 만리장성을 돌아보도록 짜여있기 때문이다. ‘팔달령 장성(八达岭长城)’은 만리장성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라고 한다. 수도인 베이징에서 8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지리적 장점과 함께 용()이 춤을 추는 듯한 역동적인 형상 때문이란다. 

 


만리장성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5,000~6,000km에 이르는 길이 일 것이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릴 정도이니 두말하면 뭐하겠는가. 하지만 만리장성이 각기 다른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 그리고 돌 등을 이용해 외세를 잘 막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지형마다 성벽의 높이를 달리했고 폭도 지역에 따라 모두 다르게 했다. 아무튼 주변의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웅대한 장성(長城)의 경관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팔달령 장성이다.



만리장성 투어의 시작은 케이블카에 올라타면서 시작된다. 산성(山城)이란 게 본래 산마루에 쌓아올린 걸로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걸어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지레짐작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소형 케이블카가 장성 턱밑까지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세 살 먹은 아이부터 여든 살 노인까지 누구나 장성투어를 할 수 있다고 하더니 맞는 말이었나 보다 

 

 

 



상부 탑승장에서부터는 걸어야만 한다. 성벽 위 계단을 오르내리며 망루(望樓)와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일은 순전히 관광객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팔달령을 비롯한 현재의 장성은 대부분 명대(明代)에 축조된 것이다. 장성은 축조 초기인 진(), () 시대에는 현재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거란(契丹)과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 위치로 남하했다. ()나라 시대에는 장성 너머까지 중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방어선으로서 의의가 상당 부분 축소되기도 했었다. 참고로 명나라 때의 성벽은 과거와는 달리 요새(要塞)뿐만 아니라 통상로(通商路)로도 이용되었다. 19세기 초 중국주재 나폴리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는 ‘15미터 높이의 성벽 상부에 말 다섯 마리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안전한 길이 있었다고 했다. 만리장성이 왕래의 중추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설명으로, 출입구 부분에는 시장도시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성벽(城壁)에 올라선다. 이제 난 진정한 남아대장부가 된 셈인가? 중국의 혁명지도자이자 정치가였던 마오쩌둥(毛澤東, Mao Zedong)만리장성에 올라가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 非好漢)’라고 말했다니 말이다. 마우쩌둥의 이 말은 장성과 주변 풍경의 아름다움을 대변한 것일 게다. 그의 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인류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이 거대한 역작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유산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TV나 책을 통해서나 볼 수 있었던 만리장성을 실제로 보다니 감개무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성벽 위를 오가는 관광객들뿐이다.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비가 시야를 꽉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장성에 발을 디딘다는 설렘에 잠까지 설쳤는데 억울하기 짝이 없다.

 

 


성벽의 위는 온통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벽돌로 바닥을 깔았고, 난간 역시 벽돌을 쌓아 올렸다. 하나같이 구운 벽돌들이다. 성벽의 폭은 5~6미터 쯤 되지 않나 싶다. 참고로 만리장성은 지형에 따라 벽의 높이가 3미터에서 8미터까지 다양하였으며, 하단부의 너비는 7미터쯤 되는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그 너비가 4~6미터로 줄어든단다. 요철형의 흉곽 길이는 안으로 1미터, 밖으로 2미터란다. 아무튼 성벽의 위는 넓다. 말 다섯 필이 횡렬로 서서 지날 수 있을 만큼 큰 폭이란다. 그런 성벽이 끝도 없이 뻗어나간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끝에 구름 한 점 두둥실 띄워보자. 용틀임을 하던 성벽은 시야가 멀어짐에 따라 실오라기처럼 얇아지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는가.

 


이왕에 성벽에 올랐으니 최소한 망루(望樓)까지는 다녀와야 한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르막길은 꽤나 길다. 거짓말 좀 보태서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런 길을 오르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휘적휘적 거침없이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오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봉()에 의지한 채로 한 계단 한 계단씩 엉금엉금 발을 옮기고 있다. 뭔가를 꼭 봐야겠다는 열망이 크지 않다면 저렇게까지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리장성하면 진시황제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진시황제가 처음으로 만리장성을 건설한 건 아니다. 장성의 시작은 춘추전국시대에 현재의 산둥지방에서 일어났던 제()나라이다. 중원에 있는 각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그 후 화베이(華北)에 세력을 가진 연()나라와 초()나라 등 여러 나라가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장성을 건설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유목민족 흉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이미 건설되었던 각국의 성벽을 보강하고 연결했을 따름이다.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흉노(匈奴) 기마부대의 위협을 받던 진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하여 잃어버린 땅을 회복한 후 기존에 건설되어 있던 장성들을 연결하도록 했다. 기존의 장성을 보수하고 장성이 없는 지역에는 새로이 성벽을 쌓으면서 10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완성했다고 한다. 흉노가 쳐들어오지 않으면 진나라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진시황제가 보인 평화 정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얼마쯤 걸었을까 망루(望樓)가 나타난다. 서로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마다 12미터의 높이의 탑()을 세웠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리고 그 탑은 무기고나 초병(哨兵)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망루 근처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성벽 위라고 해봐야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어 아래로 내려가 본다. 제법 너른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옛날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쉼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성벽은 규격에 맞춰 다듬은 돌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상부의 난간은 벽돌을 쌓아 놓았다. 지역에 따라 흙과 벽돌, 돌 등의 다양한 재료로 건설되었다고 하더니 이곳 팔달령 부근은 벽돌과 돌이 사용되었나 보다. 본래의 장성(長城)은 사람 키 정도로 참호(塹壕)를 파고 그것을 수비하기 위해 쌓아올리는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을 방어만 하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성을 쌓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변해 있는 것이다. 



거대한 성벽을 바라보며 이를 쌓아올린 힘없는 백성들을 떠올려본다. 두고두고 한탄했을 그네들의 고달픈 인생을 말이다. 당시 성을 쌓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쌓다가 죽으면 시체를 다른 곳에 묻기 힘들어 바로 그 곳에 묻어버렸단다. 만리장성을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고 산해관에 있는 맹강녀(孟姜女)의 사당이 이를 증명한다. 맹강녀는 진나라 때 사람인 범기량(范杞梁)의 아내로서, 만리장성 축조에 징발된 남편이 제물로 바쳐져 성벽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알고, 며칠 간 대성통곡하니 성벽이 무너져 남편의 시체가 나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아무튼 맹강녀는 시신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되돌아 내려가는 길, 누군가는 만리장성을 일러 인류가 만들어 낸 유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자랑스럽고, 가장 값진 문화유산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누군가는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바라보았을 때 보이는 것이라곤 만리장성 뿐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위대함은 힘없는 민초들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이 없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장성투어의 백미(白眉)는 누가 뭐라고 해도 끝도 없이 뻗어나간 장성의 모습일 것이다. 망루(望樓)에서라도 바라볼라치면 흡사 용()의 몸통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용 한 마리가 길고 긴 몸을 이끌고 구불구불한 산마루를 기어가다 일순간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성벽 위를 오르내리는 관광객들뿐이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빗속에 장성을 올랐기 때문이다.

 


아무튼 만리장성은 기마민족(騎馬民族)에 대항한 한족(漢族)의 오랜 고뇌의 산물이기도 하다.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하던 한족에게 유목 생활을 하던 북방의 기마민족은 늘 두통거리였다. 산업화(産業化)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빛살같이 빠른 기마부대에 맞설 방법이 전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그런 공포가 중국인들에게만 해당 되는 건 아니었다. 중국은 물론 유럽 전역에 숱한 공포심을 안겨주며 세계사를 뒤바꿔놓곤 했으니까 말이다.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다산즈(大山子) 798예술구(藝術區)

특징 : 베이징은 오래된 역사가 남아있는 유적지들만 있는 게 아니라 최근 중국의 문화와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베이징 동북쪽에 위치한 다산쯔 798 예술구이다. 이곳 다산쯔(大山子) 지역은 지난 2000년까지만 해도 폐쇄된 군수공장단지였다. 전선이나 무기 등을 만들던 공장 지대였으나 전쟁이 끝나고 무기공장이 철수하면서 공장을 합병하고 임대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1년 중앙미술학원이 인근으로 이전해 오면서 젊은 예술인들이 하나둘 작업실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예술 특구로 변모했다. 지금은 황루이, 구디페이, 위판, 천링양 등 유망한 작가들의 작업실과 화랑, 카페와 서양식 술집이 들어서서 중국을 대표하는 미술 공간으로 성장했다. 높다란 굴뚝이 솟아 있던 공장 건물들이 이젠 예술 공장(art factory)’으로 바뀌면서 창작의 공간이나 판매장, 그리고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곳 ‘798예술구는 타임, 뉴스위크, 포춘지 등에 세계에서 가장 문화적 상징성과 발전가능성이 있는 예술도시로 선정되면서 창의지구(創意地區), 문화명원(文化名園)’의 슬로건을 내세우는 베이징의 문화아이콘으로 상징되고 있다.


  

버스는 대로(大路) 가에다 우리를 내려놓는다. 대형버스의 거리 진입을 통제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차에서 내리면 만화 캐릭터(character)들이 그려진 화려한 담벼락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지금 향하고 있는 ‘798 예술구거리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폐차(廢車)가 된 트럭아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는 컨테이너 박스가 줄지어 늘어서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깔끔한 것이 없다. 온통 낙서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요즘 낙서냐 아니면 예술이냐를 높고 논란이 되고 있는 그래피티(graffiti)’이다. 문득 정답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경계를 가를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령 누드사진을 놓고 보자. 어느 단계까지가 예술적 영역이고 또 어느 수준을 넘기면 외설적이라고 봐야 할까? 낙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게 바로 현대예술일 것이다. 그래 미술이든 사진이든 문학이든 각 장르의 경계가 애매해져버린 요즘 경계를 나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는데 말이다.

 

 



고개라도 들라치면 파이프라인(pipeline)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담장과 그 위를 지나가는 파이프라인은 사진으로만 보아오던 공장지역의 옛날 풍경이다. 그래 맞다. 원래 이곳 다산즈(大山子)는 공장지대였다. 사회주의가 한풀 꺾이면서 중국 정부가 개혁 개방 정책을 펴기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전자공업 중심지였다고 한다.

 


 

 


명색이 예술구인데 거리의 예술가들이 없을 리가 없다. 초상화나 캐리커처(caricature)를 그려주는 화가는 물론이고, 철사만 갖고도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예술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좌판(坐板)을 펴놓고 있다.


 

 


거리의 풍경, 즉 각각의 건물 외형(外形)들은 거의 모두가 비슷비슷하다. 공장지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건물의 안은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독특한 분위기로 인테리어를 한 수많은 화랑과 카페, 전시관 등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길과 발길을 붙잡는다. 하나하나 다 들어가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발길을 돌리고 만다. 패키지여행을 따라 나온 이상 주어진 시간 안에 투어를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다양한 장르(genre)의 작품 전시장들이 즐비하다. 판매장을 겸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만큼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폐허로 버려졌던 건물들을 싼 임대료에 빌릴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커다란 메리트(merit)였을 것이다. 정부도 역시 쓸모없이 방치된 땅을 임대할 수 있었으니 서로 이해관계가 적절히 들어맞은 셈이다. 그 결과는 지금과 같은 명실상부한 예술, 상업, 여행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예술구에서는 특별전이나 축제가 가끔 열린다고 한다. 최근에도 무슨 대회가 열렸었나 보다. ‘北京 798創客 創意之星 作品大展이라는 안내문이 내걸려 있는 걸로 보아 발명가대회의 입상작들을 전시해 놓은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 그냥 빠져나오고 만다. 참고로 지난 20041회 따샨즈국제예술제를 시작으로 매년 봄 다른 주제로 축제가 펼쳐지는데 그 규모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단다.

 

 



다산쯔지역에 있던 당시의 공장들은 대게 아래 사진과 같이 일련번호를 갖고 있었다. 그 가운데 메인(main)급이었던 ‘798’ 공장은 현재 가장 큰 갤러리(gallery)로 변해 있단다. '다산쯔 798 예술구'라는 명칭이 탄생한 이유이다. 각 갤러리와 거리에는 각종 설치미술과 전위예술의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도 역시 관광객들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다지 붐비지 않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일 것이다. 인파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지만 그 때문에 놓친 것도 있다.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는 행위예술가들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각국에서 찾아온 예술가들이라는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이 열려 있으면 일단 들어가고 보자, 대부분의 화랑과 갤러리들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중국 미술의 현주소를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중국은 다수의 국가기관이 정책적으로 미술을 진흥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미술가들도 새로 떠오르는 중국 미술계로 적극 진출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798 예술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문화나 예술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북경에 왔다하면 빼먹지 않고 꼭 들르는 편이다. 20129월 초쯤엔가 방영되었던 MBC-TV'무한도전'이 세간의 입소문을 타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을 게다. 방송이 나간 뒤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척 늘었다니 말이다. 이는 그만큼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증거일 것이다. 당시 인기절정이었던 싸이강남스타일북경스타일로 바꿔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싸이는 그를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듣는 정형돈이 맡았다. 마오쩌뚱의 그림이 있는 공장 같은 갤러리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는데, 정형돈의 열정과 하하, 노홍철, 데프콘의 코믹이 어우러져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았었던 걸로 알고 있다.


 

공장과 미술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둘은 묘하게 잘 어울린다. 오히려 공장지대였다는 점이 이곳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큰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나 싶다.

 

 


한글로 된 홍보문구도 보인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거리는 예술가들의 세상이다. 그렇다고 화랑이나 예술센터, 그리고 그들의 작업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회사나 패션가게는 물론이고 음식점과 카페, (bar) 등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당대의 예술과 건축공간, 그리고 문화산업이 역사적 전통 및 도시생활 환경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셈이다. 아무튼 그런 점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지 현재는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국제적으로도 영향력이 가장 큰 예술구역으로 발전하였다.

 


이곳에는 해외 자본으로 연 화랑이 대략 40곳 정도가 된단다. 그중에는 한국 갤러리 크리에이터즈 컴퍼니(C컴퍼니)’표 화랑' 등 우리나라 자본도 일부가 들어와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만수대 창작사 미술관을 직영하고 있는데, 주로 수묵화 위주의 개인전이 열린단다.

  


이곳은 중국의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로버트 버넬(Robert Bernell)’이 입주를 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예술가들이 저렴한 가격과 넉넉한 공간에 매력을 느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중국 정부의 철거계획발전계획으로 바꿀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렸단다. 그만큼 유명해져 버렸던 것이다. 이후 갤러리와 레스토랑, 카페까지 들어와 중국 신흥 예술의 중심이 됐다. 어떤 이들은 일본에서 돌아온 예술가 황예가 200110월 화랑의 개장 기념으로 열었던 전시회 북경 Floating World’를 시발로 보기도 한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에서도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2007년 국유지인 이곳을 예술구로 공식 인증했다.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명십삼릉(明十三陵)

특징 : 북경 시내에서 약 50km 떨어진 옌산(燕山,연산) 기슭의 티엔쇼우산(天寿山,천수산)에 있는 명대 황제들의 무덤군()이다. 영락(永乐) 7(1409)에 창링(长陵,장릉)을 시작으로 명 최후의 황제 숭정(崇祯)제의 무덤인 쓰링(思陵,사릉)까지 230년간 재위했던 13황제의 능묘, 7개의 황비 무덤에 23명의 황비, 2명의 태자, 1개의 태감(太监)묘가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온전하고 고분의 보유량이 가장 많은 고분군(古墳群)으로, 1959년부터 대외에 개방되었으며 2003년에는 주원장(朱元璋)의 능묘인 난징(南京,남경)의 명 효릉(明孝陵)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409년부터 1644년까지 형성되어 300~500년의 역사를 가진 밍스싼링은 동,,북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수지리(風水地理) 상으로 명승지에 속한다. 총 면적 120에 정 중앙에 위치한 청주링(成祖陵, 성조릉)을 기준으로 좌우로 13개의 무덤이 나뉘어져 있다. 건립 순서에 따라 성조(成祖)의 창링(长陵,장릉), 인종(仁宗)의 시엔링(献陵,헌릉), 선종(宣宗)의 징링(景陵,경릉), 영종(英宗)의 위링(裕陵,유릉), 헌종(宪宗)의 마오링(茂陵,무릉), 효종(孝宗)의 타이링(泰陵,태릉), 무종(武宗)의 캉링(康陵,강릉), 세종(世宗)의 용링(永陵,영릉), 목종(穆宗)의 자오링(昭陵,소릉), 신종(神宗)의 띵링(定陵,정릉), 광종(光宗)의 칭링(庆陵,경릉), 희종(熹宗)의 더링(德陵,덕릉), 사종(思宗)의 쓰링(思陵,사릉)이 있고, 이 중 선따오(神道,신도)와 창링(长陵, 장릉), 자오링(昭陵, 소릉), 띵링(定陵, 정릉)만 개방되고 있다. 오늘 둘러보게 될 무덤은 신종이 묻혀있는 정릉(定陵)이다. 참고로 명대에는 16명의 황제가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13명의 황제만이 묻혀있다. 3명의 황제가 이곳에 묻히지 못한 이유는, 먼저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朱元璋) 시기에는 수도가 난징(南京,남경)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난징에 명효릉(明孝陵)’으로 존재한다. 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文)은 그의 숙부 주체(朱棣)가 난을 일으켜 폐위되어 종적을 알 수 없었기에 능묘를 만들 수 없었다. 7대 황제인 주기옥(朱祁鈺)도 형제인 영종(英宗)에 의해 황위를 찬탈 당해 황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의 신분으로 북경 교외 옥천산(玉泉山)의 징타이링(景泰陵,경태릉)에 묻혔다. 이렇게 해서 명대 16명의 황제 중 13명의 능묘만이 이곳에 남게 되었다.


 

오늘 둘러보게 될 곳은 명십삼릉 중의 하나인 정릉, 즉 신종이 묻혀있는 무덤이다. 관광버스가 정릉의 입구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다른 곳을 들러야할 필요는 없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찾아갔던 관광지마다 사람들로 넘쳐났었기에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차장에서 조금만 걸으면 커다란 빗돌(碑石)이 나타난다. 무자비(無字碑)란다. 무자비는 말 그대로 글자가 새겨져있지 않는 비석이다. 첫 번째 능문(陵門) 앞에 위치해 있는 대형 석비로 이무기 머리에 거북의 다리를 가졌다. 13릉의 모든 능 앞에 대형 석비가 있는데, 성조의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비에도 글자가 없다고 한다. 이는 현대에 와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단다. 사료에 따르면 본래 장릉, 헌릉, 경릉, 유릉, 무릉, 태릉, 강릉 등 일곱 능문 앞에는 비석이 없었으며, 가정제 때 와서야 비로소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예부상서 엄숭이 황제에게 7개의 비문을 적을 것을 청했으나, 가정제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가정제가 비를 쓰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흥헌왕(추존황제로 시호는 예종)을 추숭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론 주색(酒色)에 탐닉하느라 신경을 쓸 시간이 없어서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입장권을 구입해서 아래 사진의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투어가 시작된다. ()의 첫 번째 문인데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출입문이 저렇게 크다면 저 안에 있는 건물들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사뭇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하긴 황제가 죽은 뒤 거주하게 될 지하궁전을 형상화한 것이 황릉(皇陵)이다. 그렇다면 자금성(紫禁城)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을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 규모가 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능으로 들어가는 신로(神路)의 길이만 해도 3km에 이를 정도라니 그 크기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정릉(定陵)신종(神宗, 朱翊均) 만력제(萬曆帝, 재위:1573-1620)’와 황후 효단현황후 왕씨(孝端顯皇后 王氏)’, 그리고 29일짜리 황제인 태창제(泰昌帝)를 낳은 효정황태후 왕씨(孝靖皇太后 王氏)’를 함께 묻은 무덤으로 19565월부터 1년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무덤 내부의 지하궁전은 현재 관광 상품으로 민간에 개방되어 있다. 정릉의 발굴은 중국 황제의 능묘발굴로는 최초였기에 명나라 시대의 연구와 고고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고고학술이 미숙했던 시기에 발굴되었던 탓에 대량의 문화재가 파괴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중국정부는 오늘날까지 황제 능묘의 발굴을 허가하지 않고 있단다. 아무튼 이 무덤에는 당사자들인 만력제와 효단현황후, 효정황태후의 유골이 없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6824, () 사상과 문화의 파괴를 주장하는 홍위병들에 의해 정릉이 반사회적 유산으로 낙인찍히면서 지하에 보존되어 있던 유골들을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으로 들어서면 저만큼에 돌계단이 나타난다. 세 개로 나누어진 계단의 위는 반반하다. 뭔가 건물이 있었을 듯도 싶다. 능원의 두 번째 문이 능운문(稜恩門)이라고 했는데 이곳에 있었던 문이 아닐까 싶다.

 


능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머리만 내밀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그림틀을 설치해 놓았다. 옆에는 전통의상을 빌려주는 대여점도 보인다. 이곳도 역시 소문난 관광지 중의 하나라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은 비록 관광객들이 눈에 띄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잠시 후 또 다른 계단이 나타난다. 이번에도 역시 세 개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운데 계단의 중앙에는 용과 학이 조각된 옥판(玉板)으로 장식되어 있다. 자금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각(殿閣)으로 오르는 계단의 양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의 위에 오르니 주춧돌들이 일정한 배열을 이루며 늘어서 있다. 이로보아 건축 당시에는 이곳에 전각이 있었을 것이다. 능운문(稜恩門) 다음에 배치했다는 능운전(稜恩殿)이 아닐까 싶다. 제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궁전이자 황릉의 중심적인 건축물로서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 역할을 했다는 그 전각 말이다.

  

 


돌계단의 가운데 대리석에는 용과 학, 그리고 구름, 산 등 다양한 상징들이 조각되어 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문장들인 걸로 보아 어로석조(御路石彫)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계단은 황제가 지나다니던 통로였을 것이다. 신하나 외국의 사신들은 양 옆에 있는 계단을 이용했을 것이고 말이다.


 


지하궁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13릉 박물관에 들른다. 명조 황제의 자료와 명조 황제능묘의 개요, 13릉의 구도, 그리고 정릉에서 발굴되었다는 옷과 관, 신발, 도기, 장신구 등의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까 들어올 때 구입했던 입장권만 있으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니 참조한다. 아무튼 이곳은 관람객들로 항상 붐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우리 일행들뿐이다. 빗속을 걸어 다니는 게 짜증스럽지만 대신 좋은 점도 있나보다. 이래서 사람들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만들어냈을 지도 모르겠다.

 

 

 

 

 


황제가 썼다는 왕관이다. 이 관은 금사(金絲)로 직조되었는데 그 무게가 놀랄 만큼 가볍다고 한다.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황후의 관인데 봉황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봉관이라 부른다. 왕관은 화려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꽤나 무겁게 보이는 것이 쓰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웨난의 저서 황릉의 비밀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는 책의 말미에 정릉을 방문한 여러 유명인사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강청의 일화도 실려 있다. 직접 관을 써본 그녀가 생각보다 관이 무겁게 느껴지자 '황후 되기도 쉽지 않았겠군.'하며 벗었다는 것이다.

   


견직물도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이다. 당시 명나라의 직조(織造) 수준이 세계최고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릉에서도 엄청난 양의 피륙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하는데 그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발굴당시의 보존기술 미흡으로 인해 상당수를 상하게 했다는데 그나마 제대로 보존이 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박물관을 나와 지하궁전으로 향한다. 길은 명루(明樓)의 옆으로 나있다. 아니 보성(寶城)이라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황릉을 둘러싼 원형의 담장을 보성이라고 하는데, 보성과 명루는 하나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하궁전으로 들어가는 길, 건물의 벽을 뚫고 나온 커다란 나무들이 보인다. 4년 전쯤엔가 캄보디아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관광차 따 프롬(Ta Prohm)’에 들렀을 때 난 열린 입을 다물 줄 몰랐었다. 건물의 벽()과 공생(共生)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나무뿌리가 사원의 기둥과 지붕을 감싸 안거나 무너뜨리고 있었으니 공생이란 말은 잘못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 덕분에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액션과 판타지에 모험까지 곁들인 영화 툼 레이더(Tomb Raider)’의 촬영까지 하게 되었다지만 내 눈에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곳도 따 프롬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에 거론해 봤다.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5~6층 높이는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도굴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능묘(陵墓)는 아주 견고하게 건축되었고 묻고 난 후에는 매우 엄밀하게 봉해 놓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개봉이 되지 않은 능묘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고 한다.

 


지하궁전으로 들어간다. 이 무덤의 주인인 만력제는 2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를 이어받아 무려 48년간이나 재위를 했던 황제이다. 재위기간이 길었던 덕분인지 6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자신의 묘()인 지하궁전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 당시 이 묘를 건설하는데 백은 800만냥(2년치 국가 예산에 해당)이 들어갔다니 실로 어마어마한 물량이다.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대명제국의 몰락에 이를 정도로 주색에만 몰두했던 황제다운 행위라 할 수 있겠다. 하긴 공사가 끝난 뒤, 황후와 왕비, 그리고 대신들을 데리고 자신의 수궁(壽宮) 내에서 큰 연회를 벌렸다니 더 말하면 뭐하겠는가.

 


능묘는 마치 하나의 지하궁전과 같은 형태이다. 중전(中殿)을 가운데에 두고 전후좌우(前後左右)에 네 개의 공간을 배치했다.

 


뭔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모두가 지폐(紙幣)이란다.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기댈 뭔가를 찾는 그들의 눈에는 이곳 지하궁전까지도 그 대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네모진 대 앞에 관상(棺床)’이란 팻말이 세워져있다. 이로보아 만력제의 관이 놓여있던 자리가 아닐까 싶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도자기들도 진열되어 있다. 정릉은 수십 미터의 지하 깊숙이 묘가 있었던 덕분에 전란이나 도굴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대 고고학자들이 수백 년 동안 잠자던 지하궁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400여년을 지하에서 잠자던 3천여 점의 문화재가 발견되었을 때, 온 세상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단다. 황금으로 만든 금관과 옥으로 만든 옥관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단다.

 


커다랗고 붉은 관이 보인다. 제일 큰 황제의 관을 가운데에 두고 그 양쪽에 황후들의 관을 배치했다. 주위에 보이는 작은 관들은 유물들을 넣었었지 않나 싶다. 발굴 당시 유골(遺骨) 주위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비단이 가득 차있었다고 한다.

 


지하궁전은 도합 7개의 커다란 돌문들로 연결되며, 문과 동굴은 모두 한백옥석(漢白玉石)으로 조각되어 있다. 또한 전체 공간을 다섯 개의 궁전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돌로 만들어진 공간들은 하나같이 기둥과 대들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지하궁전에서 빠져나오면 명루(明樓)가 나온다. 능내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명루 내에는 거대한 석비(石碑)가 있다. 명루 앞에는 석오공(石五供)이라는 석물이 있는데, 석오공은 상징적 재물이란다.

 

 

 

 


이번 여행은 딸의 가족과 함께 했다. 모처럼 손자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다. 여행 중에 내가 아는 사료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나 알아들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명()의 제13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 재위:1573-1620)48년의 재위기간에 명()과 암()을 함께 보여준 황제이다. 초기에는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는 등의 내정 개혁을 추진하여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 불리는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 친정(親政)을 하면서 황제의 역할과 정무(政務)를 내팽개치는 태정(怠政)’을 하여 명()의 정치적 혼란을 가져오게 하여 멸망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환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재위 중에 광세(鑛稅)의 화()’직용(織庸)의 변()’과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했으며, 후반기인 1619(만력 47)에는 양호(楊鎬) 사로(四路)의 군대가 후금(後金, )에게 완패를 당하기도 했다. 재위 48년이 되던 해에 사망했는데, 멸망의 해인 갑신지변(甲申之變)으로부터 고작 24년을 남겨둔 시점이었으니 그가 명나라를 말아먹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황제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구원병력(救援兵力)을 파견해 준 이가 바로 만력제(萬曆帝, 1563.9.4.~1620.8.18) 신종(神宗)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래봤자 가만두면 언제 자기 나라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왜군들이었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테지만 말이다. 아무렴 어떠랴. 그가 아니었으면 조선이란 나라는 이 땅에서 없어졌을 것을. 고마울 따름이다.

 

 


명루에서 바라본 명십삼릉(明十三陵), 연산산맥(燕山山脉)에 감싸여있는 황릉은 초록 수목과 붉은 색 지붕이 어우러져 깨끗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금성의 엄격하고 화려한 느낌과는 또 다른 자연과의 조화이다. 웅장한 규모와 완벽한 보존 상태, 그리고 고즈넉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고대 중국의 대표적 황릉(皇陵)이라 할 수 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홍수로 인해 형성된 작은 분지가 있는데, 녹색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산기슭의 동, , 북쪽에 홍색 벽과 황색 기와를 가진 능묘 건축물이 위치해 있다. 이들은 북쪽 산기슭 정중앙에 위치한 청쭈링(成祖陵, 성조릉)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뉘어 있으며, 전체적인 구조가 조화로우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준다. 

 


명루에 올라 주변경관을 둘러봤다면 정릉의 투어가 끝이 났다고 보면 된다. 이제 아까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나가는 일만 남았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걷지는 말자.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아까 들어올 때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의 풍물들이 다른 의미를 갖고 다가올 것이다. 또한 명릉의 주변은 과수원이 많은 지역이다. 철따라 다양한 과일들이 나오지만 특히 복숭아가 유명하다고 한다. 한두 개 구입해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맛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이화원(頥和園)

특징 :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 beijing)의 서북쪽에 위치한 이화원(頤和園)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황실정원이다. 750년간 황제의 정원으로 사랑받아오다가 2차 아편전쟁중 불타 없어진 것을 서태후가 재건해서 별궁(別宮)으로 삼았다. 290나 되는 어마어마한 부지에 조성되어 있는데, 만수산(萬壽山: 인공산)과 곤명호(昆明湖: 인공호수)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인 청()나라의 황실 가든(garden)이었던 이화원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면서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온 황실정원으로서 북방정원의 장중함과 남방정원의 부드러움을 함께 갖추고 있다. 쉽게 말해 중국 정원예술의 진수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 가치를 인정받아 1998122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로 이화원은 승덕(承德)의 피서산장과 소주(蘇州)의 졸정원(拙政園), 그리고 류원(留園)과 함께 중국 최고의 4대 정원으로 꼽힌다.


 

이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동궁문(東宮門)과 북궁문(北宮門) 등 두 개가 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동궁문을 이용한다. 접근이 편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에는 백여 채의 건물과 크고 작은 뜰 20여 곳이 있고 고목 1,600여 그루가 있다. 그 중 불향각(佛香閣), 회랑(長廊), 돌배(石舫), 소주거리, 17공교, 해취원(諧趣園), 극장 등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대표적 전통 건물이다.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문(東宮門)의 앞에는 한 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다.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부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이라고 적힌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란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東八所)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형형색색의 얼굴색을 가진 수많은 관광객들이 매표소 앞에서 북적이고 있다. 이화원에 들어가기 위해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다. 입장료는 기본이 30위안이고, 덕화원(德和园) 5위안, 불향각(佛香阁)과 소주가(苏州街) 10위안, 문창원(文昌院) 20위안 등 일부 시설은 별도의 입장료를 더 내야 한다. 자유이용권(50위안)을 사면 모두 무료이나 성수기(盛需期)에는 10위안이 더 붙는다니 참조한다.



잠시 후 한자와 만주어로 적힌 편액(扁額)을 달고 있는 인수문(仁壽門)이 나온다. 인수전(仁壽殿)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서태후의 만수무강(萬壽無疆),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착한 자는 장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태후가 지혜롭고 착했다는 의미인데, 그녀의 삶이 그렇지 못했기에 그래주기를 바라는 아랫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서태후는 중국을 통치했던 두 명의 여인 중 한 명이다. 비록 측천무후처럼 칭왕(稱王)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그녀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실제 그녀가 죽고 그녀의 손으로 옹립한 마지막 황제 선통황제(부의)3년 후(1911)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때까지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역사 속에 언제나 화려하게 앞머리를 장식한 이름 석자는 늘 서태후였다.

 


인수문 뒤쪽에는 숨 가팠던 청말(淸末) 정세의 중심에 서 있던 인수전(仁壽殿)이 있다. 이곳은 서태후와 그녀가 옹립한 황제 광서제가 외국사신을 접견하며 정무를 살피던 곳이다. 경복궁(景福宮)으로 치면 근정전(勤政殿) 쯤으로 치면 되겠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원 시절까지만 해도 근정전(勤政殿)이라고 불렀단다. 그러던 것을 1886년에 재건하면서 서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인수전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자줏빛에 황금색 무늬로 단장한 기둥과 문이 화려한 인수전은 1898년 광서 황제가 이 대전에서 유신 변법을 모의했으나 봉건 보수 세력의 반대로 10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백일 유신이라 부른다. 인수전 안에는 옥좌, 병풍, 공작 깃털로 만든 장식용 부채, 향로, 크레인 모양의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병풍에는 아홉 마리의 용과 각기 다른 226개의 수()를 새겨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구(電球)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인수전 앞에는 태호석(太湖石)이 놓여 있는데 그 생김새가 노수성(老壽星)을 닮았다 해서 수성석(壽星石)이라 부른다. 태호석이란 중국의 쑤저우 부근에 있는 태호(太湖) 주변의 구릉에서 채취하는 까무잡잡하고 구멍이 많은 복잡한 형태의 기석이다. 이전에 내해(內海)였던 태호의 물에 의해 오랜 기간 잠식된 석회석에 많은 구멍이 숭숭 뚫려 이런 형태를 띠게 된 것이란다. 쑤저우의 정원에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그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사람들에 의해 수요가 늘어나 중국 각지의 정원에 설치되고 있다.

 


인수전은 청대 건륭제때 만든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이 지키고 있다. 사슴의 뿔과 용의 얼굴, 사자의 갈기, 물고기의 비늘로 된 몸통, 소의 발굽을 하고 있는 청동상(靑銅像)이다. 기린은 전설에 나오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사악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 앞마당에 이런 짐승을 놓아둠으로써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상징했다고 한다.

 


인수전 뒤로는 곤명호에 접해서 3개의 대형 사합원(四合院), 즉 옥란당(玉澜堂)과 낙수당(乐寿堂)의예관(宜芸馆)이 있고, 경극을 상영하던 덕화원(德和园)이 있다. 이중 옥란당(玉澜堂)은 곤명호를 마주 보고 있는 중국 전통의 사합원(四合院)식 건물로 건륭제(乾隆帝)가 처음 지어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었으나, 1860년 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892년에 다시 지었다. 사합원이란 그 의미상 네 개의 건물이 '원자'(院子; , 정원)라고 불리는 중정(中庭)을 둘러싼다는 뜻을 갖는데, 과거에는 사합방(四合房)’이라고도 불렀다. 전형적인 사합원의 공간구성은 한나라(B.C.206~A.D.220)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 중국 사회를 지배해 온 유교의 제도를 잘 보여주는 주택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근대화와 입헌군주제 개헌을 위한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이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파에 의해 좌절된 후, 서태후는 광서제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고 옥란당에 유폐한다. 옥란당 동쪽의 동난각은 광서제가 식사를 하던 곳이며, 서쪽의 서난각은 침실이고, 옥란당 옆의 의예관은 광서제의 황후 륭유(隆裕)가 갇혀 있던 곳이다. 참고로 옥란당 건물 안쪽을 보면 벽돌로 쌓은 벽이 보일 것이다. 광서제가 외부와 소통을 하지 못하도록 서태후가 쌓은 벽이다. 모든 실권을 잃은 광서제는 겨울에는 중남해, 여름에는 옥란당을 전전하며 허울뿐인 황제의 설움을 느껴야 했다. 너무 늙어 기력이 다한 서태후는 자신의 사망 이후 광서제가 복위하는 것을 두려워해 끝내는 그를 독살해버린다.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 서태후도 역시 죽게 된다. 그리고 세 살배기 마지막 황제 푸의가 뒤를 잇는다.

 


옥란당의 중정에서 본 덕화원(德和園), 덕화원은 광서제가 대신(大臣)들과 함께 시와 문예를 함께 논하던 곳이었는데 경극(京劇)을 좋아한 서태후가 경극을 공연하는 극장으로 전면 개조하였다. 건물이 섬세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기세 또한 장엄하다 하여 경극의 요람이라 칭송을 받고 있으며, 자금성의 창음각, 하북성 승덕 피서산장의 청음각과 함께 청나라 궁전의 삼대 희극관으로 꼽히고 있다. 아쉽게도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패키지여행을 따라나선 이상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하는 애로가 아닐까 싶다.

  

 


옥란당(玉瀾堂)을 지나면 호수가 나온다. 그리고 호숫가를 따라 낙수당(樂壽堂)으로 이동한다. 왼쪽에 곤명호를 끼고 걷다보니 멋진 풍경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진행방향 저만큼에 수목자친(水木自親)이 보인다. 5간의 천당전(穿堂殿)식 건축물로 낙수당의 정문이기도 하다. 곤명호 북안에 자리한 수목자친은 물가에 부두를 끼고 있다. 서태후가 수로(水路)로 이화원에 올 때에는 이곳을 통해 뭍으로 올라 낙수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화원은 호수 너머로 보이는 전경이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효과를 준다. 호수에서부터 궁궐까지 모든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공의 풍광이지만 요소 하나하나가 조화를 이루며 심상의 편안함을 준다.

 


수목자친 안쪽은 낙수당(樂壽堂)이다. 전각의 명칭은 논어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건륭제가 모후를 모시고 곤명호의 절경을 즐기던 곳이었지만, 서태후의 침궁(寢宮)으로 개조되어 말년에 일상 활동과 식사를 하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대형 사합원(四閤院)으로 정전(正殿), 와실(臥室), 기거실(起居室)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860년 아편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887년 서태후가 여름 별장으로 재건하여 48명의 시종과 수천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머물렀다고 하며, 1903년에는 중국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낙수당 앞에 놓여있는 청동 사슴(鹿)과 학(), ()은 한자음을 빌어 '육합태평(六合太平)'을 상징한다.


 

낙수당의 안뜰에는 세계 최대의 원림석이라는 청지수(靑芝岫 : 푸른색의 영지靈芝,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괴석 이란 뜻)가 있다. 이 돌은 명대(明代)의 미만종이란 부자가 북경교외에서 발견해 자기 집으로 가져다 놓았던 것이데 건륭황제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아무튼 이 돌은 패가석(敗家石)’이란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당시 수백 톤이나 나가는 이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겨울철을 이용해 수로를 파고 물을 얼려 밀고 오는 방법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경비가 하도 많이 들어 첫 발견자인 미만종이란 부자가 그 과정에서 가산을 탕진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당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이 돌은 낙수당에서 곤명호의 전경을 쉽게 볼 수 없도록 하는 기능을 한단다. 이러한 배치는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도 해당돼 중요한 곳을 한눈에 보여주지 아니하고, 악한 기운이 직접 들어오는 것을 방지해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국 전통 원림의 양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돌과 같이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일부러라도 패가망신(敗家亡身)을 원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낙수당을 빠져나오는 길에 보이는 석가루(夕佳樓), 옥란당과 의예관 사이에 자리한 석가루는 호숫가에 건축한 2층 건물로 청대의 황제와 황후들이 누각에서 곤명호와 만수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던 장소라고 한다.



이후부터는 장랑(長廊)을 따른다. 건륭제가 어머니 효성헌황후의 산책을 돕기 위해 만든 회랑(回廊)으로, 서태후는 곤명호의 풍경을 감상할 때나 불향각으로 행차할 때에 이 길을 거닐었다. 장랑은 동쪽 요월문((邀月門 : 달을 요청해서 즐기는 문)에서 시작되어 서쪽 석장정(石丈亭)에서 끝나는데 만수산의 중심축인 배운전(排雲殿)을 기준으로 동쪽 장랑과 서쪽 장랑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한편 장랑은 곤명호변을 따라 만수산의 건축물들과 아래의 자연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네스북에까지 오른 세계에서 가장 긴 화랑이다.



장랑의 총 길이는 728m, 273칸으로 되어 있는 회랑(回廊)의 천장과 기둥, 기둥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모든 공간에는 14,000여 폭의 전통색채화, 풍경화, 산수화, 인물화, 화조도 등 역사와 신화, 자연과 전설을 담은 그림들이 끝도 없이 그려져 있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이때 그린 546폭의 서호 경치를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넣었다고 한다. 이후 금세기(今世紀)들어 60년대에 중국정부는 서호의 풍경화에다 민족의 특색을 지닌 채색화 14천여 폭을 더 그려 넣어 장랑을 세계 제일의 회랑으로 만들었다.

 


걷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긴 장랑은 굴곡과 꺾임을 통해 단조로움을 극복했는데, 이는 시야의 변화를 통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장랑 중간 중간에는 유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請遙)라는 4개의 8각 처마정자 가 있는데, 걷다가 쉬면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으로, , , , 동 사계절을 뜻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이화원의 상징이라는 불향각(佛香閣)이다. 이화원 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자 이화원 전경을 담은 사진에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건물이다. 1891년 중건된 불향각은 이화원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높이 36.48m83층에 4중 처마양식을 한 목조건물이다. 41m의 석조기단 위에 우뚝서있는 불향각의 위엄 앞에 누구도 함부로 서태후의 권위를 넘볼 수 없게 하려는 숨은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한다. 불향각의 일층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 데 명나라 만력2년에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5미터이고 무게가 만근이라고 한다. 참고로 불향각은 항주의 육화탑(六和塔)을 모방했다고 한다. 2층과 3층은 1989년에 비로소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전망이 좋아 남쪽으로는 곤명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향산과 동쪽으로는 원명원이 보인다.

 


만수산의 남쪽 기슭을 따라 이화원의 중요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맨 아래 중심에는 서태후의 생일 연회를 열던 연회장인 배운전(排云殿)이 있다. 정면 7,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원래는 명나라 때 홍치제가 세운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였다. 배운전이란 이름은 '신선이 구름을 헤치고 나오니(神仙排雲出) 보이는 것은 금과 은으로 된 대였노라(但見金銀臺)'는 시구에서 비롯되었다. 자소전(紫霄殿옥화전(玉華殿방휘전(芳輝殿운금전(雲錦殿)4개 배전이 딸려 있으며 배운전 뒤쪽에는 덕휘전(德輝殿)이 있다.

 


배운전에서 곤명호의 안에 있는 인공(人工)의 섬 남호도(南湖島)까지는 유람선으로 이동한다.

 

 


배를 타고가다 보면 불향각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불향각이 자리 잡고 있는 산은 만수산(萬壽山)이다. 곤명호 북쪽에 있는 약 60m 높이의 만수산은 원래 봉산과 봉산호가 있던 것을 확대시킨 것으로 곤명호를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쌓아 만든 인공(人工)의 산이다. 물과 산을 통해 옥천산과 서산의 여러 산봉우리들과 이어져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으며, 만수산을 뒤덮고 있는 오랜 측백나무와 푸르른 소나무들 밑으로 웅장한 궁궐들과 유서 깊은 사찰, 그리고 이름난 사당들이 서로 어울리고 있다. 불향각 뒤편 산의 정상에는 불당인 지혜해(智慧海)가있어 여러 불상을 배치해 드넓은 곤명호와 이화원 전체를 내려다보게 하고 있다. 이곳의 관음보살과 불향각의 천수천안관음상은 서태후를 바라보며 하늘의 권력을 그녀에게 위임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각각의 건물들은 하나 같이 모두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역사적으로도 물론 흥미롭다.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것은 호수 너머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중국 풍경이다. 바다처럼 넓은 인공 호수의 자연 풍광이 정자, 전각, 궁전, 사원, 교각 등의 인공 요소들과 결합하여 매력적이기 그지없는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화원은 또 국제적으로도 영향력이 큰 중국 문화 양식의 깊은 미의식을 반영하는 중국 정원 조경의 철학과 숙련을 한 몸에 보여주고 있다.

 


곤명호(昆明湖)는 본래 조그만 연못이었던 것을 인력으로 바닥을 파내서 만든 인공호수다. 면적 2.2에 둘레의 길이가 8km로 이화원 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항주에 있는 서호(西湖)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광활한 것이 호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다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지 속의 바다'라고 부르는가 보다. 곤명호는 또 다른 기능도 갖고 있다. 곤명호로부터 공원의 구석구석까지 물을 끌어들여 이화원의 경관을 높인다.

 


남호도 복판에는 용왕묘(龍王廟)가 자리 잡고 있다. '광윤영우사(廣潤靈雨寺)'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서해 용왕인 광윤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용이 비바람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 용왕묘를 통해 수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남호도에는 산석을 쌓아 만든 높은 대 위에 건축한 함허당(涵虛堂)이 있다. 서태후가 해군의 수상 훈련을 관람하던 곳이라는데 사진이 흐려 게시하지는 않았다.

 


중국 정원은 모두 호수를 품고 있는데 이화원이 유명해진 것은 규모나 화려한 건축물도 있지만 전체 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호수 곤명호 때문이다. 곤명호는 과거 서태후가 중국 해군 훈련을 시켰던 거대한 인공 호수다.

 

 


인공의 섬인 남호도(南湖島)는 십칠공교(十七孔橋)를 통해 동쪽의 제방(東堤)으로 연결된다. 아치형의 돌다리인데, 다리의 중간에 1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해서 십칠공교 라고 부른다.

 


십칠공교는 길이 150m에 넓이가 8m인데, 다리의 난간에는 544개의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이 돌사자들이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 곽여정(郭如亭)을 만난다. 팔방정(八方亭)이라고도 부르며 십칠공교 동단에 위치한 82중 처마의 정자이다. 안팎으로 24개의 원기둥과 16개의 사각기둥이 있다. 면적이 130에 달해 중국의 정자 건축 중에서는 가장 크단다.

  


이화원을 다 둘러보고 난 후에는 신건궁문(新建宮門)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다. ‘광서(光緖) 17에 지어진 이 문은 동쪽을 바라보며 3층 너비에 권붕헐(卷棚歇)식 처마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문의 정면 쪽 제방 위에는 3층의 충전식 패루(牌樓)가 지어졌다. 패루는 동서 양쪽에 서운(瑞雲)과 연욱(延旭)이라는 편액(扁額)을 달고 있었단다. 1985년에 패루를 복구했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여행지 : 베이징(beijing, 北京, 북경)

 

여행일 : ‘15. 9. 4() - 7()

일 정 :

9.4() : 798예술구, 스챠하이, 왕부정거리, 북경서커스 관람

9.5() : 만리장성, 명십삼릉, 이화원, 솔라나거리, 발마사지 체험

9.6() : 천단공원, 천안문광장, 자금성, 국가박물관, 금면왕조 관람

 

천단공원(天壇公園, Temple of Heaven)

특징 : 천단공원(天壇公園)은 명·청시기 황제가 하늘에 제사 혹은 기우제를 지내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릴 때 이용하던 곳이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하늘과 땅, 일월성신을 소중히 하며 원초적인 자연에 대한 숭배를 성대한 의식으로 표현했다. 그중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는 조정에서 주관했고 이는 황제의 특권이기도 했다. 이중에서도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가장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그 장소인 천단(天壇)도 역시 여러 제단들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 1420년 명대의 영락제에 의해 지어진 천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인 자금성보다도 4배나 더 큰 면적이다. 이곳의 주요 건물인 기년전(祈年殿)에서 황제는 풍작을 기원하였고, 황궁우(皇穹宇)는 하느님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황제가 제천의식을 거행하기 전 목욕재계를 하던 재궁(齋宮)도 천단공원의 주요 건축물 중 한 곳이다. 유구한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천단공원에서는 명·청시기의 발자취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가꿔져 있는 화단과 나무들 사이로 여유로이 산책할 수 있다. 한국어가 지원되는 자동 오디오가이드 기계를 빌려 편하게 관람할 수 있으니 참조한다. 물론 약간의 사용료는 물어야 한다.

 

투어는 동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도라도 한번쯤 살펴보고 들어가면 어떨까 싶다. 만일 안내도를 찾지 못했다면 가이드에게 귀띔이라도 들어보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옛날 베이징 황성(皇城) 내에는 네 개의 제단(祭壇)이 있었다. 남쪽의 천단(天壇)과 북쪽의 지단(地壇), 그리고 동서(東西)에 배치되었던 일단(日壇)과 월단(月壇)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제단들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각각 다르다. 이중 천단(天壇)은 가장 중요시되던 제단으로, ·청 시대에 황제가 매년 이곳에서 천신(天神)에게 제()를 올렸다. 이곳의 넓이는 무려 자금성의 네 배. 고대규모로는 가장 큰 제단이라 할만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 최대의 제전이기도 하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1420년에 세운 이 제단은 1961년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천단은 벽으로 내단(內坛)과 외단(外坛)이 나뉘는 회()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땅을 의미하는 남쪽이 사각형, 하늘을 의미하는 북쪽은 원형의 모습을 한 남방북원(南方北圓)의 형세로 남북으로 원구(圜丘), 황궁우(皇穹宇), 기년전(祈年殿)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으며 북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진다. 중심은 가장 북쪽에 세워진 기년전으로 천단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

 

안으로 들면 전형적인 도심공원(都心公園)의 풍경이 나타난다. 천단(天壇)이라는 유적(遺蹟)에 왜 공원이라는 낱말이 하나 더 붙어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풍경들이다. 유적을 공원으로 가꾸어 놓은 것이다. 잘 관리된 아름다운 공원 숲에는 시민들로 넘쳐난다. 하나같이 즐거운 표정들이다. 북경사람들에게 천단공원은 우리의 여의도 광장이나 파고다 공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서로가 모르는 사람들 같은데도 스스럼없이 춤들을 추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보인다. 태극권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물을 뭍인 붓으로 바닥에다 아름다운 글씨체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 마작을 하고 있는 노인들이 빠질 리가 없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놀이 중의 하나일진데 말이다. 거기다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등 베이징 시민들의 문화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곳이다.

 

 


기년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긴 회랑(回廊)을 통과해야 한다. 이곳 또한 시민들의 놀이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서 갖가지 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주로 카드놀이나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들이다. 마치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훈수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할아버지들 틈에 할머니들이 끼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중국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싶다.

 

 

 




회랑을 따라 걷다보면 거대한 고목(古木)들이 눈길을 끈다. 천단공원은 이곳을 조성한 영락제 이래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들이 출입하며 제사(祭祀)를 지내던 곳이다. 따라서 모든 시설물들은 엄격하게 관리되어 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저 숲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말이다. 황제의 신전인 천단(天壇)이 더욱 신성하게보이는 것은 저렇게 잘 보존 되어온 고목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년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매표소를 통과해야만 한다. 중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이다. 하나의 유적지 안에서도 구역에 따라 별도의 요금을 받는 상술(商術) 말이다.

 


()을 지나면 천단공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기년전(祈年殿)이 나온다. 중국의 군주들이 풍요로운 수확을 비는 제천 행사를 치르기 위해 지은 제단(祭壇) 중 하나로서 천안문, 자금성과 함께 베이징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3층으로 된 청색 유리기와 지붕 건물이 원형 제단 위에 얹혀 있는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높이는 38미터, 직경은 30미터에 달하며 원뿔형의 삼중 지붕은 하늘을 상징하는, 유약을 발라 구운 짙은 청색의 기와로 쌓고 그 위에 구근 모양의 황금 상륜부를 올렸다. 건물 자체도 쇠못이나 시멘트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나무만 사용해서 지었으며, 스물여덟 개의 거대한 기둥이 전체 구조를 지탱하고 있다.

 

 


기년전은 천단공원뿐만 아니라 베이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건축 당시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 3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백석삼중단상(白石三重壇上)에 축조한 아름다운 푸른 유리기와의 원형 건물이다. 특히 지붕 꼭대기의 장식을 위해 황금이 3톤가량이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실로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명나라 시대에는 지붕이 청색과 황녹색으로 되어 있었지만, 건륭제가 1751년에 중건을 하면서 전부 청색으로 바꾸었다. 1889년 낙뢰에 의하여 한번 소실되었지만1906년에 다시 재건되었다



건물 안은 엄격한 조형적 규칙을 가지고 있다. 황금색과 붉은 색으로 장식된 화려한 내부로 들어가면 기둥으로 둘러싸인 것을 볼 수 있다. 중앙 4개의 기둥인 용정주(龙井柱)사계절(四季節)’을 상징한다. 또한 중간의 12개 붉은 기둥은 12개월을, 그리고 바깥 쪽 12개 기둥은 12시간을 가리킨다고 한다. 중간과 바깥쪽 기둥을 합치면 ‘24절기(節氣’)를 상징하게 된단다. 또한 가운데에 놓인 의자는 옥황상제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에 황제라도 앉을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건물의 천정에는 용과 봉황이 어우러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바닥에 조각되어 있던 봉황(鳳凰)이 밤에 천정의 용()에게 놀러 갔다가 날이 밝자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라고 한다 



기년전의 북쪽에는 황건전(皇乾殿)이 서있다. 황천상제와 선황제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황건전 역시 명나라 영락제 시대인 1420년에 건립되었다. 초기에는 천고(天庫)라고 불리었는데,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천고'라고 적고 있다. 

 

 


원구단으로 향한다. 아까 이곳으로 들어올 때 지나왔던 문을 통해서이다. 이번 사진에는 검표(檢票)를 위한 시설물이 확실히 잡혔다.

 



천단공원은 3단으로 된 주요 건축물들이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로 건물 안에서 제사를 올리는 내부 제단(祭壇) 형태이다. 그리고 이 제단들은 동서로 뻗은 외벽에 의해 남쪽 제단인 원구단과 곡물 신을 위한 제단인 북쪽 기곡단(祈穀壇)으로 나뉜다. 이 남북 두 제단은 단계교(丹階橋)라 불리는 360m 길이의 벽돌로 된 오르막길로 연결되어 있다 



단계교(丹陛橋)는 다리라는 이름과는 달리 일종의 통로이다. 대리석 같은 재질의 볼록한 길이 통로의 중심에 아래 사진과 같이 길게 뻗어있다. 이 길은 하늘신이 걷는 길이라고 한다. 동쪽은 황제가 다니던 길이니, 서쪽 길은 응당 신하들 몫이 된다. 옛날에는 엄두도 못 내었을 길 위를 요즘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걸어 다닌다. 이런 걸 두고 열린 세상이라 하는가 보다 

 


원구단으로 가는 길에 고깔모자를 얹은 듯한 모양의 황궁우(皇穹宇)를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의 종묘와 비슷한 점이 많은 곳으로, 황제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선대 황제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직경이 15.6m에 이르는 원형의 건축물인 황궁우는 청기와 목조 건물이며 흰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져 그 위엄을 나타낸다. 전체적인 장식과 외형이 화려하며, 내부 장식 또한 섬세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아치형의 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황궁우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 아래에는 삼음석(三音石)’이라는 석판이 깔려 있다. 첫 번째 석판에서 손뼉을 한 번 치면 한 차례의 메아리가, 두 번째 석판에선 두 차례, 세 번째 석판에선 세 차례의 메아리가 들린다고 한다.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해보려 했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사진촬영까지도 실패하고 말았다.

 


황궁우 주변에는 오래묵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중에서도 황궁우 북서쪽에 있는 기묘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가장 눈에 띈다. 나무의 신기한 모양새 때문인지 관람객들이 나무를 에워싸고 있다. 나무를 안내하는 간판엔 한자로 고수(古樹)’라고 쓰여 있고 측백나무임을 알리고 있다. 이 역시 가정제 때 심은 나무로 수령이 무려 500여 세에 이르며 이름을 구룡백(九龍柏)’이라고 한단다. 그 이름처럼 나무의 뒤틀림이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뒤틀림 현상은 지상에서 2m 정도 높이까지만 나타나고 그 위부터는 본래의 바른 나무 모양새로 되돌아간다.

 

 


사람들은 황궁우보다는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外壁)인 회음벽(回音壁, The Echo Wall)을 더 흥미로워한다. 회음벽은 한자를 풀이하면 음이 돌아오는 벽'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벽에 대고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이 반대편에서 벽에 귀를 대고 있으면 그 소리가 벽을 타고 전달된다고 한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려는지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서양인들까지도 신기한 표정으로 이 회음벽을 사이에 두고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 아무튼 하늘의 기운과 소통하고 교감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계해낸 당시의 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회음벽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한백옥(漢白玉)으로 만든 3층의 기단(基壇)이 보인다. 원구단(圓丘壇)으로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한 의식을 행하던 장소이다매년 동지에 풍작을 감사하는 의식을 행하고, 가뭄이 든 해에는 기우제를 지냈다. 형태는 중국의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원형이다또 난간이나 계단 등이 음양 사상을 따라 지어졌으며 각 단의 직경을 합계한다면 45장이고, 이것은 단지 9의 배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구오지존(九五之尊 : 주역의 이치에 따라 임금의 지위를 이르는 말)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원구단은 하늘을 의미하는 중앙의 원형이 땅을 의미하는 울타리로 둘러쳐진 사각형 안에 놓여 있는 모습이다. 원구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3개의 둥근 단으로 구성된다. 이 단들은 위로 올라가면서 지름이 줄어들며 좁아지고, 각각의 단들은 흰 대리석 난간이 감싸고 있다. 난간에 있는 360개의 기둥은 고대 중국인이 사용했던 음력의 1년인 360일을 의미한다. 황제의 왕관은 정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늘과 땅의 중재자인 황제의 역할을 상징하는 것이다.

 


위로 오르자 원구의 한가운데에서 두 손을 모은 채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들이 서있는 곳은 천심석(天心石)이란다. 태극석(太極石)이라고도 하며, ·청 시대에는 억조경종석(億兆景從石)이라고도 불렸다니 참조한다. 옛날 황제가 이곳에서 하늘에 대고 축문(祝文)을 읽었기에 그들도 따라서 하고 있는 모양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소원(所願)을 빌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하늘을 향해 축문(祝文)을 읽을 때 그 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장소가 바로 천심석(天心石)의 위라고 한다. 황제가 읽는 축문(祝文) 소리가 원구대를 둘러싼 원형 담장에 의해 굴절돼 공명 현상을 일으키도록 설계됐다는 것이다. 하늘과 소통하는 황제의 기원이 신하들에게도 메아리쳐 울려 퍼지도록 함으로써 천제의 극적 효과를 도모했던 모양이다.

 



원구단에서 바라본 황궁우, 이 두 건축물들은 명나라 제11대 황제인 가정제(嘉靖帝·재위 1521~1567)1530년에 조성했으며 건륭 14년인 1749년에 증축되었다. 이때부터 이 일대가 정식으로 천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고, 하늘과 땅을 분리해 각각 별도의 제사를 올리게 된다. 즉 황궁우와 원구대는 순수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고, 땅과 태양과 달에 지내는 제사는 각각 지단(地壇·자금성 북쪽), 일단(日壇·자금성 동쪽), 월단(月壇·자금성 서쪽)에서 거행토록 했다.  

 

 


난간에 서면 주변 풍경이 시야에 잡힌다.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크고 넓은 편이다. 인간과 하늘의 접속지점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도 하나같이 매우 크고 웅장하다. 숲도 한없이 넓은 건 물론이다. 저 모든 것들을 다 둘러보려면 다리품을 제대로 팔아야 할 것이다.

 


공원을 빠져나가는 길에 뒤돌아본 원구단, 가히 황제가 제사들 드리기에 충분한 풍모를 갖추고 있다. 원구단은 1911년 중화민국 정부가 금지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사가 지내져왔다. 490년간의 명·청 왕조시대에 22명의 황제들이 654차례에 걸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단다. 1914년 원세개(遠世凱·위안스카이)가 서구 열강의 침입에 맞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천황을 칭할 때도 이곳에서 천제를 거행했다.

 


원구단을 둘러본 후 남문을 빠져나오면 천단공원의 관람은 끝을 맺는다. 문밖으로 나서기 전, 공원의 전체적인 건축구조를 떠올려본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이념을 담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천고지저(天高地底)’라는 천지의 순리를 담아내기도 했다. 이런 구조를 통해서 하늘과 지구의 접속을 상징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