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씨버선길 1코스

 

여행일 : ‘20. 11. 7(토)

소재지 :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과 청송읍 일원

여행코스 : 장난끼공화국→월외탐방지원센터→달기폭포→너구마을→금은광이삼거리→용연폭포→주방계곡→대전사→상의탐방지원센터(소요시간 : 15.8㎞/ 3시간45분)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외씨버선길의 첫 번째 코스인 ‘주왕산.달기약수길’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을 따라 걷는 길이기도 하다. 청송 일대가 제주도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세계지질공원에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암과 폭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명산 주왕산의 비경을 걷고, 달기약수탕의 톡 쏘는 물맛도 볼 수 있으며, 운봉관 등 청송읍 일대의 역사적 발자취를 함께 할 수 있다. 외씨버선길의 15개 구간(13개 코스, 2개 연결구간) 가운데 가장 볼거리가 많은 구간이라 하겠다.

 

▼ 들머리는 청송 장난끼공화국 입구(청송읍 월외리 442-1)

당진영덕고속도로(상주-영덕) 청송 IC에서 내려와 31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면으로 1㎞쯤 내려오다 ‘청송1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에서 빠져나온다. 이어서 중앙로를 옮겨 청송읍내를 통과한 다음 ‘달기약수탕’ 방면으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달기약수탕이 나오고, 이어서 잠시 후에는 ‘청송 장난끼 공화국’의 입구인 ‘월외리 버스정류장’에 이른다. 이곳은 레포츠 마니아들에게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낙동정맥 트레일’과 ‘태행산 산악자전거(MTB) 코스’가 이곳에서 교차되기 때문이다. 거기다 외씨버선길까지 이곳을 통과하니 명실상부한 교통 요지가 아니겠는가.

▼ ‘외씨버선 길’은 호랑이 형상을 한 한반도에서 등뼈에 해당하는 영월·봉화·영양·청송을 잇는 총 길이 280㎞의 숲길이다. 북쪽인 영월부터 남쪽 청송까지 이어진 길의 모양새가 ‘외씨버선’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68)의 '승무'도 이름을 짓는데 일조했다. 외씨버선길이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의 ‘주실마을’을 지나는데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승무’에 ‘외씨보선’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외씨’는 ‘오이씨’의 준말이고 ‘보선’은 ‘버선’의 경북 방언이다. 오이씨처럼 갸름하고 맵시가 있는 버선이란 뜻이다. 지도를 보고 버선을 연상한 상상력이 놀랍고, 시에서 길 이름을 받은 감수성 또한 부럽다. 길도 이름처럼 맵시가 있다니 직접 걸으면서 느껴볼 일이다.

▼ ‘외씨버선길 1코스(주왕산·달기약수탕길)’의 시점은 원래 ‘주왕산국립공원 상의지구 탐방안내센터’이다. 주왕계곡을 거슬러 올라 주왕산의 주능선(금은광이삼거리, 해발 725m)을 넘은 다음, 월외지구 탐방안내세터와 달기약수를 거쳐 청송읍의 ‘소헌공원’에 이르는 18.5㎞ 길이의 코스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청송 장난끼공화국’에서 출발해 역방향으로 걸었다. 주왕산을 넘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18.5㎞라는 거리가 다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4㎞ 정도 되는 미답 구간은 다음 2코스에 덧붙이면 되니 이 또한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 버스에서 내리면 ‘완주 인증, 사진촬영 지점’임을 알리는 표지목이 설치되어 있다. ‘외씨버선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하겠다. 스탬프를 찍어가며 걷는 다른 ‘둘레길’들과는 달리, 이곳은 스탬프를 통합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지점에 설치해놓은 이런 표지목(매 코스 2개)을 배경삼아 인증사진을 찍은 다음, 객주(안내센터, 지자체마다 1개씩)에 들러 사진 대조 후 일괄적으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 구간 완주를 마치면 소정의 기념품이 지급된단다.

▼ ‘주왕산 월외지구 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380년이나 묵었다는 ‘월외리(月外里)’의 느티나무(보호수) 아래를 지나는데 오른편으로 ‘장난끼공화국’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들러보지는 못했다. 주왕산을 넘어야한다는 힘겨운 일정이 그럴만한 여유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트레킹이 시작되는 ‘월외마을’은 대둔산(905m)과 태행산(太行山, 933.1m)에 둘러싸인 산골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이다. ‘월외(月外)’란 ‘달의 바깥’. 즉 월명산(현재는 720m봉으로 더 익숙하다)의 밖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 ‘월외마을’에서도 가슴 아픈 농촌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공가(空家)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주인 떠난 빈 집을 따야 할 시기를 놓친 감들만이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 승용차도 교행(交行)이 어려울 정도로 비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10분 남짓 걷자 ‘월외 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주왕산국립공원에 설치된 네 곳의 탐방지원센터(상의지구, 절골지구, 갓바위지구) 가운데 하나로 너구마을과 금은광이삼거리를 거쳐 주왕산의 장군봉을 오를 때 이곳을 출발지로 삼는다. 이밖에 태행산을 따로 오를 때도 이곳이 출발지가 된다.

▼ 탐방지원센터 앞. 이곳이 ‘외씨버선길’의 1길(주왕산·달기약수탕길)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사뿐사뿐 빠져드는 4色 매력’이라는 부제를 덧대어 세워져있었다. 1길의 시점(주왕산국립공원)과 종점(소헌공원)을 연결시키는 코스가 그려진 지도에는 친절하게도 사진을 찍어두어야 할 완주인증 지점까지 표시했다. 또 하나. 외씨버선길에서 별도로 만든 ‘구호지점 표시목’도 눈길을 끌었다.

▼ 너구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수확을 끝내지 못한 고추밭이 두어 곳 보였다. 서리를 맞아 시들어버린 붉은 고추가 서러운데, 집사람의 얘기로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란다. 새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과수원도 보였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일손이 딸린다더니 그 여파가 아닐까 싶다.

▼ 그렇게 15분 조금 못되게 걸었을까 약수터가 나온다. 너구마을로 가는 도중 청송 사람들이 물을 떠간다는 일명 ‘산삼 썩은 약수’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시지 말라는 경고문과 함께 부적합 판정을 받은 ‘수질검사 성적서’가 붙어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친 이유이다. 아쉽지만 탈이 날지도 모르는데 어쩌겠는가.

▼ 고개를 들면 빈 가지 사이로 하늘이 드러난다. 첫서리가 내린지도 이미 오래니 초겨울의 삭막함까지도 이젠 눈에 익어갈 때다. 그런 풍경에 눈 맞추며 걷다보면 길 아래로 흘러가는 괘천(掛川)이 내다보인다. 태행산과 대둔산, 금은광이 등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여러 곳에서 합쳐지면서 흘러 내려 월막의 끝자락에서 용전천으로 유입된다.

▼ 늦가을 정취에 푹 빠져 걷고 있는데 길 아래 ‘괘천(掛川)’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눈에 띈다. 안내판은 이곳을 ‘노루용추 계곡’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노루용추’란 계곡의 초입에 있는 작은 폭포 아래에 형성된 폭호(瀑壺 : 계속적인 물의 낙하가 만들어놓은 폭포 아래의 물웅덩이)를 이르는 지명이라면서 말이다. 전망대로 내려서니 앙증맞은 폭포 하나가 거대한 암벽 사이에 들어앉았다. 그 아래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맑은 물웅덩이가 ‘노루용추’라는 얘기일 것이다. 노루용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 아늑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용이 살다 떠난 못을 어여쁜 노루가 슬그머니 샘터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 주왕산과 가까워질수록 응회암층은 점점 두꺼워진다. 응회암은 고온의 화산재가 쌓여 식으면서 만들어진다. 냉각으로 인해 수축되고 용접한 듯 단단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체적이 줄고 수직으로 갈라져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를 이룬다. 주상절리는 쉽게 풍화되지는 않지만 절리를 따라 무너져 내려 가파른 단애(斷崖)를 만든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다.

▼ 그 절정은 ‘청송8경’ 가운데 하나인 ‘달기폭포’다. 월외리의 지명을 따 ‘월외폭포’라고도 부르는데, 물줄기가 11m 높이에서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갈수기라선지 폭이 좁은데다 수량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폭포 아래의 용소(龍沼)는 제법 깊어 보인다. 용이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었다고도 전해지지만, 폭포 옆으로 무지개다리를 놓이면서 많이 얕아졌다고 한다. 참고로 달기폭포는 주왕산 응회암의 수직절리에 의한 절벽이 침식되어 형성된 폭포라고 한다. 아래에는 큼직한 암석들이 뒹굴고 있다. 언뜻언뜻 육각기둥 형상의 암괴들도 보이는데, 수직 절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란다.

▼ 길을 가다보면 작은 폭포와 소(沼), 담(潭)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너구동으로 이어지는 이 골짜기는 ‘월외계곡’. 월외마을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 골짜기를 태행산과 금은광이 등지에서 시작된 괘천(掛川)이 흘러가면서 수많은 폭포와 소, 담을 만들어놓는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이면 ‘너구마을’에 이른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열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다. 그러나 이 마을도 세월의 부침을 겪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때 50여 가구나 되던 마을이 다섯 가구로 줄었다가 최근에야 이주해온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참! ‘너구’란 지명은 4개의 산줄기와 4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명당이라 ‘네 귀퉁이가 만나는 땅’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니 혹시라도 ‘너구리’를 떠올리는 일이 없길 바란다.

▼ 너구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주왕산으로 들어가는 인원을 체크하는 계수기(計數器)가 ‘금은광이길 탐방로’라는 문패를 단 대문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외에도 이정표(금은광이삼거리 3.6㎞/ 월외탐방지원센터 3.4㎞)와 해발까지 적어 넣은 구조지점 표시목(주왕 01-22), ‘주왕산국립공원 안내도’ 등이 세워져 있었다.

▼ 탐방로는 이제 주왕산을 향해 산속으로 파고든다. 날머리인 ‘상의 탐방지원센터’를 가기 위해서는 주왕산의 주능선을 넘어야 한다. 그러니 도로를 따르던 탐방로가 갑자기 등산 모드로 바뀌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적응해야지 어쩌겠는가.

▼ 산속으로 들어섰는데도 자동차 바퀴자국이 선명한 임도가 당분간 계속된다. 거기다 경사까지도 완만하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저 주변에 펼쳐지는 단풍잔치를 맘껏 즐기면서 걷기만 하면 된다.

▼ 그렇게 걷기를 25분, 사람이 살았음직한 마을 터(이정표 : 금은광이삼거리 1.8㎞/ 월외탐방지원센터 5.2㎞)가 나오는가 싶더니 탐방로는 이내 오솔길로 변해버린다. 그리고는 ‘금은광이 삼거리’로 향하는 산 중턱의 오솔길을 따른다. 좁지만 길은 분명하고 옛사람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옛 사람들에게는 고난(苦難)한 삶의 수단이었을 이 길이, 오늘 나에게는 삶을 여유삼아 걷는 길이 된다. 그렇다면 내 후손들은 어떨까. 십중팔구는 나와 같은 여유로움으로 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 그런 여유로움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7분쯤 지나는 지점(이정표 : 금은광이삼거리 1.5㎞/ 월외탐방지원센터 5.5㎞)에 이르자 갑자기 가팔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가파르다. 아마 경사(傾斜)가 50~60도는 넉넉할 것 같다. 혹자는 이런 지독한 가파름을 일러 ‘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내겐 ‘코에서 흙냄새가 난다’는 표현이 더 익숙하다. 얼마나 경사가 심했으면 흙냄새가 코로 스며들 정도로 코가 땅에 닿게 허리를 굽혔겠는가?

▼ 지독한 가파름에 지쳐갈 즈음 한줄기 빛처럼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게 그냥 나무계단이 아니다. 지그재그로 ‘갈 지(之)’자를 쓰면서 위로 향하는데, 그 생김새가 예술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것이다.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포토죤으로 이만한 곳도 없겠다.

▼ 위에서 내려다본 나무계단이다. 400개도 넘는다는 이 계단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하긴 18분이나 되는 무지막지한 오르막길을 버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초주검이 되어서야 능선(이정표 : 금은광이삼거리 0.7㎞/ 월외탐방지원센터 6.3㎞)에 올라섰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산허리를 헤집으며 나있다. 그렇다고 수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낭떠러지에 가까운 산비탈이라서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비좁기 때문이다. 거기다 바닥에는 참나무류의 낙엽까지 수북하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할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구간이다.

▼ 조심조심 10분 조금 못되게 걸으니 드디어 ‘금은광이 삼거리’. 해발 725m의 고갯마루로 길 찾기에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지명은 비록 ‘금은광이 삼거리’이지만 왼쪽에 있는 ‘금은광이봉(812m)’보다는 ‘장군봉(686.8m)’과 백련암을 거쳐 상의주차장으로 연결되는 오른쪽 능선이 주등산로이기 때문이다. 이정표(용연폭포 1.6㎞/ 장군봉 3.0㎞/ 월외탐방지원센터 7.0㎞)와 함께 ‘등산로 안내도’를 세워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 이곳의 이정표도 ‘외씨버선길’의 완주 인증 사진촬영 표지목을 겸하고 있었다. 하나 더. ‘금은광이’란 지명은 옛날 금을 캐던 광산이 이 부근에 있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 이젠 산을 내려갈 차례이다. 하지만 길의 형편은 썩 좋지 않다. 급경사인데다 바닥에 잔자갈이 많아 미끄러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올여름 태풍 때 쓰러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길까지 막고 있었다.

▼ 산길이 험하다는 건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나보다.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도 ‘위험등급 구간’임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4개 등급(관심·주의·위험·매우 위험)으로 나뉘는 취약구간 가운데 두 번째이나 주왕산에서는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꼽히니 안전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탐방로는 계곡을 따라 나있다. 그러다보니 심심찮게 개울을 가로지른다. 장마철이면 저 개울은 물이 불어 잠길 것이고, 탐방로는 막힐 게 뻔하다. ‘외씨버선길’이란 명품 트레일(trail)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 하겠다.

▼ 금은광이삼거리를 출발한지 40분 만에 ‘가메봉 갈림길’(이정표 : 대전사→ 3.5㎞/ 내원마을 터← 0.7㎞/ 금은광이 삼거리↓ 1.8㎞)에 내려선다. 왼편에는 지금은 이주해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한때 ‘전기 없는 마을’로 이름났던 내원동이 있다. ‘전기 없는 하룻밤’의 낭만을 위해 등산객이며 여행자들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참! 8년 전인가 두 번째로 이곳을 찾아왔을 때 적었던 글이 보이기에 함께 올려본다. <'내원마을을 아시나요?‘ 다들 생경스러운 표정이지만 ’그럼 전기 없는 마을은 들어 보셨나요?‘ 그때서야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요즘 세상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내원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희귀성 때문인지 등산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다들 한번쯤은 들러보고 싶은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말았다. 도심의 번잡함에 지친 사람들이 동경하던 그런 쉼터를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언젠가 난 이곳을 찾았었고, 난 쉼터로 변한 분교(分校)에 들어가 난쟁이 의자에 걸터앉아, 방아취에 동동주 한잔 들이키며 인생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 앞에 앉아 고개를 끄덕여주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 탐방로는 이제 평지나 다름없다. 평탄한 흙길을 따라 100m쯤 내려가자 용연폭포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놓여있다.

▼ 계곡으로 내려서자 저만큼에 나무테크로 만든 예쁘장한 전망대가 보이고, 전망대에 올라서면 ‘용연폭포(龍淵瀑布, 또는 제3폭포)’의 웅장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폭포 중간의 물이 돈 흔적과 절벽 안으로 깎인 3개의 구멍도 바라보인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물에 깎이었으면 저런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이 경이로까지 발전하는 순간이다. 참! 용연폭포는 ‘쌍용추폭포’로 불리기도 한단다. 마침 갈수기라서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었지만 두 줄기로 떨어지는 폭포의 생김새 때문에 얻게 된 이름이란다. 또 하나. 이곳은 오랫동안 ‘제3폭포’라는 단순한 이름으로만 불려왔었다. 그러다가 옛 이름 찾아주기에 나선 청송군청이 주왕산지(周王山志) 등 문헌을 참고해서 제1폭포는 ‘용추(龍湫)’, 그리고 제2, 제3폭포에는 ‘절구’와 ‘용연(龍淵)’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 주왕산의 폭포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용연폭포는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관광객들을 배려한 전망대도 아래와 위, 2개를 설치해 놓았다.

▼ 하지만 아래 전망대에서는 폭포의 전모가 다 보이지 않는다. 윗 폭포는 가려지고 아래쪽의 와폭(臥瀑)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도 물의 양이 적어 볼품이 없다. 그저 폭포 아래 옥빛 물을 찰랑찰랑 담고 있는 널찍한 소(沼)의 풍광만이 일품의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준다.

▼ 탐방로로 되돌아와 ‘후리메기 삼거리’로 가면 저만큼에 다리 하나가 보인다. 절구폭포(또는 제2폭포)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편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이정표 : 절구폭포 0.2㎞/ 용추폭포 0.8km/ 용연폭포 0.4km).

▼ 동굴을 지나듯이 좁은 길을 200m가량 들어가니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계곡 안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수려한 모습의 제2폭포가 선을 보이는 것이다. 폭포의 앞에 숲을 이루고 있는 돌탑들도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하다. 그 하나하나에는 누군가의 염원이 돌맹이 숫자만큼이나 쌓였을 게고, 그 바람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 절구폭포는 앞쪽만 긴 절벽이고 나머지는 모두 숲인데, 절벽 위에서 맑은 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중간 호박처럼 파인 곳에 일단 쉬었다가 다시 떨어진다. 그 모양새가 유명한 조각가의 창작품 같이 오묘하며 여성스러운 미를 지녔다고 해서 ‘절구폭포’라 했단다. 물에 손을 담가본다. 서늘하다. 망설임 없이 주저앉아 세수부터 하고 본다.

▼ 절구폭포를 빠져나오자 단풍이 붉게 물든 풍경이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다른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아니 단풍나무의 붉음도 마지막 열정을 불사른데 대한 보상이요 훈장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다른 나무들처럼 발아래에 깔리면서 비명을 질러댈 것이다. 바스락~ 바스락~

▼ 그렇게 얼마간 걸어 내려오면 암벽이 문설주처럼 서있는 협곡이 나타난다. 사이가 좁아지는 기암절벽 틈으로 들어서면 우렁찬 물소리가 들려온다. 용추폭포(龍湫瀑布, 또는 제1폭포)에 다다른 것이다.

▼ 암석의 기반이 세로로 솟아오르며 만들어낸 빈 공간에, 오랜 세월 동안 물이 흐른 흔적들이 보인다. 흐르던 물이 어디를 후려쳤고, 어디는 감싸고돌았는지 잘 다듬어진 절벽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 폭포주변의 기암절벽들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물주가 아니고서는 결코 저런 작품들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래로 난 탐방로는 많은 탐방객들로 혼잡스럽다. 그만큼 이곳의 경치가 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지만 주방계곡의 풍광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만큼 계곡이 웅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니까...

▼ 용추폭포는 선녀들의 목욕탕처럼 생긴 선녀탕과 아홉 마리의 용(龍)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구룡소를 돌아 떨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기에는 상당히 많이 작아 보이지만, 어떠랴 그럴 것이라고 믿어버리면 편한 것을... 계곡을 흐르는 물은 티 없이 맑고 투명하다. 누가 파란 물감을 풀어놓았을까? 진하게 파랗다.

▼ 용추폭포를 빠져나오면 건너편에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가 보인다.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벽은 계곡방향으로 수직의 단애(斷崖)를 만들어 내고 있다. 청학과 백학이 다정하게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이다. 옛날 저 바위 위에 있는 소나무에 청학과 백학이 쌍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각없는 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아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청학이 며칠을 두고 울다가 이곳을 떠나갔다 하여 새집 소(巢)자를 붙여 학소대(鶴巢臺)라고 부른다고 한다.

▼ 생김새가 마치 떡을 찌는 시루같이 생겼다 해서 ‘시루봉’이다. 어떤 이는 거인의 얼굴을 닮았다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느 겨울철에 한 도사가 이 바위 위에서 공부하는데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루봉에 안개가 끼면 마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단다.

▼ 길가 곳곳에는 작은 쉼터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계곡을 침범해가며 공간을 만들고 벤치를 놓은 게 여간 소담스럽지가 않다. 책장을 펼쳐놓은 것 같은 안내판도 눈길을 끈다. 소중한 정보이니 책처럼 정성들여 읽으라는 모양이다. 이렇듯 모든 편의시설은 탐방객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 조금 더 내려오면 이번엔 ‘급수대(汲水臺)’이다. 김주원(金周元)이 절벽 꼭대기에 거주하면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마셨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강릉 김씨’의 시조로 그의 아들인 김헌창이 웅천주(현재의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신라의 9주 가운데 5개 주의 호응을 얻어내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 구암(龜巖) 각자(刻字)도 카메라에 담아봤다. 거북이를 닮은 바위에 새겨진 ‘주방동천 문림천석(周房洞天 文林泉石)’이란 글씨로 ‘빼어난 산수의 주왕산과 물과 돌은 문림랑의 것’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여기서 문림은 고려시대 ‘문림랑위위시승’ 벼슬을 지낸 ‘청송 심씨’의 시조 심홍부. 이곳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청송 심씨’의 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석이라고 보면 되겠다.

▼ 주방계곡을 빠져나오는 길. 쓰러질 듯 덮칠 듯 치솟은 기암절벽과 괴석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한반도의 지도를 호랑이 모양으로 놓고 보면 주왕산은 자궁(子宮)에 해당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온 폭포들과 주변의 협곡은 여성의 깊은 속살이었다는 얘기일 것이고, 계곡을 벗어나고 있는 난,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난 월외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면서 흘린 땀과 함께 헛된 마음을 비웠고, 산길을 거닐면서 바라본 하늘에서 찾아낸 새로운 메시지로, 비워놓았던 공간을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내 삶이, 잎새(잎사귀의 方言)에 이는 바람에도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되기를 빌면서 어머니의 자궁을 빠져나온다.

▼ 용추폭포를 통과하고 30분 만에 ‘대전사(大典寺)’에 도착했다. 대전사는 별로 크지 않은 사찰이다. 그래서 전각(殿閣)들의 숫자도 적을뿐더러 그 규모도 생각보다 왜소하다. 그러나 그 왜소함 때문에 대전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기암과 대전사가 절묘한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irony)가 아닐까? 참고로 이 절은 신라 문무왕 때(672년) 의상(義湘)이 세웠다고 전하나, 고려 태조 때 눌옹(訥翁)이 창건했다는 주장도 있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지금의 전각들은 조선 중기에 실화로 전소된 뒤 중창된 건물들이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절의 이름은 주왕의 설화에서 유래한다. 중국 당나라의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크게 패한 후, 신라로 도망 와서 이곳에 숨었단다. 결국 신라에 의해 토벌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산의 이름이 되었고, 주왕(周王)의 아들인 대전도군(大典道君)은 사찰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 절간에는 ‘소원성취 탑’이 세워져 있었다. 탑의 둘레에는 소원을 담은 나무판들이 흡사 무당집 처마처럼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그런데 이게 영 개운치가 않으니 문제다. 일본에서 보던 에마(繪馬). 즉 일본인들이 신사나 절에 기원하거나, 그 기원이 이루어져 이에 대한 사례를 할 때 봉납하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나무판자와 너무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살며시 아무도 보지 않은 가운데 돌맹이 하나 던져보려다 그만두어버린 이유이다.

▼ 산행날머리는 대전사 앞 주차장(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295)

대전사에서 상의지구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난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인근 아낙들이 자리를 잡고 좌판 위에 청송의 특산품인 사과와 대추 등을 쌓아놓고 팔고 있다. 물론 길가에 늘어선 식당의 아주머니들도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길가에서 빈대떡을 부지런히 뒤집고 있다. ‘맛있으니 잠깐 쉬었다가세요’ 호객하는 아주머니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가다보면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오늘 트레킹은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핸드폰에 찍힌 거리는 13.48㎞. 산 하나를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참고로 상의마을의 상의는 원래 '삼의'(三宜)로 주왕이 마 장군과 세 번 싸우고 나서 모두 이겼다는 의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