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일본 간사이 지역 여행

 

여행일 : ‘17. 3. 15()-17()

여행지 : 오사카(오사카 성, 도톰보리),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천룡사, 노노미야신사), 나라(동대사)

 

일 정 :

 3.15() : 오사카(도톰보리)

○ 3.16() : 교토(청수사, 산넨자카), 아라시야마(대나무숲, 노노미야신사)

○ 3.17() : 오사카(오사카 성), 나라(동대사)

 

여행 셋째 날 : 오사카 성(大坂城)

 

 

 

특징 : 우리나라를 가장 괴롭힌 일본인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떠올릴 것이다. 농민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하인이었던 히데요시는 추운 겨울 주군(主君)의 신을 가슴에 품을 정도의 충성심으로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고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1582년 노부나가가 죽자 정권을 잡았고 이듬해 11월에는 오사카로 본거지를 이전한다. 이때부터 오사카 성 축성(築城)이 이루어졌다. 1년 반에 걸친 대규모 공사로 완성된 오사카 성은 성벽 앞으로 강물이 흐르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졌으며, 규모 또한 지금의 요도가와 강까지 이를 정도로 큰 성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98년 병사한다. 히데요시의 사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도요토미 가문과 추종 세력을 완전히 꺾고자 1614년 오사카 성을 공격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패한다. 하지만 강화조약을 이용해 성벽 앞의 해자(垓字)를 메운 후 성을 다시 공략해 1615년 오사카 성을 점령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항복을 받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오사카 성은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 의해 1629년 재건되었다. 성의 중심 건물인 천수각(天守閣)은 당초의 규모보다 더 크게 지어졌으나 1665년 낙뢰(落雷)로 인해 다시 불타고 만다. 현재의 건물은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도요토미의 것을 본떠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나고야 성(名古屋城) 및 구마모토 성(熊本城)과 함께 일본의 3대 성 가운데 하나이다.

 

 

 오사카는 전통문화와 도시문화가 공존하는 일본 제2의 도시로, 눈이 즐거운 역사 유적지 뿐 아니라 다양한 식도락까지 즐길 수 있어 여행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오사카는 교토, 나라, 고베 등 일본의 전통을 간직한 도시와도 근접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원하는 관광객들이 여행하기에도 적합하다. 옛날에도 오사카는 다섯 키나이(畿內 : 쿄토 근방의 야마시로, 야마토, 카와치, 이즈미, 셋츠 지방의 총칭)의 중심지였다. 또한 교토를 가까이 두었는가 하면 서쪽으로 세토나이카이와도 접한 수상 교통의 요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오사카성은 윤곽식 평성으로, 혼마루(本丸/本城)를 중심에 두고 외성을 동심원으로 배치했다. 그 사이에 내측 해자와 외측 해자를 두었다. 요도가와 강의 본류와 접한 대지의 북단에 축성한 오사카 성의 방위상의 약점은 대지의 높이가 같은 남쪽이다. 그래서 서에서 남으로 해자를 만들어 성을 감쌌고, 다마쓰쿠리 문의 남쪽에 반월형의 외성 사나다마루를 축성했다.

 

 

 오사카 국제평화센터 근처에 위치한 버스전용 주차장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는데도 성곽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만큼 성의 범위가 넓다는 증거일 것이다. ! 오사카성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JR 오사카 역에서 순환선 열차를 타고 오사카성공원역에서 내려 걸어오면 된다. 지하철 다니마치욘쵸메역. 텐만바시역, 모리노미야역, 게이한 전철 텐만바시역 등에서도 가깝다. 입장료는 어른이 600엔이고 중학생 이하는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

 

 

 굵직한 벚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자 오사카 성의 성벽(城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우리가 늘 보아오던 동양의 성들보다는 서양의 성곽을 닮은 것 같다. 저렇게 큰 해자(垓字),  소토보리(外堀)’가 만들어져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해자 너머에 보이는 건물은 이치반 성루가 아닐까 싶다. ‘1번 성루라는 뜻인데 오사카성의 동쪽 출입구 남쪽에 있다. 오사카성에는 이밖에도 로쿠반 망루(六番櫓)’ 다몬 망루’. ‘센간 망루’, ‘이누이 망루 등이 남아있다고 한다. 참고로 망루는 해자 안쪽의 성벽에 만들어 놓은 방어용 시설이다. 평소에는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쟁시에는 총과 활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1차 방어선이 된다.

 

 

 소토보리는 오사카 성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거대한 해자(外堀, 소토보리).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인공호수로 깊이가 6m, 폭은 75m에 이른다. 또한 그 둘레를 에워싼 급경사의 성벽은 거대한 바위를 24~32m 높이까지 가파르게 쌓아올려 적이 기어오르는 것을 막았으며 웬만한 대포 공격에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하다. 이렇듯 완벽한 방어체제를 갖춘 덕에 오사카 성은 완공과 더불어 난공불락의 요새로 통했으며, 오사카 겨울전투(1614)를 감행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역시 이 해자를 넘지 못해 엄청난 고생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소토보리 주변의 가파른 성벽을 따라 대공포 진지가 구축돼 연합군의 주요 공습 목표가 되기도 했단다.

 

 

 해자를 건너지 않은 탓인지 천수각이 아직도 아스라하다. 오사카성으로 가는 길 주변은 매화나무와 벚나무 등이 들어찬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음악 홀이나 운동시설도 많아 시민들에게는 친숙한 공원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벚꽃나무를 가로수로 심어놓았다. 이 일대에 무려 4500그루나 심어져 있단다. 하지만 도로변의 화단에는 요런 소나무들이 주인공이다. 품종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토종 소나무보다 훨씬 못 생겼다.

 

 

 차단용 난간 위에 참새 몇 마리가 올라앉아 있다.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밋밋하게 그냥 놔두는 것 보다는 훨씬 정취가 있어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렌뇨상인(蓮如上人)의 가사(袈裟)를 걸었었다는 나무가 나온다.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지(本願寺)’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1496년 렌뇨상인은 지금의 오사카성 부근에다 방사(坊舍)를 짓는다. 이후 호사카(이시야마) 혼간지라는 큰 절이 되어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나, 1580년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굴복하여 절은 주변 시가지와 함께 불탔다고 한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그 절터에다 오사카성을 쌓았다.

 

 

 오테몬(大手門)’ 1620년에 세워진 오사카 성의 정문으로 높이는 6m. 1783년 벼락에 맞아 원래의 문이 불타버린 뒤 1848년과 1967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다. 문 앞에 서자 엄청나게 두꺼운 철문이 눈길을 끈다. 웬만한 대포로는 꿈쩍도 않을 것 같다. 거기다 철문의 위, 수직으로 세워진 나무 창살 사이로 화살을 쏘며 적의 침입을 막았다니 성벽에 못지않은 방어막이라고 보면 되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스타일의 문을 코라이몬’,  고려문(高麗門)’이라고 부른다는 것.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란다.

 

 

 외호(外堀, 소토보리)를 끼고 얼마간 걷자 다소 작은 해자가 나온다. 성의 안쪽 해자(内堀, 우치보리)’로 성의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보면 되겠다. 오사카성은 이렇듯 2중의 방어막을 갖추고 있었다. 그나저나 해자와 맞닿은 성벽이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모서리를 직각으로 쌓지 않고 올라갈수록 줄어들게 성벽을 쌓음으로써 성벽은 견고해졌고, 그래서 어느 나라의 성벽보다도 높게 지어졌다.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 무수한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워진 이 성벽은 400년이 넘는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단다.

 

 

 안쪽의 다른 해자에는 물이 없었다. 이곳 오사카 성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쌓았다. 깊은 해자와 높은 석벽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후 마주한 깊은 해자는 물이 마르고 대신 온갖 잡풀이 자라고 있었다. 권력도, 그 권력을 지키던 성채도 길고 긴 시간 앞에 아무 것도 아님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길은 사쿠라몬(櫻門, 벚꽃문)’을 통해 성의 중심인 천수각(天守閣, 덴슈가쿠)’으로 연결된다. 오사카성 관광의 주요 통로인 이 문은 오사카 성 재건 공사가 한창이던 1626년에 세워졌다. 당시 이 근처에 사쿠라. 즉 벚나무가 많아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868년 화재로 불타 버린 것을 188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19세기 후반에 소실된 담벼락도 1969년 현재와 같은 형태로 재건시켰다.

 

 

 사쿠라몬의 양 옆에는 직사각형의 큰 돌이 하나씩 박혀있다. 오른쪽 돌은 용석(龍石)’, 그리고 왼쪽 돌을 호석(虎石)’이라 부르는데. 비가 내리면 오른쪽에 용 그리고 왼쪽에는 호랑이의 형상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에도시대(조선 후기쯤)에 일어난 일이니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말이다.

 

 

 사쿠라몬(桜門)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 킨메이스이 우물(金明水 井亭)’이라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천수각이 세워지기 직전에 히데요시를 암살하려고, 이곳에 독을 풀었는데, 히데요시가 황금을 넣어서 우물을 해독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우물이다. 다른 한편으론 맛있는 물을 솟게 하려고 금을 넣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소원을 비는 동전들이 소원의 해독제처럼 우물 속으로 던져진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정보였다. 킨메이스이 우물에는 지붕이 씌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지붕은 1626년에 만들어졌는데 오사카성 천수각의 화재에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사쿠라몬 근처에는 소석(蛸石)이라 부르는 거대한 바윗돌도 있었다. 성문을 통과한 적을 막기 위한 내부 성벽의 일부분인데, 130톤이나 되는 거석으로 오사카성 안에서 가장 큰 돌이다. 거대한 이 바윗돌은 오사카성을 재건할 때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도쿠가와(德川) 막부에게 바친 돌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다이묘들이 가져다 바친 바윗돌의 크기가 클수록 막부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것으로 여겨졌단다.

 

 

 안내판은 櫻門枡形 巨石(Huge stones at Sakuramon-Masugata Square)’으로 적고 있었다. 사쿠라몬-마스가타 광장에 있는 거석이란 뜻일 것이다. 맞다. 이 거석은 오사카 성 제일의 크기를 자랑하며 면적 60에 무게가 130톤이나 나간다. 바로 오른쪽에는 세 번째로 크다는 면적 54, 무게 120톤의 거석도 있다.

 

 

 타코이시(蛸石)’ 타코는 일본어로 문어()를 뜻한다. 이시가키(石築)를 이루는 이 거석의 왼쪽에 문어 모양의 흐릿한 얼룩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바윗돌의 내력이 조금 어이없기는 하지만 그 크기만큼은 정말 엄청나게 크다. 17세기 당시 저렇게 큰 거석을 어떻게 옮겨왔을까? 일본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이누시마(犬島)로부터 성 안까지 옮겼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저렇게 큰 거석들을 오사카성까지 옮기는 것이 오사카성을 지을 당시 가장 난공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조금 더 걷자 금박 기와와 금장식을 한 망루형의 천수각(天守閣, 덴슈가쿠)이 눈에 들어온다. ‘오사카성의 꽃으로 불리며 수많은 일본 영화와 소설 속에서 각색되는 건축물이다. 천수각의 화려함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의 권력과 명예욕, 야망의 크기만큼 웅장하게 지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1615년 에도막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넘어뜨리기 위해 벌인 전쟁에 불탔다. 화마도 이 꽃을 탐냈던지 17세기에는 낙뢰로 전체가 소실되기도 했다. 1931년 일부가 복원되었지만 천수각의 기구한 운명은 근대까지 계속된다. 2차 세계대전 때 성안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려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후 20세기 들어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8층 전망대까지 갖춘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의 형상은 세월보다 역사의 굴곡을 따랐나 보다.

 

 

 천수각(天守閣)이란 일본의 전통적인 성 건축물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가리킨다. 일본어로는 덴슈(てんしゅ/천수) 또는 덴슈카쿠(てんしゅか/천수각)라고 부른다. 사실 천수각은 성의 일부분에 속하는 건물이지만, 얼굴마담이자 상징격인 건물로 취급된다. 성에서 제일 높게 솟은 구조물이다 보니 다이묘가 기거하는 화려한 시설로 상상하는 경우가 많으나, 기본적으로 천수각은 센고쿠 시대 이후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생겨난 군사용 시설이다. 수성전 때 지휘관+수뇌부가 주둔하면서 시야를 넓게 보고 전황을 파악, 지휘하기 용이하게 성의 중앙부에 높게 쌓아올렸다. 그러다보니 천수각의 내부는 높게 짓기 위해 많은 기둥이 필요했고, 때문에 어둡고, 좁고, 오르내리기 불편했다. 그래서 다이묘들의 실제 생활&업무 공간은 천수각 근처에 지어진 주택인 혼마루고덴(本丸御殿, 혼마루 어전)이었다고 한다.

 

 

 천수각 앞 광장의 오른편에 있는 미라이자’. 즉 옛() ‘오사카 시립박물관은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幕末, 維新, 150 등의 문구가 적힌 걸로 보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50주년을 기념하는 무슨 행사라도 열리는 모양이다. 덕분에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가림막 뒤의 구 오사카 시립박물관은 유럽식 건물이다. 텐슈카쿠를 재건한 1931년에 함께 지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제4사단 사령부. 전후에는 오사카 경시청(경찰청). 1960~2001년에는 오사카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됐다. 2001년 시립박물관이 지금의 오사카역사박물관으로 이전하면서 복합 상업시설(레스토랑+카페+기념품 숍) 미라이자로 바뀌었다. 건물의 쓰임은 역사가 결정한다고 보면 되겠다.

 

 

 걸음을 옮길수록 천수각이 점점 눈에 꽉 차게 다가온다. 높게 쌓은 석축을 기단 삼고, 그 위에 다층으로 전각을 얹은 모양새가 날렵하다. 이렇듯 지붕을 중첩하여 쌓은 방식은 조선시대 양식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퍽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8층으로 지어진 천수각이 층고(層高)가 높은 5층 건축물로 보이는가 하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기와지붕과 용마루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모두 뻗어나가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띄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마주한 천수각의 거대한 기단. 네 귀퉁이에 자리 잡은 돌들은 웬만한 사람의 키쯤은 훌쩍 넘겨 버린다. 이 거대한 것들을 정갈하게 자르고 끼워 맞추어 그 위에 층층이 성채를 쌓아 올린 것.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지. 주군에 대한 존경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일본의 성에서 천수각이 건립된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전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체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거처로 삼을 때 건립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수각은 망루와 비슷한 건물로 외관은 2-5층으로 보이며 혼마루(本丸, 성의 중심 구역)에 건립된 경우가 많이 있다. 천수각 밑은 천수대(天守台)라는 석벽이 받치고 있으며, 천수의 크기에 따라 소천수, 중천수, 대천수 등으로 불린다.

 

 

 천수각 지붕의 황금빛으로 만든 장식이 눈길을 끈다. 용마루 위에 올려져있는 이 장식물은 목조건물의 화재예방을 위한 주술적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샤치가와라(鯱瓦, 호와)’. 몸통과 꼬리는 물고기이고 머리가 호랑이인 이 동물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물을 불러온다는 의미에서 매 층마다 설치했는데, 용마루 양 끝에 배치한 암수 가운데 남쪽에 올리어져 있는 것이 수컷이라고 한다.

 

 

 샤치가와라(鯱瓦, 호와)’의 접사 사진은 다른 분의 것을 빌려왔다. 새로 산 카메라의 조작이 서툴러 이밖에도 여러 장을 빌려다 썼다.

 

 

 오사카성의 핵심 건물인 천수각은 한마디로 왕조사와 전쟁사 박물관이다. 오사카성의 첫 주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기 때문일까? 왕조사는 주로 도요토미 가문에 할애되고 있다. 오사카 여름 전투도 병풍, 역사자료 등을 1층부터 7층까지의 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또한 8층 전망대에 오르면 오사카 시내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3층과 4층은 촬영 금지 구역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전망대를 먼저 보고 걸어 내려오면서 각층에 전시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과 오사카성에서 있었던 전투를 관람하는 게 일반적인 관람 동선(動線)이다.

 

 

 오사카성의 상징인 천수각은 오사카 시장인 세키 하지메의 건의에 의해 1931년 다시 지어졌다. 1930년대 이후 각지에 건설된 복원천수(復元天守, 센고쿠시대 이후 지어진 성 내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 양식의 복원) 1호였다. 외관은 옛 그림을 토대로 새롭게 재탄생되었다고 한다. 오사카성의 천수는 도요토미 가문의 것과 도쿠가와 가문의 것이 서로 달랐다고 한다. 복원된 천수는 두 가문의 것을 혼합시켜 1층부터 4층까지는 도쿠가와 풍인 백색 회벽으로 처리했고, 5층에서는 도요토미 풍으로 흑색에 금박으로 호랑이와 두루미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고, 도요토미 가문의 형식으로 전부 통일해야 된다는 주장도 있었단다. 1997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천수각의 뒤쪽 공터(刻印石 廣場)에는 커다란 돌들이 가득했다. 지방 다이묘(영지를 가진 무사의 우두머리)들의 가문을 새긴 돌들로,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행했음을 증명한다.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무너진 성곽의 돌들은, 다른 한편으론 영화로움을 품고 있는 쇠락의 잔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죽고 사라졌는데 그들이 만든 것들은 사라지지 못하고 남았다. ! 오사카성의 이시가키(돌담), 돌덩이에는 도쿠가와(德川) 가문에 충성한 막부시대의 영주들 흔적(가문의 표식)이 있었다. 인간은 짧은 생에 대한 기록을 돌에 새긴다. 사라진 과거에 대한 기록을 몇 글자로 품고 있는 돌들이다.

 

 

 천수각의 뒤에도 해자(垓子)가 파여 있었다. 오사카성의 최대 특징은 거대한 해자와 성벽이다. 성벽의 높이가 15미터에 이르는가 하면, 도랑은 폭이 30미터에 달할 정도로거대하다. 특히 성을 지키기 위해 성 외곽으로 둘러 판 해자는 당시 성을 쌓았던 사람들이 적에게서 느꼈던 공포의 크기만큼이나 깊고 넓게 파였다. 그 안에 담긴 수량만 해도 엄청나게 많아서 마치 거대한 강줄기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니 현대 무기가 발명되기 전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이 오사카성은 함락하기 어려운 요새 중의 요새였을 게 분명하다. 그런 오사카성을 보고 있자니 이 성을 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권력욕이 새삼 느껴진다.

 

 

 공원의 녹색이 펼쳐진 끄트머리에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오사카 비즈니스 파크. 남아있는 늙은 유적이 외려 어색할 정도. 반짝이는 유리와 탄탄한 스틸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과 그 사이사이 오래된 건물들이 다양한 건물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늙은 건물에선 시간이 멈춰있다.

 

 

 천수각의 앞마당에는 삼백 살로 추정된다는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오사카성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라고 하는데, 오사카성 내부에는 이런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명연합군에 포위된 채로 울산성에서 농성하였으나 식수와 식량 부족으로 병사 대다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갈증과 아사로 죽었던 것을 교훈 삼았기 때문이란다. 당시는 은행나무 열매가 식량이 되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고성(古城)은 그 자체로 위엄 있는 풍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까마귀 등 성탑을 맴도는 새들이다. 고성과 잘 어울리면서 한 폭의 수묵화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일본 고유의 정원 양식으로 조성된 일본정원(日本庭園/ 니혼테이엔)’도 눈에 띄었다. 신선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섬세한 양식이 특징이라는데 내 눈에는 그저 얄밉도록 깔끔하게 꾸며 놓았다는 느낌이 전부였다. 맞다. 누군가는 일본정원을 바라봄의 대상이라고 했다. 나뭇가지를 머리 손질하듯 오밀조밀 예쁘게 다듬는 등 정원 안의 모든 것을 눈에 담기 좋게 가공한다는 것이다.

 

 

 천수각 마당은 전형적인 공원이다. 지금은 이전하여 폐쇄된 옛 오사카 역사박물관 건물이 있고, 기념품가게와 음식점은 물론이고, ‘푸드 트럭도 대여섯 대나 늘어서 있었다.

 

 

 천수각의 앞. 정원에 있는 타임캡슐은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볼거리이다. 1970년에 개최된 오사카 엑스포를 기념해 제작한 것으로, 안에는 당시의 문화를 상징하는 2,098점의 물건이 들어있으며 지하 15m에 두 개의 타임캡슐을 매설했다. 하나는 지난 2000 3 15일 개봉했고 나머지 하나는 5,000년 뒤인 6970년에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 날이 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덴슈가쿠 정문 왼쪽에 놓여있는 커다란 바위 두 개는 아쉬움을 가진 돌이란 의미의 잔넨세키(残念石)’로 불린다. 이 돌들은 원래 오사카성 공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60km 정도 떨어진 쇼도시마에서 채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용되지 못한 채 400여 년 간 채석장에 방치돼 있었단다. 1908년 그 한을 풀고자 쇼도시마의 청년들이 옛 방식대로 돌을 옮겨다 이곳에 전시해 놓았다.

 

 

 킨조(金藏)’ 1626년에 지은 창고 건물이다. ‘금 창고를 뜻하는 킨조란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과거에는 금화·은화 등의 재물을 보관하는 금고 역할을 했다. 내부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화재와 도난 방지를 위해 바닥에는 두꺼운 돌을 깔고 입구에는 두 개의 문과 한 개의 강철 문을 설치했다. 건물은 작아도 돈을 탐내는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제반 장치를 모두 갖춘 셈이다.

 

 

 오사카성은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와 관련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갇혀있던 위수형무소(육군형무소)’가 바로 오사카성의 이치반 야구라(一番櫓)’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외호와 내호 사이)에는 현재 반전(反戰) 작가인 쓰루 아카라(鶴彬,1909~1938)’를 기리는 비석(句碑)이 세워져 있다.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윤봉길 의사와 같은 시기에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한 인물이다. 군에 입대한 쓰루 아키라 1930 7월 일본 공산청년연맹 기관지를 소지한 죄(가나자와 제7연대 적화 사건)로 군법회의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위수형무소' 1 8개월간 수감된다. 반면에 윤봉길 의사는 '위수형무소'에 수감(1932.11.20-12.18)되었다가 '가나자와'로 이송되어 다음 날(12.19) 미쓰코우지산(三小牛山)에 위치한 육군 제9사단의 연병장(, 육상 자위대 미쓰코우지산 연습장)에서 오전 7 27분에 총살당한다. 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같은 시기에 수감생활을 한 것이다. 이왕에 오사카성까지 왔으니 잠시 시간을 내어 윤봉길 의사를 추도해 보면 어떨까 싶다. 쓰루 아키라와 함께 말이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빛을 품어준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새벽이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수각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신의 세상과 인간 세상의 경계를 나타낸다는 도리이(鳥居, torii)’가 보이기에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이 신사(神社)의 이름은 호코쿠(豊國).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함께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곳이다. 일본의 107대 일왕인 고요제이 일왕(後陽成天皇)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神明)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豊國 神社)‘라고 불리게 됐다. 이 신사는 한국 사람이라면 편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을 신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기억하고 싶은 역사도 있지만 기억하기 싫은 역사도 있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닐까 싶다. 이곳 오사카성은 우리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일부분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쇠퇴의 길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외면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선조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똑 같이 되풀이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본전 앞에는 도리이(鳥居) 하나가 더 세워져 있다. 신의 세상과 인간 세상의 경계를 나타내는 게 도리이라는 걸 생각하니 두 도리이 사이의 공간이 가지는 의미가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다른 이들이 보았다는 도요토미 가문의 노란색 오동나무 문장(紋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철거한 모양이다. 오동나무 문장은 일본 돈 ‘500짜리에도 박혀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일왕이 왕실에서 신성시하던 오동나무 문장을 도요토미 가문에 내렸고, 근대 일본의 메이지 정부 이후 일본 정부에서도 사용하게 된 문장이다. 참고로 도리이는 불경한 곳(일반적인 세계)과 신성한 곳(신사)을 구분 짓는 경계에 세우는데, 일본에서는 신의 사자인 새가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 해서 (새 조/토리)+(살 거/)’라 부른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 한가운데에 동상 하나가 세워져있다. 오사카성을 지은 사람이자, 우리에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낙인찍혀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고 한다. 1537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하인이었다. 하지만 추운 겨울 주군(主君)의 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을 정도로 충성심을 보여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고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노부나가 혼노지의 변(本能寺)’으로 살해당하자 그를 대신해 전국통일 사업을 완성한다. 이 과정에서 받은 성씨가 도요토미(豊臣)’이다. 당시 일본은 왕족과 귀족, 무사들만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하니 엄청난 신분상승이라 하겠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에게 섬나라 일본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명나라’, ‘대륙진출을 원하니 조건이 그 길을 내어달라는 구실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만다. 동북아시아에 일어난 중세시대 최대의 전쟁이었다. 당시 조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태평성대로 무사안일에 빠져 있다가 직격탄을 맞고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초유의 사태에까지 이르고 만다. 결국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한반도는 조선과 왜() 그리고 명나라까지 합세한 3국의 전쟁으로 초토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전쟁의 결과는 그 크기만큼이나 처참했다. 중국의 명나라는 아예 나라가 멸망해 버렸고, 조선은 이후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겪으면서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근세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다. 일본도 역시 조용하지는 않았다. 히데요시의 급사 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았지만 다시 한 번 전국이 분열되는 혼돈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과욕이 빚어낸 결과였다.

 

 

 연녹색 지붕을 인 본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아들 위패가 함께 세워져 있다. 상업의 도시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직을 발전시키는 리더십을 가진 리더이자 성공과 출세의 신으로 높게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 출세의 꿈을 꾸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출세시키고자 하는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는 편이란다.

 

 

 진한 갈색의 목재로 꾸며진 제단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다. 신전 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경배되고 있다. 그동안 자주 보아온 일본의 신사지만 인간을 신으로 받드는 일본인들의 문화는 언제나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신사 마당에는 소위 출세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원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본전 왼편에 걸려있는 큼지막한 에마(繪馬)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2017년을 상징하는 닭의 그림과 함께 출세와 좋은 운을 바라는 '출세개운(出世開運)'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기도가 담긴 에마일 것이다. 그 옆에는 개인의 길흉을 점치기 위해 뽑는 제비인 오미쿠지(おみくじ)’가 주렁주렁 걸려 있다. 제비를 뽑아 나쁜 점인 흉()이 나오면 저렇게 접어서 걸어두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을 빌러 온 사람들이 나쁜 점에 실망하고 오미쿠지를 걸어두고 갔을 것이다. 오미쿠지 위에는 개인의 사랑과 행복을 기원하는 나무판인 에마(繪馬)도 한 가득 걸려있다.

 

 

 신사의 또 다른 문을 빠져나오면서 오사카성 투어는 종료된다. 오늘 둘러본 오사카성은 오사카성 공원의 일부분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성터를 커다란 규모의 공원으로 조성했는데, 외호와 내호, 천수각과 영빈관, 무도장, 아오야몬, 그리고 망루인 야구라, 호코쿠신사 등 유적지와 오사카성 음악당, 오사카국제평화센터, 삼림공원, 오사카성구동장, 광장, 야구장, 오사카성홀, 복숭아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오사카성을 지은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몰락시킨 뒤 일본을 통일한 그는 중국(中國, 당시는 )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켜 7년간이나 조선을 괴롭힌 장수이다. 우리로 봐서는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지은 오사카성이 내가 찾았을 때는 한국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400년도 더 지난 먼 옛일이다. 그러니 다시 곱씹을 일이 뭐 있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기록이고, 기록을 통하여 사람은 교훈을 삼고 배운다.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를 망각했던 우리 역사는 과연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가. 1910년 치욕의 일제 강점기가 다시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째서 그렇게 당해야만 하는지 이왕에 온 오사카성에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