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여행일 : ‘19. 10. 8() - 10.12()

세부 일정 : 쿠알라룸푸르(1)싱가포르쿠알라룸푸르(1)바투동굴겐팅 하일랜드쿠알라룸푸르(1)말라카쿠알라룸푸르

 

여행 셋째 날 : 말라카(Melaka) 시가지 투어

 

특징 : ’말레이시아의 경주라 할 수 있는 고도(古都)로 유럽풍의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도시의 역사는 14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396수마트라 섬을 지배하던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의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 왕자가 이곳으로 도망을 와서 세운 말라카 왕국이 시초이다. 말레이 반도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 이후 왕국은 지리적 조건 덕분에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번창했고, 이를 기반 삼아 말레이 반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힌다. 말라카에 비운이 드리운 것은 1511년 포르투갈이 침입하면서다. 이후 향료 무역 독점을 노리며 동양진출의 거점 확보에 나선 서양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한다. 1641년에는 네덜란드가, 1824년에는 페낭·싱가포르와 더불어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중국인과 인도인도 대거 유입되었다. 이후의 상황은 쿠알라룸푸르와 같으니 생략하겠다. 이러한 각국의 쟁탈사는 결과적으로 말라카에 많은 사적을 남겼다. 세인트폴언덕의 유적을 비롯하여 세인트존 언덕의 성채. 이밖에 박물관도 여럿 있다.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2008)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관광객들이 몰려들지 않을 리가 없다. 매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수가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의 수와 거의 맞먹는단다.

 

버스는 우릴 메르데카 공원앞의 광장에다 내려놓는다. 지도에는 ‘Taman Bunga Merdeka’로 표기된 도심공원인데다 인근에 유적이나 박물관 등의 볼거리들이 몰려있어 말라카 투어의 출발점으로 이용하고 있나보다.

 

 

 

공원 앞에 조성된 너른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타밍 사리 전망대(Menara Taming Sari)’가 있었다. 높이는 110m의 수직 전망대로 360도 회전 전망이 가능한 시설이다. 66명이 정원인 원형 곤돌라가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가는데 이때 말라카 시내와 세인트 폴 언덕은 물론이고, 멀리 말라카 앞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단다. 하지만 우린 타워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보수공사로 인해 운행을 중단했다는데 어쩌겠는가.

 

 

공원에는 말레이시아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현관에 부착되어 있는 전광판은 ‘Selamat Datang / Welcome’. 우릴 환영한단다. 같은 뜻의 두 언어를 합쳐놓았을 정도로 격렬히 말이다. 하지만 건물의 용도는 알 수가 없었다. 레스토랑처럼 보이는데 건물 앞에 공공건물임을 나타내는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건너편에는 유럽에서나 볼 법한 예쁘장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암스테르담(Amsterdam)을 여행하면서 보았던 풍경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그러고 보니 이곳 말라카도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200년에 가깝게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었다.

 

 

공원의 숲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지구본을 올려놓은 조형물이 보인다. ‘Resilient cities Asia-Pacific 2016’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관련 국제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던 모양이다.

 

 

‘10th Anniversary of Melaka UNESKCO World Heritage city cerebration’라고 적힌 동판도 만날 수 있었다. 이곳 말라카는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바 있다. 그러니 지정 1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 때 세운 기념물일 것이다. 그나저나 동판에 새겨놓은 손바닥은 누구의 것일까?

 

 

숲속에는 우물처럼 생긴 시설도 있었다. ‘St Francis xavier commemorative stone’. 안내판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552)’ 성인을 기념하는 돌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이곳 말레이시아와 인도,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사람이다. 1622년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모셔졌고, 1927년에는 모든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우물 안에 모셔져 있는 돌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성인이 멜라카에서 처음 발을 디딘 돌이라고 한다. 원래 바다에 있었으나 1937-1739년 영국이 매립작업을 하면서 내륙으로 옮겨 놓았단다. 그 외에도 1954년의 재건과정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그나저나 안내판에 적힌 ‘the city cross’는 무슨 뜻일까?

 

 

숲을 빠져나오니 ‘Dataran pahlawan Melaka Megamall’이란 대형 쇼핑물이 나온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파는지를 알 필요가 없기에 그냥 통과해버린다. 까짓 선물용 소품이야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의무 쇼핑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산티아고 요새로 가는 길에는 유적지 발굴 현장도 지나게 된다. 남부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흔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기에 다가가 봤더니 산티아고 요새(Santiago Bastion)’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다보면 천 년도 훨씬 넘는 유적들도 방치되고 있는 곳이 많은데 500년을 겨우 넘긴, 그것도 축대에 불과한 유적을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는 게 눈길을 끌었다. 물론 좋은 의미로다.

 

 

유적지 근처의 벽면에 부착된 동판(銅版)이 특이하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연설에 열을 올리고 있는 말레이시아 귀족의 뒤로 각기 다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외국 사신들을 줄줄이 거느릴 정도로 중요한 행사가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잠시 후 산티아고 요새앞에 있는 널따란 광장에 이른다. 바로 곁에 있는 산티아고 요새는 물론이고 독립선언기념관과 이슬람 박물(The Malay & Islamic World Museum)’, ‘우표박물관(Melaka Stamp Museum)’, ‘말라카 술탄 궁전(Melaka Sultanate Palace Museum)’ 등의 볼거리들이 몰려있어 네덜란드 광장(Dutch Square)’과 더불어 말라카관광의 중요한 포인트 가운데 하나이다.

 

 

광장의 왼편에서 우린 산티아고 요새(Porta de Santiago)’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요새는 말라카해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세인트 폴스 언덕(St. Paul's Hill)’의 동쪽 기슭에 남아 있는 군사용 시설이다. 1511년 이곳 말라카를 점령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군대가 네덜란드 군대의 침략을 대비하여 건설했다. 당시에는 산을 에워 쌀 만큼 거대한 성채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네덜란드군과의 전투에서 패했고 요새는 허물어져 지금은 성채의 흔적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이 요새는 현지인들 사이에는 에이 파모사(A’ Famosa)‘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고 한다. 산티아고(Santiago)라는 이름은 파모사라고 불리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들의 수호성인이던 성 야곱(St. Jacob)‘을 가리키는 산티아고(Santiago)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단다.

 

 

요새의 문() 위에 뭔가가 새겨져 있다. 어느 글에선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 사용하던 문장(紋章)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요새는 뼈대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길재(吉再)의 시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다. 한때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포르투갈이 지은 요새였지만 끝내는 네덜란드라는 신흥강국에 빼앗겼고, 지금과 같은 폐허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밖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대포가 놓여 있었다.

 

 

건너편에는 돌출된 중앙 현관과 좌우의 돔(dome) 등 유럽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독립선언 기념관(Melaka Proclamation of Independence Memorial)’이다. 1912년 영국인들의 사교장인 말레카 클럽으로 문을 열었으나 지금은 말레이시아 독립과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 등을 전시한 기념관으로 탈바꿈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1956년 말레이시아의 독립 협상단이 영국에서 말레이시아의 독립 약속을 얻어 낸 뒤, 귀국하여 이곳에서 처음으로 국민에게 보고한 곳이어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독립관련 기념관으로 꾸민 이유가 아닐까 싶다.

 

 

독립선언기념관 뒤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목조주택, ‘말라카 술탄 궁전(Melaka Sultanate Palace Museum)’이 나온다. 이슬람의 지도자를 뜻하는 술탄의 거주지로, 현재 건물은 1985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궁전은 진갈색의 목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가로는 길고 세로는 짧으며 지붕의 경사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 중앙에 삼각형 지붕이 있는 현관이 있고 좌우에 3개씩 비슷한 모양의 발코니가 있다. 내부는 현재 문화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말라카 왕국시절 술탄과 신하들, 그리고 각국에서 온 사신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는가 하면 당시의 전통 의상과 장식품을 전시하고 있어 말라카 왕궁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산티아고 요새의 뒤쪽에 놓인 데크 계단을 따라 세인트폴스 언덕(St. Paul's Hill)’으로 오른다. 저 언덕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세운 또 하나의 유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언덕(St. Paul's Hil)에 이르면 또 다른 폐허를 만나볼 수 있다. ‘세인트 폴 교회(St. Paul's Church)’1521두아츠떼 코엘료(Duarte Coelho)’라는 포르투갈의 장군이 시내에서 제일가는 가톨릭교회를 만들겠다며 지은 성당이다. 이후 이 도시는 네덜란드인에게 점령되었고 성당도 세인트 폴 교회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1753년 막상 크리스트교회로 재건되었을 때는 교회가 아닌 귀족을 위한 묘지로 사용했단다. 이곳은 스페인 귀족 출신의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St. Francis Xavier)’가 묻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중국에서 죽은 그가 인도로 이장하기 전까지 잠시 이곳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교회 앞에는 아직도 사비에르의 동상이 말라카 해협을 내려다보고 있다.

 

 

 

교회도 역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게 안타까웠던지 이곳에서 발굴된 것으로 여겨지는 석판들을 전시해 놓았다. 이곳이 한때 네덜란드 귀족들의 무덤으로 쓰였다고 했으니 그들의 묘비(墓碑)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항해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온전하다 싶은 공간도 있었다. 중앙의 일정 공간을 철제구조물로 가려놓기도 했다. 함께 기웃거리던 외국인이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관이 모셔져 있던 자리라고 귀띔해준다. 철제 구조물에 예수회의 ‘ISH’ 표식까지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옳은 정보일 것이다. 아니 옳고 그름은 차후의 문제이고 그의 호의가 고마울 따름이다.

 

 

 

언덕에서의 조망은 뛰어난 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라카 해협이다. 맑은 날에는 바다 건너 인도네시아 땅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소문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해협보다는 말라카 시가지의 풍경이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르투갈 양식의 집들이라도 눈에 담아보고자 했다. 어느 글에선가 포르투갈 통치시대에 이주한 사람들의 마을이 요 아래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얀 벽과 붉은색 지붕이 특징이라고 했는데 대부분의 집들이 붉은색이어서 구별하는 데는 실패했다.

 

 

반대편에는 산티아고 요새가 내려다보인다. 이쪽 방향에도 시가지가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것이 신시가지인 모양이다.

 

 

올라왔던 반대편으로 언덕을 내려가는데 진행방향 저만큼에 말라카 정부 박물관(Melaka The Government Museum)’이 모습을 드러낸다.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 지어진 총독의 거주지 겸 사무실로 1996년까지 주지사 공관으로 사용되다가 2002년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식민지시대의 총독 거주지 및 사무실에 관한 자료와 말레이시아 독립 이후 여러 주지사의 거실 및 식당 등에서 쓰던 생활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는데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우리 같은 패키지 여행자들에게 저런 정도의 박물관까지 들여다본다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

 

 

 

잠시 후, 이번에는 스타더이스(Stadthuys)’가 나온다.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는 네덜란드 양식의 건물 중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건물로 1650년 네덜란드 총독의 공관으로 세워졌다. 말라카의 지배권이 영국으로 넘어간 뒤 1826년에는 영국인들이 다니는 말라카 자유학교(나중에는 고등학교)’가 개교했다. 1931년 이 학교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네덜란드제 붉은 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은 현재 역사·민족박물관(History & Ethnography Museum)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말라카왕국에서 시작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통치까지 역사적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지만 이곳도 역시 패스하기로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오늘(금요일)이 휴관이라지 않는가. 참고로 스타더이스(Stadthuys)’는 네덜란드 말로 시청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말라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말라카의 중심광장인 네덜란드광장에서 시계탑, 그리스도교회와 더불어 말라카의 상징(land mark)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타더이스의 앞은 네덜란드 광장(Dutch Square)’이다. ‘말라카는 더치 광장으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17~18세기 네덜란드인에 의해 조성된 이 광장은 말라카의 랜드 마크이자 말라카 관광의 중심이다. 총독 공관인 스타더이스, 그리스도 교회, 시계탑, 분수 등 식민지시대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대부분 이곳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광장은 온통 붉은색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스타더이스는 물론이고 교회, 시계탑 등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이 하나같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는 것이다. 말라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는 붉은 벽돌담이 워낙 강렬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광장의 얼굴마담은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 교회(Melaka Christ Church)’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유명하다면 한번쯤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우선 이 건물은 네덜란드 통치시절인 1753년에 개신교의 예배당으로 문을 열었다. 건물은 네덜란드에서 가져온 벽돌을 사용해 지었단다. 건물의 정면에는 3개의 아치형 문이 있고 지붕은 돔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붕 중앙에 작은 종탑을 두었다. 하지만 교회 내부는 보잘 것이 없었다. 제단 뒤쪽에 최후의 만찬벽화가 있을 뿐 특별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 교회 전면의 ‘Christ Church Melaka 1753’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쓰인 것이라고 한다.

 

 

빅토리아여왕 분수(Queen Victoria Fountain)’도 광장의 볼거리 중 하나이다. 1901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라 불리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분수인데, 사방에서 기둥 쪽으로 물을 쏘는 독특한 구조이다. 분수의 기둥을 장식하고 있는 수조(水槽)와 빅토리아여왕·영국 왕실문장 등이 새겨진 부조(浮彫)도 볼거리니 놓치지 말 일이다. 분수대의 옆을 지키고 있는 고풍스러운 시계탑(Red Clock Tower)’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1886년 중국계 거상 탄벵스위(Tan Beng Swee)’가 세웠다고 해서 탄벵스위 시계탑이라고도 부르는데, 3층의 4면에 배치한 시계가 탑의 규모에 비해 너무 작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곳에도 역시 ‘Love’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의 팝아트 조형물은 아니더라도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 ‘I love Melaka’라는 문구가 좋아 인증샷이라도 찍을까 했지만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스도교회 바로 옆에는 유스 박물관(Malaysia Youth Museum)이 자리하고 있었다. 1931년에 지어졌다는 아치형 회랑이 있는 2층 건물인데 1층에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발전상을 보여 주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네덜란드 광장의 건너편에는 관광안내소가 들어서 있다. 건물이 외형이 아름다워 사진의 배경으로 딱 좋다. 말레이시아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보이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광장에서 몇 걸음만 벗어나면 운하가 나온다. 도시를 관통하는 뱃놀이 코스로 이용되는 탓에 지나다니는 유람선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톡톡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낮보다 밤에 들러야 제 맛이라고 한다. 운하 주변의 불빛 흘러내리는 야경이 환상적이기 때문이란다.

 

 

운하에 기대어 놓은 쉼터에서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는데 갑자기 목이 말라온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 시간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돌아다녔다. 그런데도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경관에 취해 목이 마른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골라든 게 수박 쥬스. 수박의 내용물을 꺼내어 얼음과 함께 갈은 다음 다시 집어넣었는데 여간 시원한 게 아니었다.

 

 

이젠 말라카의 내면을 기웃거려 볼 차례이다. 이때 우리처럼 시간에 쫒기는 패키지 여행자들은 대개 트라이쇼(Trishaw)’라는 삼륜 자전거를 이용한다. 온갖 캐릭터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빽빽거리는 경적과 대형 파라솔을 장착한 관광용 자전거로 보면 되겠다. 얼핏 유치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낯선 나라에서의 즐거운 일탈쯤으로 여기면 될 일이다. 아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말라카 경치를 만끽하는 재미는 일탈 그 이상이다

 

 

첫 번째로 들어선 곳은 잘란 투캉 에마스(Jalan Tukang Emas)’로도 불리는 하모니 스트리트(Harmony street)’이다. 다양성이 특징인 말라카인 만큼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이슬람과 불교, 힌두교 등의 오래된 사원들을 만날 수 있는 이곳이 단연 인기가 높다. 하모니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기인했지 싶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녹색 삼각형 지붕이 유난히 눈에 띠는 캄풍 클링 모스크(Kampung Kling Mosque)’, 하모니 스트리트의 3대 사원 가운데 하나로 1748년 인도계 무슬림 상인이 처음 세웠고 1872년 수마트라 건축 양식으로 개축했다. 모스크는 녹색의 2단 사각 지붕이 있는 예배당과 예배당 옆 사각의 첨탑, 그리고 손 씻는 연못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첨탑이 아닐까 싶다. 터키나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두바이 등 이슬람 국가들은 물론이고,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여느 국가에서도 저렇게 생긴 첨탑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 보았던 쿠알라룸푸르의 국립모스크와도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예배당은 기도하는 넓은 공간이 있을 뿐 특별한 장식은 없었다. 이슬람사원의 특징일 것이다. 참고로 이 모스크는 인도계 이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모스크의 이름도 캄풍(Kampung)’마을클링(Kling)’인도계 무슬림을 뜻한단다.

 

 

모스크 근처에는 1781년에 지어졌다는 스리 포야타 비나야가 무르티 사원(Sri Poyyatha Vinayaga Moorthy Temple)’이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교 사원이며 복과 재물을 부른다는 코끼리 모양의 신인 가네샤(Ganesha)’를 모신단다. 가네샤는 그 아버지가 자신의 자식인 줄 모르고 목을 베어버린 다음 후회를 하면서 코끼리의 머리를 대신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네샤의 형상을 보면, 머리는 코끼리 형상이며 몸은 사람의 몸과 같은 모습을 지녔단다.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라지만 이곳도 역시 패스한다. 트라이쇼가 세워주는 곳에서만 자유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는 쳉훈텡 사원(Cheng Hoon Teng Temp)’에 이른다. 청운정(青云亭)이라고도 불리는데 15세기 초. 말라카에 머문 명나라 장군 정화를 기리기 위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이라는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1645, ‘카피탄 차이나(Kapitan Cina, 중국인 지도자)’‘Lee Wei King’이 중국에서 모든 자재를 들여와 지었다고 한다. 지붕과 기둥도 중국 양식의 도자기와 유리로 장식되어 있으며, 1406년에 이 땅을 찾은 정화 장군을 기념하는 비석도 있다. 그런 점을 인정받아 2003년에는 유네스코의 보호건물(UNESCO award for outstanding architectural restoration)’로 지정되기도 했단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문(山門)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우리나라와는 달리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밖에도 쌍사자 석등이 산문 좌우를 지키는가 하면 벽엔 용틀임 장식을 하는 등 매우 화려하면서도 특이한 형태를 보여 준다.

 

 

본전(本殿)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사원의 지붕은 얼마나 공을 들여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값비싼 도자기를 깨서 장식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말레이시아는 도자기 제작기술이 뒤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중국 사원은 도자기를 깨서 모자이크처럼 장식했다고 한다. 보존 상태도 훌륭했다. 지은 지 4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도 전체적으로 매우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불당의 안은 참배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합장을 하며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있는데 그 신심이 전해지는 듯했다.

 

 

또 다른 특징은 도교와 유교, 불교를 하나의 사원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중앙의 신은 물론 관음상이다. 여기에 문과 무를 겸비한 관우를 함께 모신다. 옆 건물에서는 조상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었다. 자신의 직계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성공을 이룬 조상을 중심으로 모신다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말라카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인 거리 투어는 꽤 오래 지속됐다. 방금 지나온 하모니 스트리트(Harmony street)’나 앞으로 가게 될 탄 쳉 로크 거리(Jl. Tan Cheng Lock)’, ‘존커 스트리트(Jonker Street)’ 등 골목길을 누비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승용차 두 대가 가까스로 비켜 갈 정도의 좁은 길 양 옆으로 중국풍의 오래된 2층 시멘트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쯤 전에 지어졌을 건물들 가운데는 식당이나 여행자 숙소, 갤러리, 가게로 쓰이는 곳도 많이 보였다. 아무튼 말레이시아의 경주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풍경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다.

 

 

 

네덜란드광장 근처에는 산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St, Francis Xavier’ Church)‘도 있었다. 말라카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가톨릭을 전파한 예수교 선교사 자비에르를 기리기 위한 곳이다. 교회는 고딕 양식으로 양쪽에 종탑이 있고 중앙에 커다란 별 모양의 창과 아치형 문이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성당 마당에는 자비에르의 동상과 더불어 안지로의 동상이 서 있다. 안지로(세례명인 안젤로의 일본식 발음)는 살인을 저지르고 포르투갈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말라카로 도망쳐 이곳에서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은 일본인이다. 포교에 심혈을 기울이다 중국에서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