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 중남미의 멕시코 및 페루

 

여행일 : ‘18. 4. 23() - 5.2()

여행지 : 멕시코, 페루. 쿠바(비행기 사정으로 인해 취소)

 

일 정 :

4.23() : 멕시코시티(소깔로광장, 과달루페성당)

4.24() : 멕시코시티(테오티우아칸)

4.25() : 쿠스코(마추픽추)

4.26() : 쿠스코(12각 돌, 쿠스코대성당, 산토도밍고성당)

4.27() : 리마(아르마스광장, 사랑의 공원, 라르꼬마르)

4.28() : 파라가스(바예스타 섬), 이(와카치나 사막)

4.29() : 나스카(나스카라인)

4.30() : 멕시코시티(소우마야 미술관)

 

여행 셋째 날 오후 : 잉카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적, 마추픽추(Machu Picchu)

 

특징 :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써내려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리스트의 첫머리에다 마추픽추라는 단어를 올렸었다. 그들이 거론했던 마추픽추는 페루 아니 더 나아가 남아메리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이 유적은 1911하이램 빙엄(Hiram Bingham, 1875-1965)‘이 발견해내기 전까지는 산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었다. 덕분에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되어버린 대부분의 잉카유적들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 잉카의 고대도시(잃어버린 도시)는 마추픽추(Machu Picchu)와 와이나픽추(Huayna Picchu) 사이에 숨어있다. 흔히들 잃어버린 도시를 마추픽추라 부르지만 실제 마추픽추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을 말하고, 건너편 산은 와이나픽추라 부른다. 산 아래에서는 도시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공중도시라고도 불리는데 잉카의 후예들은 이곳에 숨어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런 이유로 마추픽추는 잃어버린 공중 도시로 불리며 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여행자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굽이굽이 13군데의 급경사를 돌고 돌던 버스는 30분쯤 후에 마추픽추 국립공원의 매표소 앞에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깎아지른 듯한 마추픽추 계곡의 속가슴을 엿봐야만 할 정도로 날카로운 절벽을 헤집으며 올라왔는데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페루 정부가 잘 훈련시킨 베테랑 운전사들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안전사고라도 일어난다면 관광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페루경제에 큰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 마추픽추 입장권은 하루 두 타임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했다. 시간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며 오전은 6시부터 12, 오후는 12시부터 17시까지다. 그리고 티켓에 적힌 시간은 퇴장시간을 의미하니 참고해두자

 

 

 

 

 

 

여권과 함께 입장권을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 유적지가 보이기 시작하는 모퉁이에 이르자 동판 몇 개가 박혀있는 바위벽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11하이램 빙엄(Hiram Bingham, 1875-1965)’이 발견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198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동판도 보인다. 이 공중의 도시를 도대체 누가 발견했었는지 정도는 알고 나서 보라는 모양이다.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유적지는 계단식 농경지(terrace)‘이다. 잠시 후 건물군이 보이는 곳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위로 오른다. 마추픽추 제일의 전망대가 그쪽 방향의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계단길을 잠시 오르면 길은 이내 평지와 같아진다. 이 길을 계속해서 따를 경우 마추픽추(Machu Picchu)’ 산으로 연결된다. 또한 잉카트레일(Inca Trail)’로 이곳을 찾아올 경우 진입로는 저 길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 1위로 선정된 바 있는 잉카트레일34일에 걸쳐 오얀따이땀보 부근 피스카추초(Piscacucho)에서 잃어버린 도시에 이르는 트레킹 루트이다. 전체 길이가 47로 지리산 종주코스와 비슷한 거리지만 해발 2,380m부터 최고 4,200m까지의 고도를 오르내리기 때문에 무척 힘든 코스로 알려진다. 특히 죽은 여인의 길(Dead Woman’s Pass)’은 매우 경사가 급한 험난한 코스로 유명하다. 그 옛날 칠레에서 에콰도르에 이르렀던 광대한 잉카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안데스의 산중턱에 만들어진 잉카트레일은 잉카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과 황제가 각 지역 부족장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통로였다. ‘차스키(비각飛脚)’라고 불리는 파발꾼들은 이 길을 연속적으로 이어달리며 하루 평균 280정도의 속도로 전파시켰다고 전해진다.

 

 

지붕을 인 건물. 망지기의 집(Recinto del Guardian)‘이 보이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잉카트레일을 따라 마추픽추 산까지 올라갔다 돌아올 만한 시간이 우리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에 이를 즈음 돌의 예술인 '마추픽추'가 드디어 얼굴을 일부 내밀었다. 그 뒤에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와이나픽추가 하늘을 향해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기술이 조화를 이룬 천상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관광객들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감히 숨을 고르면서 자연의 신비로운 장단에 맞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처음 와본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여러 번 들러본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휘둘러본다. 보면 볼수록 눈에 익은 풍경들이다. 그리고 이내 깨닫는다. 그만큼 이곳 마추픽추가 매스컴을 많이 탔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론 마추픽추를 대표하는 경관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전망대 부근은 초지로 이루어져 있다. 제법 너른 것이 올라오면서 보았던 비좁기 짝이 없는 계단식농경지와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앞에 보이는 바위는 장례식과 제사 때 사용하던 바위(La Roca Funeraria)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부근은 묘역(Cementerio Superior)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빙엄175구의 미라를 발견했다는 제단구역이 이곳이라는 증거가 될 수도 되겠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농경지를 따라 조금 더 진행하자 마추픽추 유적군은 한층 더 또렷해진다. ‘마추픽추제일의 전망대라 할 수 있겠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파수꾼 전망대(Recinto del Giardián)‘보다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우루밤바 계곡과 그 절벽 위에 세워진 마추픽추, 또 그 마추픽추를 바라볼 수 있는 와이나픽추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니 일단은 꼼꼼히 살펴보자.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의 두 기준에 따라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단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지만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새(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신성한 산으로 여겨진단다. 또한 그런 이유로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다 신성한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왼편에는 우루밤바강 협곡이 지그재그로 돌면서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협곡의 깎아지른 바위절벽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옮기면 와이나픽추(WaynaPpicchu)가 나타난다. 유적지와 와이나픽추는 완벽하게 조화로운 모습이다. 산허리의 구름들은 연신 흩어졌다 다시 몰려오기를 반복한다. 마추픽추의 전경을 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구름이 오가는 정도에 따라 탄성과 비명을 번갈아가며 내뱉는다. 물론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와이나픽추는 물론이고 마추픽추의 유적군까지도 구름 속에 완전히 가려버린다. 허망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잠시 후 마추픽추를 덮고 있던 구름이 걷히자 또 다시 유적지가 나타난다. 구름은 연신 이리저리 움직이고 그럴 때마다 마추픽추를 이루는 석축, 주거지, 계단식 농경지, 관광객의 모습들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마추픽추의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수천 년을 감춰온 그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먼 옛날 건축 자재조차 나르기 힘든 첩첩산중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완벽한 도시를 무슨 이유로 건설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스페인 침략 이후 스페인을 피해 황금을 가지고 건설한 최후의 도시였다는 주장이나 종교적인 목적의 도시였다는 주장 혹은 단순히 잉카 왕족의 여름 피서를 위한 별장이었다는 주장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참고로 마추픽추 유적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신성한 광장과 3개의 창문 신전, 콘도르신전, 태양신전, 귀족 거주지, 농경지역과 서민거주지 등이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읽었던 한 건축가의 글이 생각난다. ‘깊고 깊은 계곡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자연의 우주적 광경이다. 의례 같은 우아함, 그 돌들이 토해내는 영원의 표현 속에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중요한 역할이 반영되어 있다. 안데스의 고봉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세계에 보석처럼 꼭 끼워진 잉카인들의 가장 위대한 유물이다.’ 이 하나의 문장에 마추픽추의 모든 것이 다 담겨있는데 더 이상의 미사여구가 무에 필요하겠는가.

 

 

마추픽추의 농경지는 2m쯤 되는 높이의 계단식 밭40단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밭들은 3천여 개의 계단으로 연결된단다. 개중에는 이렇게 바위를 돌출시켜 만든 계단도 보인다. 아니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쉽게 내려설 수는 없는 계단이다. 옛날 사람들이야 뛰어다녔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젠 직접 마추픽추의 건축물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성채의 정문으로 향한다.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갈 갈수록 잉카의 고대도시는 점점 또렷해진다. 송곳 모양의 와이나픽추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유적지의 석조물들 가운데 하나가 유독 눈길을 끈다. 독야청청 둥근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신전(Templo del Sol)'이라는데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지금은 들어가 볼 수가 없단다.

 

 

 

 

마추픽추의 심장이라 일컬어지는 태양의 신전(El Templo del Sol)’은 정교하게 쌓아 올린 석벽과 탑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외관이 특징이다. 또한 거대한 자연석 위에 탑의 형태로 우뚝 세워져 있어 여느 건축물과도 한눈에 구별이 된다. 해마다 열리는 태양의 축제(621)’ 때에는 태양의 빛이 신전 중앙의 창문으로 딱 맞추어 들어온다고 한다. 신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 그런 부분까지 고려한 잉카인들의 세심함이 더욱 돋보이는 면모라고 하겠다.

 

 

널따란 녹지는 중앙광장이다. 종교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 광장의 둘레에 배치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되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신전 근처인 왕의 궁전에는 식당과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화장실도 갖고 있단다.

 

 

2001년 페루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인 톨레도(Alejandro Toledo)’가 그의 취임식을 이곳 중앙광장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물론 페루 제일의 효자 관광자원인 이곳 마추픽추를 홍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 잉카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여 보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중앙광장 근처에 있는 왕녀의 궁전(Picchu Aposento de la Ñusta)’도 거론해 보자. 마추픽추에서 유일하게 2층으로 설계된 왕녀의 궁전은 왕녀가 사용한 곳이 맞는지, 왕녀가 존재하기는 했는지 등의 여러 의문점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유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용도의 건물에서만 보여지는 2층의 설계 형태를 통해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했으리라는 추측이 성립된다. 또한 태양의 신전 바로 옆에 위치한 점이 왕실이나 신성한 곳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잉카의 도시로 접어드는 주 게이트(Puerta de acceso a la ciudad=main Gate)'로 들어선다. 성채의 정문(正門)치고는 매우 좁아 보인다. 방어용으로 짓다보니 그랬지 않았나 싶다. 문틀의 위에는 문짝을 매달았던 고리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크고 작은 돌들이 나뒹굴고 있는 채석장이 나타난다. 다양한 크기의 화강암들인데 과거 잉카인들이 마추픽추를 건설하면서 사용하고 남은 돌들이라고 한다. 어떤 돌들은 쪼개다 남은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잉카는 청동기문명을 거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도 저렇게 정교하게 돌을 다듬을 수 있었다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채석장의 뒤에 보이는 건물군은 신전지구(Sector de los Templos)‘이며, 그 뒤에서 뽈록하니 솟아오른 곳은 인티와타나(Intihuatana)’이다.

 

 

신전지구로 가는 길에 만난 주택가. 고대 잉카인들은 계급사회 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왕과 귀족들은 주로 햇볕이 잘 드는 남쪽에 거주(Las Tres Portadas) 했고 서민들은 북쪽에 살았단다. 계급에 따라 거주지 지대의 높낮이가 달랐다는 점도 흥미롭다. 아무튼 왕과 귀족 그리고 신들을 모셨던 곳은 정교하고 고르게 돌을 쌓아 올린 주거지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지체가 낮은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는 돌의 짜임새가 고르지 못하고 엉성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단다. 역시 앉을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는 속담은 우리나라에만 통용되는 건 아닌가 보다.

 

 

 

 

잠시 후 마추픽추의 핵심이 되는 '신성한 광장(Plaza sagrada)‘이 나타난다. 광장 주위에 신전(神殿)들이 많다고 해서 신전지구(Sector de los Templos)’로도 불린다. 이 지역의 특징은 정교하게 지어진 건축물이라 할 수 있겠다. 조금 전의 건물들이 조악하게 다듬은 석축들인데 반해, 이곳 신전지구의 석축은 거대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구축했다. 특히 '주신전'(Templo Principal)은 지진에 견딜 수 있도록 창()의 밑변이 윗변 보다 더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단다.

 

 

커다란 바위들을 잇대어 쌓았건만 조그만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돌로 도구를 만들어 돌을 정교하게 가공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궁금하다. 그래선지 많은 이견이 존재한단다. 잉카의 신묘한 돌 건축술이 그만큼 미스터리란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마추픽추가 현재 30% 정도 밖에 발굴되지 않았다니 어서 빨리 조사를 마쳐서 갖고 있는 의문점들을 밝혀줬으면 좋겠다.

 

 

잉카의 초대 황제인 망코 카팍(Manco Capac,1198-1228)’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세 창문의 신전(Templo de las Tres Ventanas)’이다. 이 신전의 창문도 역시 지진에 견디도록 밑변이 더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마추픽추'의 건물들은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돌들을 짜 맞춰 쌓는 '드라이 스톤(dry-stone)‘ 방식으로 지어진 게 특징이다. 그렇다고 모든 건물을 이처럼 정성껏 돌을 다듬어 짜 맞추기식으로 만든 건 아니란다. 신전과 같이 중요한 건물들만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돌을 다듬은 정성과 정교함의 정도를 보면 그 건물의 중요도와 용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신전지구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가 나온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기단(基壇)을 만들고 그 위에다 막대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태양이 비칠 때 기둥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가늠한 해시계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구조물이다.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여기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단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를 보고 대단하다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는 훨씬 더 정교한 해시계를 갖고 있었다. 세종대왕 때 장영실이 개발한 '앙부일구(仰釜日晷)'가 바로 그것이다. 15년 전쯤인가 독일의 구텐베르크 박물관(Gutenberg Museum)’을 공식 방문했을 때 박물관장이 직접 나와 자기네들보다 앞서 발명된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를 거론하면서 부러워하던 생각이 난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네 선조들인가. 참고로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신성한 바위(Roca Ceremonial)’로 이동하는 주변에도 마추픽추의 많은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중앙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일반인 거주지역은 물론이고, 산꼭대기 가까이 쫒아 올라간 계단식 밭들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투명한 하늘, 잉카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돌 하나하나가 영롱한 태양의 빛을 받아 막 깨어날 듯한 기운으로 다가온다. 내게는 결코 단순한 폐허의 유적이 아니었다.

 

 

 

 

인티와타나(Intihuatana)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가자 제관(祭官)들이 머물렀다는 건물 두 동이 나온다.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m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라는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 건물의 안에서 관광객들이 쉬고 있는 게 보인다. 관광객들의 휴식을 위해 복원해 놓지 않았나 싶다.

 

 

건물의 앞마당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바위에 손을 대면 땅의 여신으로부터 기운을 전수받게 된다는 전설을 지닌 성스러운 바위(Roca Sagrada)‘라고 한다. 그래선지 바위에 손을 대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그들은 문화재 훼손을 염려해서 쳐놓은 금()줄 정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와이나픽추 통제소가 나타난다. 그 뒤에서 날카롭게 허리를 곧추세운 와이나픽추가 어서 오라는 신호를 보내온다. 가슴 설레는 순간이다. 하지만 건물 옆에 내놓은 출입문은 굳게 닫혀있다. 입산(入山) 인원을 하루 2회 각 200명씩으로 제한하고 있다더니 오늘은 아예 그것마저도 금하고 있나보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서였겠지만 산길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아무튼 와이나픽추 등반은 시도조차 해볼 수 없게 됐다. 잃어버린 도시를 한눈에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정상(2,693m)에 올라 그곳에 있다는 농경지와 망루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성곽, 그리고 달의 신전을 곁눈으로라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덕분에 정상으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계단과 로프, 난간 등이 설치되어 있어 조심만 한다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전조사까지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곳은 공동마당이 아닐까 싶다.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로 지어진 집들이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된다는 특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건축물들은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참고로 공동마당에는 커다란 맷돌과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었는가 하면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기도 했단다.

 

 

마추픽추는 스페인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건물들의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해발이 2280m나 되는 높은 산봉우리에다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수림과 기암괴석의 봉우리들, 그리고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한 골짜기가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격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란다.

 

 

 

 

별자리 수면거울이라고 한다. 동그랗게 파인 부분에 물을 채워 넣고 수면에 반사되는 별의 위치를 추적하여 계절과 시간, 별자리의 이동 등을 연구하던 유적이란다. 그렇다면 이곳은 천문대쯤으로 보면 되겠다.

 

 

 

 

동쪽으로 빠져나오자 콘도르 신전(Temple of Condor)’이 나온다. 말 그대로 독수리 형상을 띤 신전(神殿)이다. 자연석에다 잉카족의 석조기술을 조합하여 날개를 편 독수리의 형상을 만들었다. 돌바닥에는 독수리의 머리와 부리를 만들어 넣었고, 이를 중심축으로 삼아 양편으로 거대한 크기의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조각하여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고고학자들은 콘도르 신전에서 '인신공희 의식'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사람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잔혹하게 죽였다니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엊그제 들렀던 멕시코의 마야유적지들에서도 인신공희 의식의 흔적을 보았는데, 잉카족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는 천재지변에 인간이 매우 취약했던 고대인들에게 신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잉카인들의 건축기술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게 수로(水路)가 아닐까 싶다. 특히 고지대(高地帶)인 마추픽추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게다. 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돌을 깎아 도시 전체에 물이 흐르도록 조성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 바퀴 다 돌아봤으면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유적지 남동지역에 있는 계단식 밭(Zona Agricola)’ 방향인데 계단이 하도 많다보니 이 또한 뛰어난 볼거리가 된다. 잉카인들은 평지가 없고 구릉지로만 되어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산비탈을 빙 둘러가며 돌 축대를 쌓아 농경지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코카 등을 재배했다. 계단농경지의 규모로 볼 때 마추픽추의 인구를 대략 1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 게 대세란다.

 

 

1.5~2m 정도로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었다. 평지가 없는 지형 조건을 극복한 잉카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계단식 밭(Zona Agricola)’이라 하겠다. 이곳에는 몇 동의 건물도 지어져 있다. 농경지에 지어진 건물들이니 대충 곡물창고로 사용되었을 게다.

 

 

 

돌아가는 길, 계단식 농경지의 초지대에 야마(라마)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아까 내렸던 비로 인해 고운 털이 촉촉이 젖어 있지만 아랑곳 않고 하나 같이 선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저마다의 버킷리스트였을 이곳이 리마에게는 그저 일상일 뿐인가 보다. 그래 잉카인의 화신이듯 당당한 여유로움이 참 좋다.